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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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d By You

견희

대지 1+견희.jpg

 

 

 

세상은 그야말로 데미안 그 자체였다.

세상은 알이었고, 그 범주를 깨고 다시 태어나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알았다. 무엇을? 적어도 이 알이 황금 거위가 낳은 알은 아니라는 것을.

 

 

대학로가 시끌시끌했다. 너도나도 새로 들어오는 신입생들을 상대로 동아리 부원 좀 모아보겠다고 아직은 쌀쌀한 봄 날씨에 다들 맞춘 것 마냥 청 자켓을 입고 길에서 홍보하는 중이었다. 온 세상이 그들만의 청춘으로 짜여진 뮤지컬 무대 같았다. 그 사이를 정한은 정말 엑스트라처럼, 스태프처럼, 그냥 지나갔다. 어차피 윤정한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풍경이었다.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밴드부는 윤정한이 부장으로 이끌고 있는 동아리였다. 다들 한 명이라도 더 모으려고 하는 분위기 속에서 윤정한은 사실 누구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무시하고 지나가기에 바빴다. 그 걸음으로 정한이 동방 문을 벌컥 열었다. 작은 공간에는 나란히 기타와 베이스가 세워져 있었고, 한쪽에는 드럼이 놓여져 있다. 왜냐하면 윤정한은 밴드부니까. 그런데 문을 열자 모르는 동그란 뒤통수가 하나 있었다.

 

 

윤정한이 두 눈을 끔뻑였다. . 누구? 그러자 부승관이 허리 숙여 인사한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밴드부로 들어오게 된 경영학과 1학년 부승관 입니다! 아니아니, 우리 동아리에 왜 신입생이 있는데?... 윤정한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신입생 소식에 황당할 따름이었다. 너네 혹시 나... 왕따시키냐? 그 말을 뒤로 홍지수가 동방에 들어왔다. 승관이 노래 엄청 잘해. 진짜 명창. 쟤는 뭐가 만족스러운지 엄지를 치켜들며 저와 같은 과 후배를 칭찬하기만 하고 있었다. 아니 홍지수, 니가 꼬셨어? 아니, 난 말렸지. 근데 들어왔다고? .

 

 

... 승관이랬나?”

 

 

윤정한이 부승관을 불렀다.

 

 

너 우리 동아리, 뭐하는 동아리인지 알고 온 거니?”

!”

 

 

윤정한이 곤란한지 뒷머리만 벅벅 긁다가 안되겠는지 밴드부의 자랑, 빨강 소파에 매트리스를 죽 뜯었다. 그 밑으로 보이는 전단지들, 누군가가 못난 글씨로 삐뚤삐뚤 정성스럽게 한자 한자 꾹꾹 눌러 쓴 필사, 그리고... 피 묻은 손수건. 직접 보는 게 낫겠지. 승관아, 우리 이런거 한다. 윤정한은 날 것을 그냥 그대로 부승관한테 보여줬다. 혹시나 니가 사회 운동에 로망 같은 게 있을까 봐 보여주는 건데, 이거 위험해. 그런데도 할 수 있어? 어느 순간부터 같이 동방에 있던 석민이 괜히 정한의 냉정하고 차가운 말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관은 전혀 움츠러드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방금까지 떨고 있던 눈동자가 막 단단해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승관이 주먹을 꽉 쥐고 크게 소리쳤다.

 

 

당연히 각오하고 왔죠. 저 그런 어줍잖은 마음으로 여기 온거 아니에요.”

 

 

크고 똘망똘망한 맑은 눈이, 그렇게 올곧은 시선으로 얘기를 하는데 더 이상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이 동방에는, 이 동방만큼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도 처음에는 다 눈에 초롱초롱한 별이 박힌채로 무언가를 외치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으니까. 정한은 승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발성 진짜 좋네. 괜히 지수가 명창이라 하는게 아닌가봐. 그게 끝이었다. 잘 부탁한다던가, 앞으로 잘해보자라던가, 그런 말 없이. 무언의 연대인 셈이었다. 그렇게 마음의 결속력을 다지는 것이었다.

