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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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카피캣

밀리

대지 1+밀리.jpg

 

 

 

 

 

 

 

 

 

열아홉의 봄. 이상한 나이, 이상한 계절에 윤정한은 홍지수를 처음 만났다.

 

이름만 익숙하지 낯설기 그지없는 캘리포니아 출생의 지수는 아기오리처럼 정한을 따랐더랬다. 하이. 아임 조슈아 지수 홍. 새끼 고양이처럼 웃고는 비어 있는 윤정한 옆자리 꿰찼다. 근데 걔 첫 마디가 가관이었다. 너 진짜 예쁘게 생겼다아.

 

참나. 넌 거울도 안 보고 사냐? 목까지 물들이고 소리친 결과. 윤정한은 향남고 공식 윤첨지가 됐다.

 

아무튼. 미국인 애정은 좀 맹목적인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존재를 보호자로 점찍은 것일지도 모른다. 것도 아님 원픽이거나. 데미안이든 국민 프로듀서 홍지수의 원픽이든, 정한은 졸졸졸 뒤를 따라다니는 미국인이 낯설었지만... 좀 기껍기도 했다. ?

 

그러게. . 왜지? 그걸 찾다 일 년을 꼬박 샜다. 꽁무니에 아기오리 달고. 그래서 찾았냐면 답은 아니. 몰라. 전혀 모르겠다. 정한은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고 라면을 두 개 끓였다.

 

 

나 한국 살까?”

 

 

정한의 침대에서 뒹굴던 지수가 문득 물었다. 그건 내일 어딜 가자던가, 메뉴는 이걸로 정하자던가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톤이었다. 정한은 라면 끓이던 것도 잊고 쿵쿵 걸어가 지수를 내려다 봤다.

 

 

그럼 가려고 했어?”

.”

 

 

대답 참 쉽다 너... 물론 말 못 했지만. 동갑의 미국인 앞에서만 유독 생기발랄해지는 정한의 눈동자가 픽 죽었다. 속이 확 가라앉았다가 들뜨고, 뭔가 바글바글 끓고 울컥 올라오기도 한다. 이게 무슨 감정인데? 찬찬히 따져 볼 여유가 있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정한은 침착 잃은 지 좀 됐다. 홍지수가 돌아간다. 그건 윤정한 플랜에 없는 일이었으니까.

 

 

졸업이니까 이제.”

 

 

정한에겐 돌아갈 곳 같은 건 없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속 편한 급식이 돌아갈 곳이 달리 어디 있다고. 리터럴리 왔던 길 그대로 뒤돌아 뚜벅뚜벅 집에 돌아가면 되는데.

 

정한은 그제야 지수에겐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집과 가족, 전부 미국에 있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지수가 자기 입으로 미국관 달리 이 좆만한 대한민국 아담 사이즈가 마음에 드니까 뿌리내리겠다 한 적도 없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영원을 약속한 기분... 그건 머쓱하다거나 민망한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정한은 적당한 답을 찾으려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와서 어딜 간다고...”

처음엔 그랬다는 거지.”

가지 말라고 하면. 안가?”

 

 

쪽팔린 건 둘째 치고, 일단 냅다 들이박는 게 윤정한이다. 장난 속에 숨는 법은 잘 아는데 우회해서 골 넣는 법은 못 배웠다. 니가 먼저 날 분리불안 환자로 만들었잖아.(?) 니가 먼저 비즈 팔찌 주면서 우리 우정을 영원하게 했잖아.(그러니까 내가 언제...) 우격다짐 식 공갈협박으로도 안 되면 무릎이라도 꿇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소리다.

 

 

안가. 약속할게.”

