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에서 윤정한에 대한 평판은 다음과 같았다. 도라이, 루시퍼, 윤복치. 전자는 이전에 있던 회식 자리의 만행에서 비롯되었고, 루시퍼는 소리함에 적힌 <생글생글 웃는 거 보면 천사 같은데 가끔 보면 타락천사였어요> 따위 글에서 유래했으며, 윤복치는 학교 후배이자 지금의 동료인 부승관이 지어줬다. 형은 참 사람 피곤하게 한다니까. 다크서클 내려온 것 좀 봐. 내가 비타민 좀 챙겨 먹으라고 했지. 내가 한두 번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 쓰러져서 발견되면 가만 안 둬! 이딴 잔소리 들을 때면 정한은 승관의 머리칼을 마구 흩뜨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똑같은 패턴의 대화가 멎으면 둘은 촌스러운 감색 유니폼과 점퍼를 입고 주머니에는 핫팩을 넣고 야외로 향했다.
윤정한은 놀이공원에서 캐스트로 일했다. 그의 직장은 늘 환상, 모험, 신비를 표방하는 대기업 소유 놀이공원들과는 차이를 두었다고 늘 말했다. 분기별로 유익한 테마를 선정해 놀이공원 구석구석에 지식을 심어 두는 식이었다. 유명 테마파크들이 봄이 되면 튤립 축제를 열고 겨울이 되면 눈꽃 축제를 열듯이 이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새로운 지식이었다. 어린이의 꿈과 희망 그리고 학습 효과까지 신경써 학부모들의 지갑을 유혹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노는 건 노는 거고 공부는 공부지. 그건 학습만화가 더 유용하지 않아? 아니면 요즘 애들 유튜브 많이 보던데. 승관아 안 그러냐?
윤정한은 그 되도 않는 컨셉질에 회의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아이들 앞에서는 미소 방긋방긋 지었다. 놀이공원 일은 늘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방문객들은 반짝거리는 얼굴로 왔다가 갔다. 그러나 거기 상주하는 윤정한의 얼굴은 늘 피곤에 잠겨 있었다. 정한은 종종 자신이 알 나간 전구마냥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적성에 아주 맞지도 아주 안 맞지도 않은 일. 그러나 세상 일이 모두 그렇다는 생각을 하면 예민하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무엇보다 관람차에서 내리는 환한 미소를 보면, 신나는 비명과 가끔의 울음을 들을 때면 주체할 수 없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 콘셉트는 <우주>라고 했다. 백여 년 만에 돌아오는 혜성을 맞아 기획한 특집이라 했다. 예전에 물리 했다 캐스트 일동 탈탈 털렸던 걸 잊었나? ptsd 눌리는 소식에 먹구름 낀 승관 옆에서 정한도 눈썹을 내렸다. 그래도 우주복 한다고 잠바 두껍대. 이런 소리로 승관을 위로할 뿐이었다.
이 년 전쯤의 일이었다. <낙하>라는 테마로 놀이기구의 과학적 원리를 설명한 표지판을 그 옆에 달아 두었다가 극성 학부모에게 잘못 걸린 적도 있었다. 그때 정한과 승관은 자이로드롭에 있었다. 왜 중력 가속도가 9.8이 아니라 10이라 써 있냐 따위 질문은 물리 교과서 펴보기는 했나 싶은 캐스트들에게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제가 사실 문과였어요... 선생님에게 혼나는 것처럼 승관이 말끝을 흐렸을 때엔 정한이 사태를 수습했다. 입으로는 영업용 미소 눈으로는 살기의 눈빛 장착하고 사장님 저희 놀이기구 탑승 지연되거든요 하면 와 이 캐스트분 정말 잘생기셨네 하고 꼬리를 금방 내렸다. 형 우리 그래도 좀 닮은 거 아니었어? 하는 부승관의 섭섭한 목소리가 꽤 오래 갔었다.
시즌이 바뀌며 정한과 승관은 대관람차에 배정받았다. 오래 있던 직원 몇이 퇴사를 했다는 이유였다. 놀이공원의 꽃. 빠를수록 무섭다는 놀이기구의 명제에 대놓고 당당히 반기를 드는 규모의 물리학. 처음 교육이 끝나고 퇴근할 때 정한은 눈을 빛내더니 승관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배를 누르면 알라뷰 외치는 곰인형처럼 승관이 빽 소리 질렀다.
"아, 형! 제발 할 말 있으면 말로 하라고!"
"승관아, 그거 알아?"
"뭐."
"일본에서는 관람차 정상에서 애인끼리 키스하면 평생 간대."
"형 여기 어느 나라? 한국. 오는 애들 다 초딩이랑 학부모밖에 없는데 뭔 소리야."
"승관이 오늘 많이 피곤하지."
낭만을 몰라, 애가. 정한이 피식 웃더니 앞장을 섰다. 승관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관람차도 잘도 도네 돌아가네. 명랑한 멜로디가 흐르는 동안 둘의 등 뒤로 오색 조명이 하나둘씩 꺼졌다.
우주로의 비행 시작합니다. 이제부터 우리은하를 탐험해 볼게요~ 셋 둘 하나!
가끔은 정한이 외치고 가끔은 승관이 외치면 관람차가 돌아갔다.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철제 프레임이 눈에 띄었다. 이름만 갈아 끼운 우주관람차 개장 3일 차. 이곳은 아이들이 고소공포증을 최초로 체득하는 곳이다. 대관람차는 느릿하게 십여 분 정도에 두 바퀴를 돌다 내려오는 구조였는데, 설레는 표정으로 출발했던 아이들이 급격히 초췌해진 얼굴로ㅡ때로는 엉엉 울며ㅡ 하차했다. 그런 낌새가 보이면 정한은 토끼눈을 하고 아이들에게 달려가 달랬다.
"형은... 이럴 때 보면 다정한인데 나한텐 매정한이야."