 

 

 

 

사실, 승관이 사회운동에 어느정도 로망이 있었던건 사실이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로망이었냐 하면... 밴드부의 주 활동은 가사에 있었다. 낭만을 방패삼아 가사를 쓰고 멜로디를 연주하는 밴드부의 노래에는 젊은이들의 세계가 담겨 있었다. 세계뿐만이 아니라 미래도. 노래로 자기들의 신념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숭고하고도 멋진 일인가. 그래서 솔직히 부승관은 밴드부만으로도 충분히 끌렸는데 홍지수가 머뭇거리는 부분에서 되려 가슴이 뛰었던 것이었다. 그럼 아까 윤정한 앞에서의 그 포부는 무엇이었냐 하면... 솔직히 좀 쫄았다. 머리는 샛노랗게 물들여서는 푸석푸석한 머리에 종잇장같이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이 생긴 주제에 골격은 굵고 기가 존...나 세서. 근데 솔직히 부승관도, 기가 약한 편은 아니었다. 깡으로 버틴 셈이다. 자기도 모르게 찔려서 강하게 부정하다보니 긍정이 튀어나왔다고 해야하나. 승관은 참 저스스로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같은 과라고는 해도 4학년이랑 1학년이 만나는 경우는 드무니까. 홍보도 잘 안하는 밴드부가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고, 마침 부원이 저랑 같은 과라니. 승관으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던 것이다.

 

 

 

 

 

 

학교는 생각보다 보물찾기나 숨바꼭질을 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뜻이었고 실상은 우리처럼 운동하는 동아리가 많이 있었다는 뜻이다. 사진 동아리부터 글사랑시사랑 동아리, 알게모르게는 다도 동아리까지. 그리고 대표적으로, 정한과 같은 동기인 체육교육과 4학년 최승철, 그리고 승철의 친한 동급생이랑 후배들이 들어와 있는 영화동아리는 말이 영화동아리지, 비디오 틀어보면 전혀 다른 영상이 나오고 그랬다. 윤정한과 홍지수는 심심하면 영화동아리 부실을 제 부실처럼 드나들었다. 어차피 거기 얼굴들은 다 서로 아는 얼굴이고, 같이 시위 나가면서 상부상조 하는 사이라 가끔 동아리 회식때 간혹 윤정한과 홍지수도 끼곤 했었다. 보통은영화동아리에 있는 여학생들이 최승철보고 그 두사람은 안 오냐고 기대의 눈빛을 보냈기 때문이긴 하다만.

와 최승철, 이거 제목 누가 지은 거냐? 촌스러운 문장을 그럴싸하게 영화 제목인 것처럼 써놓은 비디오들을 보며 윤정한이 폭소했다. 옆에서 홍지수는 은은하게 웃으면서 지켜보기만 했고. 물론 속으로는 지수도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여느때처럼 최승철네 동방에 놀러온 참이었다. 술마시러 가자는 의미로.(보통 이럴 때만 찾긴 한다.) 야 그거 원우가 지었어. 승철의 한소리에 정한이 들고있던 비디오를 툭... 떨어트렸다.

 

 

, ! 조심히 다뤄!”

 

 

최승철이 얼른 잽싸게 떨어진 비디오 테이프를 주웠다.

 

 

원우... 너희 동아리였니?”

.”

걔가?”

아 그렇다니까.”

너 구라 아니지?”

아니, 뭔 구라야. 진짜라고.”

 

 

쎄빠지게 삼수해서 의대 들어온 놈이 무슨, 까지 말했다가 윤정한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 삼수해서 의대 들어온 놈이니까 사회운동 하는거지. 원래 많이 알 수록 세상은 불편하게 살아가게 된다. 배운 사람은 멍청한 사람보다 인생이 더 복잡하다. 정한은 승철의 손에 들린 비디오 제목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소년과 순정. 쟤 저런 감성이니.