 

 

웃긴다. 약속이라고. 지장 찍고 복사까지 해. 손 내밀고 유치하게 굴면서, 정한은 지금 이게 청춘영화 오프닝 시퀀스가 아닌가 했다. 홍지수 웃는 얼굴? 그건 미뤄둔다 해도. 저기 멀리에 있는 집과 가족을 뒤로하고 여기에 있겠다는 말을 이렇게 간단하게 한 마디로 결정해도 되는 거야? 근데 묻진 않았다. 지수가 헉 다시 생각해보니 그러네 나 그냥 돌아갈게. 할까봐. 쓸데없는 현실감각 일깨워서 혼자가 될까봐. 참 반짝이는 일 년을 보냈다 추억하다가 천천히 잊혀질까봐.

 

도대체 언제부터 외로움을 배웠는지 알 수가 없었다. 꾸역꾸역 타임라인 세워 보면 딱 지수가 등장했을 그 무렵부터였을까. 가는 사람 안 잡고 오는 사람 안 막는, 프리하기 짝이 없는 인간관계에 대한 감상이 다소 구질구질한 방향으로 변모한 것이. 그러니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런 날 남겨두고 돌아간다고. 이건 진짜 말 안 되잖아.

 

그렇게 책임을 전가하면서도 정한은 지수의 눈치를 살폈다. 풍선처럼 한계까지 부푼 마음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고,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예민한 눈치가 떨었다.

 

 

실은 나도 가기 싫어졌었어. 너 때문에.”

 

 

그런데 지수가 웃었다. 휘어진 눈꼬리가 접히고 입꼬리가 유영한다. 뺨 어드메에 별처럼 찍힌 점이 떠돌았다. 그래. 웃었다. 지수는 원래 남들보다 웃음이 많고, 그야말로 떨어지는 나뭇잎만 봐도 웃었다. 그게 뭐 대수라고.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그런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쿵쿵 울리는 소리는 꼭 앰프가 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그게 뭔지도 모르고. 정한은 그 때부터 감히 홍지수 없는 미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정한은 열 번의 연애를 했고, 열 번 다 차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넌 날 외롭게 만들어.

 

만남은 쉽고 이별은 더 쉽다. 미련이 없어서 그랬다. 미련도 없는 연애를 지속하는 마음은 글쎄. 아 걔가 나 좋다자나.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닌데 거절하기도 미안하구. 난 외롭고, 걔는 내가 좋고. 완전 상부상조 아니야?

 

말관 다르게 정한의 안색은 연애가 지속될수록 푹 꺼졌다. 하하. 암 해피. 바들거리는 입꼬리와 퀭한 눈가가 기가 막힌 시너지를 냈다. 두 살 연하인 A를 만날 때 피로도는 극상을 찍었다. 어딜 나가더라도 한 군데 죽치고 앉아 시간을 죽이는 정한은 종일 끌려 다니며 영혼까지 뽑아 먹혔다.

 

그런 연애까지도 정한은 감내했다. 존나게 행복했다곤 못해도 외로움은 충분히 달랬다. 다만 그 연애 이후로 연하는 만나지 않았다.

 

애인들의 유형도 어지러울 만큼 다양했다. 아홉 번째 애인에게 차인 이후로 정한은 스스로 인류학자라 칭해도 부족함 없다 여겼다. 인간은 대체로 뭔가를 주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원하기 마련이다. 연애의 끝도 그랬다. 트로피 대용으로도 식을 무렵이 되면 정한은 혼자가 됐다.

 

스물다섯의 봄. 넌 꼭 니 같은 사람 만나서 외로워 봐. 기어이 뺨 처맞고 까인 날. 정한은 털레털레 택시 잡아타고 홍지수 집으로 런어웨이 했다.

 

정한아 난 니가 쩨일 이해 안 돼. 지수는 야무진 손길로 멍든 광대에 약을 바르며 잔소리 했다. 언제까지 애처럼 굴래. 죽을 때까지. 그럼 내가 죽을 때까지 이러고 살아야 돼? 죽을 때까지 나랑 놀아주겠단 뜻이네? 진짜 재수 없고 짜증난다.

