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그친 하늘이 시렸다. 아직 물기가 남은 벤치를 대충 손으로 두 번 쓸고 앉았다가 바로 일어났다. 빗물에 거의 다 쓸려가고 찌꺼기만 남은 꽃잎을 발로 모으고 있자 눈앞으로 불쑥 파란 캔이 들어온다. 홍지수는 살이 약간 따끔거릴 정도로 따뜻한 캔커피를 받아 손바닥 전체로 감싸 쥐었다. 홍선생 우는 걸 또 보네. 홍지수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눈가가 벌건 게 누가 봐도 저 울었어요 하는 꼴이다.
"인턴 때도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봄이라서 그런가?"
"그런가 봐요."
"요즘이 딱 감수성 풍부할 때지. 이해해요."
수용한계를 넘은 정보는 범람해 뇌와 가장 가까운 구멍으로 흘러내렸다. 그릇에 용량보다 많은 물을 담으면 넘친다. 당연한 결과다. 그러니까 이건 당연한 일인 거다. 12세 관람가 히어로 영화를 보다가 옆자리 직장동료가 걱정스럽게 볼만큼 눈물이 흐른 건 피할 수 없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반도 못 먹은 팝콘 통 끌어안고 줄줄 흐르는 눈물 닦으면서 상영관을 나온 홍지수는 남은 이들이 쿠키영상을 기대하며 올라가는 크레딧의 끝을 기다릴 동안 밖에서 벅찬 마음을 갈무리했다. 부는 바람이 다른데 매번 똑같은 파도는 없는 법이다. 첫 충격 후 남은 그리움이 여진이 됐다. 울대를 다시 뜨겁게 치고 올라오려는 걸 미지근한 커피로 누르고 500원 추가한 달콤한 맛 팝콘 한 주먹 입에 넣어 당을 채웠다. 사막에서 자석도 없이 바늘 찾기. 나쁘지 않지.
나이, 고향, 학력, 하다못해 알바한 이력이라도 한 줄 들고 와야 뭘 찾아보던가 하지 이름 세글자 딸랑 가져오면 어떻게 찾아요. 사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홍지수는 세 번째 퇴짜를 맞고 이 방법은 포기하기로 했다. 흥신소는 만능이 아니었다. 그래도 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찾아온 건데 건진 거라곤 구글에만 검색해도 바로 나오는 파평윤씨 집성촌 목록이 끝이었다. 이미 다 아는 정보였다. 오래됐지만 직접 살아도 봤다.
홍지수는 주변의 제안으로 가입만 해놓고 방치 중이던 인스타그램에 자기 정보를 줄줄 추가했다. 이름, 원래 본관, 먼 옛날의 진짜 고향을 써놓고 알아보기 쉽게 증명사진까지 프사로 박아놨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윤정한' 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용자를 검색해 한명한명 집요하게 조사했다. 사진이 올라와있는 경우는 거르기 편했다. 비공개 계정을 제외하고 sns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정한들의 신상을 캐다가 해가 바뀌었다. 레지 3년 차가 시간을 낸다고 내 봤자였다. 그렇게 아무 소득 없이 눈만 나빠졌다.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려다 민증이 없어 빠꾸맞은 홍지수는 문득 그동안 윤정한과 저가 재회했을 때 한 번도 나이를 따져보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위아래를 굳이 구분 짓지 않는 사이이기도 했고, 대충 비슷한 시기에 다시 태어나 살다가 어느 날 기억이 떠오르고 나서 만나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설이 세워졌다.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명백했다.
규칙이 어긋난 게 분명하다. 홍지수는 직전의 삶을 회고했다.
작은 마을의 중간을 약간 비껴 지나가는 얕은 냇가에선 종일 빨래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 수고로움을 입고 아무 거리낌 없이 진창에 뛰어드는 꼴을 구경했다. 그 흙탕물에 낚싯대를 드리운 윤정한은 말만 어이쿠 하면서 그대로 앉아있었다. 몇몇이 그물을 들고 섰고 나머지는 첨벙이며 있기는 한지 의문인 물고기를 몰았다. 한참 뒤 자신 있게 들어 올린 망에는 나뭇잎과 작은 돌뿐이었다. 윤정한은 씨익 웃었다. 저럴 줄 알았다.
