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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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선

대지 1+회님+도는선.jpg

 

 

 

정한아.

 

?

 

넌 내가 좋아?

 

?

 

내가 좋아?

 

, 뭘 당연한 걸 물어 조슈지~

 

...

 

당연히 좋지.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구 그래?

 

그냥.

 

...

 

너랑 이렇게 지내기 싫어서.

 

?

 

 

 

홍지수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구김살 없이 펴진 눈이 날 응시했다.

 

너랑 이렇게 지내기 싫다고.

 

 

 

 

 

 

 

 

 

 

 

거친 숨이 턱 끝까지 밀어오른다. 곁눈질로 옆을 살펴보면 나란히 뛰고 있는 어깨가 보인다. 정면을 보고 뛰라 소리 지르는 목소리에 다시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킨다.

 

 

 

힘들어?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 죽을 것 같아. 그래도 어떻게 해. 해야지. 몰라 몰라. 너가 내 몫까지 뛰어주면 안돼? 되겠니 정한아. 새로 부임한 체육 선생님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성한 체육시간에 누가 떠드냐는 소음이 날라오지 않게 목소리를 낮춰 소근거렸다. 끝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면서 꾸역꾸역 대답했다.

 

 

 

한바퀴만 더 돌면 돼. 정하니 화이팅~ 지수야 너 진짜 귀엽고 얄밉다. 헉헉거리며 초점이 풀린 눈으로 말하는 저와 달리 홍지수는 여전히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드디어 19바퀴하고 반.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반 바퀴를 완주했다.

 

 

 

헛구역질이 올라오며 크게 기침을 내뱉었다. 다시는 축구에서 지는 일은 없을거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달리기 트랙 위에 그대로 엎어졌다. 폐부 가득히 공기가 들어차는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젠장, 반대항전 벌칙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체육시간에 한 축구 한판 졌다고 운동장 돌게 하는 체육쌤은 우리 쌤밖에 없을거다. 주상진 개새끼. 동시에 들어온 지수가 고새 야무지게 챙긴 수건과 물을 내밀었다.

 

 

 

"슈지야아~ 나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일으켜줘."

 

"힘든 정한이 말도 잘하네. 나두 힘들어."

 

"나 진짜 죽을 것 같다고. 빨리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것과는 달리 부드럽게 내민 손은 따뜻했다. 땅바닥에 뒹구느라 흙먼지가 잔뜩 묻은 제 체육복을 털어주는 손길도. 히히, 지수야아~ 나 업어주라~. 1절만 해, 정한아. . 흑흑, 훌쩍 훌쩍.

 

 

 

4교시 체육시간의 꽃말은 급식시간의 야만인이다. 물론 체육시간은 꽃 이름이 아니지만 대충 넘어가자. 무튼 그런 말이 무색치 않게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정한의 반 아이들은 미친듯이 급식실을 향해 달려갔다. 지수와 정한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둘은 당당하게 교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수야, 거짓말을 절대 들키지 않으려면 누구보다 뻔뻔하게 행동하면 돼. 그러면 아무도 모른다? 수위실 옆을 지나치며 정한이 속삭였다. 따뜻한 봄의 낮 온도에 알맞게 포근해진 수위실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낮잠 장소가 되었다. 알지, 정한아. 내가 너 옆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게 몇개인데. , 역시 조슈지. 이게 바로 전교에서 놀아주는 학생의 급인가. 실없는 소리를 하며 교문을 빠져나간 둘은 이내 무얼 사먹을지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뒤로 쭈볏거리며 몰래 학교를 나가려다 걸린 학생들이 수위에게 잔소리를 듣는 소리가 흩어졌다.

 

 

 

 

 

 

 

 

 

햄버거로 가득 채운 배로 학교에 들어섰다. 3분 거리에 맛있다고 평이 자자한 떡복이 집이 있었지만 매운 걸 잘 먹지 못하는 홍지수를 위해 부러 10분 거리의 햄버거집응 갔다. 반으로 들어가자마자 날라오는 목소리. 너네 또 둘이서 먹으러 갔냐? 아주 사귀네~ 같은 반 친구들이 놀리는 소리는 어이없음 반,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 반으로 대충 웃어넘겼다. 아 웃기고 있어.

