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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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궤도

피스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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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품 담당은 한우리시설 업무 중엔 편한 쪽이었다. 애들을 가르치는 건지 세뇌와 학대를 하는 건지 모를 선생들과 섞이지 않아도 됐고, 그렇다고 그 세뇌와 학대를 당하는 원생에도 섞이지 않아도 됐으니까. 행정 일도 하라면 했겠지만 원장은 제 귀한 아들내미가 모두의 눈에 잡일이나 하는 모지리처럼 보이는 걸 싫어하셔서. 보급품 담당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지만.

 

부잣집이고 거지집이고 문제 있는 고딩들 집합소. , 세달 잡아두고 애들 풀어진 나사 조여 주는 시설이 한우리시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한우리시설 원장의 아들로, 시설이 처음 지어진 열한 살 때부터 지수 선생이라는 호칭으로 여기에 머물렀다. 원장은 한우리시설의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니 대학은 알아서 가라는 입장이었다. 그걸 대학만 가면 자유라는 착각으로 버티고 있는 게, 벌써 7년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정정하셨음 좋겠어. 너무 정정하셔서 나한테 한우리시설을 물려준다고 할 일이 절대 없도록.

 

 

"원장님. 저 보급품 사러 갈 건데, 필요한 거 있으세요?"

"나는 늘 쓰는 것들만 있으면 돼요."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요새는 그, 이상한 거 쓰는 애들 없나?"

 

 

보급품 담당은 한우리시설 업무 중엔 가장 저질인 쪽이었다. 부모가 아이들을 맡길 때 남겨둔 돈으로 아이들이 원하는 것들을 일주일에 한 번 씩 사다주는 게 전부인 일이었다. 하지만 삐뚤어진 애들답게 익명이 아닌 신청서에 당당하게도 담배나 콘돔, 성인 잡지나 현금 같은 걸 써내는 게 절반이었고, 나는 그런 것들 보단 지수 선생님 입술이나 동정, 홍지수 마음 같은 것들이 훨씬 무서웠었고.

 

나는 여기 열한 살부터 있었지만, 여기 들어오는 애들은 항상 열일곱과 열여덟, 열아홉이었거든. 제 귀한 아들내미가 모지리처럼 보이는 걸 싫어하시는 원장이 '지수쌤 지금 입고 있는 팬티 주면 여기 3년도 있을 수 있음 앙'이라 적힌 보급품 신청서를 본 게 내가 열다섯 살인 해였다. 그걸 쓴 남자애는, 그 날 팬티 바람으로 오리걸음을 오십 바퀴 돌아야 했다.

 

그렇게 보급품 신청서 오기재 명단이 생긴지 3년이나 됐는데, 그게 원생들에게 겁이 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오기재 명단이 안 올라온 지 꽤 된 것 같아서."

"걱정 마세요.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막 새로 들어온 원생 이름 세 글자를. 그것도 내가 직접 써서 오기재 명단에 올릴 줄은, 죽어도 몰랐지.

 

 

 

 

편향궤도

윤정한

홍지수

 

 

 

 

원생과 마주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담배나 술, 화투나 콘돔을 써낸 보급품 신청서는 자연스럽게 무시하면 그만이었고 너무 높은 금액도 당연히 안 되고, 아령이나 운동기구는 자칫하면 무기가 될 수 있어서 살 수 없었다. 종종 엄마 편지나 가족사진을 쓴 애들을 보고 있자면 있을 때 잘하지 싶다가도 혹시 모르는 마음에 한우리시설 홈페이지의 원생에게 메뉴를 들어가도 역시나 게시판은 텅 비어 있었다. 결국엔 들어줄 수 있는 거라곤 몇 가지 과자나 주전부리, 스타킹이나 다이어리 같은 거였다.

 

그렇게 정리 된 보급품은 매주 월요일 오전에 사러 나가고 오후에 텅 빈 기숙사에 순서대로 배급한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쉬운 일이 맞았거든. 어려울 거 없고 판단하기 쉽고. 또래라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오케이, 선심 쓰듯 줄 수 있는 것들. 종종 괴롭히던 곳에서 도망쳤음에도 여기서 같은 괴롭힘을 당하는 애들이 속옷 같은 걸 적어 내면 보급품을 배게 아래 넣어놔서 더 이상 뺏기지 않게 해두었고, 종종 반입 금지인 핸드폰을 어떻게든 들고 들어온 애들이 적어 내는 이어폰도 굳이 신경쓰지 않고 사다줬다. 음질은 구렸겠지만.

 

이 외에도 식사 시간이나 쉬는 시간엔 가끔 원생들을 마주쳤지만 잠깐 뿐이었다. 여자 애들이 식사로 나온 요구르트 같은 것들을 다용도실로 종종 가져다 줬지만 그게 다였거든. 선생들이야 말 할 것도 없고. 그러니까 이런 적이 처음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엊그제 막 들어와 첫 보급품 신청서를 작성한 윤정한 원생. 그리고 신청 물품이 혼자 파악하기엔 되게 애매한.