"고기가 있기는 해?"
"글쎄."
내도록 미동 없던 낚싯대를 이제 와 든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별 말없이 지켜봤다. 윤정한은 잠시 기다렸다가 일순 눈을 빛내며 챔질을 했다. 홍지수는 답지 않게 크게 놀랐다. 진흙이 팍 튀며 거짓 조금 보태 팔뚝만 한 가물치가 튀어나왔다. 필사적으로 사수하던 흰 무명옷에 얼룩이 생겼다.
"있네."
홍지수는 가물치탕을 한 그릇 받아 거의 다 남겼다. 덜 고아진 탓에 살은 질기고 국물에선 흙내가 났다. 아까 그 물을 그대로 마시는 것과 비슷한 맛일 거라 조용히 얘기했더니 윤정한이 듣고 좋아했다. 윤정한의 그릇은 애초부터 비어있었다. 낮에 묻은 얼룩은 몇 번을 빨아도 없어지지 않고 남았다. 끈질기기가 윤정한과 같았다.
이미 다 싸둔 짐을 괜히 뒤적이며 홍지수는 말했다. 아무래도 내 운수는 너를 만나는데 다 쓰인 모양이지. 윤정한은 대꾸없이 농에서 꽁꽁 싸맨 보따리를 꺼내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너한테. 홍지수는 말을 골랐다. 이게 왜 이렇게 안돼! 윤정한은 억세게 묶인 매듭이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인지 성을 냈다.
"불운이었고."
전쟁은 작은 마을이라고 피해가지 않았다. 일찌감치 피난길에 오른 집이 많아 마을의 반은 텅텅 비었다. 홍지수는 간밤에 혼자 몰래 떠나려다 윤정한한테 딱 걸렸다. 어디 가냐고는 묻지 않았다. 들어와. 하더니 이불 꼭꼭 덮어주고 자기가 나갔다. 잠시 부산한 소리가 나더니 방바닥이 점점 뜨끈해지기 시작했다. 민망함에 억지로 눈을 감고 있자 윤정한이 들어와 앉았다. 숨소리 사이로 간혹 코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안 누워?"
"너 자면 알아서 할게."
"안 갈게."
"누가 뭐래? 그냥 어두우니까 너 범한테 어? 잡혀갈까봐 범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 밤중에 나가 나가길."
"안 간다니까."
"일단 자고 해 뜨면 아침 먹고 가."
"알겠어."
홍지수는 이불을 걷어치웠다. 들어와. 윤정한은 순순히 옆에 누워 등을 돌렸다.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고 두번 토닥였다. 여즉 끌어안고 있던 짐을 옆으로 치우고 홍지수도 반듯하게 누웠다. 자려는 듯 조용하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산에 범 없어. 윤정한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걱정하지 말고 잘 자."
불을 너무 땠는지 더워 홍지수는 잠을 설치다 밖이 희끄무레할 즘 겨우 눈을 붙였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지만 제 몫으로 아직 따끈한 밥 한 그릇이 남았다. 소반을 덮은 보자기 아래엔 혼자 먹기 과한 찬이 차려있었다. 드물게 홍지수보다 먼저 일어난 윤정한의 소행이리라. 기가 찼다. 난리 통에 입 하나 줄여주려니 이런 식으로 나와. 홍지수는 기특해 죽겠는 밥상을 남김없이 꼭꼭 씹어 삼키느라 약간 과식했다.
윤정한의 가족은 고향에 남는 입장이었다. 어딜 가나 완벽히 피하진 못할 것이고 그럴 바엔 차라리 살던 데서나 계속 사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은 윤정한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폭격을 하더래도 저기 도시에나 하지요. 차라리 이런 시골이 더 안전하지 않겠어요? 홍지수는 백번 동의했다.
"있어 봐."
드디어 굳게 봉해둔 꾸러미가 열렸다. 손을 쑥 넣어 뒤적이더니 금으로 된 가락지 한 쌍을 꺼냈다. 입으로 호 불어 소매 춤에 쓱쓱 닦더니 하나를 내민다.