 

 

 

5교시가 시작되었다.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던 눈길이 슬그니 움직이더니 동글동글한 뒤통수에 이르렀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동글동글. 둥그런 홍지수. 코 끝도 동글동글. 말투도 동글동글. 마음도 동글동글. 별명도 조슈지라 동글동글. 끝임없이 이어지는 동글동글함 속에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할 상념이 펼쳐진다.

 

 

 

두근두근. 홍지수와 내가 사귄다면. 지수와 내가 연인이 된다면. 서로 좋아한다 마음을 말하면. 행복하겠지. 둘이서 일찍 등교해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손도 잡고. 이어폰 나눠끼는 척 손장난도 치고. 교실 뒷구석에서 소곤소곤 사랑한다 속삭이고. 아침 햇살이 비추는 흰 침대에서 서로 머리를 쓰다듬어줄거야. 일어나라며 볼에 입맞춰보고. 요리하는 뒷모습 꼭 끌어안아 품에 가두어 보고. 행복할텐데. 분명. 좋을텐데. 하지만.

 

 

 

꼭 사귀어야하나.

 

 

 

난 지금도 좋은데. 만약 멀어진다면.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나를 그저 친한, 유별나게 친한 친구라고 생각해도. 차라리 멀어질바엔. 지금만큼만 욕심 부리면서. 딱 이정도만 응석부리면서. 웃음 속에 내 마음을 감춰서. 농담 속에 진심을 감춰서. 알아차릴 수 없게. 친구보단 가깝고 애인보단 먼. 알 수 없는 우리 온도가 평생 유지되길 바라면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 너를 평생토록 옆에서 바라보고 좋아할 수 있게. 그럴 수 있게. 너의 마지막을 옆에서 바라볼 수 있게. 내가 너를.

 

 

 

"정한아. 집 안가?"

 

"?"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순식간에 하교시간이 다가왔다. 이미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은 한산했다. 청소하는 아이의 빗자루 소리와 저를 이상하기 바라보는 홍지수의 숨소리만이 실내의 정적을 깼다.

 

 

 

", 어어. 아니, 가야지. 잠깐만 기다려, 지수야."

 

"너 어디 아파? 점심시간 이후로 계속 멍 때리던데. 불러도 답이 없고."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홍지수에 단단히 잡혔구나, 윤정한. 허겁지겁 책상을 정리하는데, 책상 위에 가지런히 펼쳐져 있는 깨끗한 공책. 그리고 그 귀퉁이에 적혀있는 이름들. 홍지수. 홍지수 홍지수 홍지수.

 

 

 

화들짝 놀라 공책이 찢어지건 말건 가방에 급하게 쑤셔넣는다. 정한아, 왜 그렇게 급해. 천천히 해도 돼. 아냐아냐 지수야. 나 거의 다 챙겼어.

 

 

 

본걸까? 그럴리가. 지수가 봤다면 아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날 볼리가. 내 얼굴은 어떠지? 아까와 같나? 빨갛게 익어있나? 저녁의 노을빛이 내 얼굴을 숨겨줄까? 표정은 안 이상할까?

 

 

 

"정한아. 나 봐봐."

 

 

 

곱상한 얼굴과 맞지 않는 커다랗고 투박한 손이 제 이마를 짚는다. 너 좀 뜨거운데. 몸이 안 좋아서 계속 멍 때렸던거야? 걱정을 담은 커다랗고 맑은 눈이 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거울을 안 봐도 제 꼴이 어떤지 보인다. 얼굴이 홧홧해진다. 손이 벌벌 떨렸다. 차게 식는 것 같은 손끝.