승관의 칭찬인지 불평인지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다음 탑승객들을 맞이했다. 멋있는 우주 함장 오빠 내지 형아가 되는 법은 어렵지 않았다. 어른들의 얼굴을 블러칠하면 됐다. 조금만 시끄러워도 자녀들에게 윽박지르는 어른들 얼굴은 페이드 아웃 하고 온전히 아이들의 표정에 집중하기. 아이들도 화내는 엄마 아빠보다는 자기한테 잘해주는 잘생긴 오빠/형아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평일 낮의 놀이공원은 한산했다. 그래도 관람차가 꼭 멈추지는 않을 만큼의 사람은 왔다. 민무늬 얼굴을 한 어른과 빛나는 얼굴을 한 아이들이 하나둘씩 캐빈에 올랐다. 정한은 인원을 커트하려 늘어선 줄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초점을 잘못 맞춘 렌즈처럼 만물이 흐릿해졌다. 익숙한 어떤 얼굴만 빼고. 내가 벌써 노안이 왔나? 눈을 의심하며 다시 한 번 확인해도 동일인이었다. 검은 롱코트에 목도리까지, 단정하면서도 익숙한 차림을 한 사람. 순간 자이로드롭처럼 윤정한의 심장이 중력 가속도 9.8m/s²로 곤두박질쳤다.
홍지수?
6년 만이었다.
6년은 다음과 같이 시각화된다. 윤정한의 머리카락은 금발이었다가 붉은색이었다 검은색으로 돌아온 지 오래였다. 종종 다시 염색을 생각했으나 꼴값인 것 같아 그만두었다. 기장 면에서는 귀찮다는 이유로 묶고 다닐 수 있을 때까지 길어졌다가 꽤 오랜 시간 동안 박박 밀렸다가 다시 깔끔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머리카락이 나이테였다면 한 가닥 뽑아 홍지수의 눈앞에 갖다 댈 자신 있었다.
홍지수를 다시 보게 된다면 그 모양이 깔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정한은 공항에서 입국하는 홍지수의 뒤통수를 갈긴다든가, 타국에서 히치하이킹으로 얻어 탄 차의 주인이 홍지수라는 등의 유쾌한 상상을 즐겼었다. 재회는 드라마 같은 전개일 거라고 생각했다. 장르는 코미디이나 주연 배우 둘은 울고 있는.
그러니 홍지수를 적어도 여기서 만나면 안 되었다. 단지 윤정한이 직원이고 홍지수가 고객이라 화를 낼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홍지수의 해명을 들을 시간이 없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마주친다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우주관람차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즐거운 비행 되세요 따위 소리밖에 할 수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윤정한이 정말로 어린이의 꿈과 희망을 책임지는 학습 테마파크에서만큼은 재회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홍지수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아이를 쳐다보며
딸이야?
라고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의 전학생은 그것이 좋은 뜻이건 나쁜 뜻이건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반복되는 느슨한 일과에 긴장감을 준다는 새로운 자극이라는 점에서 일단 그랬고, 멀게는 내신 경쟁자인지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홍지수는 1학년 2학기 때 전학을 왔다. 다를 게 없어서 날짜도 잘 기억 안 나는 어떤 월요일에 걔는 담임선생님을 따라 교실에 들어왔다.
"안녕. 나는 홍지수라고 해. 늦게 왔지만 반갑고, 잘 지내보자."
간결하고 형식적인 인사말이었다. 처음 봤을 때 정한은 지수가 식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갓 개업한 학원에서 많이 본 것 같은 줄기가 얇은 나무 같은 거.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서 잊히기 쉬운 식물. 더 클 것을 염두에 뒀는지 전학생의 조금 긴 교복 마이 소매가 어른거렸다. 지수는 당시의 정한보다 키가 조금 컸지만 정한이 깔창이 높은 슬리퍼를 신고 다닌 탓에 그 사실은 조금 늦게 알았다.
전학생은 이상한 점이 몇 개 있었다. 인사 안 하면 붙잡고 예의에 관해 설파하던 학생부장 선생님이랑 눈을 또렷이 마주치고는 그냥 쌩 지나가던 것. 초등학생이나 신는 하얀 실내화를 신고 다녔다는 것.
그 중에서 가장 이상했던 건 자신의 출신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반장이 홍지수 자리까지 와서 너는 어디서 왔어? 물으면 부산광역시라고 했다. 부산인데 사투리 안 쓰네? 블루베리 스무디 한번 해봐 같은 수도권 중심주의 질문을 내놓으면 어물쩍 웃어넘겼다. 담배 피우다가 담임한테 걸려서 로우킥 맞았다는 소문이 도는 무리 애들이 물었을 때는 강원도 춘천시라고 했다. 윤정한은 홍지수 대각선 뒷자리에서 엎드려 자는 척하며 대답들을 들었다. 자기소개로 전국 일주를 할 셈인가? 작은 소란이 가신 후 정한이 몸을 일으켰다.
"지수야."
홍지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수야?"
"홍지수."
세 번을 불러야 걔는 뒤돌아봤다. 얘는 풀네임으로 불러야 대답해 주나? 정한은 성 붙여서 부르면 삐쳐서 대꾸도 안 해 주는 몇 명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
"친하게 지내자고. 나는 윤정한이야."
"그래 정한아."
지수가 눈을 접어서 웃었다.
"근데 너 진짜 고향 어디냐?"
"몰라도 돼."
"왜."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이게 무슨 말이지? 정한이 피식 웃었다. 이 정도면 북한 출신 아니야? 그러나 정한은 더 묻지 않았다. 역사 선생이 들어온 것도 있었지만 이 이상 대화를 엮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 이상의 발뒤꿈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 이상의 아킬레스건이 있다. 윤정한이 그렇듯. 정한은 조용히 지수의 발목까지 올라오는 새하얀 양말을 쳐다보았다.
홍지수의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어 과목인 담임에 의해서였다. 모의고사에서 담임이 구린 콩글리시를 엮어 가며 잘못된 문법 지식을 가르치고 있던 때였다. 영어를 그리 잘하지 않던 정한에게도 포착될 만한 오류였다. 저건 어떻게 선생이 됐지. 내가 가르치는 게 더 낫겠다. 정한은 엎드려서 수면을 보충할 생각이었다. 성장기가 아직 안 끝난 고등학생에게는 잠이 보약이었다. 담임이 엎드린 정한 쪽을 쳐다보다 잠시 고개 각도를 꺾었다.