"뭐야."
"나 돌 반지."
"이걸 왜 줘."
아침을 먹어도 너무 많이 먹었다.
"팔아도 금을 팔아야 쓸모 있을 거 아냐."
속이 심히 울렁거렸다.
홍지수는 입까지 가져왔던 유부초밥을 다시 그릇에 내려놨다. 그 반지를 어쨌더라. 마을을 떠나서 어떻게 했더라. 함께 맞이한 끝은 하나하나 선명한데 처음으로 떨어져 본 기억은 흐릿했다. 옷 한 벌과 비상금 약간이 전부인 단출한 짐가방 깊숙이 넣어놨던 것까진 떠올렸다. 그 뒤에.
"에헤이."
간장이 팍 튀어 하얀 가운을 물들였다. 딴생각하면서 초간장 뜯기. 멀티가 잘 안되는 타입이라 예정된 결과였다. 가슴팍에 생긴 얼룩이 익숙했다.
"아이고 죄송해요. 그쪽으로 안 튀었어요?"
"괜찮아요 쌤 옷이 다 먹었어."
물티슈로 열심히 닦아봤자 오염 범위만 넓어질 뿐이었다. 처음엔 오백원 사이즈였던 얼룩이 주먹만큼 커졌다.
"쌤 가슴에 총 맞은 거같애."
비슷한 심정이긴 했다.
홍지수는 머리에 총을 맞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했다. 급식 시절 교실에서 다 같이 본 불법 다운로드 영화는 대부분 별로였다. 그중 최악은 5분마다 사람이 죽는 고어 영화였다. 트랩을 풀지 못하면 죽고 풀더라도 큰 상해를 입는다. 의료민영화 세상에서는 죽음이랑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톱날에 몸통이 썰려 내장이 쏟아지는 장면은 그저 역겨웠지만, 주사기가 가득한 구덩이에 빠질 땐 소름이 돋았다. 상상 가능한 아픔에 머리 꼭대기까지 삐쭉 솟았다. 배움에 뜻이 깊었던 홍지수는 B급 슬래셔 무비에서도 가르침을 얻었다.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모를 땐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는 거다. 지금이 딱 그랬다.
차트에 쓰여 있는 이름을 봤을 땐 설마 했다. 커튼이 걷히고 창백한 낯의 윤정한과 마주한 순간은 충격적이지만 고통스럽진 않았다. 총에 머리를 맞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환자분 넘어지면서 의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다고 합니다."
싹싹 넘긴 머리 안쪽으로 아직도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반듯한 미간이 찌그러졌다. 근무하며 별 상처 다 봤으면서 유난이었다. 그도 그럴 게 죽은 듯 누워있는 윤정한은 너무 작고 어렸다.
"선생님이 머리를 좀 봐도 될까?."
"네 근데 저 알아요?"
"어우 얘가 뭐라는 거야 선생님 죄송해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윤정한 어린이. 선생님이 머리를 좀 봐도 될까요?"
"어린이 아닌데 청소년인데."
"어이구 혼자 자빠져서 병원 왔으면서 잘나셨어요."
넘어지며 머리를 찢어먹어서 엄마 손 붙잡고 홍지수가 일하는 소아병동 응급실에 나타난 초등학생 윤정한. 이건 예상 못했다. 상상이라고 해봤을 리 없었다. 홍지수는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소독하고 마취하고 최대한 흉 안 지게 예쁘게 직접 봉합했다. 바빠 눈 돌아가는 와중에 윤정한 하나만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고 있다가 배웅까지 나갔다. 로비 자판기에서 풍선도 뽑아다가 작은 손에 꼭 쥐여줬다. 어머 선생님 괜찮아요 얘는 이런거 졸업했어요 하는 말에도 끄떡없었다.
사람은 안 변한다. 세월이 지나도, 모습이 변해도 본질은 그대로 변함없다. 근데 사랑은 변한다. 홍지수의 사랑은 새로운 형태로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홍지수가 윤정한을 예전과 같이 사랑한다면 아무래도 좀 위험했다.
"맛있어?"
좀 많이 위험했다.
"한 입 줄까여."