 

기깔 나는 핑퐁이 끝나곤 이른 저녁을 먹었다. 저녁 후에는 영화. 그리고 카페. 정한은 딸기 스무디의 스트로우를 씹으며 영화의 이런 부분이 좋았고 이런 장면이 아쉬웠다 조잘거리는 지수의 얼굴이나 구경했다.

 

 

그 영화 진짜 재미있었지. 시간이 진짜 빨리 가더라고.”

 

 

정한은 회상을 마무리하며 어딘가 슬픈 사연이 있는 영화 주인공처럼 아련하게 웃었다. 그 날 먹었던 저녁 메뉴와 카페에서 흐르던 음악, 그리곤 지수가 추천해줬던 팝송에 한국 노래가 더 좋다고 반박하자 뒤통수를 때리던 일련의 흐름까지 떠올랐지만, 간신히 눌러 삼켰다. 아무튼. 걔랑 내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었는지 말하자면 끝도 없다. 나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은 거지? 순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결론이 뭐야? 지수 형이랑 먹었던 그 메뉴가 다시 먹고 싶다고?”

뭔 소리야. 호싱이. 형 말 제대로 안 들었어?”

아니 너무 개소리가 많아서... 주제 파악을 못 하겠는데.”

 

 

주제 파악이고 뭐고, 화자의 의도가 감도 안 잡힌다. 순영은 왜 토요일 아침부터 카페에 끌려 나와 강형욱 훈련사 비슷한 게 되었는지를 되짚어 보다가, 처음 정한을 만났을 때 낯도 뒤지게 가리는 주제에 살가운 척 먼저 말을 붙였던 순간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랑 조슈지 사이에 너무 많은 역사가 있었다는 소리지.”

 

 

순영은 그 말을 하는데 왜 지난 연애사까지 죄다 끌려 나왔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으나 묻지 않았고, 곧 그 역사 끝날지도 모른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삼켰다.

 

 

그니까 갑자기? 나한테? ?”

슈지가 나랑 안 놀아줘.”

 

 

이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남자는 동갑의 친구에게 눈이 멀어 조슈지니 뭐니 하는 근지러운 별명까지 지어 부르는 주제에 꼬박꼬박 연애를 하는 미친놈이다. 애초에 진지하게 고민을 듣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순영은 일순간 꼬와진 눈빛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나는 조슈지 대용이다?”

그건 아냐. 근데 있잖아. 걔가 도망 다니면 내가 가면 되는 거잖아?”

그거 피하는 거 아니야?”

내 캐릭터가 좀 그렇잖아. 알다시피. 무대뽀로 들이 박으면 걔도 별 수 없을걸.”

아니 그건 좀...”

에휴. 어쩔 수 없지. 또 내가 지고 들어가야지.”

 

 

정한이 선심 쓴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났다. 숨 쉬듯 개소리 지껄이기엔 과분하게 잘난 얼굴이었다.

 

그리고 순영은, 사랑을 참 유난 떨며 한다는 생각을 한다.

 

 

, 그리고 순영아. 조슈지는 내 전용 별명이야.”

 

 

아주 많이.

 

 

 

 

 

또 한 계절이 지났다. 연애는 열한 번을 채웠고 윤정한은 열한 번 까인 남자가 됐다.

 

카페에서 나온 정한은 먼저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헤어졌어.”

-그렇구나.

 

 

잠시 멈칫했던 지수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별 관심도 없거나 또 헤어졌구나, 하는 태도였다. 정한은 답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말하려던, 걔랑 노는데 너랑 안 간 데가 없더라, 라던가 생각해보니까 조슈지랑 노는 게 더 재미있는 것 같더라, 하는 것들을 전부 삼키기로 했다.

 

정한은 자주 지수가 자기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널브러져 있던 정한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지수의 전화였다.

 

 

-정한아. 너 알았지.

.”

-내가 너 좋아하는 거.

... 왜 울어.”

 

 

안 울어. 고집스레 붙은 답과 분명 붉어졌을 눈가 같은 게 엉켜 어지러이 떠돈다. 그리고 그 끝에 감춰 두었던 마음.