 

 

 

난 괜찮아. 중얼거림인지 비명인지 모를 말을 내뱉는다. 그럼 말고. 어깨를 으쓱한 그는 먼저 교실을 나간다. 빨리 와, 정한아. 너 때문에 우리 나가기도 전에 교문 닫히겠어. 농담을 뒤로 제 시야에서 홍지수가 사라진다. 어깨에 둘러맨 가방끈을 꽉 쥐고 그 뒤를 따라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 앞에 보인 풍경은 붉게 타는 노을. 어쩌면 어지러울 만큼, 혼란스러울만큼 화려함을 가득 품고 타오르는 하늘. 그 가운데 있는 태양을 향해 걸어가는 한 사람. 뒤로 길게 늘여지는 그림자. 내가 본 모든 것 중 가장 밝게 빛날 긴 그림자. 지수야. 지수야. 지수야. 내가 이 마음을 숨길 수 있을까. 다정하게 사람을 파고드는 너에게 이 마음의 금고를 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냥, 오늘은 혼자 등교할게.]

 

 

 

정한은 제 핸드폰 화면을 허탈하게 쳐다본다. 이게 맞나. 홍지수 번호 이거 맞는데. 잘못 보냈나. 꿰어신던 신발을 힘없이 툭툭 차 벗는다. 홍지수네 집까지 들리기 위해 항상 30분 일찍 집을 나섰다. 데리러 갈 필요가 없다면 볼써 나갈 이유가 없지.

 

 

 

10분 동안 문자로 한참을 씨름했다. 오늘은 따로 등교하잠 말에 한참을 찡찡거렸지만 통하지 않았다. 홍지수는 대부분 다 무난하게 들어주는 스타일이지만 은근 똥고집이라 한번 내린 결정은 뒤집는 법이 없었다.

 

 

 

어제 느꼈던 황홀함과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밤새도록 씨름했다. 덕분에 잠이 부족했는데, 그냥 남은 시간 동안 잠이나 자야겠다. 홍지수로 설친 잠 홍지수로 채우네.

 

 

 

30분 동안 잔 쪽잠인데도 꿈을 꿨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가 멍했다. 홍지수가 저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장면만 계속 떠올랐다.

 

 

 

 

 

 

 

"지수야- 오늘 왜 먼저 가써. 나 오는 길에 외로워 얼어 죽을 뻔 했어~"

 

"정한이 넌 뭐만 하면 죽을 뻔 했대. 이 봄에 목도리에 패딩까지 껴입고 왔으면서."

 

"우리 지수가 옆에 있었으면 봄잠바 하나로도 충분했지."

 

 

 

사실 오는 길에 좀 안절부절 못했었다. 설마 어제 무언가 눈치 챈건가? 이제 자기 좋아하지 말라고 선 그을까? 친구로도 못 지내면?

 

 

 

윤정한은 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저를 손가락질하고 놀리는 것보다 홍지수 하나한테 외면 받는게 더 무서운 아이였다. 근데 그럴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 지수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저를 맞이했다. 제 실없는 소리에 맞장구 쳐주는 것도 그대로. 말하는 이를 향해 웃어주는 입꼬리도 그대로. 진심으로 웃을 때면 부드럽게 접히는 눈꼬리도 그대로. 장난인 척 살며시 기대면 못 이기는 척 단단히 받쳐주는 어깨도...

 

 

 

", 민수야. 나 물어볼게 좀 있는데..."

 

 

 

.

 

 

 

홍지수가 피했다. 나를.

 

 

 

자신을 향해 기대오는 나를 피했다. 아닌가? 우연인가? 그냥 우연히 타이밍이 맞아떨어진걸까? 내가 지수한테 기대는 타이밍과 지수가 다른 친구에게 말을 걸려했던 타이밍이 겹친걸까? 겹친 것이다. 겹쳤을 것이다. 정한아. 제발 진정 좀 해봐. 어제부터 쉴 틈 없이 오르락 내리락 울렁거리는 심장을 가만히 눌렀다. 젠장. 그만 좀 하자. 정한아.

 

 

 

어릴 적 걱정과 한숨이 많아 붙었던 별명. 걱숨이. 크면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두려움 덩어리 걱숨이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홍지수의 단단함에 기대 숨어있었을 뿐이다. 너 왜 이래 진짜? 너 홍지수의 아무 의미 없는 행동 하나 때문에 왜 이렇게 가슴이 철렁거리는 건데? 윤정한, 진정해. 이따 지수가 돌아오면 자연스레 매점이나 가자고 하자. 무서운 게 많은 고딩 윤정한의 사랑은 물음표로 가득 차 있다.