 

나비넥타이.

 

 

"안녕하세요! 다용도실 불려가는 원생 처음이라고 애들이 엄청 신기해하던데요."

"이거. 원생이 쓴 거 맞아?"

"? 아아. 그런데요?"

"나비넥타이라고 쓴 거, 맞다고?"

"!"

 

 

불량 학생은 아니었다. 원래 문제 있는 애들은 이틀 안엔 일이 터져도 터지거든. 그런데 윤정한 원생은 그런 게 없었다. 다용도실에 타고 타고 들어오는 소문 중에 윤정한에 관한 건 잘생겼다, 정도. 진짜 그게 다였다. 밖에 있을 때 한 따까리 한다거나, 아님 뭔가 문제가 있었거나. 그런 게 전혀 없었다.

 

한우리시설엔 부모가 문제여서 보내지는 애들도 있었거든. 사채나 도박 빚에서 자식만은 지키겠다고 시설을 피신 목적으로 찾아오는 부모도 여럿 있었다고. 아님 초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몇 번을 학교를 옮겨도 계속 왕따를 당하거나, 심지어는 스토킹을 당하는 애들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그러니까 더더욱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거다. 대체 왜? 무슨 사연이 있어서 여기에 나비넥타이를 써낸 거냐고.

 

뭐가 문제냐는 눈빛이 더 황당했다. 첫째로 시설에서 필요한 물건이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학생한테 필요한 물건이냐면 진짜 아니었고. 한우리시설은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교복이 없었는데, 교복이 없단 말은 나비넥타이를 매달 셔츠가 없다는 거였다. 이게 안 이상하다고 하면 문제 있는 거야. 그렇지?

 

 

"근데 애들이 쌤한테 지수쌤이라 부르던데, 우리랑 동갑 아니에요?"

"맞는데 난 원생이 아니니까. 이건 원장님께 여쭤보고 어떻게 할 지 말해줄게."

"왜요?"

"뭐가 왜요?"

"애들 진짜 심하던데. 친해지면 그런 장난도 안 칠 거 아니에요."

"오지랖은."

 

 

친해진다. 그런 적도 없던 건 아니었다. 형아들, 누나들. 누군가를 나를 지켜주기도 했고 누군가는 나를 정말 아끼기도 했거든. 근데 문제가 있지. 그 사람들은 절대, 여기 평생 안 있거든. 눈물로 보낸 내가 있었고, 눈물로 떠난 그들이 있었다. 그게 몇 년 반복되면 말이야. 누가 오고 가는 게 되게 아무렇지 않아지거든. 그리고 누구랑 친해진다고 장난이 줄지도 않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친해지더라도 너랑은 안 하구 싶다.

 

 

"만약에 원장님이 된다고 하면 같이 사러 가도 돼요?"

"무단 외출 안 되는 거 모르니?"

"쌤이랑 같이 가는 건데요, . 색이나 원단 같은 거 어떻게 고를 건데요. 안목 좋아요?"

"좋겠니. 나가, 이제."

"언제 갈 건데요."

"벌써 아홉시니까, 한 시간 있다가? 그 전엔 말해줄게."

"알았어요."

 

 

학대만 안 당하지 나도 너네랑 똑같이 갇혀 사는 처지인데 무슨. 사실 원장님 허락 같은 거, 필요도 없다. 원장님이 그 보급품 하나 하나를 검사했다면 속옷도, 이어폰도 사지 못했을 걸. 소지품 검사를 하다 걸린 애들이 있었을 텐데도 늘 그냥 넘어갔었다. 이게 원장 자식이라는 특혜이고 저주였지. 나비넥타이 그거 하나 못 사겠어. 그냥 궁금한 것뿐이었다. 결국엔 이게 왜 필요하냐는 질문은 못 했지만. 왜 못했냐면, 얘도 어차피 몇 달 뒤면 나갈 건데 내가 그걸 궁금해해서 어디에 쓸 건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확 들더라고.

 

그리고. 원장님 허락이 필요 없단 말은 무슨 말이냐면 사도된대, 그런데 나가는 건 안 된대. 아니면 사지 말래. 그런 말을 다시 이 원생에게 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진짜 내가 원장님한테 물어보고 대답을 얻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말이다. 왜냐면 보급품이란 건 누군가에겐 필수품이고 생존품이기도 했거든. 결과에 대해 최대한 빨리 얘기해주는 건 내 책임감이었다. 이 시설에서 지내면서 유일하게 성장한 책임감.

 

색이나 원단. 진짜 알기나 하겠니.

 

내가 있는 다용도실에서 원장실로 가는 데에 십 분. 원장님이라면 이 시간엔 행정 실장을 달달 볶고 있겠지. 늘 원장한테 깨지면서 원장 아들인 나는 안쓰럽게 생각하는 행정 실장은 그 분위기를 내가 깨주면 내게 슬쩍 웃어 보일 거다. 그리곤 원장님께 아버지 저녁은 나가서 드실까요 하면서 진짜 해야 하는 말은 하지 않고 원장실에 들어갔단 행동만 남긴다. 그럼 원장님은 오늘 원내 식당 석석이 괜찮더라 하시겠지. 원장실에서 원생실, 그러니까 교실까지 가는 게 또 오 분. 그리고 막 수업인지 세뇌인지 모를 걸 하는 교실 안을 슬쩍 보면.