 

이제 안 할래. 힘들어. 지친 목소리 끝에,

 

 

-집에 돌아가려고.

 

 

기어이 끝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제 와 고해하자면, 지수의 집이 되고 싶었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몇 번이고 밖으로 돌아도 끝내 돌아오는 곳. 근데 알아. 너무 빙빙 돌았지. 정한이 허탈하게 웃었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쌓아뒀던 것들이 둑을 무너뜨리고야 만다.

 

 

-기회 줄게. 가지 말라고 말해.

갑자기 가긴 어딜 간다고...”

 

 

그거 아냐 지수야. 난 겁 많은 인생을 살았어.

 

 

이제 다 한국에 있잖아.”

 

 

널 잃을까봐 두려워.

 

 

 

 

 

윤정한 인생 모토는 후회하지 않기. 지나간 일에 마음 써도 돌이킬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다. 너 답네. 지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우스꽝스럽게 큰 교복이 마냥 귀엽다 느껴졌던 열아홉 그때처럼.

 

답이 없으면 지수는 보통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유도 모른 채 악착같이 피하려고 애썼다가도 용기 내 눈을 마주하면 찰나도 억겹처럼 느껴졌었지. 그러면 지수는 꼭 그 속내까지 전부 꿰뚫어 보는 것처럼 굴었다. 웃는 법을 잊은 정한의 입꼬리에 양 검지를 대고 위로 죽 당기면서. 스마일-.

 

이전에도 자주 잠든 지수의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밤이 되면 문득 외로워져서. 그럴 땐 거기 있는 비행기 전부 다 고장 내고 싶던 인천공항이나 꼭 같이 가보자고 새끼 걸었던 다운타운 마그넷 하이스쿨 대신, 야속한 지수 머릿속이나 뛰어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니면 보송한 이불이나 라텍스 베개라도 되고 싶었다. 못해도 벽지. 그래도 역시 살닿는 게 최고지.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정한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다. 아주 오랜만에 맑았다. 저 위에 위성인지 별인지 하는 것들이 꼭 누구의 눈동자를 훔친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유치해 죽겠다고 자조하면서 길게 덮인 속눈썹 이불을 헤아릴 듯 굴었다.

 

내가 미국 가고 싶다고 말하면 같이 갈 거였어? 지수 물음에. 당연히 가야지. 나 두고 가려고 했냐? 조슈지 나빴네. 찡찡대며 답했고.

 

그래. 그래서 나도 여기 있잖아. 한국에. 그 말 하는 얼굴, 천 년에 한번 떨어진다는 유성이 여기 있나 착각하게 만들었었다. 그러니 당연히 반대가 되어도...

 

당연하게도 다른 선택지는 없다. 윤정한은 말 잘 듣는 홍지수네 애완 토끼니까. 이럴 줄 알았음 쫑쫑이니 뭐니 하면서, 토끼 노릇 해주지 말 걸 그랬다.

 

언제부터 후회로 점철된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화상이 될 걸.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흉터로 남고 싶진 않았고. 그래서 더 오래. 이대로 몸이 붙겠다 싶을 정도로 가깝게.

 

널 바로 옆에 두고도 니가 없는 삶을 산 것 같아 슈지야. 그래서 쫑쫑이 외로워.

 

정한이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꾹 다물었다.

 

윤정한 인생 모토는... 후회하지 않기.

 

 

 

 

 

나 이거 쩨일 좋아하잖아.”

 

 

가긴 어딜 가. 평범한 바짓가랑이와 뭐 그딴 걸 일방적으로 통보하냐??? 뻔한 분노를 거쳐 얼굴 좀 보자. 한번만. 구질한 애원 끝에 정한은 그토록 원하던 홍지수 얼굴을 마주하게 됐다.

 

 

케이크도.”