 

 

정한의 친구, 승철. 어떻게 친구가 됐냐면 그냥 같은 동네 친구였다. 학창시절에 학교는 달랐는데, 자주 얼굴 마주치고 살다보니까 친해진 동네 친구에 대학까지 같은 곳을 가게 되면서 절친이 됐다. 어쨌든 둘은 사회에 크고 번쩍이는 포탄을 쏘아올리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방법이 조금 달랐을 뿐이지. 셋이 자주가는 가게에 자주앉는 자리에 앉았다. 아주머니 여기 매일 먹는 걸로요. 대학 입학하고 나서 꼭 여기서는 파전에 소주였다. 간장종지는 두 개. 승철은 고추가루를 뿌려먹었고 지수는 그냥 먹었기 때문에 두개였다. 보통은 승철이 먼저 마시자고 찾아오는게 대부분이었는데 오늘따라 정한이 먼저 승철에게 마시자고 권유했다. 아니나 다를까 술 까자마자 잔도 안 부딪치고 먼저 냉큼 털어마셔버렸다. 그러더니 꺼내는 말. 너희 동아리에 신입생 많이 들어왔냐? 원우 말고.

정한의 말에 승철은 가만히 잔을 바라보다가 저 역시 술잔을 털었다.

 

 

두 명. 찬이라는 애가 있는데, 얘가 진짜 기특해. 빠른이라 일찍 들어왔다는데 제일 어른스러워.”

 

 

승철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수가 정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정한아, 우리도 왔잖아. 정한이 그 말에 웃음을 지었다. , 진짜 웃긴애 하나 왔어.

 

 

내가 겁주니까 되려 큰소리 내는거 있지. 원래 쫄거나 찔리면 그러잖아. 근데 우리는 그 패기 하나 믿고 싸우고 있는게, 딱이다 싶어서 그냥 받았어.”

 

 

윤정한의 말의 끝으로 최승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부원 거의 안 받잖아. , 그래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받았어. 지수랑 같은 과이기도 하고. 그 말에 지수가 살짝 웃었다. 걔 진짜 대단해. 나 밴드부인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그러면서 홍지수가 술잔을 들었다. 홍지수가 부드럽게 소주를 넘기면서 셋이 한참은 거기서 신나게 조잘거렸다.

 

 

 

 

홍지수는, 한국에 와서 담배를 배웠다. 정확하게는 한국에 왔으니까 담배를 폈다. 홍지수와 조금만 친해지면 그가 대한민국 국적이 아니라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잘 사는 집안의 도련님 같은 귀티나는 얼굴을 하고서는 개털 집안이라는 것도. 미국에서 가난에 쫓겨 도망치듯 한국에 발을 디뎠더니 그곳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붕괴 직전의 건물이었다. 원인은 부실공사인 건물. 그러나 홍지수는 가장 오기 싫었던 곳에서 가장 싫었던 제 치부가 제 무기가 됨을 알고 참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여기서는 저에게 칼을 겨눈 자신의 나라가 곧 자신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준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리고 특히, 오늘같이 최승철과 윤정한이 같이 술을 마시는 날에는 꼭 중간에 나가서 한개비씩 펴줘야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날에는 홍지수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홍지수의 엄마는 홍지수가 담배를 배웠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고, 홍지수 역시 그것만큼은 엄마에게 숨기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래서 늘 술자리가 쫑나고 헤어질 때 윤정한과 홍지수는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지수야.”

.”

토요일에, 너도 갈거야?”

 

 

윤정한이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희미한 악력이 느껴지자 홍지수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세상이 까맣다. 미국은 이런 풍경이 아니었는데, 여기는 다들 날이 어두워지면 걸음을 재촉한다. 서둘러 집에 들어간다. 낭만 없는 신데렐라처럼. 홍지수는 윤정한을 쳐다봤다.

 

 

가야지.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하기로 했잖아.”

