공전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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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하는 궤도 위에서 (상)

일구

대지 1+일구.jpg

 

 

 

* 글 속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는 허구이며 실제 인물, 단체, 지명 등과 무관합니다

 

 

 

윤정한은 질린다. 이 뭣같은 빙상장이. 이 위에서 매일매일 대가리 박는 스스로가. 그냥 관두고 싶다. 때려치고 싶다.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그냥. 다 관두고 싶다. 일생의 반을 빙상장 위에서 살아온 주제에 이젠 그냥 이 스케이트화 벗어 던지고 싶다. 그래서 생채기 난 뺨 한 번 손등으로 닦아내고 두 팔 말고 두 다리로 곧게 섰다. 야 이새끼야 대가리 안 박아? 인간답게 서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 무시하고 반대로 걸었다. 씨발. 선배 말이 좆같지? 느릿느릿한 걸음 따라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순식간에 마른 어깨가 낚아채졌다. 좆같냐고 씨발아. 혼자 꼴받아서 지랄하는 새끼 빤히 쳐다보고 서있자 그대로 주먹이 날아왔다. 빠악. 옆에 벤치 잡고 다시 똑바로 섰다. 야 씨발. 넌 선배 말이 좆같지? 선배랍시고 군기 잡는다고 지랄해봤자 그냥 우습기만 하다. 피 터진 입술 손등으로 닦아내고 다시 걸었다. 씨발. 어딜 가. 이새끼가 돌았. 한 번 더 어깨 잡아 돌려세워졌고 그제서야 똑같이 주먹질 했다. 똑같이 한대. 똑같이 아구창. 정당방위라 생각했으나 안타깝게도 정당방위가 아니었다. A는 빙상연맹 높으신 분의 아들이자 감독 연줄이었고 윤정한은 뭣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란한 빙상장을 뒤로 하고 바닥에 널부러진 제 스케이트화 어깨에 짊어지고 빙상장을 나왔다

좆같네. 씨발

 

 

이탈하는 궤도 위에서 ()

 

 

1

윤정한은 아픈 거 싫어하고 힘든 거 싫어하고 맨날 침대에 누워있는 체력 꼴찌라는 설명과 함께 소개되지만 그건 다소 과장이 포함돼있다. 어떤 놈이 퍼뜨린 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건 하루에 트랙 200바퀴 넘게 도는 쇼트트랙 유망주에게 붙을 수 없는 수식어다. 전국에서 열리는 대회란 대회는 죄다 휩쓸고 다닌 유망주에게 체력 꼴찌라니. 물론 트랙 돌고 지상훈련 하는 거 외에는 대부분 누워있긴 했지만. 성격 급한 윤정한의 주종목은 남들 다 꺼리는 단거리 500m. 순식간에 경기가 끝나는 탓에 다들 꺼리는 걸 제일 좋아하고 제일 잘탔다.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빨리 끝나니까. 500m하면 윤정한. 윤정한하면 500m. 어지간해서는 메달 내어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전국 대회를 죄다 휩쓸고 다니는 주제에 국가대표 선발만 되면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미 쇼트트랙 팬들 사이에서는 국대 다는 거에만 운이 없는 걸로 유명할 지경이었다. 제일 싫어하는 장소는 국대 선발 경기가 열리는 목동 아이스링크장, 제일 싫어하는 달은 국대 선발이 있는 4월일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만큼 국대 선발에만 지지리 운이 없었다열아홉살에 처음 출전한 국선에서는 9위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졌고 스무살에는 10위 스물하나에는 아예 출전조차 하지 않았다. 직전에 발목 부상까지 입었기 때문이다. 매번 종목 가리지 않고 잘만 하던게 국가대표 선발 경기만 됐다하면 엉켰다. 이쯤되면 징크스라 불릴만 했다. 국대선발 빼고는 전부 다 잘하는 윤정한. 국내 대회란 대회는 다 휩쓰는 주제에 국대선발만 엮이면 다 말아먹는 윤정한. 국대 못달면 다른 대회 아무리 잘 뛰어도 의미없지 않나. 쑥덕거리는 목소리들 뒤로하고 묵묵히 스케이트 끈을 묶었다. 국대를 못다니까 세계대회도 어림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트랙을 돌았다. 쉽게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소문이 무색하게 윤정한은 매일매일 새벽 다섯시에 기상해서 여섯시까지 빙상장으로 향했다. 평생 그렇게 살았다

어떡하지 근데. 이제 질린다

어느날부터 매일매일 피딱지 달고 숙소 들어오는 게 일상이 됐다. 코치 연줄로 들어온 선배 하나가 후배들을 계속 갈궈댄 탓이다. 요즘 세상에 누가 군기 잡냐지만 그 어려운 걸 해내는 새끼도 세상엔 존재한다. 어느정도 짬이 찬 윤정한은 건들지 않았으나 뭣같지도 않은 같은 트집 잡으며 후배들을 쥐 잡듯이 잡아댔다. 구십도로 인사 박는 건 기본이고 대가리 박는 것도 이틀에 한 번 꼴로 이어졌다. 운동부 군기가 원래 그렇지, 라는 말로 넘기기에도 슬슬 한계였다. 모두가 뻔뻔스러운 줄 아는 윤정한은 사실 그런 꼴을 제일 못견뎌 했으니까. 자기는 군기 잡혀서 깍듯이 굴어도 제 아래 애들이 그 취급 당하는 건 못참아했다. 타고난 성정이 그랬다

덕분에 얼마안가 매번 사람 좋은 얼굴로 아 선배 왜그러십니까ㅎㅎ 하던 게 결국 터졌다. 그 씹새끼가 연습 경기에서 추월하다 엉켜 자기를 빙상장 벽에 처박히게 한 후배를 락커룸에서 패는 꼴을 목격한 탓이다. 팀에 들어온지 고작 2달된 애를 자기가 벽에 처박혔다는 이유로 발까지 써가며 밟아댔다. 그 꼴 보고 눈 돌아간 윤정한은 갓스물된 애한테 발길질 하는 씹새끼 락커로 밀치고 멱살 잡은 채 작작 좀 하라고 처음으로 지랄했다. 이성보다 몸이 먼저 튀어나갔다. 다행히 바로 달려온 다른 팀원들에 의해 몸싸움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고 그새끼는 팀원들에게 팔이 잡힌채로 씨발거렸으나 윤정한은 대꾸하지 않았다. 무참히 손목이 밟힌 후배가 걱정될 뿐이었다. 안그래도 손목 부상이 있던 애를. 씨발새끼가. 상황이 정리되고 구석에 서있는 후배에게 제 지갑에 있던 현금 죄다 털어 손에 쥐어줬다. 병원 가. 미안해서 입술만 달싹이는 후배 어깨 두어번 토닥이고 숙소로 들어갔다