 

한 자리가 비어 있다.

 

 

"문제아가 맞는 건지, 아닌 건지."

 

 

사실 한 자리만 비어 있는 건 아니었다. 제 아무리 한우리시설이라 해도 막 나가는 애들을 어떻게 잡겠어. 그걸 반 포기한 선생이 있고 그거에 분노하는 선생도 있고, 그걸 바로 잡으려고 하는 선생이 있는데 아마 새 원생은 눈치가 좀 빠른가 보다. 반 포기한 선생 수업을 짼 거니까.

 

말해준다고 했는데. 알았다고 했고. 그럼 잠자코 기다려야 되는데 자리에 없다. 나는 새 원생을 찾으러 한참 돌아다닐 시간이 없고, 사실. 좀 바보된 것 같아서 어이도 없고.

 

어쨌거나 보급품을 사러 나가는 건, 정말 좋았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게 얼마나 귀한지 몰라. 오늘만큼은 날이 흐리던 구리던 도로가 시끄럽던 고요하던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다짐한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면허를 따야지. 그래서, 영영 이곳에서 벗어나야지. 지금 하는 이 외출들이 스무살 후에는 모두 일상이 되게 해야지.

 

 

"여긴 시설 아니니까 친구해도 되지?"

"너 뭐야?"

"지수 쌤, 이를 거야?"

"반말하지 마, 이 자식."

 

 

문제아가 아니라 이거 그냥 여태까진 없던 유형인데. 문지기라고, 한우리시설에서 진짜 조폭 같은 사람 있거든. 무단 외출을 제일 경계하는 한우리시설 원장한테 제일 믿음을 주는 사람. 무단 외출을 시도한 애는 많았어도 성공한 애는 아무도 없었다. 1단계는 무작정 탈출. 문지기에게 창피를 당해야 정신을 차리더라고. 2단계는 나. 어떻게든 구슬려서 어떻게든 나가려는 애들. 걔넨 안타깝게도 보급품 신청을 안 했는데도 오기재 명단에 올랐었다.

 

그런 애들은 특징이 있었다. 멍청했고, 무모했고, 착각에 빠져 살았거든. 나를 뭐든 할 수 있는 구원자로 착각하거나, 아무것도 못 하고 금방 빌빌대는 멍청이 일거라고 착각하거나. 새 원생은 멍청하거나, 무모하거나, 착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 시내에 나와 있는 걸까. 마치 나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것도 목에 아주 검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왜애. 친하게 지내자. ? 안 이를 거지?"

"난 일른 적 한 번도 없어. 지들이 다 걸린 거지."

"그럼 됐네."

". 그 나비넥타이. 왜 산 거야?"

 

 

새 원생은 씨익, 하고 웃는다.

 

 

"결혼식에 가야하니까."

"?"

"초대해 줄까? 3주 뒤인데."

 

 

남들이랑 다른 거. 정말 맞다. 남들이랑 다르게, 미친놈이다. .

 

 

 

*

 

 

더 있고 싶어도 못 있는 곳이 한우리시설이었다. 한우리시설에서는 사이비 같은 식의 교육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군대나 교도소 같은 교육도 아니었다. 대신 희망을 줬지. 여기서 나갔을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는 거였다. 그리고 여길 나가기 위해서 잡아야하는 목표에 관해 알려줬고. 처음엔 콧방귀를 뀌던 애들도 그 희망에 무너지더라고. 그렇게 진짜 부모가 말해둔 날. 그러니까 퇴소 예정일에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애들이 있었다. 거의 그랬지.

 

하지만 퇴소 예정일에도 도저히 갱생이 안 되는 애들이 있다. 그럼 부모가 한우리시설에 입금을 더 해. 그럼 여기 더 있어야 되거든. 그게 진짜 지루해 미칠 것 같은 애들은 그 때부터 바뀌기 시작한다. 두 번째 퇴소 예정일엔 그런 애들이 나가게 된다. 만약에 그 때도 정신 못 차리고 있으면 또 남겨지는데, 그 때부턴 진짜 여기 평생 있을 수 있겠다고 위기를 느낀 애들이 변하기 시작한다. 세 번째 퇴소 예정일 넘긴 애는 여태까지 아무도 없었다. 부모가 데리러 오기로 한 날, 오지 않는 일도 꽤 많이 있었다. 그래도 원생은 한우리시설에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새 원생은 나비넥타이를 사러 나온 걸 걸리지 않았다. 나비넥타이를 애들에게 보여주고 다니지도 않았다일주일에 한 번 하는 소지품 검사에서 들키지도 않았고. 도대체 방법은 모르겠지만 새 원생에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마치 내가 그 날 꿈을 꾼 것처럼. 하지만 아직도 보급품 신청서를 정리해둔 파일철엔 새 원생의 이름으로 나비넥타이가 쓰여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고, 다만 새 원생의 보급품 신청서에는 또 개떡 같은 물건이 써 있었다.