 

 

사회운동은 결코 정의롭고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목소리를 크게 낸다는 것은 나를 알리는 것이었다. 운동은 하나의 전투다. 하나, 둘 하면서 신호를 세고, 일제히 각자의 포부와 뜻이 담긴 탄알을 하늘과 세상을 향해 쏘는 작은 전쟁이나 다름없다. 그 곳에서 되찾아야 하는 것이 있음에도, 더 잃을 수는 없어 발을 내딛는 것을 무서워한다. 사실 그게 당연했고, 그렇기에 발을 내딛는 것은 숭고하고도 대단한 것이었다. 윤정한은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간혹 윤정한은 제 스스로가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들었다. 위험한 곳에 소중한 사람의 힘을 빌리는 것을 꺼려했다. 한 명이라도 더 힘을 보태주고 목소리를 내주고 관심을 가져달라고 연대와 지지를 추구하는 최승철과는 사뭇 다른 방향이었다. 그리고 셋은 그걸 이해하고, 인정하고, 격려했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에.

홍지수는 늘 윤정한에게 말했다. 정한아, 나는 여기서 겨우 내 쓸모를 할 수 있어. 그럼 윤정한은 더이상 홍지수를 말리려들지 못했다. 그럼 그들은 말 대신 입맞춤을 했다. 무언의 연대는 그윽하고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알겠니 승관아?”

아 몇 번을 말하는 거예요!!!!”

 

 

동방이 승관의 비명소리로 가득찼다. 이러다가 귀에 딱지 앉겠네 진짜! 윤정한의 과한 잔소리 덕분에 부승관은 진절머리가 났다. 조심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거야, 진짜! 승관이 밴드부에 들어오고 나서, 많은게 변했다. 제일 먼저 뭐가 변했냐면, 너저분하고 칙칙하던 동방의 분위기가 창을 열어 환기라도 한 듯 확 밝아졌다. 너저분한 동방을 정리하고, 쓰레기도 버리고, 여기저기 널부러져있던 물건을 정리하고, 부원들 사이에서도 분위기메이커 부크박스를 자처했다. 물론 지금 승관은 진심으로 괴로워서 비명을 지른거지만 그걸 지켜보는 홍지수는 재밌기만 했다. 이지훈이랑 이석민도 마찬가지로. 윤정한은 아 진짜 이해한거 맞냐고~ 라며 한껏 부승관을 귀찮게 했지만. 말은 안해도 내심 윤정한과 홍지수는 부승관을 '귀여워' 하고 있었다. 강조하지만 이게 그들의 후배 사랑법이었다. 진짜 걱정에 어린 잔소리도 맞았지만.

토요일에 영화동아리와 밴드동아리는 같이 근처 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민운동에 참여할 계획이었다. 밴드부 동아리실은 스무명이 넘는 인원이 다 들어오기엔 좁아터져서 그나마 널널한 영화부 동아리실에서 모였다. 정한이 가방에서 인쇄물을 한뭉텅이씩 꺼내는 모습을 보고 승철이 입을 열었다.

 

 

석철아저씨?”

.”

 

 

정한의 집 근처에는 작은 인쇄소가 하나 있었다. 석철 인쇄소. 정한이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도 사실상은 인쇄소 사장님인 석철 아저씨였다. 석철 아저씨가 밤에 남몰래 현 정권에 대해 비판하는 글이 담긴 대자보를 인쇄하는 것을 윤정한이 봐버린 것이었다. 그 뒤로 윤정한은 자주 인쇄소에 놀러갔다. 그곳은 정한이 모르는 우물 밖의 세상을 들을 수 있는 전화박스였다. 윤정한이 더 자라면, 어른이 되면, 세상 밖으로 나가면 어떤 일이 있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저가 사는 삶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이정표가 되어준 공간이자 선생. 정한이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발을 담그면서 윤정한은 신문을 인쇄해야 할 때마다 꼭 석철 인쇄소에서 인쇄를 맡겼다. 거뭇거뭇한 피부에 실제 나이보다 더 늙어보이는 얼굴의 아저씨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정한은 더욱 석철 아저씨를 안쓰러워 했다. 윤정한이 제 값보다 더 비싼 값을 주고 인쇄를 부탁하는 것도, 돈을 받지 않고 그냥 해주려는 아저씨의 선심을 거절한 것도. 윤정한이 그 동네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집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것들은 모두 이어져서 한 사람과의 깊은 유대를 맺었다.