"지수가 사실 엘에이에서 왔거든. 전학 온 기념으로 지수가 35번 문제 읽어 볼까?"
LA에 대해서 아는 게 류현진과 LA 갈비뿐이던 고등학생들이었지만 홍지수의 출신은 화제성이 충분했다. 저래서 고향 속였구나. 오오 유학파 하며 탄성을 지르는 친구들 사이로 홍지수가 지문을 읽어내렸다. 예전에 미드에서 들어 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영어 발음 죽인다. 얇은 제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던 정한의 귀에 지수의 목소리는 꽤 달콤했다. K-입시로서의 영어 말고 정말 영어를 잘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 목소리가 더 듣고 싶어서 정한은 지수와 급식을 먹었고 야자가 끝나면 같이 하교했다. 어느 날에는 동네 소개해 주겠다는 핑계로 주말에 시내를 마구 돌아다녔다. 정한이 피시방이나 노래방 같은 열일곱 살의 주류 문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기에 둘의 행보는 남자 둘치고는 상당히 오글거렸다. 정한아. 하고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는 더 좋았다.
그래서 윤정한은 이름 불릴 짓을 더 했다. 당시 윤정한은 사람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101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홍지수는 그중 약 95가지에 흡족한 반응을 내놓았다. 예를 들면 샤프심을 홍지수 머리에 꽂듯이 세워 두면 정한아 우리 엄마 한의사거든. 나 약간 내 엄마 손길 느낀 것 같애. 하며 태연하게 샤프심을 제거하고 제 샤프에 꽂아두었다.
"정한이 너는 진짜... 골때려."
윤정한이 101가지 장난 중 96개째를 시전했을 때 홍지수가 보인 반응이었다. 골 때린다를 goal처럼 발음하는 바람에 정한은 한참 웃었다.
둘이 붙어 다니면 교사들은 종종 둘을 헷갈렸다. 복도에서 선생님을 마주치면 니가 지수였나? 니가 정한이? 물으며 내 수업 시간에 맨날 처자던 애가 누구였지? 물었다. 윤정한은 홍지수를 가리키면 아 쌤 제가 얘보고 그만 자라 할게요. 했다. 교사는 귀신같이 발화자 정체를 알아채고 출석부로 윤정한 머리를 갈겼다. 정한은 가끔 무단외출 걸리면 홍지수요 이름을 댔다. 지수는 둘의 벌점이 비슷해졌을 즈음에야 대리 벌점 사태를 알아채고 윤정한 등짝을 세게 쳤다. 그다음부터는 같이 쨌다. 베스트 프렌드. 윤정한과 홍지수 모두 이 오글거리는 어휘를 싫어했지만 (미국 태생 홍지수가 훨씬 더 기겁했다) 그렇게 얼버무릴 수 있었다.
가을이었지만 햇빛이 따갑고 기온이 높았다. 축구하는 다른 남학우들 사이에 둘만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정한은 발목 부상 핑계로 하복 차림이었고 지수는 하복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보통 정한은 홍지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가 뺨 맞)기를 좋아했는데, 그날만큼은 교복에 먼지 묻는 게 신경쓰여 조용히 홍지수 옆에 앉았다.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달리는 남학생들이 휩쓸고 지나간 구역엔 흙먼지가 잔뜩 날렸다.
"정한아. 너 내 이름 아나?"
하루에 몇십 번도 부르는 이름을 모를 리가 있냐? 그렇게 대답하고 정한은 자기를 에르메스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는 이상한 여자 친구 이야기가 생각이 나 피식 웃어버렸다.
"아니, 홍지수 말고."
"몰라."
당시 정한은 본명을 제외하면 인터넷상에서 하니하니 같은 닉네임을 사용했지만 이런 걸 이야기하는 건 아니라 생각했다.
"조슈아."
"그게 뭔데."
"나 태어나서, 미국에 있을 때까지 계속 쓰던 이름."
홍지수의 생애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이름. 홍지수가 절대 말해 주지 않아 윤정한이 알 수 없을 시간이 담긴 이름. 그때 축구공이 네트를 갈랐다. 시끄러운 반 애들의 함성. 따가운 햇살. 주름 진 제 셔츠. 입꼬리를 휘어 미소짓는 홍지수. 정한은 그 순간에 방부제 처리를 하고 싶었다.
"그래 슈아야."
그때부터 정한은 둘만 있을 때 지수를 슈아라고 불렀다.
정한은 계속해서 하늘을 쳐다봤다. 관람차가 천천히 회전하며 색색의 캐빈들이 하늘에 뜨고 졌다. 관람차가 운행하는 십몇 분이 이렇게 길었나. 홍지수 쟤는 몇 번 캐빈에 타고 있었더라.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차하는 검은 롱코트의 뒷모습을 보며 풀렸다. 아이는 네 살에서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한 손에는 풍선을 들었고 다른 한 손은 지수와 잡고 있었다. 관람차가 무섭지도 않았는지 아이는 신나서 홍지수를 잡아끌었고 지수는 기꺼이 끌려가는 액션을 취했다. 다음 손님들을 받아야 하는데 정한은 멍청하게 줄을 막고 서 있었다. 어깨가 저렇게 넓었나. 이런 감상에나 젖어서.
"형 뭐해? 정신 안 차려?"
승관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제서야 정한은 고개를 돌려 줄을 보았다. 대기가 별로 길지 않았다. 입가에 붙은 마이크를 올려 얼마 되지도 않는 발성을 끌어모아 외쳤다.
"잠시만 우주관람차의 기기 점검 시간이 있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윤정한 미쳤어?"
"승관아, 나 급한 일이 있어서 조금만 부탁할게."