"괜찮아 너 많이 먹어."
이천원 콜팝 사 들고 집에 가는 초등학생을 네 캔 만원 수입 맥주 봉다리 달랑달랑 들고 가던 성인이 사랑하는 건 누가 봐도 범죄로 보였다. 이미 범법행위를 저지르긴 했다. 개인정보보호법과 의료법 둘 중 어느 쪽의 위반이 적용되는지까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이게 떳떳한 방법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네 보호자님 환자분 경과가 어떤지 궁금해서요. 좀 괜찮나요? 다행이네요. 빼도 박도 못 하는 고의. 고소당해도 할 말 없지만 다행히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
두어 번 봤다고 이제 아는 사람 됐는지 반말에도 지적 않고 양도 얼마 안 되는 콜팝을 권하기까지 하는 모습에 홍지수는 울컥했다. 맛감자도 아니고 치킨팝콘을 찍어서 내미는데 어떻게 참아. 봄이라 감수성이 풍부해서 그랬다. 근데여.
"응?"
"의사 선생님은 바쁜 거 아니에요? 이종욱 엄마는 맨날 늦게 들어온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왜 맨날 낮에 만나요? 이종욱 엄마도 의사랬는데."
"종욱이네 어머니도 의사 선생님이셔?"
"대학교 병원이라고 했는데 근데 그러면은 대학교 다니는 학생들만 갈 수 있어요? 근데 이종욱 알아요?"
이거 사춘기일까? 연년생 아들 둘을 키우는 간호사 선생님이 그랬다. 초딩이 걸핏하면 이거 아냐고 물어보는 거? 그거 시비 아니고 아는 척 하고 싶어서 그래요. 약간 소속감? 동질감? 그런 거 또 좋아하거든 초딩들이. 애가 몇살이라고 하셨죠? 사학년, 오학년. 힘드시겠어요….
"아니? 모르지."
"근데 왜 종욱이라 해요?"
"선생님은 어른이니까."
"아하."
뇌의 회전축을 약간만 틀면 즐거운 대화가 가능했다. 간지를 한 바퀴 돌고도 반이나 더 돈 나이 차이는 의외로 극복하기 쉬웠다. 사랑의 방향성을 바꿨다고 사랑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홍지수는 여전히 윤정한을 사랑했다. 부모라도 된 것처럼 사랑으로 쑥쑥 키우고 싶었다. 첫 만남 때는 장소가 장소인지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건강한 거 확인하고 안심했다. 지병 없고. 가족력 없고. 나중에 오토바이만 못 타게 말리면 완벽했다. 건강하게 오래 보기. 이번 생은 그거 하나면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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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고등학교 졸업식 불참자 홍지수는 방금 막 오늘의 마지막 진료를 마쳤다. 저녁은 꼭 같이 먹기로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고 식당 예약까지 다 해놨는데 이미 반쯤 지각 확정이었다. 신발만 갈아신었는데 벌써 시간이 빠듯했다. 좀 시들더라도 꽃다발 하나 미리 사둘 걸 후회하며 뛰어나오다 로비에서 발이 멈췄다. 성격상 맨손으로는 절대 갈 수 없었다. 어차피 선물은 따로 준비했고 꽃보다 좋아하리라 확신했다.
윤정한은 교복 위에 하얀 가루가 약간 묻은 검은색 가디건을 입고 엎드려 있었다. 2월에 입기엔 좀 얇은 가지건은 지난가을 홍지수에게 생일선물로 받았다. 상 위에는 굳이 챙겨온 꽃다발이 널부러져 있고 그 밑에 졸업장이 아무렇게나 깔려있었다. 일곱시에 만나기로 한 사람은 십오분이나 지났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일일한정판매 한우 육사시미. 우와 비싸고 맛있겠다. 타이밍 좋게 누가 들어도 지각이라 서두르는 발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벌로 주문서에 작대기를 하나 추가했다. 문 열고 제일 먼저 할 말에 미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미안 늦었지."
"굶어 죽기 전에는 왔어요."
"요즘도 그런 거 해?"