새로 들어왔다는 영화동아리에 막내 찬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찬이도 대학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운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던 아이였다. 부모님이 위험하다고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학생때는 눈치보느라 하지 못했던 시위 참여를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드디어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고향을 멀리 떠나게 되면서 조금 씁쓸한 감정도 있었으나 덕분에 찬이는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지게 됐다. 그리고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무게라는 것이 뭔지 알게됐다. 내일은 이찬이 처음으로 책임이라는게 뭔지, 무게라는 것이 뭔지를 배울 수 있는 때였다.

 

 

그리고, 이찬은 아마 평생 그 날을 잊지 못할 것이다.

 

 

광장에 드문드문 모인 앳된 얼굴들이 서로를 힐끔힐끔 바라봤다. 무너지지 말자, 우리. 모두가 입을 열고 배에 힘을 준다. 목소리를 낸다, 목소리를 높인다. 아우성처럼 들린다.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이 그려졌다. 심장소리가 모여서 북소리가 되는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금방이라도 터져서 피를 뿜어낼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힘을 준다. 땅에 버티고 선 두 다리에, 주먹을 쥔 두 손에, 성대에, 심장에. 호헌-철폐, 독재-타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곧 일촉즉발의 상황이 된다. 무장을 하고 나타난 군인들이 광장에서 거리로 나와 앞으로 나아가는 앳된 얼굴들을 막아선다. 곳곳에 전단지가 날린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울려퍼지는 구호 속에서 한 사람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도망가라고. 그리고는 일제히 다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최루탄 때문에 매운 연기가 올라오고 사람들이 전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다. 학생과 어른 분간할 것 없이 모두가 살기 위해 소리치고 도망간다. 그 뒤를 매섭게 쫓는 군인들이 그들에게 매질을 한다.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든다. 분명 슬프지 않은데 눈이 따가워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거리에 어린 얼굴의 청년들은 겨우 자신을 보호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엉망이 된 질서에 찬이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분명 찬이가 어제 그린 내일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근처에서 권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 뭐해?! 뛰어! 그 말에 퍼특 정신을 차린 찬이가 도망가려고 다리를 움직였으나 군인에게 뒷덜미를 잡히는 것이 더 빨랐다. 숨쉬는 것을 순간 잊은 이찬이 어떻게든 살기는 살아야겠다고 몸을 한껏 움츠렸다. 실랑이를 벌이며 닥치는대로 밀어내고 막다보니 군인의 헬멧이 떨어졌다. 동시에 이찬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맞는다, 나는 여기에서 무너져 내릴 것이다. 심장을 귓구멍 속에 때려박은 것처럼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소리가 먹먹하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이찬은 무너지지 않았다. 눈을 뜨자 본 것은 눈 앞에 있던 군인이 쓰러지는 뒤로 두꺼운 의학 전공책을 들고 숨이 차게 헉헉거리며 깨진 안경을 쓴 채 핏대가 선 눈으로 이찬을 바라보던 전원우만 보일 뿐이었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전원우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웬만해선 취하지 않는 최승철이 얼마나 혼자서 술을 마셔댔는지 꽐라가 돼서는 윤정한을 불렀다. 부른건 윤정한이었는데 때마침 윤정한이 홍지수와 같이 있어서 두사람이 같이 최승철한테 갔다. 최승철은 분명 실실 웃으면서 그냥 내뱉었는데 윤정한과 홍지수는 그걸 도저히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축축한 목소리로 정한아, 네 방식이 맞나보다라고 말하는걸 도저히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윤정한이 최승철을 택시태워서 보내고, 그 테이블은 정한과 지수가 앉아 2차를 시작했다. 한참을 둘이 말 없이 소주만 들이키다가 정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느낌이 쎄해.”

느낌이?”

. 꼭 안좋은 일이 겹칠 것처럼.”

 

 

그러고는 픽 웃는데 홍지수는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승철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둘이 같이 있었다. 연대의 의미보다는, 연애의 의미로서. 지수는 순순히 정한을 걱정하고, 보살폈다. 홍지수가 윤정한의 잔을 빼앗아 대신 마셔버린다. , 홍지수 뭐해? 윤정한이 물어도 홍지수는 대답하지 않고 병째로 남은 소주를 들이켰다. 뭐하냐니까? 제 손목을 붙잡는 윤정한에 홍지수가 입을 열었다.