정한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검은 롱코트가 지나간 길을 따라 달렸다. 제한 시간 이십 분. 돌아가 부승관한테 들들 볶이고 민원 청구로 먼지 나도록 털릴 미래가 어렴풋이 그려졌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도 홍지수는 여기서 만나면 안 됐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홍지수를 이곳에서 만나 버린 이상 그건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정한과 먼저 눈을 마주친 것은 홍지수 옆의 여자아이였다. 무지개 고무줄로 양갈래 머리를 묶었는데 높이가 전혀 맞지 않았다. 아이는 우주비행사 캐스트 복장을 하고 뛰어오는 잘생긴 삼촌을 신기해하다 그를 지칭할 어휘를 찾는지 한참 말을 골랐다. 정한은 미소 지으며 아이를 기다렸다. 정한이 유니폼을 입고 있는 동안에 행하는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진짜 정한이네. 혹시 했거든."
지수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 역시 정한의 습관이었다. 그제서야 정한은 지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추위를 많이도 타는지 긴 목이 목도리에 파묻혀 있었다. 코트 차림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어깨는 넓어진 것 같았다.
"그럼 내가 가짜 윤정한이겠니."
"그거까지도 진짜 너 같다."
아이 앞에서 다정 뚝뚝 떨어뜨리던 윤정한 눈이 빛을 지웠다. 홍지수가 부르자마자 아이와 있었을 때 직업인의 자세며 윤리 같은 건 거 다 날려먹었다.
"안녕하세요."
삼촌이나 아저씨 따위 단어 불러오기 실패한 아이가 꾸벅 인사했다. 인사하는 동안 아이는 헬륨 풍선을 손에서 놓쳤다. 정한이 능숙하게 잡아와 다시 아이의 손에 플라스틱 손잡이를 끼웠다. 윤정한 한 번 홍지수 한 번 눈치를 보더니 감사합니다 하며 웃었다. 아빠 눈치 보는 거 봐라. 애를 잡으면서 키웠네. 하긴 미국으로 날랐던 홍지수 딸내미면 hello가 더 익숙하지 않을까.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얘 이름 뭐야?"
"수아."
"이름도 너 같네."
갈릴레오 갈릴레이나 슈아 수아나. 한국 이름 돌려막기라니.
"수아가 자꾸 니 눈치를 보길래. 애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마. 정서에 안 좋아."
"정한아, 근데 관람차가 멈췄네."
미친놈. 면전에 저런 말이나 뱉고 싶었지만 걔 손을 잡고 있는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참았다. 오은영 박사님 빙의해 육아론 전개했던 건 당연히 개뻥이었다. <조슈아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101가지 방법> 내지 <조슈아를 즐겁게 할 수 있는 95가지 방법>이 절판된 지 오래되어 할 말이 생각이 안 났다. 조슈아야, 연락 끊긴 지 6년 만에 동창을 마주하면 반가운 척이라도 해 주는 게 예의라는 거다. 미국에서는 지 보고 싶었다던 사람 깔끔하게 무시하는 법이나 가르치냐. 빨리 가라는 말이 뭐야. 설마 나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봤던 거니.
시간이 촉박하니 여유 있는 척이 안 됐다. 승부수를 띄워야 했다. 그렁그렁한 눈 장착하고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아니면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같은 멘트를 던지고 싶었다. 그러면 윤정한이 아는 홍지수는 자존심 세우다가도 금방 넘어와 줬다. 그런데 그 말이 입에서 안 나왔다. 침 안 발라도 잘 나부끼던 입술이 6년 지난 홍지수 앞에서는 딱딱하게 굳었다.
"슈아야."
수아와 슈아가 동시에 응? 하며 되물었다. 정한은 상대를 부르는 호칭을 지수로 정정했다.
"연락해도 돼?"
고민 끝에 내민 답이 고작 이거였다. 윤정한은 <자니?>류의 문자를 보내는 구 애인들을 지극히도 싫어했는데, 이런 답을 내뱉고서는 그 좆같은 의도의 백분의 일 정도 포용하리라 다짐했다.
"연락해."
지수가 눈을 접어 웃었다. 선배 우리 밥 한 번 먹어요 하는 것 마냥 거절 없는 질문을 던지니 당연한 답이었다. 그대로 타임 오버. 아쉬운 사람이 지고 시간 없는 사람이 또 지는 게임이었다. 그게 둘 다 본인이라 정한은 억울했다. 0승 2패. 홍지수를 이겨먹으려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오기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 이제 가 볼게. 제자리에 서 있는 윤정한을 두고 홍지수가 수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정한아,
"너는 진짜 여전하네."
홍지수가 뒤를 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수아의 핑크색 루피 풍선이 궤적을 그리며 멀어졌다. 정한은 거기 몇 분 가량 굳어 있다 관람차를 향해 뛰었다.
정한은 어린이들의 나라에서 일하느라 나이치고는 철이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 왔는데(물론 대부분의 출처는 부승관이었다.) 아까 본 홍지수는 풍파를 여러 번 겪어 본 나무처럼 단단했다. 윤정한은 상상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상념의 진폭이 크지 않았으며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도 쉬웠다. 그러나 자꾸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허리케인이 홍지수를 휩쓸고 갔을까. 정한은 자기가 몇 번 가보지도 못한 인천공항 게이트를 통과하는 위태로운 소년을 상상했다. 한국의 미련을 한데 모아 잔뜩 소각해 버렸을 청년을 상상했다. 영어로 진행되어 윤정한은 알아듣지도 못할 결혼 서약을 하는 홍지수를 생각했다. 아무 무늬도 없는 새카만 정장을 입은 홍지수. 그러다 몽땅 암흑이 됐다. 홍지수를 생각하면 결말이 같아 마음이 갑갑했다. 결말이 없는 게 결말이었으니까.