이런 제멋대로 화법. 윤정한이 뭐라고 하든가 말든가 자기 할 말만 하는 이 화법. 홍지수는 윤정한을 아직도 애라고 여기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대등한 취급을 했다. 사실상 지향해야 할 올바른 육아법이다. 그렇긴 한데 당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한 건 그냥 기분 탓인가.
"그런 거?"
"졸업식 날 밀가루 뿌리는 거."
"아. 이거 밀가루 아니에요."
윤정한은 손을 들어 가루의 흔적을 몇 번 털어냈다. 털릴 건 다 털리고 남은 얼룩이라 더 옅어지진 않았다.
"선생님은 해봤어요?"
"우리 땐 계란도 맞았지."
"옛날 사람이다."
"그치 옛날 사람이지. 많이 옛날 사람이지."
"뭐가 또 많이까지예요. 뭔 말을 못 해."
한우 모둠 구이 한 판에 사이드로 육사시미와 갈빗대가 들어간 된장찌개, 서비스 계란찜까지 올라와 상이 가득 찼는데 윤정한이 다시 호출벨을 눌렀다. 쌤 콜라? 어. 여기 콜라 하나랑 테라 하나 주세요. 홍지수의 눈썹이 살짝 솟았다. 어쭈? 자연스럽다?
"누구한테 배워서 벌써부터 술을 마셔?"
"1월 1일 되자마자 아빠한테요."
별거 없던데. 이상적인 루트지만 내리사랑 중독자인 홍지수에겐 조금 속상한 소식이었다. 윤정한의 제 1 양육자로 올라서기에 홍지수는 너무 바빴고 남이었다. 웃기다. 홍지수한테 윤정한이 남일 수 있나. 나 차 가져왔다. 자연스럽게 병을 따는 윤정한에게 시위하듯 말했다. 짠 만 해요. 선생님이랑 처음이잖아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정작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줘 봐 따라줄게."
잔을 기울이는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반만 채우고 자기 잔에 콜라를 조금 따라 부딪혔다.
"졸업 축하해."
한 모금짜리 콜라를 끊어 마시고 앞을 봤을때 윤정한은 홍지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묘하게 처음 보는 반항적인 시선이었지만 육아 중독자 홍지수 눈엔 그저 귀여웠다. 사춘기 한번 오래갔다. 남들처럼 깔끔하게 1년 딱 왔다가 가야 되는데 끊어쳐서 그런 게 분명했다.
"어른 앞에선 고개 돌리는 거야."
홍지수는 저가 아직 윤정한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남아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투플러스 한우를 배불러서 짜증 날 만큼 먹은 윤정한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누가 프로포즈를 이렇게 소박하게 한담."
천장에 딱 붙은 빨간색 헬륨 풍선이 불어 들어간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정한이 너 애기 때 이거 좋아했었어."
둥둥 떠 있는 풍선에서 떨어지지 않던 눈을 홍지수는 기억했다. 정전기 때문에 붙은 먼지를 떼고 풍선을 윤정한에게 내밀었다.
"기억나?"
망각은 윤회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비이며 특권이다. 벌로 박탈당한 이래 어찌 보면 제일 평화로운 이별이었다. 누구 하나가 눈 앞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다음에 봐."
그 다음이 그냥 다음이 아닌라는 건 둘 다 잘 알았다. 깊은 사랑은 이별의 형태로 나타났다. 해소되지 않을 인연을 믿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용기. 윤정한이 사랑하는 모습 중 하나였다. 홍지수가 떠나기로 정했을 때 윤정한은 전적으로 홍지수의 선택을 존중했다. 남들 눈에는 최소 남남, 최대 친구로 분류되는 윤정한과 홍지수가 같이 비비고 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저라도 그랬을 테다. 이해했다. 그렇다고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속으로는 몇 번이고 구접스럽게 붙잡아놓고 뚫린 입만 시원하게 떠들었다.
"응 다음에 봐."
이건 윤정한의 사랑이었다.
머리통에 바느질을 할 때도 참았던 게 줄줄 흘렀다.
윤정한은 8년 만에 홍지수네 집에 처음으로 입성했다. 홍지수가 얼음팩을 건넸다. 겨우 진정된 입꼬리가 다시 한껏 솟는다. 윤정한이 버럭 성질을 냈다.