 당연히 감독 귀에 들어갔으나 둘다 징계는 없었다. 먼저 잘못했으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덮으라는게 감독 지시였다. 그렇게 넘어가는 듯 했으나 그 이후로 대상이 후배에서 윤정한으로 옮겨갔다. 그딴 지랄에 놀아나주겠냐 싶었지만 니가 대가리 안 박으면 니 밑으로도 다 집합 같은 개소리를 지껄여대서 그냥 대가리 한 번 박고 몇대 맞고 말았다. 머리 한 번 박고 무릎 좀 꿇는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근데 이제 슬슬 질렸다. 여기 대가리 박고 있는 스스로도 좆같고. 눈치보는 후배들도 이젠 지겹고. 무엇보다 감독 연줄에다가 빙상연맹의 무슨 높으신 자리 하나 꿰차고 있다는 남자의 아들인 그 개새끼가 제일 좆같고. 마음 먹고 개겨줄 수 있으나 이미 앞의 사건들로 어느정도 코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선수 하나 쯤이야 손쉽게 갈아치워질 수 있다. 썩을대로 썩었다는 빙상연맹. 어떤 갖은 핑계를 대며 선수 생활을 정지 시킬지 모른다. 거기까지 몸소 체험해보고 싶지는 않다. 가진 거 아무것도 없는 윤정한은 그간 그 선수 생활 하나를 위해서 참았는데 점점 노력하고 싶지 않아졌다. 원래 슬럼프라는 건 한번에 집어 삼킬듯 찾아오는 법이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빙상장 위를 도는 게 예전만큼 재밌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어쩌면 그새끼가 바라는게 이거겠지. 구르고 벽에 처박아도 다시 스케이트화 신게 만들던 것들이 예전같지 않았다. 그래서 똑같이 한대 패고 빙상장을 나왔다. 평생의 반을 뒹굴었던 빙상장인데 한 번 마음 먹으니까 나오는 건 의외로 쉬웠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쫌 더 팰 걸 그랬나

 

개새끼가 악지르는 소리 뒤로 하고 향한 곳은 빙상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 단지 놀이터다. 어깨에 스케이트화 끈 걸치고 무턱대고 걸었더니 도착한게 고작 놀이터였다. 동심으로 돌아간 거 같고 좋네 뭐. 스케이트 바닥에 내려놓고 아무 생각없이 그네부터 탔다. 끽끽 거리는 쇳소리 들으면서. 한참 추처럼 왔다갔다거리고만 있는데 흰색 패딩에 폭 안긴 꼬마애가 바로 옆 그네에 탑승했다. 마찬가지로 끽끽. 머리에는 연보라색 리본핀하고. 끽끽. 슝슝 타지 않고 끽끽 거리는 애 그네 쳐다보다가 먼저 말걸었다.

 

밀어줄까?”

무서워.”

살살 밀어줄게.”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몇시간 만에 일어난 윤정한은 찌뿌둥한 다리 한 번 쭉쭉 펴고 그네 뒤로 가서 살살 밀었다. 끼이익. 끼이이익. 그네줄 꼭 잡은 손이 엄청 작았다. 내손이 저만했을 때부터 빙상장 돌았던 거 같은데. 애기 몇살? 묻자 똘망똘망한 대답이 돌아온다

 

우리아빠가 모르는 아저씨랑 말하지 말랬어요.”

아하. 좋은 아부지네. 아저씨가 미안해. 그네도 그만 밀어야겠네에.”

일곱살.”

진짜 애기네.”

 

애기라는 소리에 고개 홱 돌리고 밉지않게 야렸다. 애기 소리에 발끈하면 진짜 애긴데. 웃음 나올 뻔한 거 참고 어어 애기 취소. 눈빛이 완전 어른이넹. 하며 다시 살살 그네 밀었다. 밀리는 동안에도 고개 돌려 빤히 윤정한 쳐다보던 애기는 밀렸다가 돌아오면서 물었다. 궁금증 가득 담은 목소리로. 그네 좀 밀어줬다고 호칭도 아저씨에서 금세 오빠가 됐다

 

오빠는 머리가 왜 노란색이야?”

오빠는 천사라서 그래요.”

천사면 날개도 있어?”

 

역시 애기는 애기다. 이걸 믿어주네. 물론 천사라고 해도 믿을만한 얼굴이긴 하지만. 등 뒤에서 씩 웃으면서 뻔뻔스레 대답했다

 

아 당연하지. 오빠 얼음 위에서 날라다녀.”

보여줘.”

…….”

 

끼익. 끼이익. 끼익. 끼이익. 그네가 두 번 왔다갈 동안 침묵하다가 뒤늦게 답한다

 

지금은 날개가 아야 해서 안돼.”

못 날아?”

나중에 다 나으면 보여줄게.”

 

애기가 운동화로 바닥을 질질 끌어서 그네가 멈췄다. 굳이 더 밀지 않았다. 브레이크도 걸 줄 아네. 그네 고수네. 고수. 잔잔하게 흔들리는 그네줄 탓에 어지럽기라도 할까봐 손으로 잡아 완전히 멈추게 했다. 그러자 애기가 곧장 그네에서 내려 뒤돌아 윤정한을 마주봤다. 무슨 애기가 눈도 이렇게 땡그랗고 애교살도 볼록하고 입꼬리도 위로 예쁘게 올라갔고. 얘 부모님이 연예인이라도 되나.

 

얼굴도 아야 했어?”

?”

얼굴도 아야 했냐구.”

얼굴? . 어엉. 얼굴도 아야했어.”

 

그제야 잊고 있던 피딱지 앉은 입술이 생각났다. 정신없이 걸어오느라 그것도 잊었다. 아무 생각 없는 척 했지만 정신이 나가긴 했구나 싶었다. 쪼끄만 손이 윤정한 입가 근처로 올라왔다. 여기 뺨에도 긁혔어. 그래? 대수롭지 않아하자 오히려 애기가 더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귀여워.

 

누가 이래써.”

있어. 어떤 새, 아니 어떤 악마.”

천사 얼굴을 이렇게 만들면 어뜩해. 쓰레기야.”

어허. 그런 말 쓰면 안되지요.”

. 아빠한테는 비밀이야.”  