그런데 뜻밖의 장소에서 진짜 홍지수가 나타나버렸다. 퇴근하자마자 정한은 있는 자료 없는 자료를 몽땅 뒤져가며 홍지수 전화번호로 추정되는 열한 자리 숫자를 찾아냈다. 010 뒤에 적힌 숫자들을 가만 읽어보니 낯익은 것도 같았다. 삭제한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손가락에 잘 붙는 번호들. 신호음을 기다리며 정한은 첫 마디를 다시 고민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선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홍지수 번호 아닌가요?"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정한은 전화를 끊고 스마트폰을 침대 위에 던졌다.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슈아야 너 정말 많이 변했다. 설마 했는데 연락처도 안 주고 연락하라는 건 연락하지 말라는 뜻이었니. 한참을 냉전 유지하다가도 정한이 아무렇지 않게 말 걸면 눈 접어 웃으면서 공격 태세를 사르르 풀던 게 윤정한 기억 속 홍지수였다. 걔가 어쩔 수 없이 떠났어도,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오만이었나. 예상을 벗어나는 결과를 받아들 때 정한은 늘 취약해졌다. 정한이 스마트폰을 따라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남들 눈에는 비슷하게 잘생긴 놈 둘이 비슷한 짓을 함께 했다. 열일곱이 열아홉이 될 때까지 붙어 있었다. 정한이 일학년 일학기 때 여소 받았다 흐지부지된 P가 이학년 겨울방학 무렵 홍지수한테 페레로로쉐 꽃다발 주면서 고백해올 때까지. 그때도 정한은 지수 옆에 앉아 있었는데 P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졸지에 하이틴 드라마 엑스트라가 되어 버린 윤정한은 조금 민망해 딴청이나 피웠다. 지수야, 내 마음 안 받아도 되니까 이거는 받아줘. 하면서 내민 꽃다발. 홍지수는 P의 얼굴과 꽃다발을 번갈아 잠시 살펴보더니 미안 내가 단 걸 안 좋아해서 하고 고개 꾸벅 숙였다. P가 들어올 때와 똑같은 손으로 나간 걸 힐끗 보고 정한이 트윅스 미니를 내밀었다.
"이거 먹어."
"정한아 뭔 개수작이야. 나 이제 이거 안 좋아해."
윤정한에게 배웠을 단어인 개수작 세 글자에 힘을 실어 홍지수가 대답했다. 그리고 오 초 뒤에 그 초콜릿은 지수 입안에 들어 있었다. 정한은 그거 확인하고 책상에 냅다 엎드렸다. 일어나라. 지수가 옆구리 쿡 찌르면 정한은 아이고 홍지수가 나 죽이네 온갖 엄살 부리며 기상했다.
언제는 불안한 얼굴 하고 있는 홍지수 앉혀 놓고 브리핑을 했다. 지수야, 나 조금 더 노력하려고. 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제안한 게 <서로 문제 가르쳐주기>였다. 윤정한은 홍지수에게 국어를, 홍지수는 윤정한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시스템이었다. 수학은 둘 다 재주 없어서 탈락이었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 묻는 지수에게 아니이. 우리 성적을 위한 거지. 윈윈 몰라 윈윈? 하며 둘러댔다. 남들이 보기에는 꽤 괜찮은 거래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홍지수는 기본적으로 문학적 감수성이 있어 단어 몇 개만 가르쳐 주면 제법 잘 풀었다. 그리고 이 정도 단어는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캐치해낼 수 있던 거였다. 비문학은 윤정한도 못 풀어서 이상한 소리만 하다가 퇴짜맞았다. 이 상호 과외는 홍지수가 아니면 영어는 거들떠도 안 보는 윤정한 쪽에 더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검은색 두꺼운 기출문제집을 넘겨보던 정한이 지수의 등을 툭툭 쳤다.
"슈아야 나 이거 모르겠어."
"몇 번."
"일번부터 사십오번까지."
"정한아 내가 다시 한번 제대로 말할게. 꺼져."
하면서도 윤정한이 빨간 색연필로 별표 쳐 둔 33번 문제 해설해 주는 거였다. 너 모의고사 단어 좀 외워야 되지 않을까? 하면 정한은 헤헤 웃으며 대답이나 회피했다. 너네 같은 애들 때문에 사교육 사람들이 고통받는 거야. 지수가 핀잔 줬지만 윤정한은 그런 말에도 만족해했다.
"나 집중 안 되는데 너네 집 갈까?"
하면 지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다가도 그래 다음에 놀러와~ 했다. 홍지수의 애정 섞인 핀잔 하나하나가 좋았던 것 같다.
삼 년 내내 같은 반이길래 슈아한테는 외국인 특례라도 있나?라고 잠시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 의심은 문과 남자반은 두 개밖에 없었으므로 금방 종결되었다. 정한은 지수를 생각하면 종종 서로의 거울 같다고 느꼈다. 정한이 시계 방향으로 180도 돌면 지수는 반대 방향으로 180도를 돌았다. 그래서 서로 마주볼 수 있었다. 정한이 왼손을 들면 지수는 오른손을 들었다. 그래서 남은 한쪽 손을 잡고 있을 수 있었다.
삼학년이었고 계절은 봄인지 여름인지 기억 안 나는 자습 시간이었다. 정한은 영어 실전 모의고사를 풀다 심장이 간지러운 느낌을 받았다. 초조해서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옆에서 수학 문제 푸는 홍지수 쿡쿡 찌르고 복도로 나가자는 모션을 했다. 지수는 샤프 놓고 조용히 따라나왔다. 정한은 영어 기출문제집까지 들고 나왔으면서 그건 펴지도 않고 홍지수 얼굴만 봤다. 아, 홍지수 진짜 잘생겼다. 이딴 감상이나 하면서.
"무슨 문제 모르겠는데."
"슈아야. 나 너 진짜 좋아해."
뜬금없는 고백을 받은 지수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게 윤정한의 관심 받는 101가지 방법 중 몇 번째 기행인지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다시 눈을 접어서 웃었다. 정한이 처음 친해지자고 말을 걸었던 날처럼.
"정한아,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는데. 나도 너 좋아."
그리고는 잠시 또 망설였다. 침묵의 시간 동안 지수의 얼굴은 웃는 것도 같다가 우는 것도 같다가 매 촤다 변했다. 그러다가 이내 깨진 거울처럼 일그러졌다.
"그런데 나 네 고백 못 받아줄 것 같아."
"왜."
"나 미국 가."
물기 섞인 목소리를 들었을 때 정한은 자기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다. 진심 없는 고백은 아니었다. 정한은 지수를 때때로 좋아했다. 지수랑 사귀게 된다 해도 둘의 생활에는 변화가 없을 걸 알았다. 그래서 던진 거절의 위험부담 없는 농담이었다. 좋아한다고 장난스레 주고받은 말도 한두 번도 아니었다. 복도 창가에 뉘어진 검은 기출문제집처럼 끈적하고 검은 마음이 정한을 짓눌렀다.