 

 

"정장 구두, ."

 

 

신경 쓰려고 하지 않았다. 결혼식이란 얘기를 듣고 오만 상상을 했지. 그냥, 가야하는 결혼식일 수도 있잖아. 그러나 그냥 가는 결혼식엔 아무도 나비넥타이 같은 거 안 한다. 어떻게 열여덟 살에 결혼을 한다고 하지. 하지만 못 믿을 건 아닌 게 밖에서 중학교때부터 만나거나 만난 지 하루 이틀 된 여자친구 사이에 애기를 가졌다고 해도 할 말 없는 얼굴이긴 했잖아.

 

새 원생이 써낸 보급품 신청서를 뒤집는다. 먹지의 단면엔 이따금 검은 먼지가 섞여 있었다. 하나하나 써 본다. 처음부터 하나 하나. 윤정한이 입소한 날. 이건 아니고. 입소식을 따로 하지 않는 한우리시설에서 옷과 생활용품을 받던 날. 이것도 딱히. 처음 보급품 신청서를 낸 날. 아니고. 처음으로 얘기한 날. 의외로 여기도 아니고. 시내에서 만났을 때. 아니, 아니다. 윤정한이 입소한 날, 그 위에 하나를 더 적는다. 윤정한이 검은색 차에서 내렸을 때. 그래. 그 때부터였네. 그 때부터 새 원생이 신경 쓰였다.

 

아니. 좋아했다.

 

 

"지수 쌤! 이번에도 나 찾으실 것 같아서요."

"너 정말 제정신 아니네."

"제정신 아니죠. 구두 사이즈를  안 적었더라고요."

"니 발 사이즈 알고 싶지 않아."

 

 

사실은 처음엔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외모가 없었거든. 새 원생이 입소하고 나서 귀찮고 어이없기만 한 보급품 신청서 란에 내 이름과 새 원생 이름이 비슷하게 나올 정도로. 그러니까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냥 둔 거였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든 말든. 정리하고 나니깐 너무 확실해진다. 흘끔흘끔 쳐다볼 수밖에 없던 내 시선과 보급품 신청서에 쓰여 있는 윤정한 번호가 나도 궁금해지던 마음, 그런 것들이. 애초에 보급품 신청서로 희롱 당하는 와중에 적수가 생겼다고 라이벌로 생각할 리가 없지.

 

근데 내가 그랬잖아. 여긴 한우리시설이라고. 주기적으로 사람이 들어오고 비주기적으로 사람이 나간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건, 어쨌든 나간다는 거였다. 어쨌든. 그러니까 새 원생도 다를 게 없었다. 좋아하면 뭐 해? 어차피 나갈 애를. 얘 퇴소 예정일이 언제더라. 그래. 그 결혼식 즈음이네. 어련히 상상 되지 않아? 막무가내로 책임지고 결혼하겠다는 애를 안 된다고 갈라둔 거지. 양가 부모든 새 원생 부모든. 기를 쓰고 말려 보려고 하는 거야. 새 원생은 그 기를 꺾겠다는 거고

 

 

"이거."

", 이거 설마 그 오기재 명단?"

"이상한 거 써 내지도 말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오는 거, 궁금하지도 않은 거 말해주는 거. 더 싫어."

"나 여기 들어와서 협박하는 선생님 처음 보는 거 알아요?"

"내가 선생 같니? 나가."

 

 

그래. 몇 번이나 있었다. 좋아하는 감정, 그것도 남자. 첫 번째 형은 퇴소 예정일에 텅 빈 문 앞에서 문지기에게 끌려갔다. 시설에서 나한테 제일 잘 해주던 형이었다. 처음으로 잘 해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 형은 밖에서 사고를 너무 많이 치고 다녀서 한우리시설에 입소했다. 한 마디로 완전 날라리. 근데 나한테는. 나한테만큼은 그 험상궂은 손으로 만날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리고 문지기에게 끌려갔지. 그 땐,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졌단 게 슬프다기보단 그렇게 사람이 사라진다는 게 무서웠었다.

 

 

"저 사이즈 265예요. 지수쌤."

"오리걸음이 그렇게 좋으면 뭐."

"아아, 잠깐! 잠깐! 죄송해요. 미안, 미안."

", 나와."

"오리걸음 진짜 싫어해. 진짜, 진심으로."

