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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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wins over infinite possibilities

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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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n anonymous letter

 

 

  너는 내게 말했지. 무수한 가능세계 속에서 죽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라고.

 

  닫힌 우주에서 내가 목격한 것도 그와 같았다.

  너는 정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 그 때문에 네가 죽지 않은 열린 우주를 찾아 다시 블랙홀을 쏘다녀야했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아. 엉망인 우주 속에서 너만이 나의 기준이었으니.

 

  J,

  이 순간과 저 순간을 잇는 가능성을 따라 단 하나의 시간선 좌표를 보낼게.

 

  오직 너만을 위해 열어둔 이 길로,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으로.

 

 

 

II. Revolutional orbit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 문명을 이룬 행성들은 자연스럽게 행성 연합의 소속이 되었다. 일정 수준 이상이라 함은, 그 행성 문명의 기술력만으로도 우주 항해나 타 행성으로의 이주가 가능한 정도였지만 목적 없는 단순 방문은 허락되지 않았다. 각자가 독자적으로 쌓아 올린 문명의 질서에 혼란이 생길 것을 방지하는 차원이었다. 행성들은 자신들이 타 행성에 무력 침입할 수 있는 것처럼 타 행성에서의 침입 역시 경계해야 했기에 행성 전체의 지적 문명에 노출된 행성들은 행성 연합의 소속이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다만 어느 연합에 속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 아직은 원시적 행성들의 과제였다. 행성 연합 체제는 여러 지적 문명 행성들을 미가입 행성으로 남겨둔, 여전히 초기 구상 단계였다. 그 중 가장 큰 연합이 섀플리 클러스터와 라니아케아 클러스터였다. 행성들의 문명이 이룬 지식 체계 혹은 이념에 따라 각 클러스터 연합으로 가입했고 두 연합에서도 미가입 행성들을 자신의 클러스터로 끌어오려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정한은 섀플리 클러스터의 출입관리소 소속이었다. 말이 좋아 출입관리이었지, 사실 정한의 주 업무는 섀플리로로 들어오는 스파이를 걸러내는 것이었다. 클러스터 간의 교류는 극히 적었다. 적은 교류는 반목을 더욱 깊어지게 했기 때문에 언제 전쟁이 터질 지 몰랐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도청과 첩보, 감시 등 서로의 동태를 살피는 일은 중요했다. 정한은 섀플리로 들어오는 모든 탐사선과 여행선의 탑승객 신원을 확인했고, 수상한 이는 따로 조사하거나 심문했다. 행성 간 자유여행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업무 양도 많지 않았다.

 

  이런 행정 업무를 하기 전에 정한은 오래도록 블랙홀을 쏘다니는 훈련을 받았다. 클러스터 본부에서 열어준 블랙홀은 역사의 시간선 어느 순간, 어느 위치에 뚫려있었다. 임무는 때마다 달랐다. 과거의 어느 날 라니아케아의 광장에 정체 모를 주머니를 툭 내려놓고 오기도 했고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누군가를 만나 기밀을 전하기도 했다. 정한은 시간을 모험하는 일을 좋아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블랙홀이 막히기 시작했다. 열린 블랙홀을 타고 들어가도 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출구가 없는 블랙홀 속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도 여러번이었다. 본부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정한은 위기의 상황에 긴급으로 블랙홀을 인위적으로 열거나 주변의 가장 가까운 블랙홀을 찾는 방법을 다시 배웠다. 그럼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정한과 같이 시간을 넘나드는 훈련을 받았던 많은 특수요원들이 행정 업무로 분장되었다

 

   정한은 한 눈에 조슈아를 알아봤다. 라니아케아의 스파이. 그 언젠가 정한의 손으로 직접 걸러내었던 다른 스파이의 서류에서 본 적 있는 이름과 얼굴이었다. 정한은 심문을 위해 그를 따로 불러내었다.

 

  - 조슈아씨?

  - , 조슈아입니다.

  - 왜 부른 건지는 아세요?

  - 글쎄요.