갑자기? 언제? 막연한 공포감이 덮쳐왔다. 내일이면 우리는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나는 학교 복도에서 고백했다 차인 사람으로 남는 건가?
"질문 없으면 들어가도 돼?"
정한은 끄덕였고 지수는 정말로 떠나버렸다. 삼학년 일학기에.
다음 날 정한은 느지막이 일어났다. 다른 약속 없는 휴무일이었다. 핸드폰을 집어들어 무표정으로 시답잖은 연락들에 답장하고 한나절을 누워 있었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넷플릭스로 드라마 틀고 시간 때웠다. 집중하지 않아 흐름을 완벽히 따라가기는 힘들었으나 싸우고 사랑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싸우고 사랑하는 내용 같았다. 난리났네. 지랄맞은 연애를 관망하다 또 누구 생각이 났다. 이런 찝찝한 결말은 드라마에서는 없던데. 잊어야지, 잊다가 안 되면 어떻게든 걔 찾아가서 등짝 한 대 갈겨야지. 고개를 저었다.
홍지수를 막말로 뜨겁게 사랑했다고는 말 못했다. 지수가 떠난 후로 그저 그렇게 공부했다. 윤정한 속 다 꿰뚫고 더한 짓 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심심했다. 검은색 영어 문제집은 못 펼쳐봤다. 표지만 봐도 걔 생각이 나서 그랬다. 니가 나 보기 싫다고 떠났겠냐. 싫어하면 내가 널 싫어했지 조슈아아. 이런 생각을 하면 홍지수가 미워져서 덜 억울하다가, 미운 사람이 자꾸자꾸 생각나 두 배로 억울해졌다. 그저 그렇게 수능을 쳤다. 영어 등급이 제일 안 좋았다. 성적표 바라보면서 홍지수는 영어 공부 안 해도 잘만 하던데 그냥 여기 있지 그런 생각도 조금 했다. 여행 갈래? 수능이 끝나고 중학교 동창이 물었을 때는 아니. 나 누구 만나야 된다며 없는 핑계 대면서 거절했다.
성적 맞춰 대학 가고 그냥 강의를 들었다. 고백해 온 애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구석 보이면 사귀었고 얼마 못 가 헤어지자고 했다. 그런 지리멸렬한 연애가 쌓이고 쌓여 학교에서의 평판이 <얼굴 믿고 깝치는 애>가 되었을 때 입대했다. 제대하고서도 딱히 바뀐 건 없다. 이렇게 6년이 갔다. 그저 그런 시간이 모여 만든 그저 그런 윤정한. 간절하고 치열해 본 기억이 아득한,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윤정한. 그런데 열아홉에 끊긴 어떤 시간이 생각이 나면 정한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능청맞은 척이 잘 안 됐다.
저녁에는 휴무가 아니었던 승관이 카톡을 보내 왔다. 그는 이전에 함께 찍었던 윤정한의 증명사진 원본을 퇴근 후에 보내주겠다고 말해 두었던 터였다. 정한은 따로 쓸 일도 없을 것 같고 귀찮다는 이유로 사양하려 했으나 나 조금 있으면 퇴사한다. 형도 나중에 이력서 쓸 때 후회하지 말고 미리 받아 둬. 하는 부승관의 케어에 메일 주소 하나 던져 주고 말았다. 사진이야 나중에 필요할 때 찍으면 되지 않나? 생각하며 메일함에 접속했다.
받은 메일함
부승관 윤정한(웹용).jpg 오후 9:37
Joshua Hong 정한아 오후 7:03
어 뭐야. 무의식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저 그런 윤정한이 회상하던 그저 그렇지 않은 시절. 그 시간을 생각하는 다른 이름이 미련인 줄은 조금 나중에 알았다.
미국에서는 Joshua. 한국에서는 홍지수.
홍지수의 새하얀 발목 양말 속 잘 빠진 아킬레스건. 모태신앙인데 호모 새끼. 친척 어른들과 모여 있을 때면 지수는 이따금씩 느껴지는 눈초리에 주눅이 들어 조용하게 기도문을 외웠다. 그런 유년을 거쳤더니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아 어른들 앞에서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 그 눈알들이 안 보이는 곳으로 숨어 버리고 싶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출신을 숨기려 했다. 영어 발음은 최대한 안 하고 싶었다. 남들과 다른 데서 오는 관심이 두려웠다. 괴로울 거면 차라리 외롭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 목소리가 좋다고 말을 시키는 애가 있었다. 짓궃게 구는데 그 속에 다정함이 빤히 보였다. 걔랑 같이 급식을 먹었고 주말이면 모르는 거리를 같이 쏘다녔다. 동네가 익숙해질 무렵엔 수능이 끝나면 같이 여행을 가자 했다. 수능. 대학. 그 뒤의 미래에도 내가 한국에 있을까. 확답할 수 없었다. 지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수업 시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취재자와 취재 대상에 관한 내용이었다. 마음이 통하고 무엇이든지 터놓을 수 있는 심리의 상태. 감성이나 이성이나 통하는 관계…… 따위 들으며 머릿속엔 한 사람 얼굴만 둥둥 떠다녔다. 슈아야 하고 하하 웃으며 달려오는, 짧은 검은 머리에 피곤한 눈동자를 한, 나를 Joshua도 홍지수도 아니게 하는 사람.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사람.
미국 이름 Joshua, 한국 이름 홍지수. 그런데 윤정한과 있을 때는 슈아. 홍지수는 그 세 번째 이름을 퍽 마음에 들어했다. 그래서 이 년 조금 안 되게 걔랑 데칼코마니 같은 삶을 살았다.
"조슈아. 너 한국에서도 남자애랑 붙어먹고 다니니."