"왜 웃어. 뭐 잘했다고 웃어."
"니가 운다고 나도 같이 울 순 없잖아. 나는 안 슬픈데."
"진짜 짜증나 미친 거 아니야? 나 그때 열두살이었어. 지금은 스무살이야."
자그마치 8년이었다. 윤정한한테만 홍지수가 남이었던 시간이.
"왜 말 안 했어?"
"니가 그때 열두살이었잖아."
"아니이이."
"괜찮았어."
괜찮다고 말하는 홍지수는 윤정한이 아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왔어 너. 그래서 별로 안 기다렸어."
직전까지 눈물 콧물 질질 짜다가 할 짓은 아니지만, 윤정한은 지금 당장 저가 홍지수를 얼마나 사랑하고 원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웃느라 살짝 얇아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왜?"
과감히 돌진하던 머리통은 목표지점을 목전에 두고 홍지수에 의해 막혔다.
"왜 이래?"
"지금이 딱 타이밍 아니야?"
"정한이 너랑? 내가?"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나는, 어… . 너를 내 자식처럼 생각했어. 알지."
육아 중독자의 말로였다.
태워다 주겠다는 걸 백번쯤 거부하고 택시 타고 집에 돌아온 윤정한은 가디건을 신경질적으로 벗었다. 아 따가워억! 따닥 튄 정전기 소리가 꽤 살벌했다. 심히 복잡했던 머리는 화로 뭉갰더니 일시적으로 매끈해졌다. 사람이 그대로인데 어떻게 사랑이 변해. 지금 윤정한과 백년 전 윤정한, 이백년 전 윤정한은 똑같은 윤정한이다. 홍지수도 마찬가지고. 근데 꼴랑 8년 전에 잠깐 윤정한이 그 윤정한이 아니었다고 해서 바로 그런 마음을 먹을 수가 있는 건지. 아니 진짜 짜증나네. 결혼도 안 했으면서 자식 같은 소리. 홍지수가 진짜 결혼을 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최악이었겠지만 안 했으니까 논외로 친다. 혼자 다 정해서 결론 내리면 다인가 싶었다. 한참 씩씩거리다가 마법의 단어 역지사지를 꺼내 본다. 근데 나라도 그랬을 거 같애. 내가 서른인데 홍지수가 열둘이면. 그걸 10년 가까이 키웠으면. 이해하는 거랑 짜증이 나는 거랑은 별개였다. 화를 못 이겨 주먹으로 꼭 쥐고 있던 가디건을 던지려는 듯 했다가 얌전히 주름 탁탁 펴 옷걸이에 걸었다. 페브리즈도 칙칙칙칙 네번이나 뿌렸다.
"혹시 라면 먹고 잤어?"
아침 댓바람부터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쳐들어온 윤정한은 좋은 놀림감이었다.
"어디 나갔으면 어쩌려고 연락도 안 하고 왔어."
"내 꽃 내놔. 어제 놓고 갔어."
"나 준거 아니었어?"
"5월에 카네이션 줄 테니까 그거 달고 다녀 아빠."
좋다고 웃는 홍지수를 지나쳐 들어오자 종이가방에 담아 깔끔하게 정리해둔 꽃다발과 졸업장이 보였다. 위치를 표시하듯 떠 있는 풍선을 괜히 툭 쳤다. 가방 손잡이에 풍선을 묶어놓은 꼴이 홍지수 같았다. 윤정한은 탁자 위 화병에 자기 꽃다발에서 제일 크고 예쁘고 싱싱한 걸 골라 꽂았다. 홍지수가 꽂아놓은 풀때기 같은 거랑 잘 어울렸다. 윤정한은 홍지수의 결정을 막을 수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홍지수가 윤정한을 사랑해서 내린 결정이다. 일단은 수긍하기로 했다. 대신 다른 길을 찾는다. 어떤 방향이라도 상관없다. 무조건 더 나은 길을 가게 할 거다. 아무리 길어도 8년 안에 끝내주리라 다짐한다.
"아침 뭐 먹을래?"
"순댓국. 아니면 선지."
"순대 먹자."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