 

  말투에서 라니아케아 특유의 억양이 남아있었다. 상부에 조슈아의 클러스터 출입을 보고해야 했지만 정한은 보고를 미뤘다.

 

  조슈아도 정한이 자신이 스파이임을 안다는 것을 알았지만 피하지 않았다. 왠지 모를 기시감과 왠지 모를 신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조슈아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이 신뢰가 사실은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았다. 낯선 이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III. Once you're over the edge

 

 

 

  사랑은 순식간이었다. 언제라고 말할 수 없이 누가 먼저라고 할 수 없이 산불이 나듯 번졌다. 사랑은 이념 혹은 연합보다 우선했다. 욕망은 분명했고, 일생일대의 벼락과 같이 느껴진 사랑 앞에서 둘은 도망가지 않았다.

 

  정한은 남몰래 조슈아를 자신의 집으로 들였다. 연인과 함께하는 아침과 밤이 정한을 기쁘게 했다.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살았지만 사실은 내내 허전했던 자신의 한 조각이 조슈아라고 믿었다. 정한은 두려울 게 없었다. 조슈아가 이미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했으므로.

 

  그러나 그 무엇보다 앞선다고 믿은 사랑 또한 균열 앞에서 가장 먼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섀플리의 주요 블랙홀이 또 막혔다

 

  - ……조슈지, 너야?

  - 한아, 우리 그런 건 묻지 않기로 했잖아.

 

  정한의 의심도 일리있었다. 정한 취향의 커피 향과 조슈아 취향의 룸 스프레이 향이 섞인 집에서 정한은 조슈아를 추궁했다. 여전히 굳은 얼굴의 정한을 향해 조슈아는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조슈아가 정한을 침대로 밀어 눕혔다.

 

  - 나 이거 말하면 기밀 유출로 죽을 수도 있는데. 책임질 수 있어?

  - 지금도 책임지고 있잖아. 먹여주고 재워주고.

 

  덩달아 말랑해진 정한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서렸다. 얼마나 더 책임져? 정한이 조슈아의 어깨를 감싸고 뒹굴었다.

 

  - 한아, 블랙홀을 어디에 뚫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블랙홀은 시간line에 뚫는 것. 조슈아는 라니아케아의 시간 인식 자체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라니아케아의 시간은 무수히 많은 시간선들로 이뤄진 square이라고 했다.

 

  - 거기선섀플리에서는 가능성으로만 남은 모든 가능세계가 실재해.

 

  모르겠단 표정을 짓는 정한을 보며 조슈아가 웃었다.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넘겨 말끔한 이마에 입맞췄다. 촉촉한 소리와 함께 경쾌하게 떨어졌다.

 

- 이게 한 순간.

 

다시 입술에 입 맞춤했다.

 

- 이건 또 다른 순간.

 

조슈아가 정한의 이마부터 눈꺼풀과 볼을 따라 입술까지 입술로 찍어내려왔다. 순간은 점이고,

 

- 점이 이어진 건 선이야. 하나의 순간이 또다른 딱 하나의 순간으로 이어지는 선. 선에선 순간마다 하나의 가능성만 존재하잖아. 키스했다그렇다면 키스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이 아니라 가능성이 끝없이 펼쳐진 면이라면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실재하니까. 키스했다그리고 키스하지 않았다.

  - 잘 모르겠어. 더 설명을 들어야 알 것 같은데.

 

  정한이 장난스럽게 입술을 쭉 내밀었다. 조슈아가 정한의 입술을 검지로 꾹 눌렀다. 그러면서도 눈을 반으로 접어 웃으며 오른쪽 볼에 짧게 입 맞췄다.

 

  - 왼쪽 볼에 키스했다그리고 키스하지 않았다그리고 오른쪽 볼에 키스했다.

  -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실재한다고.

  - 무한의 면에서 선 하나 쯤 없애는 건 어렵지 않아.

 

  시간은 각각의 우주를 하나의 면으로 직조하는 것과 비슷했다. 조슈아는 시간을 베틀로 짜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베틀에서 면을 짜다가 잘못된 실이 있으면 뽑아버리는 것처럼, 라니아케아 전체 역사에서 불순한 시간선이 존재하면 그 우주를 닫아버리는 것이 조슈아의 역할이었다.