 

 

두 번째 형은 왕따였다. 안경이 부러졌다고 안경을 신청하려고 했는데, 보급품 신청서도 안 보여서 다용도실로 직접 찾아왔었는데 그 안경이 없어진 얼굴이 잘생겼었거든. 이게 소설로만 보던 바로 그 상황? 하면서 얼굴이 붉어졌었고, 보급품을 원생을 베개 밑에 몰래 챙겨주는 걸 시작하게 된 이유였었다. 결국 여기서도 왕따 당한단 걸 알게 된 부모가 노발대발을 하면서 얼른 데리고 나갔다. 그래도 그 형은 나가는 날 울고 있는 나를 찾아와서 그 동안 고마웠다고 말하긴 했었다. 다시 안경을 쓴 얼굴이 영 볼품 없었어서 눈물 흘린 게 후회될 정도로 마음을 금방 접었지만.

 

 

"안 물어본 거 말하지 마."

". ."

"안 부르면 오지 마."

"."

"이상한 거 그만 써."

"."

 

 

세 번째는 동생이었다. 아마 새 원생이 오기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 얘는 동성애자라 한우리시설에 들어온 애였다. 이미 엄청 맞은 채로 입소했는데,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너도 남자 좋아해? 첫 연애였고 상대가 나보다 어린 애라 엄청 휘둘릴 거 각오하고 말한 거였다. 근데 뭘 해 보기도 전에 나갔다. 이유도 모른다. 퇴소 예정일보다도 훨씬 빨리 나갔거든. 눈 뜨고 일어나 보니까 원래 없던 애처럼 사라져 있었다.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연락을 안 받았으니까. 그 누구도.

 

 

"왜 대답 안 해?"

"아니이. 쫌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금 너무한 게 나야? 너지."

"내가 뭘."

"내가 뭘? 내가 뭐얼?"

 

 

동갑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 못 했다. 그것도 여태까지 좋아해본 사람 중에, 아니 여태까지 시설에 들어온 사람 중에 제일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그러니까 그게 문제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고, 운이 좋아서 사귀게 되더라도 그 사람은 여기 있을 수 없다. 네 번이면 충분하지. 멍청하게 감정이 흘러가도록 둘 순 없다. 접어야지. 아주 꼭꼭 접어야지. 그런데 꼭꼭 접을수록 잘라내는 게 힘든 걸 안다. 그래도 어쩌겠어.

 

어차피 한우리시설의 궤도를 도는 미성년자는 나 하나로 유일하다니까.

 

 

"나비넥타이도 안 사줬잖아. 구두는 좀 사주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리고 나비넥타이는 사주려고 했어."

"나비넥타이는 되는데 왜 구두는 안 돼?"

 

 

끊고 살면 그만이었다. 첫 번째 형, 두 번째 형, 세 번째 동생. 아직도 내가 좋아하겠어? 기억 하는 것도 일, , 삼이라서지 별 이유도 없다. 그냥 조용히 있다 퇴소 소식 들리면 잠깐 우울하고 눈물 짜면 그만이라니까.

 

게다가 얜 결혼까지 한대. 다른 것도 아니고, 결혼! 애도 있을 수 있다니까? 그것도 신생아.

 

 

"우리 시설에선 만 원 넘어가는 거 안 사줘. 됐지?"

"아아, 진짜?"

"너 근데 진짜 자꾸 말 깔래?"

"지수쌤. 나 왜 이렇게 싫어해. 난 지수쌤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이 반말을 듣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다. 원래 내가 사랑에 좀, 약해서. 사실 사랑이 아니라 이렇게 잘 생긴 애한테 약해서. 한숨을 쉬고 오기재 명단을 내려놓는다. 안심했다는 듯 웃지 않는 얼굴이 정말 사람 착각하게 만든다. 얜 팔자에 게이가 없어. 사실은 한우리시설도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닫혀 있는 다용도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애가 먼저 찾아와서 오로지 단 둘이 있는 상황, 아무도 나를 선생 취급 안 하는 이곳에서 꾸역꾸역 지수쌤이라고 장난스럽지 않게 부르는 목소리나 친해지고 싶다는 분명한 호감. 신경 쓰이는 만큼 간질거리는 마음.

 

 

", 나 근데 진짜 필요한데."

". 근데 진짜 안 돼. 애초에 저번엔 운 좋아서 무단 외출 안 걸린 거라고 생각 안 해?"

"운 좋아서 안 걸린 거 아닌데? 난 안 확실한 건 안 해."

"무슨 자신감이야."

"근데 아껴뒀다가 결혼식 날 써야지. 무단 외출 하고 싶으면 말해, 지수쌤한테는 알려줄게."

 

 

여기 몇 년을 있었던 나한테 무단 외출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한다. 웃겨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얘 때문에. 내가 진짜 웃긴 건, 그게 진짜 궁금한 내 스스로가 진짜. 얼마나 감겨 있는 거야, 얘 한테.

 

 

"너네 아부지. 원장님. 신발 몇 신어?"

"그것도 안 들킬 것 같아?"

"잘 하면."

"참 나. 갖다 줄게. 대신 나도 초대해 봐."

"?"

"결혼식."

 

 

무단 외출, 그게 하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다.