 

그리고 사방을 한 번 살피더니 반대쪽으로 뛰어나갔다. 놀이터 입구에 서있는 진회색 수트를 차려입은 남자 앞으로

 

천사 오빠 안녕! 나중에 또 봐!”

 

윤정한은 멀뚱히 서서 어느새 남자 품에 안긴 애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빠 저 오빠 천산데 날개 다쳐서 못난대. 안긴 채로 얘기하는게 여기까지 들렸다. 남자가 윤정한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눈이 마주친 것 같았으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대신 머쓱하게 서서 인사하던 손으로 뒷머리나 긁어댔다. 미친놈인 줄 아는 거 아냐? 남자가 애기보고 무슨 말을 하는 듯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스케이트화를 집어들었다. 집에 가자. 이제. 그래봤자 숙소지만

 

 

2

그 뒤로도 훈련을 튀었다. 남들 다 일어나는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빙상장으로 향하지 않고 하루종일 길바닥을 떠돌았다. 같이 훈련하는 팀원들이 카톡과 전화로 어디냐고 테러를 해대는 것도 다 무시하고 요리조리 잘 튀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방 앞에서 대기타고 있던 동기 손에 이끌려 빙상장 가는 척 하다 화장실 간다는 구라치며 튄 참이었다. 너 진짜 짤리고 싶냐? 걱정 담긴 카톡 미리보기로 보고 다시 주머니에 휴대폰을 쑤셔 넣었다. 차라리 짤리는게 속 편할 거 같긴 하네

새벽 여섯시에 숙소에서 나온 주제에 갈만한 곳이 있을 리 없다. 평소였다면 이런 고민 안해도 됐을 텐데. 그냥 일어나면 씻고 오전 훈련하고 밥 먹고 쉬다가 오후 훈련하고 또 밥 먹고 저녁 훈련 하고나면 하루 끝이었을 텐데. 갑작스레 이룩해낸 자유에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너무 익숙했던 생활패턴이라서. 이래서는 뭐 일탈도 못하겠네. 물기 젖은 노란 머리칼 털어내면서 또 막연히 걷는다.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이. 이젠 바라는게 뭔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 있던 막연한 목표가 눈 앞의 작은 돌부리 따위에 걸려 흐려졌다. 좆같은데. 그걸 발로 차고 다시 일어설 기력이 없다.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닌데. 빙연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게 구는 새끼들을 한두명 겪어본 것도 아닌데. 맥이 풀렸다. 평소답지 않다. 윤정한스럽지 못하다. 훈련을 땡땡이친지 딱 삼일 되던 날 저녁 또 그네 위에 앉은 윤정한은 생각한다.

 

그냥 다 때려칠까.

 

천사 오빠다.”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려는 순간에 눈앞에 튀어나온 건 삼일 전에 만난 애기였다. 방금 전까지 바닥으로 꺼지려던 고개가 절로 치켜들어졌다. 이름도 모르는 애기 때문에. 힘없이 고개 살랑살랑 흔드니까 어느새 그네 뒤로 다가온 애기가 물었다.

 

내가 밀어줄게!”

무거울 텐데.”

 

할 수 이써. 하며 꽤 굳은 결의를 다지는 탓에 별 수 없이 윤정한은 그네 줄잡고 밀리는 대로 밀렸다. 애기 무거울까 봐 발도 알아서 굴렀다. 와 천사 오빠 멀리 날아간다. 한번 밀었다고 뒤에서 박수 짝짝 치는 애기 따라서 박수도 쳤다. 우와. 짝짝짝짝. 오빠 내가 또 밀어줄게! 그네 한 번 밀고 조금 뒤에 떨어져있던 애기가 다시 도도도도 뛰어오다가.

넘어졌다. 놀이터 바닥에 엎어진 상태 그대로 멈춘 애기를 보고 황급히 그네에서 뛰어내렸다. 넘어져서 미동도 없이 울지도 않는 애 조심조심 일으켰다. 얘는 왜 애기가 울지도 않어. 괜찮아? 안아파? 다친데는?? 놀래서 와다다 묻자 그제야 잡힌 팔이 떨려왔다. 입술 깨물고 눈물만 그렁그렁한 채 였다. 후웅. 어뜩해. 이쁜 얼굴 다 긁혔네. 다른 데 아픈 건 없어? 그 큰 눈에 눈물 쏟아내지도 않고 그렁그렁 맺혀만 있는 애기 360도로 돌려보면서 지가 더 아픈 얼굴로 물었다. 안 아파. 울지도 않던 애기는 등 토닥여주는 윤정한에 결국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잉잉 울었다. 잘 참는다 싶더니 애기네 애기. 토닥이다가 양 손으로 눈물 닦아주고 벤치에 앉혔다.

 

애기.”

지아.”

지아? 알았어 지아야 오빠가 약이랑 밴드 사올테니까 쫌만 기다릴래? 너 아야 한 거 약 발라야 돼.”

 

벤치에 앉아 고개 끄덕거리는 눈물 범벅된 지아를 두고 윤정한은 약국이 어디있는지도 모르면서 뛰었다. 이러려고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지상훈련했나. 다행히 아파트  단지라 쉽게 약국 찾아내고 소독약, 후시딘, 메디폼까지 샀다. 그냥 일반 밴드 내놓는 약사에게 흉 안지는 밴드 달라고 두 번이나 재촉했다. 그리고는 다시 존나 뛰어 지아가 있을 놀이터로 향한다. 원래 정 많고 다정하고 천성이 따뜻한 윤정한은 늘상 남을 먼저 살피니까 이건 충분히 베풀 수 있는 다정이었다. 그리고 애기잖아. 진짜 애기. 어른이면 당연한 거지

 

혼자 벤치에 앉아 발장난 치고 있는 지아 데리고 얼굴에 소독약 바르고 약 바르고 메디폼도 조심조심 붙여줬다. 천사오빠 사람 많이 치료해봐써? 아까 울었던게 무색할만큼 반짝반짝거리는 눈으로 묻는 지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케이트 타다보면 앞 사람 날에 얼굴 찍히고 베이고 하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냐앙. 다칠 일이 많아서. 너 얼굴에 이거 흉지면 어뜩해. 지아는 속상해하는 윤정한 한참 쳐다보다 저보다 큰 손에 들린 메디폼을 뺏어 들었다. 다른 데도 아파?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윤정한 얼굴을 작은 양 손으로 붙잡는다.

 

천사 얼굴도 아야 해.”

.”

천사도 얼굴에 흉지면 안돼.”