 

  조슈아는 섀플리에 온 뒤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실존하는 모든 가능세계의 다른 조슈아이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조슈아의 임무는 섀플리의 동향을 파악하고 지금 역사선의 우주를 닫을 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조슈아가 파악하기로는 불순한 것들을 조금씩만 치워준다면 지금의 우주를 닫을 필요는 없었다. 조슈아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한과의 사랑을 닫힌 우주에 남겨두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 섀플리에서 블랙홀을 몇 번을 뚫든, 그 우주를 닫아버리면 출구도 없어.

  - 어떻게 닫는데?

  - 그것까지 가르쳐주면 나 진짜 죽어.

  - 닫아버린 우주에 소중한 게 있으면?

  - …….

  - ……있구나?

 

   조슈아는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조슈아도 자신이 닫아버린 우주에 남겨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닫힌 우주에 남겨진 것은 이미 영영 사라진 미지였다

 

  - 데자뷰(déjà vu) 있잖아.

  - 기시감?

  - 실제로 겪은 적 없는데 이미 본 것 같은 거. 그게 사실은 다른 가능세계에서 겪은 것들이거든.

 

  정한이 조슈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조슈아는 눈을 감았다.

 

  - 언젠가 잃어버린 게 있는 것 같아. 가끔씩 보긴 하는데 잘은 모르겠어.

  - 아쉽지 않아?

  - 해야 하는 일이었겠지.

  - 너 그렇게 말하니까 라니아케아 사람 같다.

  - 맞잖아. ……그리고 지금은 너랑 같이 있는걸.

 

  정한이 부드럽게 조슈아의 볼에 부드럽게 입 맞췄다. 이 순간이 언제까지고 이어지기를 바랐다.

 

 

 

IV. Tapestry of time

 

 

 

  예견된 끝이었다. 적진에 와서 적과 사랑을 나누는데 무사할 리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정한의 동료가 조슈아를 고발했다. 정한은 조슈아가 전향했다고 증언했다. 오히려 자신에게 라니아케아의 핵심 기술의 일부를 유출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사랑이 순식간이었던 것처럼 죽음도 순식간이었다. 조슈아는 섀플리에서 죽었다.

 

  아직 라니아케아에서는 조슈아가 죽은 것을 몰랐다. 정한은 조슈아의 생체 신호를 조작해 라니아케아로 수신했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정한은 조슈아가 고발 당하기 전으로 블랙홀을 열었다.

 

  '그때 배운 걸 이렇게 쓰네.'

 

  죽지 않기 위해 배웠던 생존 기술을 연인을 구하기 위해 사용할 때였다. 빛조차 삼켜버린 블랙홀 안에서 출구를 찾아 헤맬 때의 두려움이 생생했다. 정한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죽음보다 상실의 두려움이 정한을 압도했다

 

  블랙홀의 반대편, 출구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 너머에 자신의 연인이 살아있음을 알았다.

 

  아직 죽지 않은 나의 연인. 아름다운 나의 조슈아.

 

  - 라니아케아로 돌아가.

 

  정한이 조슈아의 손을 덥썩 잡고 말했다. 숨을 헉헉 대며 말하는 정한에게 조슈아는 왜냐고 묻기 보다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정한의 땀을 닦았다. 그 손길이 퍽이나 따스해서 정한은 눈물이 터졌다.

 

  - 조슈지 너 여기 있으면 죽어…….

 

  그 언젠가 장난스럽게 붙여준 애칭으로 조슈아를 불렀다

 

  - 한아, 나는…….

 

  조슈아를 조슈지로 부르는 사람은 온 우주를 통틀어 정한밖에 없었다. 모든 시간선을 샅샅이 훑는다고 해도 정한밖에 없을 것이었다. 조슈아는 알 것 같았다. 이 만남이 처음이 아니었음을, 자신이 닫아버린 우주에 남겨둔 이가 정한이었음을. 언제, 어떻게, 어떤 모양의 사랑을 했는지 혹은 할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랑은 예정되어 있었다.