 

 

 

*

 

 

기본적으로 원장님은 날 찾지 않았다. 애초에 월요일 보급품 관련 업무가 아니라면 내가 공부만 한다는 걸 너무 잘 아시니까. 그거면 충분했다. 지원 없이 오로지 내 힘으로 자유를 취할 수 있도록 한다는 거. 솔직히 누가 봐도 학대지만.

 

사실 생각은 몇 번이나 했었다. 특히 첫 번째 형. 따라가고 싶었거든. 쓰다듬던 손길이 잘생겼어서. 문지기에게 끌려간 형을 어떻게든 찾으려면 찾았을 거였다. 그걸 아는 순간 한우리시설에서 보급품 담당을 맡으며 원장 아들로 지내는 것도 끝날 거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나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여기서 절대 나갈 수 없단 거. 어느 정도냐면, 라푼젤 정도. 라푼젤은 몇 살 정도에 탈출했더라.

 

 

"갈까요?"

"구두 엄청 크네."

"이 정도면 간지죠."

 

 

확실한 건 새 원생은 왕자도 도둑도 뭣도 아니라는 거다. 새 원생은 그 이후로도 셔츠와 멜빵을 적어 냈다. 보급품을 사러 나가는 걸 따라 나오지 않았고, 시설에서도 실수나 사고 하나 없이 조용히 지냈다. 대신 다용도실에 눈에 띄지 않게 찾아와 반말을 했고, 정확한 날짜를 말했고, 정확한 시간을 말했고, 심지어는 내 드레스코드까지 정해줬다.

 

복장은 늘 단정하게. 원장님이 중요시하는 덕분에 새 원생이 정해준 드레스코드는 일요일 9시의 무단 외출에서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았다. 윤정한은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왁스인지 스프레이로 앞머리를 올렸고, 흰색 셔츠에 나비넥타이와 검은 멜빵을 차고 한우리시설의 검은 바지와 원장님의 검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검은 멜빵 아래엔 한우리시설의 어떤 곳에서 꺾은 작은 꽃송이 몇 개를 끼워 놨다. 저런 걸 부토니에라고 하던가. 모르긴 몰라도 얜 엄청 눈에 띄었다. 도대체 어떻게 무단 외출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난 정문으로 나갈 거야. ?"

"지수쌤 너무해요오. , 이래서 무단 외출 어떻게 하는 건지 안 물어봤구나?"

"넌 맨날 나한테 너무하대. 구두 훔친 거 들키면 넌 하여튼 각오해."

"흐흐. 이따 식장에서 봐요. 오늘 잘생겼어요, 지수쌤!"

 

 

참 나. 니가 더 잘생겼거든.

 

새 원생은 꽤 들떠 보였고, 헐떡이는 구두로도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일요일의 한우리시설은 자유 시간을 갖는다. 대부분이 고꾸라져 자는 애들이고, 남은 애들은 축구나 족구를 했다. 아님 어디서 담배 피고 있겠지. 나는 꽤 절망적이었다. 진짜 새 원생의 결혼식을 눈앞에서 보는구나. 궤도를 돌다 네 번째로 만난 애의 뒷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하는구나. 하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다. 이 날을 위해서 해야 할 거짓말을 여섯 개는 준비해 뒀고, 이 날을 위해서 내가 포기해야할 것들엔 전부를 걸었다.

 

당당하게 정문으로 걸었다. 문지기는 오늘이 월요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했다.

 

 

"원장님이 급하게 필요한 게 있으시다고 해서요."

", . 얼마나 걸리십니까?"

"보급품도 살 수 있는 건 미리 사두려고요. 평소랑 비슷할 것 같아요."

 

 

문지기가 무전으로 원장님께 확인해본다고 할 걸 대비해서 원장님 무전도 꺼뒀다. 나 사실 사랑에 약한 게 아니라 사랑에 미친 거 아닐까 싶어. 하지만 문지기는 옆으로 비켜선다. 운동장에서 놀던 애들이 힐끔힐끔 보는 게 느껴졌다. 저 중에 하나가 저 사람은 왜 나가냐고 따져 묻고, 그게 원장님 귀에 들어간다면 어쩌지. 하지만 원장님께 그 얘기가 들어가고 문지기의 말을 듣고 날 찾기 시작한다면 난 이미 결혼식장에 도착해 있겠지. 그럼 됐다.

 

사실은 엄청 흥분됐다. 결혼식장을 핑계로 영영 한우리시설에서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돈이야 어떻게든 벌면 되고, 하다못해 두 번째 형을 어떻게든 찾아서 며칠만 재워달라고 할 생각도 있었다. 알바를 한다면 어떤 게 적성일지도 생각해봤다. 별로 없긴 해도, 뭐든 하면 할 수 있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발걸음이 빨라졌고, 빨라지다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도 지금 당장 멈춰서 돌아가야 한다고, 돌아가서 원생 한 명이 무단외출을 했다고 말해야 한다고. 그런 생각이 피어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달렸다.

 

이 궤도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해서.

 

 

"지수쌤, 뭐야. 괜찮아요?"

"뛰느라, 버스정류장을 지나쳐서, 늦었어."