아버지는 그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 필요한 말이 있으면 이메일이나 엄마의 입을 통해 전해온 그였다. 그래서 전화를 받고 지수는 당황했다. 지수는 대답을 유보하고 붙어먹다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돌이켜 보아도 맹세코 정한과 이상한 짓을 한 적 없었다. 뺨을 맞고 한국으로 쫓겨왔던 때처럼 모르는 남자와 외박한 적도 없었다. 다른 커플들 하는 것마냥 남사스럽게 손을 잡고 다니지도 않았다. 가끔 서로에게 이상한 장난을 쳤고 정한이 안아 달라고 할 때 몇 번 껴안았다. 그러면 정한은 지수가 말하지 않아도 달려와 등 뒤에 꼭 붙어 있었다. 정한과 한 짓은 정말 그게 다였다.
"아니에요, 아빠."
그 이후로 하나님이며 예수님이며 몇십 분의 긴 설교가 있었다. 이전에 들어 왔던 말에서 요지가 단 한 번도 어긋난 적 없었으니 홍지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으나 다음 말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돌아와."
지수의 심장은 중력 가속도 9.8m/s²로 자유낙하했다.
"명령이야."
지수는 거기에 저항 한 마디 못 했다. 타국에 유배 보낸 주제에 심기 하나 비틀렸다고 다시 불러내는 게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응하지 않는 게 붙어먹는다는 사실의 방증일 것만 같았다.
아버지와의 통화 이후 벌어졌던 일련의 일들은 뚜렷하게 기억에 남지 않았다. 정한에게 떠난다는 말을 했는지도 생각이 안 났다. 재빠르게 짐을 쓸어담아 떠밀리듯 게이트를 나섰고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지 않는 비행시간을 견뎠다. 미국에서 수능이 아니라 SAT 준비를 했고 괜찮은 주립 대학에 진학했다.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교회에서 만난 백인 여자애와 연애도 했다. 그리고는 얼마 못 가 차였다. 걔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며 가운데 손가락 날리고 사라졌다. 제대로 사랑한 적 없으니 그 엿 기꺼이 받아먹었다. 그게 다였다.
그게 다였나.
지수는 온실 속에서 자라는 야자나무를 생각했다. 나무는 온실을 나섰다가 잎이 하나 시들었다는 이유로 반품당했다. 온실 주인은 허약한 나무에게 비료도 주고 영양제도 맞혀 주었다. 나무는 뿌리가 깊어지고 줄기도 단단해졌다. 그렇게 6년이 갔다. 나무는 늘 온실 밖 세상을 그리워했다. 가끔 비도 맞고 태풍도 맞던 때가 생각이 났다. 나는 시절을 그리워하나. 사람을 그리워하나. 고민 끝 내린 결론은 사람이었다. 끝은커녕 시작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솎여 나간 어떤 장면 속 두 사람.
gap year을 가지던 중 한국에 사는 사촌누나가 이메일을 보내 왔다. 고등학생 시절 잠시 한국에 머물렀던 때 많은 도움을 줬던 사람이기도 했다. 출산과 육아를 거치다 대학원 진학을 꿈꾸게 되었는데, 아이를 놀아주거나 잡무를 도와줄 생각 없냐는 내용이었다. 페이는 서운하지 않게 지급하겠다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지수는 한국을 생각하면 무언가 끝내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옷에 자꾸 일어나는 보풀 같은 것. 잘라도 잘라도 계속 딸려나오는 기억들. 매듭을 확실히 짓고 싶었다. 아버지, 딱 일 년만요. 격렬히 반대하던 아버지는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큰아버지의 전화를 마치자 비행기 티켓까지 끊어 주셨다.
열네 시간 정도 걸리는 비행시간 동안 그 생각만을 했다.
네가 아니면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서 먼지 낀 이름을 챙겨서 돌아가야겠다고.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한 주 동안은 늘 우연한 재회를 생각했다. 식당이든 카페든 어딘가에서 그 잘생긴 뒷모습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한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열여덟 언저리로 돌아가 그때 나누었던 장난이나 치는 상상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차분한 만남을 기대했다. 소개팅하듯 조용한 카페에서 A부터 Z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런 드라마 같은 전개를 바랐다. 장르는 멜로이나 주연 배우 둘은 환하게 웃고 있는.
그러니 윤정한을 적어도 여기서 만나면 안 되었다. 옆에 있는 수아가 당장이라도 삼촌 빨리 가자 외칠 것 같아서 그랬다. 다시 마주친다면 해명부터 해야 되는지 반갑다는 말부터 해야 하는지 아니면 윤정한이 날리는 주먹부터 맞아줘야 하는지 몰라서 그런 것도 맞았다. 무엇보다 홍지수가 정말로 어린이의 꿈과 희망을 책임지는 학습 테마파크에서만큼은 재회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거절이 두려워 쿠션 백 개 깔아서 던진 게 빤히 보이는 윤정한의 발화가 너무 오랜만이라
연락해. 라고 대답할 용기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홍지수는 삐뚤빼뚤하게 묶은 수아의 머리를 풀어 주며 생각했다. 말 한 마디 하려고 두뇌 빙글빙글 돌리는 윤정한을.
다음 날에 홍지수는 수아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혼자 놀이공원에 갔다. 성인 한 장이요. 동반 아이는 없으시고요? 매표소 직원이 되묻자 지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람차 근처에 윤정한은 없었다. 그날 혼자 관람차 다섯 번을 탔다. 칭얼대는 수아가 없으니 감각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지면에서 천천히 멀어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캐빈이 느리게 덜컹댈 때마다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우주관람차는 느렸고 너무 자주 정지했다. 이동 속도에 적응할 만하면 멈췄고 고도에 적응할 때쯤 다시 출발했다. 멀미를 느껴 창문을 봤을 때는 거의 꼭대기였다. 저 멀리 보이는 숲. 아래 보이는 색색의 놀이기구 뚜껑들. 당장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기분에 지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어떻게 몸이 버티고 있는지 의식하면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타면 탈수록 무섭지 않았다. 다섯 번째 탑승에서 지수는 모든 전경을 눈에 담아낼 수 있었다. 정한아 너는 이걸 몇 번이나 타 봤니. 이런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있는 자료 없는 자료를 모두 뒤졌다. 윤정한의 연락처는 찾을 수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갈 때 모든 허물을 소각하고 달아났었으니까. 연락하라고만 하고 아무것도 건네지 않았던 건 다시는 너를 보기 싫다는 선언과 동의어였겠구나. 지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전에 과제 제출용으로 사용했던 메일 주소를 생각해 냈다. joshua951230을 입력해 보니 꽤나 손에 익었다.