 

윤정한은 이미 딱지 앉은 뺨에 메디폼 붙여주는 작은 손을 눈만 끔뻑끔뻑뜬 채로 쳐다보며 얌전히 있었다. 천사도 다치면 안돼. 아라찌. 아푸지마. 그리고는 빨리 나으라고 호오. 하고 입김도 불어넣었다. 우리아빠가 이렇게 하면 빨리 낫는댔어

스물두살 윤정한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고작 일곱살짜리 지아 때문에. 붙여준 건 고작 상처난 뺨 위에 밴드 하나인데. 위태위태하던 윤정한 정신줄에 끊어지지 말라고 밴드 하나 붙여준 것만 같았다.  없던 스물두살 윤정한은 이쁘게 땋은 지아 머리 쓰다듬으면서 말한다. 고마워 지아야.

 

원래 친구끼리는 그러는 거라고 우리 아빠가 그랬어.”

우리 친구야?”

. 그네 같이 탔으면 친구.”

근데 오빠 스물두살인데. 너 일곱살이자나.”

. 그네 같이 타고 밴드 같이 붙이면 친구야.”

 

아라써ㅎㅎ 지아랑 나랑 친구. 둘다 한쪽 뺨에 밴드 하나씩 붙인 채로 양손 잡고 쎄쎄쎄나 했다. 지아 아부지 언제 오셔. 곧 올거야. 그럼 그때까지 같이 있어주께! . 고마워 천사야

 

 

얼마안가서 bmw 한대가 놀이터 앞에 멈췄다. 아빠다벤치에 앉아 발장난 치다 말고 달려나갔다. 또 넘어지면 어뜩해. 천천히 가. 바람막이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지아 뒤 따라간 윤정한은 까만 차창 내리는 지아 아부지에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지아가 놀다가 다쳐서,

. 지아 아부지 얼굴보고 일초정지한 스물두살 윤정한은 괜히 뒷목 쓸었다. . 이집 유전자가 좋네

 

제가 밴드랑 발라주긴 했는데 흉질수도 있으니까.”

. 감사합니다. 지아는 안 아파?”

. 안 아퍼. 천사가 호 해줬어.”

 

천사 소리에 헛기침하고 괜히 먼 산만 봤다. 그랬어? . 다행이네. 고맙습니다 해야지. . 고맙습니다. 아냐ㅎㅎㅎ. 조수석에 앉은 지아 벨트 메주고 창문을 올렸다. 천사야 빠빠. 빨리 집 잘 가아. 양손 붕붕 흔드는 지아 보면서 윤정한도 한손 마주 흔들었다. . 안녀엉

 

하지만 윤정한은 일곱살짜리 지아 말 듣지 않았다. 밖으로 나돈지 삼일만에 처음으로 운동장을 뛰었다. 그냥 그거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땀 범벅된 채로 밤늦게 숙소 돌아왔을 때 반기는 건 유일한 동기였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귀라도 대고 있었는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씩씩거리는게 존나 빡쳐보였는데 애써 태연한 척 되물었다. 또 왜

 

너 무슨 짓 하고 돌아 다니냐 대체?”

아무짓도 안 하는데.”

그니까 문제라고 새끼야. 너 복귀 안해?”

.”

뭐 씨발.”

나 친구 생겼다.”

지랄이야 씨발. 친구고 나발이고 친구인 나는 니 때문에 속 답답해 뒤지게 생겼으니까 닥쳐.”

어우 왜 이렇게 까칠한 거야.”

됐다. 감독이 너 불러. 이번엔 진짜 까여도 난 몰라. 빨리 가기나 해라. 속 좀 썩이지말고 윤쪽아.”

 

맨날 윤쪽이래. . 제 할 말만 하고 문 닫고 나가버렸다. 솔직히 걱정 많이 끼치긴 했지. 심지어 꽤 어릴때부터 같이 빙상장 돌던 사이였는데. 닫힌 문 바라보다 뒤 따라 나섰다. 마냥 도망치고 있을 수는 없다. 없던 일인척 덮어두고 있는다고 해서 일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건 윤정한이 제일 잘 안다

 

똑똑. 감독님. 저 왔습니다. 바짝 쫄아서 들어가니 감독은 창가에 서서 창밖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윤정한은 뒷짐지고 가만 서있었다

 

일주일이면 되겠냐.”

?”

마음 잡는 거 일주일이면 되겠냐고.”

.”

무단 이탈가지고 너 그냥 내보내자는 거 그 자식 잘못도 있고 하니까 최대한 덮자고 했다. 그러게 주먹은 왜 써. 잘 참는 놈이. 더러운 꼴 한두 번 봐? 한 주만 나돌다 와. 그 이상은 안돼.”

.”

나가 봐.”

감사합니다.”

 

머리 푹 숙이고 방을 나섰다. 고개는 왜 숙였지. 나 죄인 아닌데

 

딱 한 주의 자유가 주어졌다

돌아갈지 말지는 순전히 제 손에 달렸다

 

 

3

자유 1일차. 윤정한은 새벽부터 뛰었다. 자유를 만끽하긴 무슨. 일탈을 즐기긴 개뿔. 이미 3일동안 다 해먹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몸이니 생각나는 건 몸 쓰는 것 뿐이었다. 숙소 근처 운동장만 내리 뛰었다. 적어도 몸 쓸 땐 복잡한 생각 같은 거 안하게 되니까 오히려 편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달리다 보면.

 

지아 아부지다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던 윤정한은 제 옆을 스쳐가는 자전거에 멈췄다. 진짜 지아 아부지다. 주말 낮부터. 대단하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속도를 올린다. 자전거 뒤꽁무니만 쫓았다. 그냥 한 번 소리내서 부르면 될 일을 굳이 입 다물고 몸으로 뛰었다. 나는 젊고 어리고 심지어 현역인데. 자전거 하나 못 따라잡겠어? 싶었지만 못 따라잡았다. 와 씨발 한 번을 안 돌아보네. 도로에 멈춰서서 허벅지에 손 올리고 헥헥거리자 그제야 앞서가던 자전거가 멈춰섰다. 별로 못 뛰네. 지아 아부지가 돌아보면서 그랬다. 상식적으로 자전거를 사람이 어캐 따라가. 아니 따라가는 거 알았으면 쫌멈추지 그랬어여. 헥헥

 

지아가 천사랬는데.”

. 천사도 달리기는 못하거든요.”

천사도 달리기는 못하는구나. 말해줘야겠다.”

지아는 괜찮아요? 얼굴이라 걱정되던데.”