 

 

너 과음하고 있어.”

병나발 부는 니가 할 소린 아니거든.”

내가 마실 술까지 니가 다 마시고 있잖아.”

 

 

너는 자꾸 너 혼자 책임지려고 한다고 말했지 내가. 그 말에 윤정한이 입을 다문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왜 신경 써. 그리고 만약 그런 미래가 생겨도 너 혼자 힘든거 다 시킬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구질구질하게. 홍지수의 따끔한 한마디에 윤정한의 나갔던 멘탈이 조금 돌아왔다. 홍지수, 구질구질하다는 말은 어디서 배운거야. 승관이가. 또 뭐배웠는데? 징글징글하대, 너랑 내가. 그거 맞지. 정한과 지수가 깔깔 웃는다. 최승철 미친놈, 혼자서 얼마나 마신거야? 당분간은 병 안모아도 되겠네. 그니까.

 

 

 

 

그러나 윤정한의 느낌은 정확했다. 안 좋은 일은 시기를 가려서 찾아오지 않는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 하지 않는다. 인쇄소 아저씨가 잡혀갔댄다. 윤정한이 멘탈이 나간건 정확하게 그때부터였다. 다행히 전원우도 일주일 뒤에는 다시 멀쩡히 학교를 나오고 동방에도 얼굴을 비췄지만, 승철의 괜찮냐는 말에 원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온 석철 아저씨는 더이상 다리를 쓸 수 없게 됐다. 인쇄소 문을 닫는 석철 아저씨를 윤정한은 이제 한참을 내려다봐야 겨우 눈이 맞았다. 윤정한은 형용할 수 없는 분노로 몸이 불타는 것 같았다. 타오르는 건 육신이 아닌 정신이었다.

 

 

아저씨.”

정한아.”

 

 

윤정한이 석철 아저씨를 보기 위해 인쇄소로 갔다. 석철 아저씨는 이제 윤정한을 한참을 올려다봐야 했다. 정한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이 눈에 핏대가 서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석철 아저씨를 끌어안았다.

 

 

아저씨, 죄송해요. 제가제가 그러면 안되는건데,”

윤정한아.”

 

 

모든게 자신의 탓이라고 돌리고 있던 윤정한의 말을 석철 아저씨가 끊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아저씨는 한참은 어려보이는 정한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우리 정한이, 다 큰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까 아직 어린애네. 빨개진 콧잔등이 시큰해져서는 한 번 코를 찡그렸다. 정한아 나는, 니가 여기서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는 너 혼자 거기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

 

 

그리고 내가 정한이 네 부탁은 그냥 들어줄테니까 개고생 하지말고 필요하면 계속 여기로 와. 석철 아저씨는 그 말과 함께 이제 영영 셔터가 열리지 않을 인쇄소의 여분 열쇠를 정한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뒤로 윤정한은 닥치는대로 운동에 참여하러 나갔다. 길거리의 시민들 사이에 섞여서, 누구보다 목청이 터져라 구호를 외쳐댔다. 너무 소리를 질러서 목이 쩍쩍 갈라지고 피맛이 나는데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분노했고, 그만큼 슬퍼했다. 최승철도, 홍지수도, 그의 주변 사람 모두가 윤정한을 말렸지만 윤정한은 듣지 않았다. 붙잡혀서 끌려가는 순간까지도.

홍지수는 시위에 나가기 딱 좋은 사람이었다. 앞장서기에 좋았고, 총대매기에 좋았다. 붙잡혀가도 그의 신분이 미국인이라는 것 덕분에 홍지수는 깔끔하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빙글빙글한 계단을 눈이 가린채로 걷는 것은 저가 몇층에, 어디에 있는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감옥보다 더 감옥같은 곳에 홍지수는 지옥은 그리 먼 곳에 있는게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홍지수가 밖에 나오면 윤정한은 항상 제일 먼저 홍지수한테 달려갔다. 그곳에서 나오는 홍지수의 표정은 축축한 주제에 건조하게 바싹 마른 느낌이었다. 사막인데 장마가 온 것 같았다. 그 표정을 윤정한은 견딜 수가 없었다. 저가 이끌었던 세계로 인해 홍지수가 힘들어한다는 것이, 어쩌면 정말 다른 세계 사람처럼 살 수 있었을 걔가 이러고 있는게 미안했다.