 

 

 

 

 

 

 

조슈지. 이따 밥 뭐 먹을거야? , 정한아. 나 오늘은 승철이랑 급식 먹기로 했어. , 그래? 나도 같이 먹자. 그래. 조슈지. 밥 다 먹고 매점 갈래? 아니, 나 학원 숙제가 좀 남아서. ... 별일이네. 우리 슈지가 숙제도 다 밀리고. 조슈지, 슈지야. 홍조슈지.

 

 

 

"정한아, 갑자기 왜 그래?"

 

"? 뭐가?"

 

"갑자기 우리 어릴 때 쓰던 별명 꺼내오고 있어. 조슈지가 뭐야."

 

"~ 맘에 안 들어?"

 

"맘에 들고 말고가 아니라, 무슨 뜻인지두 안 알려줬잖아."

 

"그래?"

 

"."

 

"그럼 앞으로도 모르고 있어도 돼."

 

"뭐야..."

 

 

 

왜 조슈지를 다시 끄집어왔냐고? 무서워서. 다시 내 안에서 커지고 있는 어린 걱숨이가 무서워해서. 이 아이를 다시 잠재우려면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던 조슈지와 걱숨이를 다시 꺼내와야 해서. 조슈지가 무슨 뜻이냐니. 그걸 누가 알아. 나조차도 몰라, 그건. 난 나만의 너가 필요해서. 햇님반 조슈아나 지구초 홍지수가 아닌, 나만의 조슈지가 필요해서.

 

 

 

지수야. 나 좀 봐. 너가 하는 별 것 아닌 행동 하나하나에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나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할말이 커지는데 차마 꺼내놓을 수 없어 속으로 중얼거리는 나를.

 

 

 

 

 

 

 

 

 

지수야. 피씨방 갈래?

 

나 이번에 학원 새로 끊어서.

 

 

 

지수야, 너 학원 옮겼댔지. 밑에서 기다릴게.

 

미안, 정한아. 나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학원 안 갔어.

 

아파? 어디? 죽이라도 사갈까? 약은 먹었어?

 

됐어. 옮길지도 모르니까 오지마.

 

 

 

지수야, 너 왜 요즘 급식 먹어? 나한텐 말도 없이.

 

나 요즘 용돈이 떨어져서. 넌 급식 별로 안 좋아하잖아.

 

 

 

지수야.

 

 

 

나 좀 피하지마.

 

나 너 안 피해.

 

 

 

안 피하는 척이라도 하지 말던가.

 

 

 

 

 

 

 

이주일이 지났다. 사춘기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다. 홍지수와 윤정한이 싸웠대. 반 아이들이 수근거린다. 학교 전체에 퍼질 만큼 크게 소문이 나진 않았다. 서로 대놓고 주먹다짐을 했으면 몰라도, 아직까지 윤정한은 홍지수를 졸졸 따라다니니까. 둘이 사랑싸움이라도 했냐는 친구들의 농담이 아프게 찔린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하하, 건조하게 웃었다.

 

 

 

말을 걸면 대답한다. 먼저 말을 걸진 않는다.

 

옆에서 밥을 먹으면 같이 먹는다. 다 먹은 급식판을 들고 먼저 자리를 뜬다.

 

먼저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간다. 서둘러 걸음을 옮겨 빠져나가지도 않는다. 따라잡으면 따라잡혀준다. 하지만 걸음을 맞춰주지 않는다.

 

 

 

숨 막히는 애매한 외면. 교무실 심부름을 갖다와 가방을 챙기러 다시 교실에 도착했을 때, 윤정한을 맞이하던 불 꺼진 텅빈 교실. 다시 한번 주문마냥 속으로 마구 외쳐댄다. 조슈지. 지수야. 홍지수.