 

여전히 헥헥거리며 묻자 지아 아부지는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 왜요? 눈을 끔뻑끔뻑 뜨며 물으니 그제야 화면을 켜서 보여줬다. 밴드 붙인 채 브이하고 있는 지아 얼굴. 귀여워라. 진짜 연예인 집안인가

 

멀쩡해요 덕분에. 그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미안하세요?”

별로 안,”

그럼 밥 사주세요. 비싼 걸로.”

 

패기로 달려든 덕에 지아 아부지 비엠떠블유 옆자리 꿰찰 수 있게 됐다. 역시 결국엔 강한자가 얻게되는 꽁밥. 따지고보면 꽁밥은 아니지만. 여튼. 둘다 나란히 트레이닝복 입은 채로 지아 아부지가 핸들 돌리는 대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존나 비싼 레스토랑. 이정도까지 바란 건 아닌데. 고작 스물두살 신분에는 충분히 삐걱거릴만한 레스토랑 앞에 서서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체할 거 같은데 씨발. 지아 아부지가 주문하는대로 저도 그걸로 할게요, 하며 메뉴 통일하는 거부터 꽤 고난이었다. 이런 데 완전 처음 온 애 같아보이겠지. 대낮부터 단둘이 얼굴 마주보고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여튼 스물두살 윤정한은 물만 들이키면서 일곱살짜리 애 딸린 남자 앞에서 할 말을 골랐다. 후보 다섯개 정도 생각하다가 그중에서도 제일 공통 관심사로 선정했다.

 

지아는요?”

오늘은 할머니집 가는 날이라 없어요.”

아하. 지아 어무니랑 갔구나.”

이혼 했어요.”

 

……. 죄송. 신경 안써도 돼요. 같이 산 적도 없어서. . . 또 소재고갈. 대화단절. 애 아빠와 스물두살 대딩 사이에 대단한 연결고리가 있을 리 없다. 머리 싸매고 있는 윤정한을 알았는지 이번엔 지아 아부지가 입을 열었다

 

운동해요?”

원래 했었는데 이젠 안하는 중.”

무슨 운동?”

맞혀봐요.”

모르겠네.”

 

맞혀보랬는데 모르겠다는 말이 1초도 안돼서 나오는 건 쫌. 이건 관심이 없는 거 같은데 그냥. 윤정한 눈에 지아 아부지는 무척 친절하지만 깊지 않다. 선을 넘지 않는다. 할일없는 윤정한은 선 좀 넘어보고 싶었는데. 인코스 추월이 특기이자 장기인 인코스 추월 천재 윤정한은 다시 한 번 파고들어본다

 

저는 윤정한이에요.”

.”

이름도 안 물어보시길래그리고 스물두살이고요. 쇼트트랙,”

 

불분명한 무언가에 대해 뭐라 이야기해야 하지. 잠시 고민했지만 있는 그대로 말하기로 한다

 

했어요. 지금은 아니고. 앞으로도 안할지도 몰라요.”

.”

저는 뭐라고 부르면 돼요? 지아 아부지? 근데 이거 너무 아저씨 같은데.”

홍지수. 정한아.”

 

홍지수. 그럼 지아도 홍지아겠다. 그쵸. 지수 형이네. . 당연한 소리 굳이 물어가며 공백을 줄였다. 몇살인지 궁금하다. 물으면 실례인가. 지아한테 물어봐야지. 그러고 있는 사이 음식이 나오고 윤정한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먹었다. 들어올때 진짜 체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체하겠네

 

그리고 그 뒤로 암전. 기억이 없다

 

윤정한은 오늘의 집 무드의 포근한 방에서 눈을 뜬다. 숙소의 온기없는 2층짜리 쇠침대가 아니라 말랑말랑 포근한 침대 위에서. 그것도 기분좋은 단내까지 나는 따뜻한 방에서. 씨발. 뭐지. 눈뜬 장소가 평소랑 다르다는 걸 깨닫자마자 억 소리 지를 뻔 했다. 술김에 사고라도 쳤나싶어서 뒷목이 서늘했는데 역시 내가 그럴리가 없지. 아무리 개가 돼도 그딴 짓은 안하지. 근데 여기 대체 어디야. 지끈지끈한 머리통 붙잡고 끊긴 필름 돌리고 돌려보면 제일 마지막 지점에 홍지수 얼굴이 있다. 정한이 술 별로 못하네. 하고 잔 뺏어가던 큰 손. 그만 마셔. 안 일어날 거야? 차분히 묻던 목소리. . 씨발. 처음 만난 날 뒤지게 마셔댄거야 지금? 그것도 지아 아부지 앞에서? 소리없이 비명 질렀다. 씨발. 너무 쪽팔려서 죽고 싶었다. 그 어른 같은 남자 앞에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 도통 기억조차 나지 않아서 딱 뒤지고 싶은 심정이다. 이대로 숙소로 순간이동 하면 안되나. 그냥 차라리 길바닥에 버리지 왜 주워와서는. 씨발. 하지만 윤정한은 진짜 천사가 아니라 시간을 돌릴수도 없고 순간이동은 더더욱 할 수 없기 때문에 한숨 푹푹 내쉬다가 대신 제멋대로 산발된 노란 탈색머리 양손으로 꾹꾹 누르며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열었는데 밖에 없으면 그냥 튈까. 생각도 했으나 그건 너무 싹바가지 없다고 결론 지어 실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심했어도 실행하지 못했을 거다. 문 열리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지아가 곧장 튀어나와 머리에 까치집 지은 윤정한을 반겼기 때문이다

 

천사 잘잤어?”

어엉. 굿모닝.”

굿모닝 아니고 오후인데.”

천사는 원래 시간 개념이 쫌 없어. 미안해.”

 

아빠! 천사 오빠 일어났어! 그렇게 큰소리로 알리지 않아도 되는데. 이대로 사라지고 싶은 윤정한은 지아 손에 이끌려 터벅터벅 거실까지 나갔다. 친구 집도 아니고 이게 뭐냐. 죄송하다고 바로 머리 숙여 사과라도 해야지, 싶어서 그대로 고개 박으려는 찰나. 남색 파자마 입고 요리하던 홍지수가 윤정한 코 앞에 불쑥 명함을 내밀었다. ?

 

변호사  홍지수

 

하얀 종이 위에 변호사 글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뭔데요? 잠도 덜깨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홍지수는 밥 먹자, 따위의 말과 비슷한 온도로 상쾌히 대답한다.

 

고소하자. 그새끼들.”

?”

도와줄게.”