 

 

등받이 의자에 몸을 묻고 앉은 지수는 그야말로 상전처럼 굴었다. 아쉬운 게 누구 쪽인지 이보다 더 확실하게 알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은 태도. 건물주라 해도 믿겠어. 정한은 조그만 초콜릿이 앙증맞게 올라간 당근케이크를 가깝게 끌어주는 자신의 손가락을 해괴망측한 눈으로 봤다.

 

, 나 원래 얘랑 만나면 뭐 했더라. 돌아보면... 늘 이러고 있었다.

 

홍지수 한국 와서 제일 처음 바이킹 탈 때 새싹핀 사다 바친 것도, 한강에 피크닉 가자고 꼬셔서 손수 라면에 계란까지 끓여다 바친 것도, 달마다 왜 먹는지도 모르겠는 미주라 토스트 박스떼기로 사다 바친 것도... 정한은 문득 억울해진다.

 

단 거 별로 안 좋아해. 그 말에 빼빼로 먹으면서 초코에몽 마시는 니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반박 안 하고 우물거리는 얼굴 바라볼 때. 조슈지 곧 임플란트 해야겠는데. 끝까지 눈은 못 보고 시비 걸 때도.

 

 

너야말로 알았지 조슈지.”

.”

니가 저번에 물어봤던 거.”

 

 

홍지수 특. 뜬금없이 돌멩이(이하 돌쫑이)를 입양했다 지껄여도 욕은 할지언정 눈 휘어 준다.

 

거기에 플러스, 쩨일. 지수에게 스민 말버릇. 이젠 정한에겐 남아있지 않지만. 정한은 그런 것들을 돌이켜 본다. 지수가 준 것과, 지수에게 준 것들. 사소한 버릇과 말투, 말하지 않아도 쌍둥이처럼 통하는 회로와 또 비롯한 마음을.

 

 

정한아. 예전에 물어봤잖아. 진짜로 니 말 때문에 안 돌아갔냐고.”

“.....”

맞아. 그 땐 그랬어. 이상하게 니 말을 들으면 근거도 없는 자신감 같은 게 생겨서.”

지수야.”

.”

 

 

우린 뭔데. 우리 뭐하고 있는 건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린 대체 뭘 한 거야. 내 말 한 마디에 간단히 대답한 건 너잖아. 니가 그래도 간다고 했으면 바짓가랑이 붙들었을 거긴 한데 그럴 필요도 없이 남겠다고 했잖아. 그럼 난 왜 널 붙잡은 건데. 니가 없으면 외로워질 것 같아서. 외로워지기 싫어서. 그래서...

 

사실은 알고 있었다. 디나이얼이 너무 길었지.

 

정한은 문득 울고 싶어졌다. 이제 와 둘의 인생을 분리하기엔 너무 긴 시간을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아직 유효해?”

뭐가.”

내가 잡으면. 그러면 안 가겠다고 했던 말.”

 

 

정한은 지수 앞에선 늘 비굴해진다. 이건 퍼포먼스로 언제든 꿇을 수 있는 깃털 같은 무릎과는 또 다른 문제다. 그리고 지금은 빈사 직전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

 

 

. 유효해.”

 

 

그리고 정한은,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는다.

 

 

가지 마. 좋아해.”

누가 그런 말을 울면서 해. 가오 죽게.”

 

 

저것도 내가 가르쳐 준 건데. 정한은 가오 죽게 울면서 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그 사이로 슬쩍슬쩍 보이는 게 물기 때문에 흐렸다. 슈퍼 갑 앞에서 가오가 어딨냐. 멀리 있던 지수가 상박을 바짝 숙였다. 정한은 오늘따라 그 얼굴이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하나만 물어보자.”

“...”

진짜로 날 좋아해?”

 

 

정한이 헛웃음 쳤다. 말로 듣고 나니 부정할 수도 없이 펄떡이는 게 쿵쿵 뛴다.

 

 

. 좋아해.”

 

 

눈가가 뜨끈했고, 속에서 뭔가 자꾸 울컥 올라오는 바람에 숨이 막혔다. 정한은 끊임없이 말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좋아해. 사랑해. 진짜야. 중얼거렸다.