"어우. 그러게. 머리 다 흐트러졌어요. 못 오는 줄 알고 조금 쫄렸네. 으하하."

"하아. 미안."

"미안할 게 뭐 있어요. 2층 그랜드 홀, 알죠?"

"?"

"나느은. 입장 준비 해야지."

 

 

결국엔 그 복장이 다 흐트러질 정도로 뛰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누가 날 잡으러 올까봐. 그리고 첫 번째 형이 끌려갔던 거기로 데려갈까 봐 다시 달려야 했다. 중간에, 그 다음 버스 정류장에서 운 좋게 만난 마을 버스 안에서는 조금 울기도 했으니까 얼굴이 말이 아니긴 하겠지. 한우리시설에서 15분 정도 걸어서 30분 간격으로 오는 마을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버스를 타야 올 수 있는 이곳에서, 새 원생은 뒤돌아섰던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맞이했다.

 

새 원생을 만난 게 건물 뒤편인 것과 씩 웃는 얼굴이, 어딘가 이상했지만 뭔가를 물어볼 겨를도 없이 새 원생은 나를 보챘다. 결혼식장은 붐볐다. 결혼식장에 온 건, 처음이었다. 어쩌다 원장실에 있는 티비를 흘끔흘끔 봤을 때 몇 번 스쳐 지나간 기억은 있었어도. 전부 다 차려 입고 표정엔 축하만이 가득했다. 그건 어쩌면 끔찍했고 어쩌면 황홀했다. 그 묘한 기분에 홀리고 취해 2, 그랜드홀. 열린 문으로 들어가 뒷자리 앉는다.

 

그런데 진짜 이상한 게 뭔 줄 알아?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신랑 윤진철님과 신부 박선우님의 예식을 거행할 예정이오니, 내빈 여러분께서는 식장 안으로 입장하셔서 앞쪽부터 자리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예식장 어디에도 윤정한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

 

화환에도, 팻말에도, 하객들의 대화에도, 사회자의 대본에도 윤정한 그 세 글자 이름이 없다. 윤이라는 글자는 있지. 있긴 하지. 두 눈을 깜빡여도 머리에 제대로 된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건 새 원생이 날 제대로 멕이려고 내 무단 외출을 꼰질렀거나 새 원생이 누군가의 결혼식을 제대로 망치려고 하는 거 같은데, 둘 중에 하나만 맞아도 이건 그야말로 뭐 된 게 틀림없다.

 

나 어떡해.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돼. 새 원생에게서, 지금이라도 도망쳐서 내 원래의 궤도로 돌아가야 될 것 같애.

 

 

"아아.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 아시죠?"

"윤정한?"

"울 아부지 결혼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아직 신부 되실 분이 제 존재를 모르더라구요! 윤진철 씨가 울 아부지거든요? 나중에 울 아부지 고소 당할까봐 제가 미리 알려드리려고 이렇게 어려운 으아악, 아부지이!"

 

 

순식간에 입이 떡, 벌어진다. 어쩐지. 입소 날 그렇게 분위기 좋은 부자가 없더라고. 좋게 좋게 얘기가 된 거지, 그건. 이 아버지 연애 사업 성공할 때까지만 조용히 거기서 지내라고. 그러니까 새 원생이 불량배도 사채 빚에 나앉은 부모 아들도 아닐 수밖에. 새 원생은 얼굴이 터질 듯 빨개진 윤친철 아저씨에게 목덜미가 잡혔다. 들고 있던 마이크로 이 놈의 자식에게 주먹질을 하려던 찰나보다는 신부의 싸대기가 더 빨랐다.

 

아마 모든 하객의 표정이 똑같지 않을까. 이걸, 이걸 내가 좋아한 네 번째 남자애가 벌인 짓이라니. 오 마이 갓. , 그럼 결혼할 여친도 결혼해야할 이유인 애기도. 없는 거지? 나 정말 미친 것 같다. 들숨에 자괴를 날숨에 기대를 품는 내게 무대에서 도망쳐 내려온 새 원생이 뛰어 온다. 그리고 그 상태로 나를 잡고 달리면, 내가 더 이상 새 원생 향한 마음을 접는 궤도가 끊어지고 만다.

 

혼자 달릴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야 했다. 그랜드 홀에서 단숨에 계단을 타고 내려가 건물 뒤편으로 빠져 골목길로 들어가 빈 상가의 문을 닫을 때까지.

 

 

"으아! 으아, . !"

 

 

이래서 오리걸음은 죽어도 하기 싫어한 거구나. 오늘 있는 힘을 쥐어짜서 달려야 하니까. 나처럼 머리와 옷이 모두 흐트러진 새 원생. 그리고 함께 숨을 고르는 나. 우리는 몇 분이나 피맛이 나는 침을 삼키거나 뱉었고, 흘리다가 닦았다. 비실비실 웃음이 나기 시작할 때에 드디어 둘 다 미쳤구나, 싶었다.

 

 

"지수쌤, 일어나자. 다음 미션은 무단 외출 안 걸리기야."