 

  ──────

 

  귀가 찢어질 듯한 경고음이 들렸다. 공식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열린 블랙홀이 클러스터의 감시망에 포착되었음을 알리는 경고였다. 정한은 자신의 블랙홀을 숨길 수 없을만큼 바쁘게 달려왔다. 순식간에 전기가 차단되고 누군가 문을 위협적으로 두드렸다. 불법 블랙홀이 연결된 곳이 이곳이었으니 조사를 해야겠다고.

 

  조슈아는 이 시간선을 닫아버려야 함을 직감했다. 이미 자신의 죽음을 겪고 그것을 넘어 돌아온 연인의 손을 강하게 붙들었다. 이미 정한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 침착하고 잘 들어, 한아.

 

  아직 닫히지 않은 가능세계의 나를 찾아. 내가 너를 몰라도……

 

  - 찾아갈게.

 

  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 어려운 부탁해서 미안해. 조슈지라고 부르면 그게 너라고 알아볼게.

  -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잘 지내고 있어야 해.

 

  정한이 붙들고 있는 조슈아의 손이 모래처럼 흩어졌다. 순간 문을 박차고 무장인원이 밀려들어왔다. 방 안에 정한이 홀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V. No way back

 

 

 

  죽음은 되풀이되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정한을 만난 이후 모든 시점에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조슈아는 죽었다. 그의 죽음이 이미 변하지 않는 절대값으로 시뮬레이션 된 고약한 게임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한은 모든 것을 기록했다. 자신의 모든 선택과 조슈아의 반응, 상황의 변화는 하나하나 기록되었다.

 

  어디가 잘못되었던 거지, 온갖 숫자와 문자로 가득한 모니터 화면을 보며 A부터 Z까지 모든 것이 통제된 실험을 하는 미치광이처럼 함수식을 세웠다. 미세하게 조정된 식과 변수와 계수들 사이에서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찾아내면 정한은 그 가능성으로 향하는 블랙홀로 향했다.

 

  그러나 촘촘하게 계산된 어떤 선택에도 조슈아는 죽었다. 어쩔 땐 정한을 만나고도 몇 년을 살았다. 정한이 마침내 조슈아의 죽음으로 이르지 않는 단 하나를 찾았다고 마음 놓을 즈음 조슈아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죽었다. 어쩔 땐 정한을 만나자마자 죽어버렸다. 정한은 조슈아를 찾아낸 기쁨에 안도하기도 전에 주검이 된 연인을 끌어안았다. 그 많은 죽음에 무뎌질 만도 한데 정한은 그가 죽을 때마다 구역감에 토를 했고 다시 모니터를 보며 식을 수정했고, 기어코 다시 찾아낸 가능성의 블랙홀로 기꺼이 몸을 던졌다.

 

  다시 만난 조슈아가 정한의 손을 따스히 잡았다. 가슴에 총상을 안고 마지막 숨을 가쁘게 내뱉었다.

 

  - 이게 처음이 아니지?

 

  정한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조슈아를 쳐다봤다.

 

  - 미안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하나의 우주가 닫힐 때마다 혹은 어떤 가능세계의 우주 속 자신이 죽을 때마다 조슈아는 데자뷰를 봤다. 수없이 반복되는 자신의 죽음과 옆에서 죽음을 막으려는 자신의 연인이 있는 우주를.

 

  - 미안하다고 하지마.

  -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지? 미안해, 이제 그만해도 괜찮아

 

  마지막 말과 함께 조슈아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정한은 무너져내릴 수 없었다. 아직 연인을 구하지 못했다.

 

  어쩌면, 조슈지가 섀플리에 와서 나를 만났던 게 잘못이었을 지도 몰라.

 

 끝내는 먼 과거의 조슈아를 찾으러 다녔다. 정한은 언젠가 조슈아가 닫아버렸을 우주로 향하는 블랙홀로 궤도를 수정했다.