 

 

?”

몰라. 그냥 그렇게 됐어.”

 

 

정한이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그냥 언젠가부터 그러고 있더라고.

 

 

"늦어서 미안해."

 

 

그렇게 심심하고 재미없는 늦은 고해 끝에. 마침내 둘의 캐치프레이즈를 우정에서 사랑으로 갈아 끼운다.

 

울 듯이 웃는 지수의 얼굴. 그건 장마 같다. 눈 깜짝할 새 발목까지 잠겨 위기였다. 정한은 살려 달라 소리치는 것 대신 수작질 시작한다. 지수야 새삼 너 손 되게 크네. 손 크기 재볼래? 향수 뭐야? 너무 좋다. 나 눈에 먼지 들어간 것 같애 봐줘.

 

그 모든 개수작 목도한 홍지수 표정... 눈에 띄게 꼬와졌다. 실은 무서웠다. 불한당처럼 불친절하게 털어 놓은 마음에, 더해서 그지 같던 멘트까지 도로 꼭꼭 포장해 반송할까봐.

 

너무 늦었잖아... 지수가 웅얼댔다. ... 미안해. 울지 마. 속상해. 막 찢어져. 오바 떨지 마. .... 근데 내 마음만은 진짜야, 지수.

 

사랑은 재해고 윤정한은 한낱 인간이므로. 정한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후회 안 해? 지수가 물었고. 안 해. 벌써 너무 많이 했어. 그러니까 한번만 잡혀줄래. 뒷말은 생략하고. 이런 표정 하면 좋아했었지, 선명한 기억 끄집어내 비 맞은 개새끼처럼 굴어본다.

 

자포자기인 인간 윤정한 앞엔 해일 대신 물결 같은 홍지수 입술만 붙었다.

 

 

 

 

 

그래서. 연애하게 됐습니다?

 

요약하자면 딱 한 줄. 연애가 별건가. 그도 그럴 게, 둘 사이에 큰 변화는 없었다. 애초에 연애 비슷한 걸 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정한은 생각했다. 이걸 어떻게 우정이라고 착각했을 수 있을까. 거창한 건 싫다. 귀찮고 성가셔. 배짱 부렸던 게 전생인 것처럼 정한은 절절 맸다.

 

지수야. .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개소리 말고...

 

그럼 딱 개소리 멈추고 안겨 왔다. 매달리는 쪽은 꼭 정한이었는데, 그게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 이제 고해성사는 숨 쉬듯 쉽고. 좋아 죽겠으니까 제발 팔 풀지 마 슈지야.

 

뭘 해도 잘하는 운빨 스택 몰빵 사기캐 윤정한은 수도 없이 했던 연애에 뜬금없이 발목 잡혀 허둥거렸다. 뭘 해도 새롭다. 신생아 된 기분. 연애가 이런 건가요? 홍지수 답은 간단하다. 넌 내 첫사랑만 아니었음 벌써 내 손에 뒤졌어 정한아.

 

그리고 혼란의 연애질과 의미 없이 오래도록 이어졌던 줄다리기 끝에, 정한도 조금씩 변모한다. 미친 연애에 발 맞춰 헤까닥 했단 소리다.

 

 

슈지야. 우리 좀 더 즐기면서 살자.”

 

 

비장한 밑밥 깐 뒤, 우리 뻔한 건 하지 말자. 깜찍하게 눈 깜빡이곤 101, 202일 챙겼다.

 

지수는 혀를 찼다. 진짜 미친 새끼... 101일 기념 뺨 맞기 내기는 좀 그런가?

 

 

 

 

 

 

 

홍지수랑 하는 연애질. 재밌어 죽겠다. 정한은 아무래도 난 어려운 연애가 맞는 것 같다 느낀다.

 

눈 뜨자마자 방전되기 시작하는 침대 밀착형 인간 정한은, 끝내 애인과 등산하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김밥 레시피를 검색하는 우렁각시로 변태했다.