", 못 일어나. 미친놈아."

"으하하하. 사실 나도."

 

 

무단외출이고 뭐고, 한우리시설은 이제 뒤집힐 일만 남았다. 원생 하나를 관리 못 해서 여기 들어오게 한 이유를 없애버렸다. 이런 일은 7년의 역사 중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원생을 원장의 아들이 도왔다.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그 애가 필요한 걸 사다줬고, 들키지 않게 입을 다물어줬다. 문지기를 속이고 원장의 구두까지 훔쳤다. 한우리시설이 아니라 내가 뒤집힐 일만 남은 거구나.

 

그리고 새 원생은 윤정한으로 돌아가겠지. 돌아가서 뒤지게 맞거나, 호적에서 파이거나, 뒤지게 맞아 죽겠지. 어쨌거나 원생으로 남아 있더라도 보급품 신청을 할 일은 두 번 다시는 없을 게 분명했다. 나는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서 그 안에서 죽어가야 할 텐데.

 

 

". 진짜 미친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 아부지 결혼식을 망쳐서?"

". 진짜 미친 것 같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뭔 소리야.

 

 

"이런 걸로 파혼 안 해. 그 아줌마도 내 존재 알거든. 아부진 결혼식만 잘 넘기면 데리러 온다고 했지만 그 아줌마가 준비되기 전까진 나 가둬둘 거야. 아마 마지막 발악쯤으로 생각할 걸. 오늘은 나 죽이려고 했지만 내일부턴 나한테 미안해서 보러 올 낯짝도 없어. 울 아부진."

"너랑 관련된 사람은 다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다. 내 생각에는."

"됐고, 이제 드디어 한우리시설에 마음 놓고 쳐박힐 시간이다."

"아니. 왜 거기에 마음 놓고 쳐박혀?"

". 왜겠냐?"

 

 

새 원생은 처음으로 나를 야, 하고 부른다. 하지만 그 표정만큼은 너무 다정해서 나는 더더욱 미궁으로 빠진다. 나는 그렇게나 도망치고 싶었던 거기를 왜 너는, 그렇게 가고 싶은 걸까. 여태까지 한우리시설에 남고 싶다고 하는 애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나조차도 남고 싶지 않은 곳이라니까. 감을 못 잡는 내 얼굴을 보고 새 원생은 작게 웃음 짓는다. 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다시 한 번 쓸어 올린다.

 

그리고 새 원생은, 아니 이제 한우리시설에 처박히게 될 윤정한은 멜빵에 아직도 남아 있는 말도 안 되는 부토니에를 꺼내 손에 쥔다.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보고만 있으면 그 작은 꽃줄기들은 내 귀 위에 꽂혀 자리를 잡는다. 이게 지금 뭐하는 미친 짓인가 싶다. 다른 게 아니라 그 땀범벅인 풀린 눈을 한 얼굴이, 미치게 잘생겼거든.

 

 

"내가 울 아부지 닮아서, 사랑에 좀 미쳤거든."

"윤정한."

"첫눈에 반해서 머리 굴리느라 죽을 뻔 했다. 그니까 앞으론 머리 비우고 그냥 너랑 놀게."

"안 되는데."

"?"

 

 

백 년을 주기로 돌아오는 공전궤도가 있다더라고. 근데 나는 백 년을 살지도 않았는데, 이상하지. 지금 방금 딱 이 순간에 나랑 똑같은 궤도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백 년이 아니라 천 년 만에.

 

그래. 이제 생각해보면 그렇다. 내가 외면했을 뿐이다. 나를 보는 눈과 다른 선생, 다른 원생을 보는 눈이 다른 윤정한을. 나를 대하는 태도와 다른 선생, 다른 원생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윤정한을. 내가 선생이었든 원생이었든 원장의 아들이었든 아니었든, 나를 나로 보고 있는 윤정한을 알고도 모른 척 했다. 팔자에 게이가 없었다니까, . 날 보려고 늘 지나치던 시설 복도와 그래서 만났을 때 짓는 웃음과 윤정한이 오고 서서히 줄기 시작한 보급품 신청서의 희롱들. 그것들 다. 내가 외면하고 내가 무시했었지.

 

실은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윤정한이 다용도실에 들어 왔을 때 우리의 공기가 어땠는지. 진짜로 윤정한의 결혼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게 무섭더라고. 만약 오늘이 진짜 윤정한의 결혼식이었어 봐. 얼마나 내가 실망했겠어. 정당방위였다. 이건. 근데 내가 하나 딱 놓치고 있었다.

 

 

"너 머리에 힘 엄청 줘야 될 걸. 내가 너 더 미치게 할 거라서."

 

 

사랑엔 나만 미친 게 아니라는 거.

 

먼저 겹치도록 다가선 건 내 궤도였다. 그리고 날 넘어뜨린 건 윤정한이었다.

 

 

 

그저 그대가 좋으니

사랑할 밖에

그저 그대가 사랑스러우니

 

사랑할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