 

 

 

 

 

 

 

넋이 빠진 윤정한은 혈기왕성한 남고딩들이 상대하기에 어려운 상대는 아니다. 특히 그 원인인 홍지수와 같은 팀인 정한이면. 축구는 뒷전으로 홍지수 곁을 뱅뱅 맴돌기에만 바쁘다.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공에는 곁눈질도 주지 않고 한 사람만 좇기에 벅찬 듯 숨을 몰아쉰다. 결국 또 졌다. 반 축구. 벌칙은 여전히 달리기 스무 바퀴. 반 아이들의 질책에서도 아무 반응 없던 그의 눈이 달리기 시작 구호를 외치는 체육의 목소리에 다시 빛을 띈다.

 

 

 

홍지수는 기다려주지 않을지언정 먼저 가진 않았다. 어릴 때 크게 말다툼을 해 울면서 집에 돌아갔을 때도 같이 걸어줬던 홍지수. 결코 적지 않은 스무 바퀴라는 양으로 이 넓은 운동장을 다 돌 때면 왜 나를 피하는지 한마디의 단서라도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정해진 궤도를 따라 트랙을 돌면서, 달리기를 좋아하는 홍지수를 지켜보다가 차분히 말을 건네보는거다. 중간에 꼴사납게 헐떡거려도 상관 없어. 홍지수에겐 제 밑바닥의 밑바닥을 뒤집어서 보여주더라도 상관 없다. 오히려 마음 약한 지수는 제 이런 모습을 보고 안쓰러움을 느껴 조금 마음을 풀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을 알게 된 누군가는 윤정한에게 추악한 집착이라 할 수도 있다. 다른 누군가는 어린 소년의 청춘스러움이 가득 담긴 풋풋하고 열정적인 첫사랑이라고 말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제 이런 모습을 보고선 저마다의 미사여구를 붙인 정의를 내릴 것이다. 하지만 윤정한에겐 그런 말재주도 없었다. 제 마음을 뭐라 정리할지 알 수 없었다. 사춘기라는 감정의 돌풍에 휩쓸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덜 여문 청소년의 충동? 어릴 적 제 옆을 지켜오던 존재가 사라짐으로써 느껴지는 허전함을 애정과 사랑으로 착각하는 미숙한 존재? 다 거추장스러운 말들이다.

 

 

 

그냥, 그냥 윤정한은, 그냥 나는. 홍지수의 눈을 한번 더 들여다보고. 어깨에 한번 더 기대어 그 아이의 체향을 가슴 깊이 기억하고. 커다란 손으로 손그늘을 만들어주는 그 아이의 입꼬리를 한번 더 회상하고. 홍지수를 제 마음 구석구석 한번만 더 음미하고, 각인하고, 색칠하고. 조금만 더 사랑하고 싶은데.

 

 

 

이런 생각조차 거치적거린다. 정한은 제 머리속에서 질질 늘어지는 생각을 털었다. 홍지수의 발에 맞추어 내딛었다. 처음으로 제가 홍지수의 달리기에 맞췄다. 항상 먼저 맞추어주던 그 아이를 기다리지 않고 제가 그 아이를 쫓아 달렸다. 옆을 흘끔 봤다. 그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제 오른쪽.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나란히 어깨를 둔 홍지수. 됐다. 잡았다. 이를 악물고 달린다. 벌써부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지만 계속 달린다. 부족한 숨이 저의 평균 이하인 체력 탓인지 자꾸만 울컥 울컥 올라오는 서러움 때문인진 모르지만 그래도 달린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랜만에 맞춰지는 발의 스텝이 기분 좋아서. 나란히 왼발, 오른발이 번갈아가며 튀어나오는 모습이 행복해서. 곁눈질로 살펴보는 너의 모습이 알 수 없지만 이주 전 그날과 같아보여서. 한달도 안되는 시간 내에 이렇게 너에게 큰 거리감을 느낄 줄은 상상도 못했던 마냥 사랑에 빠진 나로 돌아간 것 같아서. 그래서 제 발 밑에 툭 튀어나온 돌도 보지 못하고 걸려 나뒹굴었나보다.