그래서 윤정한은, 저 대신 앞으로 치고 나가려는 홍지수를 뒤로 밀치고 자신이 대신 창 밖으로 나갔다. 홍지수가 눈으로 꼭 윤정한,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윤정한은 희미하게 웃었다. 걔한테는 의무가 없다. 홍지수는 총대 매는 사람이 아니다. 윤정한의 예쁜 얼굴이 보기 좋게 얻어터졌다. 홍지수가 악을 쓰고 윤정한에게 가려고 했으나 반대로 달리는 인파를 뚫고 건널 수가 없었다. 전원우가 말렸다.

 

 

그 후 정한이 잡혀갔다는 소식은 금방 학교에 돌았다.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홍지수였다. 되지도 않는 연락을 기다리며 안절부절하다가 윤정한의 소식을 듣자마자 뛰쳐나가려고 하는 홍지수를 막은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전원우였다. , 형이 가면 뭘 어쩔거예요. 어디로 가야하는 지는 알아요? 그러나 홍지수도 윤정한만큼이나 불도저였다. 가야해, 나는 가야해. 나는 걔 옆에 있어주겠다고 했단 말이야. 전원우가 잠시 생각했다. 그가 사람 살리는 책으로 사람을 내리쳤을 때, 충격으로 집에 내려가겠다고 창원으로 가는 짐을 싸고 있는데 찾아온 윤정한을. 윤정한은 전원우를 이해했다. 그리고 부탁했다. 나는 네가 여기 남았으면 좋겠다고. 내려가는걸 내가 막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네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고. 최승철이 너 걱정 많이한다면서, 네 망설임과 겁을 이해한다면서. 윤정한은 전원우에게 부탁했다. 혹시나 홍지수가 또 우리 대신에 앞으로 나서려고 하면, 원우 네가 좀 막아달라고. 이번에는 지수 혼자서 그 차가운 무저갱 같은 곳에 홀로 가게 두지 않게 해달라고.

전원우는 홍지수를 놔줬지만 홍지수는 발자국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전원우의 말이 틀린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홍지수는 윤정한을 찾으러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몰랐다. 어디로 잡혀갔는지, 어디서 봐야하는지, 볼 수는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홍지수는 이제서야 저가 삼았던 미국인이라는 방패는 사실 겨우 한 사람만 쓸 수 있는 우산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홍지수는 한국에 와서 딱 두 번 울었다. 첫번째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였고, 두번째는 윤정한이랑 첫키스 했을 때였다. 홍지수는 솔직히 한국의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고 거의 도망치듯이 온 곳이었다. 솔직히, 사회의 분위기가 이렇게 냉랭할줄 알았으면 홍지수는 한국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와버린 홍지수는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 좋아하는 기타 연주를 하고 싶어서 들어갔던 동아리는 사회운동 나가는 동아리였다. 홍지수가 미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제일 먼저 홍지수의 사정을 물어본 것이 윤정한이었다. 너 미국인이라며, 우리 동아리 그냥 밴드하는 동아리 아닌데. 그래도 여기 있을거야? 홍지수는 무슨 객기인지 남고 싶었다. 윤정한을 돕고 싶었다. 저렇게 예쁜애가 하는 말은 불가항력이었다.

윤정한은 일본어학과였다. 엄마가 그쪽으로 일하고 있다는게 이유였다. 홍지수는 서툰 한국어 실력으로 윤정한이 일본어로 작문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未来になる. 이건 어떻게 읽는거야? 미라이가하이니나루. 지수는 일본어를 몰랐기 때문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멋대로 해석했다. 정한은 미래가 재(하이)가 된다고 썼지만, 홍지수한테는 high(하이)라고 들렸다. 지수는 정한의 그런 감성이 좋았다. 정한이 어떤 감성으로 가사를 쓰는지 알아가는게 좋았다.