 

시작은 지수의 덤덤한 한 마디였다. 나 요새 등산이 하고 싶어. 삼일 뒤, 둘의 홈 스윗 홈에는 산더미 같은 등산 장비가 배달됐다.

 

우린 시작이 좀 늦었잖아. 지랄도 많이 했고. 가벼운 회고와 칼 같은 자기 성찰의 결론은 간단하다. 적어도 더 이상의 후회를 남기지는 말자는 거였다.

 

서로 한쪽 팔뚝을 맞대고 앉아 목적지를 서치하면서 정한은 지수의 머리칼이나 배배 꼬며 놀았다. 언젠가 정한이 머리를 아무렇게나 길러 단발 수준이 됐을 때, 가깝게 붙어 앉은 지수의 뺨에 스치는 머리칼이 마치 피부인 것처럼 근지러웠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난 눈치가 좀 없는 타입이었나 봐.”

타이밍을 몰랐던 거지.”

 

 

아님 자신감이 너무 넘쳤거나. 지수가 덧붙이며 가볍게 웃었다. 열아홉에도 딱 저렇게 웃었는데. 뼈테로의 가슴에 선명하게 박힌 명화. 정한은 인생이 각자의 영화라면, 지금이 과거 회상 씬이 나올 때라고 확신했다.

 

그리고는 또 틀어박혔다. 정한이 아무 것도 아닌 날을 기념하기 위해 사온 한 쌍의 피규어가 장식된 거실에서 비즈를 뀄다. 예쁘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낀 새끼손톱만한 데이지 파츠보다 그 너머의 지수가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나 정한은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어잉. 예쁘네. 하고.

 

가끔은 침대가 너무 멀었다. 정한은 눈을 송아지처럼 치켜뜨며 손 내밀었고, 지수가 한숨 쉬며 깍지를 꼈다.

 

 

가만 보면 넌 니 얼굴 너무 믿어.”

내가 언제.”

지금도 봐. 얼굴만 내밀면 다 되는 줄 알지.”

 

 

정한이 허리 숙여 목줄기를 깨물 때 바닥에 이미 난장인 비즈가 한 차례 더 구르며 소리를 냈다. 하지 말라니까. 지수의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목에 매달리면 귓가에서 웃음소리가 끓었다. 지수는 사랑에 자존심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홍지수 한정 올패스인 건 잘 알지.”

 

 

그리고 사랑은 사람을 과감해지게 만든다. 그러니 칭찬도 못 견디는 윤정한이 셀프로 헛소리도 하게 되고 그런 거지. 지수는 열에 들떠 웃었다.

 

쫑쫑이는 사랑이 고파. 자꾸 봐줘야 돼. 정한은 열아홉, 교복 입고 토끼 중에 쩨일 큰 쫑쫑이예여. 애완 토끼 자처했을 때처럼 안 그런 척 절절 맸고. 조용히 좀 해. 입을 막은 지수 손바닥에 입술 쪼면서 귀염 떨었다.

 

거실엔 공기청정기 돌아가는 소리만 미약하게 들렸다. 정한은 지수의 가슴팍에 엎어져 오늘을 한 프레임에 가두고 끝없이 반복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고요한 거실엔 곧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가 틀렸다. 정한은 땀에 젖은 지수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아직도 뜨끈한 뺨 근처에 손부채질을 했다.

 

 

이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난 연애하는 게 진짜 지루하다고 생각했거든.”

.”

조금만 반복하면 래파토리가 떨어져. 했던 거 또 하고, 또 하고. 별 재미도 없는 걸 자꾸 반복하는 거라고.”

 

 

지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중간 중간 짧은 답을 붙이기도 했다. 머리가 복잡한 건 애인의 전 연인들을 향한 미안함 탓이 컸다. 윤정한을 향한 욕이던가. 저런 신랄한 소리를 듣는 입장이었다면 정한을 죽이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 지루한 걸, 너랑은 계속 하고 싶더라고.”