 

고소라니? 팽팽 머리 굴렸지만 어제 제가 한 이야기들이 기억나지 않으니 무슨 소린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딱 하나 생각나는게 있다면 그건데. 제가 설마 그런 얘기까지 했나요?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홍지수는 여전히 상쾌한 목소리로 그런다

 

정한이가 어제 엉엉 울면서 그랬는데 나한테. 그 씹새끼 좆같다고.”

.”

빙산연맹이고 나발이고 다 좆같다, 라고도 했는데. . . 울면서. 우리 지아도 치과갈 때 그렇게는 안울었던 거 같은데. 정한이가 눈물이 많네.ㅎㅎ

천사 울보야? 천사 그럼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못 받아?”

……원래 예산부족 때문에 천사한테는 선물 안 줘. 요즘 산타 마을 자금난 인력난이 지인짜 심하거든. 몰랐지.”

 

이와중에 헛소리 늘어놓을 정신머리 탑재한 뻔뻔스러운 인간 같아 보이겠지만 그건 다 결국 너무 쪽팔려서 한 소리다. 윤정한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른다. 백팔십센치의 신사적인 쥐가 내 몫의 쥐구멍을 파줬으면 좋겠다. 당장 숨게. 쪽팔려서 당장 땅으로 꺼지고 싶은 당사자 제외하고 홍지수는 여전히 ㅎㅎ 웃고 있었다. 이미 점수는 다 까였겠지. 지아 아부지에게 난 그냥 첫만남에 꼬장부린 주정뱅이겠지. 첫인상은 다 말아먹은거겠지. 당장 한숨 푹푹 쉬고 싶은 거 겨우 참아내고 고개 한 번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ㅜㅜ. 예의까지 없는 새끼로 남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홍지수는 대수롭지 않다. 별 걸 다. 어깨도 한 번 으쓱한다. 대낮부터 잘생긴 어른 남자가

진짜 괜찮은 거 맞냐고 붙잡고 묻고 싶은데 그럼 쿨하지 못해 보일까봐 괜히 허리를 곧게 세웠다. 큼큼. 기침도 두번 했다. 그러는 동안 홍지수는 가만히 서서 테이블만 손끝으로 두드린다. 이미 둘의 대화에 흥미 식은 지아는 티비 앞으로 달려가 신비 아파트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은?”

.”

 

그냥 하는 장난인 줄 알았더니. 진짜 도와줄 생각이었나. 윤정한은 쪼끔 감동 먹은 채로 홍지수 한번 명함 한번 번갈아 쳐다봤다. 갑자기 장르가 바꼈다. 술 먹고 사고친 뒤 이어지는 뜨겁고 끈적한 뻔한 멜로 영화의 시작일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빙상연맹의 썩은 뿌리를 잘라내는 씨제이 상업 영화가 되려한다. 주연은 윤정한, 홍지수. 법정에 서있는 스스로와 홍지수를 상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변호사님(어느새 호칭을 갈아끼웠다.) 은 수트가 잘 어울리니까 법정에 있는게 잘 어울리지만 나는 쫌

됐어요. 고소는 무슨 고소야. 그리고 여기 대빵만하게 이혼 전문 이라고 적혀있는데 뭐라는 거야. 하지만 윤정한은 어렴풋하게 안다. 이거 위로 같은 거 맞지. 내 편이라는 소리도 맞지. 그래서 아무렇지 않아하며 물었다. 변호사님은 해장 했어요? 저 요리 잘하는데. 자취 4년차라서

 

나는 12년차.”

아 그럼 선배님이 하셔야겠다요.ㅎㅎ

 

홍지수가 차려준 점심 (혹은 아침) 으로 해장까지 완료한 윤정한은 자기가 설거지 하겠다고 두 팔 걷었으나 술냄새 난다는 이유로 짤당했다. 홍지아는 그런 윤정한 제 옆에 앉히고 같이 신비아파트를 시청했다. 지아는 묻지 않아도 하나하나 설명해줬다. 그닥 궁금하지 않았으나 홍지아의 열띤 설명에 신비아파트 지식 하나하나 열심히 머리에 새겼다. 한참 설명 듣던 윤정한이 홍지아 귀에 속닥거린다. 지아야. .

 

아부지 몇살이야.”

몇살 아니고 연세라고 물어야 돼.”

에이. 그거는 완전 어른한테 그렇게 묻는거야.”

우리 아빠도 완전 어른인데?”

알았어. 연세가 어떻게 되시니.”

서른네살.”

 

. 열두살 띠동갑이네

 

에이. 완전 어른 아니네. 열두살 밖에 차이 안나네.”

난 일곱살!”

 

그래 너 완전 애기다. 애기. 스물일곱에 결혼 했으려나. 일찍했네. 소파 등받이에 몸을 쭈욱 기댔다. 근데 같이 산 적 없댔는데. 설거지하는 홍지수 뒷모습 쳐다보다가 다시 티비로 고개를 돌렸다. 궁금한 게 너무 많다. 묻고 싶다. 나무위키에 검색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출생부터 현재까지 죄다 훑어보고 싶어. 미쳤나. 지아 몰래 주먹으로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배 채운지 얼마나 됐다고 토끼모양으로 사과깎기 스킬까지 손보인 홍지수는 사과 하나 포크에 찍어 지아에게 건넸다. 그럼 홍지아는 그걸 그대로 윤정한 입에 밀어 넣어준다. 지아야너머거. 다가온 포크 보고 거절하려고 입 벌리자마자 쑤셔 넣는 바람에 말이 제대로 끝나지도 못했다. 거마워. ㅎㅎ. 한 입에 쑤셔넣어진 사과 덕에 양 볼 빵빵하게 부풀린 윤정한에게 홍지수는 삼킬 틈도 주지 않고 공격을 시도한다. 부녀 시간차 공격인가.

 

여기서 살아.”

 

푸흐흡. ??? 디러. 질색하는 지아 손 꼭 잡은 채로 윤정한은 다시 되묻는다. 머라거요??? 한주동안 자유라면서 그동안 여기서 살라고 했어요 윤정한 선수. 최근 숙소 들어가는게 죽기보다 싫은 윤정한에게 너무 완벽한 제안이었으나 문득 궁금해진다. 제가 왜요? 그리고 변호사님이 왜요? 하지만 한번 물었다가는 금방 거두어갈 제안 같아서 딱 삼초 고민하고 그냥 지아 손 꼭 잡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빚은 나중에,

 

국대 다는 걸로 갚으면 되겠다.”