Inbox
윤정한 보고 싶다
Google 휴면 계정 알림ㅡ 회원님의 계정이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윤정한 조슈아야
윤정한 ㅇㅇㄴㅁㄴㄹㅇ
윤정한 홍지수바보
지수는 지층처럼 쌓인 정한의 말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너는 나를 오래도록 그리워했겠구나. 한국과 미국. 지구의 반 바퀴를 건너 단면을 거울로 삼으면 서로가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여전히 데칼코마니 같이 살고 있었네. 그리고 정한아, 나도 정말 너를……
도착한 메일의 내용은 읽어보지 않았다. 대신 그중 아무거나 골라 답장을 써내려갔다.
제목 정한아
내용 연락하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안 알려줘서 미안해
내일 일곱 시에 놀이공원 앞에서 보자:)
p.s 보고 싶었어
짧은 메일을 읽은 정한이 피식 웃었다. 홍지수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아날로그야, 촌스럽게. 누구처럼 육 년 뒤에 봤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정한은 그날 근무가 여섯 시에 끝나게 되어 있었으므로 퇴근 후에 바로 지수를 기다렸다. 지수는 여섯 시 사십 분 정도에 왔다. 이틀 전보다는 조금 편한 차림이었으나 롱코트는 그대로였다. 진짜 슈아네. 장난기 어린 얼굴로 들었던 말을 돌려주었더니 지수는 나 그러면 간다? 하고 응수했다. 떨어져 있을 때는 온갖 청승 다 떨면서 만나면 똑같이 굴었다. 그게 윤정한 홍지수 사이 방식이었다.
뚜렷한 행선지 없이 만났기에 둘은 인스타 감성으로 자주 올라올 것 같은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정한은 맞은편에 앉은 지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조금 체할 것 같았으나 정한아 왜? 하는 홍지수 목소리에 금세 누그러졌다. 윤정한은 놀이공원에서 얻은 본인의 별명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홍지수는 지난 시간 다 도려내고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대학 학업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말했다. 부연 설명 없이 말은 잘도 통했다. 수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는데 제 발 저린 홍지수가 다 털어놓았다. 정한은 그냥 오 슈아 그랬구낭 하고 입에 밥 한 숟갈 더 밀어넣었다.
솔직히 더럽게 맛없었다. 남들 눈 안 보이는 데였으면 배추김치로 뺨 맞기 내기하던 급식 시절 버릇이 도질 수 있었을 정도였다. 커플들은 데이트 하겠답시고 이런 걸 먹는 건가. 홍지수 얼굴도 마찬가지로 oh my godness 외치는 것 같아서 빨리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는 갈 곳 없어서 야간 개장 놀이공원이나 갔다. 윤정한 이름으로 직원 할인 받아서. 성인 두 명이요. 동반 아이는 없으시고요? 매표소 직원이 갸웃하며 물었다.
"지수야 나는 그냥 공짜로 들어갈 수 있는데, 너도 할인받으라고 이렇게 들어가는 거야."
"나도 돈 벌 줄 알아."
"오 조슈아 어른이네~ 너 언제부터 어른이었어."
"정한이 너보다는 일찍."
어른 둘의 행선지는 말 안 해도 알았다. 야간 개장 관람차에는 오색 조명이 켜져 있었다. 평일 야간에는 낮보다 사람이 더 없었다. 대기줄에서 퇴근한 동료를 발견한 부승관 눈이 대빵만해졌다. 윤정한 니가 왜 여기서 나와? 라는 대사를 얼굴로 열심히 표현했지만 안타깝게도 육 년 만의 제대로 된 상봉 앞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 우주관람차 탑승하실게요. 한숨 섞인 서비스직의 안내 멘트를 뒤로하고 함께 캐빈에 올랐다. 잠시 후 관람차가 천천히 운행을 시작했다.
"이거 몇 번 타 봤어?"
"처음이지."
여기서 일하는데도? 지수의 의심 섞인 대꾸에 원래 직원들은 이런 거 잘 안 탄다고 했다. 기기 작동할 때 희망자에 한해 가끔 태워 주기는 했다. 정한은 단 한 번도 자원한 적 없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원래 겁이 많아서 스릴을 굳이 즐기지는 않았다. 조금 멀미가 날 것 같아 홍지수 옷자락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캐빈 너머 풍경을 살펴보니 위치가 거의 꼭대기였다. 창문에 시선을 고정하던 지수가 돌아보며 물었다.
"손 잡을래?"
"슈아야, 너 그 사이에 많이 앙큼해졌다."
"무드 깨는 발언 하지 말고."
지수가 왼손을 내밀면 정한이 오른손으로 잡았다. 다시 각자의 육 년 만에 잡은 홍지수 손은 더 커진 것 같았다. 정한은 지수 손을 잡고서야 제대로 인정할 수 있었다. 걔 앞에서만 자꾸 열아홉이 됐다. 요점 없이 툭툭대는 말이나 던지는 것도, 생각이 너무 많아 망설이게 되는 것도, 그래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것도 다 열아홉의 증세였다. 걔가 너무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심술이 났다. 그렇지만 홍지수 앞에선 계속 열아홉으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
캐스트인 정한은 잘 알고 있었다. 관람차는 이제 정상에서 일 분 가량 정지한다. 승부수가 필요했다.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닌 계절에 복도에서 했던 멋없는 고백을 생각했다.
슈아야. 조슈아야. 니가 믿을지는 모르겠는데.
"나 니가 진짜 좋다."
"나도 너 좋아, 정한아."
윤정한이 처음 말을 걸어 줬던 날처럼 홍지수도 눈을 접어 웃었다.
상공 백 미터의 고백. 상공 백 미터의 연인.
관람차 정상에서 애인끼리 키스하면 평생 간대. 정한이 버릇처럼 내뱉던 어떤 미신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