나랑 하는 연애가 지루하냐?”

편하다는 거야. 왜인지 모르겠다 진짜. 아무것도 안 해도 펄펄 날잖아."

"뭐라도 좀 해."

"난 지수 믿어."

"믿지 말라니까."

 

 

그래. 바로 이런 거. 노력하지 않아도 순항하는 말들. 아무렇게나 떠도는 것 같지만 분명히 공전하는 것들.

 

그리고 생각한다. 사랑이란 건 그런 것 같다고. 운명이니 낭만이니 하는 허무맹랑한 단어들을 마구잡이로 가져다 붙이고 싶은 것.

 

겁이 많아지고 쉽게 들뜨고 쉽게 식어도 또 다시 몇 번이고 마음의 풍선을 부는... 이를테면 단어 하나 말 한 마디에 기분이 상했을까 절절 매고, 웃는 얼굴에 세계를 일주할 용기가 생기고, 하필 그 얼굴을 또 하필 정면으로 목도해서, 오래 제자리걸음 했으나 끝내 이렇게 되고야 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 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는 허탈하기 짝이 없는 문장으로나마 조금이라도 표현 가능한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보려면, 분명 걸맞는 주인공이 있어야 하겠지. 그리고 정한은 그 주인공 자리가 오직 지수의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너머의 관객 중 일부는 주인공 둘이 꼭 닮은 것 같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촌스럽고 지루한 사랑 놀음이 아주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휴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다. 정한은 간만에 한강이나 가자. 조르던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날로 돌아간다면 또 같은 소릴 하게 되겠지...

 

그런 고로. 정한의 한 손엔 아기자기한 피크닉 세트가 들리게 됐다. 뭘 해도 기왕이면 잘 해야 한다는 마음의 문제였다.

 

굳이 나서서 변명하진 않았지만, 정한은 지난 연애 모두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기왕이면 잘 해야 하니까. 남자친구 노릇도 똑같은 거지. 세상에 노력해서 안 되는 게 어딨어? ...사랑은 안 된다는 건 몸소 체험하고야 알게 되긴 했다만.

 

근데 이상하다, 지수야. 왜 너랑 있음 노력할 게 없지. 정한은 잠깐 멈춰 서서 고민해본다. 너무 순탄하니까 오히려 이상하다니까. 불안하고.

 

그럴 때. 또 예고 없이 웃는 바람에. 정한은 하릴없이 무너져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시작한다.

 

 

정한아. 안 와?”

 

 

잡념에 파고든 사이, 저만치 앞서 간 지수가 뒤돌아 정한을 불렀다. 동그란 정수리가 햇빛 받아 반짝인다. 눈부셨다. 난파선을 타고도 버뮤다 순항하게 만드는 홍지수. 윤정한을 다른 사람 만드는 홍지수. 사람 속도 모르고 자꾸 웃는 홍지수.

 

어쩌면 열아홉 그 때, 지수가 전학을 온 그 날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정한아. 다시 이름 불렸다. 저 얼굴은 셀프로 인내심 테스트 하는 얼굴이다. 근데 저것도 귀여우면, 나는 진짜 어쩌지. 큰일 났다. 윤정한 진짜 미쳤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 감도 안 잡힌다.

 

이제 와 생각하자면, 한 번도 저걸 보고 평온했던 적 없다. 그러니까 생각하게 되는 거다. 나는 정말로 널 처음 본 날, 네가 날 보고 웃던 그 순간부터 패배가 확정된 승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쫑쫑이 가여.”

 

 

정한은 놓칠 세라 달려가 빈손 파고들었다. 눈 살벌하게 깜빡이면서도 손잡지 말란 소린 안 하는 게 지치지도 않고 좋다. 그래도 혹시 몰라 애교도 좀 떨어 주었다. 그러면 늘 그랬듯이 못이긴 척 깍지 껴 오고. 때마침 지수의 웃음이 만개해서, 정한은 그제야 봄이 왔구나 알아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