 

그걸 제일 장담할 수 없는데. 순식간에 입이 꾹 다물어진다. 이미 치부란 치부는 다 배까고 까발려 보인 주제에 그거 하나 제 입으로 말하기 쪽팔려서 그냥 토끼 사과로 제 입을 막았다. 아삭아삭. 괜히 제 발을 내려다봤다. 국가대표. 금메달. 잊고 있었던 것들이 홍지수 말 한마디에 쓰나미 치듯 밀려왔다. 쓸데없는 것들에게서 도망치느라 정작 뭘 위해 뛰었는지 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도망 끝에 찾은 여기가 너무 따뜻하잖아. 빠져나가고 싶지 않을만큼. 그냥 빠져 죽고 싶게. 상처가 쌓이고 쌓인 발등에서 홍지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쳤으나 홍지수는 별말 하지 않는다. 따라서 윤정한도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냥 딱 일주일. 일주일만

 

일주일 동거는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모든 게 빠른 윤정한 인생답게

 

 

 

 

<S# 비하인드. 윤정한 필름 끊긴 시점부터 재생.>

삭제된 필름 뒤. 홍지수는 잔은 족족 비워대면서 눈물 한방울 흘리지않는 윤정한을 빤히 쳐다본다. 눈은 버썩 말라있으면서 되게 울 거 같이 말하네. 차라리 울지. 이미 반쯤 테이블 위에 엎어진 얼굴을 들여다보다 첫만남 때부터 기스났던 얼굴을 떠올린다. 그때 상처도 그새끼가 낸 건가. 혼자 갖다 붙일 수 있는 갖은 죄목들을 떠올려 본다. 저 얼굴 때릴 데가 어디있다고 기스를 내. 씨발새끼. 이미 머릿속으로 감방에 처넣는 상상까지 마치는 동안 윤정한은 그 사이에 테이블에 머리 대고 잠들어 있었다. 서른네살 홍지수는 스물두살 윤정한의 잠든 뺨을 쿡 찌른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멍드는 티라도 나든가. 울고 싶으면 울든가. 괜히 더 신경 쓰이게 굴어. 홍지수는 윤정한에게서 위태롭던 스물 언저리의 스스로를 본다. 뭐든 빨리 편안해지고 싶었던 시간. 위태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친 모든 순간들. 그때 잡아볼 손이 있었다면 덜 울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홍지수는 막연히 윤정한에게 가득 채운 두 손을 내밀고 싶다. 예쁜 애가 우는 건 보기 싫다. 눈물을 참는 건 더더욱.

 

그러니 이제야 평범히 궤도를 순항하던 홍지수에게 윤정한은 소행성 같은 존재다. 불시에 나타난

홍지수는 윤정한에 의해 멸망하게 될까

 

 

 

4

일주일 동거기간 동안 스물두살 윤정한은 일곱살 홍지아의 유치원 등원을 도왔다. 새벽 같이 일어나서 동네 한바퀴 뛰고 샤워 한 판 하고 아침도 해먹이고 지아 등원 시간까지 칼 같이 맞췄다. 이게 또 원래 운동하는 사람들이 시간개념이 철저하거든. 새벽 다섯시에 칼 같이 기상하는 윤정한에 홍지수도 덩달아 깼는데 더 자라고 다시 이불까지 덮어줬다. 아침잠 많다는 홍지수 자는동안 운동하고 씻고 베이글 굽고 베이컨도 구웠다. 홍지수는 잠 덜 깬 눈으로 윤정한이 차린 아침 먹고 출근했다. 정한이 요리 잘한다. 아이. 베이글이 있으면 구울 뿐. 잘하네ㅎㅎ. 지아는 내가 데려다주면 되는데. 어허.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출근이나 하시죠. 마자 아빠는 출근해. 지아까지 거들자 별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애한테 애 맡기고 가는 기분에 영 찝찝했지만 둘이 즐거워하니까. 홍변도 홀가분히 출근했다. 그리고 매번 등원 때마다 윤정한이 제 폰으로 지아랑 등원완료 셀카를 찍어 보냈는데 그거 보는 재미도 있었고

노란머리 잘생긴 형아 또는 오빠의 손을 잡고 등원한 홍지아는 뭇 어린이들의 동경을 샀다. 첫날 누구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홍지아는 뻔뻔스레 <친구>라 대답했다. 그래서 윤정한이 아침에 넥타이 메던 홍지수가 일러준 대로 선생님께 <사촌오빠> 라고 둘러 댔다. 제가 잠시 지아네 있을 일이 생겨서. ~. 데리러 오는 것도 제가 할거예요. 지아는 좋겠네 멋진 사촌 오빠 있어서. 아하하하. 오빠 아닌데. 친군데

 

복작복작한 첫아침을 치루고 난 뒤. 윤정한은 운동보다 뿌듯하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바빴는데 두 명이나 챙긴 최초의 하루였다. 피 섞인 가족은 본가에 멀쩡히 있건만 어쩐지 가족같았다. 뭐 꼭 피를 나눠야만 가족이 되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매일매일 살 부대끼며 살아갈 누군가 있다는게 자꾸 저도 모르게 의지하게 됐다. 처음엔 꽤 높아보이는 선 한 번 넘어보고만 싶었는데 이젠 그거보다 좀 더 욕심이 났다. 하지만 그건 허벅지 찔러가며 참았다. 이건 흑심이지. 흑심. 애 딸린 아부지 상대로 이럼 안되지. 매일밤 찬물로 세수하면서 다짐했다. 빈틈을 파고 들어 자리 잡아 버렸다는 이유로 마음을 다 내주면 안되지. 너무 다른 사람인데. 나랑

하지만 굳이 그런 마음 아니라 해도. 그런 것들 다 떠나도. 무엇보다 숙소가 아니더라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게 든든했다. 일주일짜리 동거라 할지라도. 늘 낭떠러지 끝에 혼자 매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하루들이 어쩐지 자꾸만 따스해졌다. 어느 날 다시 낭떠러지로 처박히는 건 아닐까. 포근할수록 빌고 싶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래

위태롭던 스물두살 윤정한은 홍지수와 홍지아가 옆에서 열심히 먹이고 재우고 사랑 갖다 퍼부은 덕에 조금씩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홍지수는 사실 육아가 특기일지도 모른다. 위자료 왕창 뜯어내주는 이혼 전문 변호사가 아니라

 

 

그리고 꼭 동화 속 잘 먹고 잘살았답니다. 하는 결말 같은 일상이 반복된지 <7일차>. 홍지아 하원하고 홍변도 퇴근한 저녁. 일곱살 홍지아 양은 스물두살 윤정한이 차린 저녁밥 먹으면서 폭탄발언을 내뱉는다. 천사 오빠 있지.

 

우리 엄마 같애.”

.”