 

 

 

VI. Methodology: From when nothing happened

 

 

 

  대부분의 블랙홀은 출구가 막혀있었다. 섀플리에서도 이미 출구가 막힌 블랙홀로 향하는 정한을 굳이 쫓지 않았다. 정한은 막힌 출구 가장 가까이에 있는 어떤 가능세계, 정한이 열게 된다면 비로소 실존하게 될 그 세계로 향했다.

 

  처음은 조슈아가 섀플리로 오기 전이었다. 정한이 라니아케아 클러스터로 진입했다. 우연인지 클러스터로 진입하는 정한의 낡은 우주선을 잡아낸 건 조슈아였다. 라니아케아 복식을 입은 조슈아가 정한은 낯설게 보였다.

 

  - 조슈지.

 

  스파이임을 알아봤음에도 자신의 공간으로 조슈아를 들였던 정한처럼 조슈아 역시 당연하게도 자신의 집으로 정한을 안내했다. 섀플리에서처럼 라니아케아의 조슈아의 집 또한 조슈아가 평소에 뿌려두는 룸 스프레이 속에 정한이 좋아하는 커피 향이 섞여들어갔다. 섞인 두 향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 쯤, 정한이 라니아케아의 생활양식이 익숙해질 때 쯤, 조슈아가 물었다.

 

  - 한아, 너는 어디서 온 거야?

  - 알잖아.

 

  정한이 조슈아의 품에서 부비적거렸다

 

  - 공간 좌표 말고…… 시간 좌표 말이야.

 

  라니아케아에서는 무한의 시간선을 관리하는 좌표 체계가 있었다. 섀플리 출신의 정한은 정확한 좌표를 알 수 없어 자신이 온 곳이 어디라고 말을 할 순 없었다. 대신 정한은 자신이 겪은 일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조슈아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지금의 안정이 완성된 안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다시 조슈아의 죽음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으니.

 

  조슈아는 가만히 정한의 이야기를 듣고는,

 

  - 고생 많았겠다.

 

  하고 정한의 헬쓱해진 볼을 쓰다듬었다. 그럼 정한은 어린 애처럼 조슈아의 손에 볼을 부볐다.

 

  - 응 조슈지이 나 고생 많았지.

 

  정한과 조슈아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그게 끝이었다. 정한은 어느 순간 섀플리의 집에서 눈을 떴다.

 

  당연한 수순으로 정한이 라니아케아로 향했다. 다시 조슈아를 만나고, 다시 사랑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섀플리였다. 정한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꿈이라고 하기엔 수백번 반복되었던 조슈아의 죽음과 블랙홀 안에서 떠돌던 기억, 조슈아가 볼을 쓰다듬던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다시, 그리고 다시. 정한은 시간을 거스르고 거슬러 조슈아를 다시 만났다.

 

  - 조슈지.

 

  시간 좌표 어디라고 콕 집을 수는 없지만 수없이 되풀이 되었던 재회 중 하나와도 같았던 날. 라니아케아로 진입하는 정한을 막아선 것은 역시나 조슈아였다.

 

  - 한아.

 

  정한은 이제 거듭되는 재회에 눈물 짓지 않았다. 헤어지고 또 헤어져도 다시 만났으니까. 그러나 첫 만남에 자신을 한이라고 부르는 조슈아는 처음이었다. 조슈지라고 불렀을 때 한눈에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소원하지 않았다 하면 거짓말이다. 정한은 모르는 라니아케아의 시간 흐름에 따라 마법처럼 조슈아가 정한을 기억해주길, 정한과 나누었던 사랑과 대화를 떠올려주기를 바랐다. 연인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때부터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정한의 유일한 위안은 조슈아가 죽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어떤 설정값에도 사랑은 언제나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같은 일이 무수히 반복되니 정한도 무한의 가능세계에 존재하는 무한의 조슈아에게 어떻게라도 자신이 새겨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그러나 조슈아가 정한을 기억하는 일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한의 기대는 단 한번도 보답받지 않았는데 눈 앞의 조슈아는 정한을 한이,라고 친근하게 불렀다.