 

 

 

시야가 빙그르르 돌았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따갑다. 딱딱한 운동장 바닥에 온 살이 다 쓸렸으니 그럴만 하지. 손바닥, 무릎, , 종아리, , 구석구석 안 까진 곳을 찾는 게 더 쉬울 정도다. 어질어질한 시야에 초점을 맞추려 애쓰며 상체를 일으킨다. 아야야. 지수야. 나 아파. 저 멀리 스탠드에서부터 달려온 친구들이 허겁지겁 부축해준다. 일어나기도 힘들어 간신히 앉았다. . 쌔앰. 이게 뭐에요. 지수야. 이게 뭐야. 쪽팔려 죽겠다. 아픔과 부끄러움 때문에 차오른 눈물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정한아, 너 코피 나! 약간 웅웅거리는 귀에 들어오는 작은 소리. 이지러진 시야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팔로 대충 눈물을 훔지고 나서 보니 빨간 돌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더 빨간 액체. 떨어지는 게 내 눈물인 줄 알았더니, 피눈물이었네.

 

 

 

코 위로 흘러내리는 액체를 닦을 생각도 안하고 고개를 들어 너를 본다. 입 안으로 짭짤한 맛이 느껴지는 게 코피가 들어와서인지 그동안 물고 뜯은 입술이 터져서인지 모르겠다. 바글바글 모인 친구들과 나, 그리고 그 혼돈 속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홍지수. 조금 놀랐나. 눈이 조금 커졌나. 아직 멀쩡하지 않은 시야 탓에 제대로 보이는 게 없다. 그저 꼿꼿하게 서서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만 느꼈졌다. 그리고,

 

 

 

눈을 한번 깜빡일 때마다, 조금씩 돌아가는 너의 모습. 윤정한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다. 무표정한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슬로우 샷이라도 걸린 듯 그 아이의 몸짓에 흔들리는 옷자락마저 눈에 박힌다. 차분하게, 소리 없게 저를 외면한다. 홍지수는. 넘어진 저를 두고, 등을 돌려, 먼저 출발한다. 나를 두고 먼저 가버린다. 완전한 뒷모습을 보인 채,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지다가, 조금씩 빨라져가며, 뒤는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사람들이 오가며 가리는 시야 속 너는, 저 멀리 달려 나가며.

 

 

지수야.”

 

 

처음으로 입 밖에 꺼내본다. 지수야. 지수야. 제 목소리가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얼마나 컸는지도 모르겠다. 침묵의 외침이 운동장 곳곳에 퍼져나간다.

 

 

 

멍하니 앉아있는 그를 누군가, 또는 여럿이 힘주어 일으켜 세운다. 여전히 막을 생각은 하지 않은 코피가 제 흰 반팔 티셔츠를 점점이 물들인다. 아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다른 아이들에게 이끌려 걷는 제 다리가. 굽혀지는 무릎이, 잡힌 팔뚝이.

 

 

 

보건실에 데려가 앉혀진다. 어디가 아프니- 같은 질문은 하지 마세요 선생님. 누가 봐도 왜 왔는지 명확하게 보이는 아이잖아요. 제대로 쓸렸네. 흰 휴지 뭉치를 코 아래 갖다대고 꾹 누른다. 소독약 뚜껑을 열자 알코올 냄새가 좁은 보건실 내에 가득 찬다. 소독솜을 상처에 갖다대자 마자 눈물이 쏟아진다. 아파요, 선생님. 어머, 너 우니? 이게 그렇게 아픈 약은 아닌데? 그래도 조금만 참아. 소독 안하면 덧난다. 아픈데, 아픈데요 선생님. 너무 아파요.

 

 

 

문득 홍지수와 엎드려 떠들던 과학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블라인드에 인쇄된 태양계 행성들의 모습. 지구 주위를 끊임없이 멤돌던 달의 모습. 그때의 나는 우리가 서로의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행성과 항성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서로의 주위를 끊임없이 배회하며 이어오던 평행한 우리의 궤도를 네가 벗어나려 한다. 궤도를 이탈한 너라는 우주비행선은 새로운 관계라는 이름의 행성을 발견할까? 아니면 삶이라는 우주 속에서 떠도는 하나의 잊혀진 소행성이 될까. 이 탈선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그치만 당장 이 넓은 우주 속에서 혼자 궤도를 도는 나는 너무 외롭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