 

윤정한은 숟가락질을 멈췄고 홍지수는 그랬어? 한다. 역시 조금이라도 흑심이 있는 쪽이 더 찔리는 건가. . 천사 그냥 우리 엄마해. 그럴까? 홍지수가 한술 더 거들었다. 저런 말을 어떻게. 혼자 고장난 윤정한만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생각없이 던진 돌에 정통으로 맞았다. 심장이 그대로 땅으로 꺼질 것 같았다. 이러다가 걸려서 그대로 쫓겨나는 거 아냐? 등 뒤로 식은땀 흐르는 사이 홍변이 그런다

 

오빠 너무 놀리면 안돼요.”

 

홍지아는 끝까지 놀린게 아니라 진심이라고 주장했으나 홍변은 그 주장을 기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러가기 직전에 이번엔 윤정한에게 대놓고 천사엄마 굿나잇! 이라했다. 홍지수는 평온했다. 지아가 널 많이 좋아하네. 그런 말만 늘어놓는다. 현역 운동선수 윤정한은 술 절대 꺼리면서 홍지수가 깐 맥주캔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여기 오고 술 먹는 횟수가 늘었다. 인생이 쓰다. 아니아니 어쩌면 사랑이 쓰다. 술 없이 견디기는. 운동선수들은 멘탈 싸움인데 그런 면에서 재능없나 싶기도 하다. 누구보다 강철멘탈인 주제에. 제 맥주캔 뺏어 마시는 윤정한에게 열두살 많은 홍지수는 거실 구석에 7일째 처박힌 스케이트 화 한번 보고 태연히 말한다. 홍지수에겐 의무가 있었다. 윤정한 원래 자리로 돌려보낼 의무. 원래 보호자라면 그 정도는 하는게 맞다

 

정한이 너 엄청 유명하더라.”

봤어요? 그냥 물어보지 왜 검색을 하고 그래요 안 좋은 것도 많을텐데. 아진짜 쪽팔리게.”

그냥 잘하던데.”

.”

잘하는데 왜 그만해. 아쉽게.”

.”

그리고 멋있어. .”

 

만화였다면 아마 윤정한 머리 위로 김새는 꼴이 그려졌을지도 모른다. 열두살 많은 남자는 너무 노련하고 능숙하구나. 이런 말로도 사람을 꼬시는구나 싶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심장을 빼먹는구나. 구미호인가. 흔들어 대는 족족 흔들리는 뜨겁고 불타는 어린 심장의 소유자 윤정한은 내내 허벅지만 찌르다가 결국 고개 치켜든다. 마주한 홍지수 얼굴은 여전히 윤정한이 처음에 일초 정지했던 그 상태 그대로 잘났다. 아니 그때보다 더 잘생겨진 거 같은데.

 

변호사님 이거 문제 있는 거 알아요?”

무슨 문제?”

나 혼자 오해하란 거잖아.”

오해해 지금? 오해해 그럼.”

아진짜 짜증나.”

 

결국 제 머리 부여잡고 엎어진 윤정한 보고도 혼자 뇨롱 미소 짓고 있을 뿐이다. 진짜 흔드는 대로 다 흔들리네. 애기다. 완전 애기. 홍지수는 솥뚜껑만한 손 들어 푸석푸석한 금발을 쓰다듬는다

 

그러니까 계속해. 그만두지 말고. 다들 너 잘한대.”

변호사님은요.”

잘한다니까. 그냥 너 잘해. 엄청엄청.”

 

여전히 손바닥에 얼굴 파묻은 채면서 물을 건 다물어보네. 귀여워. 달려오는 진심을 모른척 하는게 어렵다. 너무 반짝거리는데 그걸 어떻게 못본 척 해. 어떻게 무시해. 처음부터 눈이 멀 만큼 반짝이고만 있었는데. 끝까지 모른 척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실패다. 홍지수는 원래 반짝이는 것들에서 시선을 돌리는 법 따위 모르기 때문에. 정한아. 천천히 부르자 숙인 고개가 시선을 맞춰온다. 어린애들은 너무 쉽게 불 붙고 너무 쉽게 연소된다. 쉽게 불 붙은 탓에 쉽게 타버릴까 걱정하면서도 홍지수는 기꺼이 같이 태워지길 택한다. 윤정한이 제 인생의 궤도를 이탈하는 중인 것처럼 홍지수 역시 그 궤도 따위 좆까보려한다. 둘은 교차점에 서있다. 마주한 눈을 보고 잠시 멈칫한 홍지수는 윤정한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다. 그래도 너 너무 애기다. 쫌 더 커야 잡아먹지 이걸

 

 

5

숙소 밖으로 나돌기 <마지막 8일차>.

결과적으로 윤정한은. 쇼트트랙을 관두지 않았다. 똑같이 새벽 다섯시에 기상해서 제 소리에 잠깬 홍지수 다시 재우고 운동장 돌고 씻고 베이글 굽고 홍지수 출근하라 등떠밀고 지아 손잡고 등원시키고 다 한 뒤에 짐 챙겨서 숙소로 돌아왔다. 감독님한테 제일 먼저 인사하고 기다려준 팀원들한테 고맙다 하고 곧바로 훈련 복귀했다 씹새끼는 윤정한 없는 사이 그간 구타 당한 후배의 진술로 자격 정지를 먹었다하지만 윤정한은 그딴 새끼 상관없이 다시 빙상장으로 돌아갔을 텐데그렇구나하고 말았다윤정한의 슬럼프는 끝이 났다놀이터에서 약속한 홍지아에 의해서빚을 져버린 홍지수에 의해서. 

하루종일 트랙 200바퀴 돌고 그대로 기절할 뻔한 거 겨우 손가락 놀려서 홍지수로부터 온 카톡 뒤늦게야 확인했다

 

지아 아부지

화이팅ㅎㅎ    오후 7:35

 

그리고 사진 두 장도 보내왔다. 하나는 바닥에 엎어져서 우는 홍지아. 그리고 하나는 눈물범벅된 채로 홍지수 품에 안겨서 같이 화이팅 포즈하고 있는 사진. 이거 완전 국가대표 전용 포즈잖아. 귀여워라. 금방 샤워하고 나와 푹 젖은 머리한 채로 휴대폰 보고 실실 웃었다. 아 힘난다. 완전. 그대로 두 번째 사진을 배경으로 설정했다. 수년간 올림픽 오륜기가 차지해오던 배경이 순식간에 둘의 사진으로 바꼈다

 

국가대표 선발까지는 이제 한 달

 

윤정한은 갚아야할 가장 간절한 빚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