 

  - 방금 뭐라고……

  - 한아, 이제 그만해도 괜찮다고 했잖아……

 

  돌리고 또 돌렸던 수많은 끝. 많은 숫자와 함수식 사이에서 정한이 찾고자 했던 단 하나. 정한은 조슈아가 살아있는 걸 눈으로 확인한다면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정한은 울지 않는데 오히려 조슈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 내가 아니었어 한아.

 

  정한이 조슈아에게 다가갔다

 

  - 너 여기서……

 

  정한이 조슈아를 끌어당겨 안자, 조슈아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정한을 밀어냈다.

 

  - 셀 수 없을 만큼 죽었어. 네가 죽을 때마다, 네가 죽은 우주를 전부 닫았어. 네가 살아있을 세계로 몇 번이고 돌려보냈어.

  - 조슈지 그게 무슨 말이야?

  - 이제 그만해, 한아.

 

  수없이 정한을 돌려보내도 정한은 지치지 않고 다시 조슈아를 찾아 왔다. 끈질기게 찾아오는 정한을 보며 조슈아 역시 기대를 걸었다. 이번에는 부디 다르기를. 자신이 죽어서 정한이 슬퍼하는 일은, 정한이 죽는 일은 다시 없기를. 그러나 조슈아의 수많은 죽음을 목격해야만 했던 정한처럼 조슈아 또한 라니아케아에서 외로이 죽어가는 정한을 수없이 목격해야만 했다. 조슈아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정한이 죽은 혹은 죽어야 만 하는 가능성의 우주를 모두 닫았다. 그럼에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 ……

  - 미안해, 죽어야 했던 거야. 죽음이 필연인 거야. 미안해

  - 아니야 조슈지…… 내가 찾아낼게.

 

  정한이 조슈아를 끌어안았다. 찾아낼게, 무한의 가능성 속에 단 하나더라도.

 

 

 

VII. The last necessary condition

 

 

 

  정한이 여태껏 고수해오던 궤도를 수정했다. 목적지는 열린 우주 속 남아있을 연인, 그리고 살아있을 자신에게로. 정한은 포기할 수 없었다.

 

 

 

VIII. Across the untraversed possibility

 

 

 

  그래서 다시 섀플리 정한의 집. 휴일이면 침대를 벗어나지 않고 서로의 살갗을 간지럽히던 게으른 연인.

  정한과 조슈아에게 갑작스레 기억이 밀려들어왔다. 정한이 벌떡 일어나 조슈아를 쳐다봤다. 조슈아도 눈을 크게 뜨고 정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굳이 기억 나느냐고 묻지 않아도 서로의 눈에 담긴 혼란과 안도가 모든 것을 설명했다.

 

  조슈아는 아무 것도 시작되지 않았던 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 닫아버린 우주에 소중한 게 있으면?

  - …… .

  - ……있구나?

  - 언젠가 잃어버린 게 있는 것 같아. 가끔씩 보긴 하는데 잘은 모르겠어.

 

  내내 알 것 같은 기분, 어렴풋이 잡힐 듯 말 듯한 기분이 느껴졌었다. 조슈아는 이제야 진정으로 알 것 같았다.

 

  정한아, 그 모든 게 너였어.

  내가 잃어버렸던 게 너였어.

 

  죽음이 필연인 게 아니었다. 억겁의 가능성 속에서 완성되어야 할 역사가 완결이 되어야 끝날 죽음이었다. 잃어버렸던 모든 조각.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살았지만 사실은 내내 허전했던, 그 모든 조각이 정한이었다. 그리고 정한은 조각을 모두 채워넣었다. 어쩌면 이 사랑도 온전히 완성될 지도 몰랐다.

 

  모든 필요조건이 충족되었다.

 

  - 조슈지…… 나 알 것 같아.

  - 확신해?

  - 이번에야말로.

 

  정한이 침대를 벗어나며 조슈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 먼저 가서 기다릴게.

 

    조슈아도 이번에야말로 단 하나의 정답을 찾았음을 확신했다. 긴긴 이별이 될 지도 몰랐다. 그러나 끝내는 재회할 사랑스러운 연인을 향해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