윤정한이 홍지수를 데리고 처음으로 운동을 하러 나갔을 때, 홍지수도 이찬과 똑같았다. 머리가 멈추고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두 달리는 순간에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홍지수만 우뚝 서 있던 그때. 따가운 눈이 줄줄 눈물을 쏟아내느라 시야가 흐릿해 눈을 비비는데 그 손목을 낚아채고는 골목으로 달리던 걔가 홍지수에게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돼버렸다. 눈물이 쉴새없이 흐르는데도 걔의 얼굴이 보고싶어서 눈을 부릅 뜨려고 애썼다. 정한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홍지수, 괜찮아? 그러는데 홍지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진짜 좆같았다. 내가 왜 한국에 와서 이런걸 겪어야 하는지. 꼬여버린 제 인생이 너무 좆같아서 더 울고 싶었다. 홍지수가 눈물을 못 멈추니까 윤정한은 답지 않게 안절부절했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수야, 나는 네 곁에 있어줄게.”

 

 

홍지수의 외로운 상황을 아는 윤정한은, 홍지수가 어쩌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거기서 들려줬다. 가난에 떠밀리듯이 혼자 낯선 곳에서 홀로서기를 해야하는 상황이 얼마나 막막하고 힘이 들었을까. 골목 사이사이로 잡아내려는 군인들에 윤정한과 홍지수가 입을 맞춘다. 위장키스, 라기에는 맞붙은 입술이 필요 이상으로 뜨겁고 달콤하다. 홍지수는 첫키스 주제에 눈물에 젖어서 축축하고 최루탄 냄새 때문에 퀘퀘한데 너무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윤정한의 입맞춤이 다정했기 때문인지, 홍지수의 입술이 부드러웠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홍지수가 충동적으로 맞춘 입술에 윤정한은 오히려 안심한듯 홍지수를 혀로 달랬다.

 

 

그건 무언의 약속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 곁에 있어 주겠다고.

 

 

 

 

 

 

윤정한은 생각보다 빨리 풀려났다고 한다. 어째서 직접 본게 아니라 들은 소식이냐 하면 윤정한을 빼낸건 윤정한의 엄마였다. 사실 도련님은 홍지수보다 윤정한 쪽이었다. 홍지수는 미국에서 살다 한국에 왔으니 당연히 미국에서 살 때보다 한국에서 형편이 더 좋았을 뿐, 엄마가 고위직에 종사하는 윤정한 쪽이 솔직히 더 좋은 라인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충분히 더 좋은 부자 동네에서 살 수 있을텐데 정한의 집은 못사는 동네 중에 가장 좋고 으리으리한 집이었다. 그럼 그 동네에서는 정한의 집이 가장 눈에 띄었다. 정한의 엄마는 그걸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제 아들이 사회운동을 하다가 붙잡혀서 지금 유치장에 들어가 있는걸 손 놓고 볼 리가 없었다. 정한은 엄마의 치맛바람으로 풀려났으나, 외출 금지로 집에 꽁꽁 묶여있는 신세였다. 그 잘생긴 얼굴에 덕지덕지 밴드를 붙인 채로. 하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서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복잡한 천장의 패턴을 눈 감고도 그릴 수 있겠다 생각할 정도로 그것만 보고 있으면서 숨을 죽이 듯이 시간만 죽이는 중이었다.

솔직히 정한은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이해했다. 저도 딱 그런 사람이니까. 윤정한은 아직도 친구나 후배나 홍지수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든든한 마음 한편으로는 너무 두려워서 간혹 악몽까지 꾸는 성격이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 사회운동이라는 위험한 걸 한다는데 이것이 맞는 일임을 알아도 쉽게 허락할 수 없는 부모의 심정을 윤정한은 이해했다. 그래서 제 어머니를 한 번 더 상처주고 싶지 않아했다. 당장 창문을 열면 집 밖을 나갈 수 있는데도. 여기저기 맞아서 상처가 난 정한의 몰골을 보고 눈동자가 흔들리던 제 엄마의 표정을, 정한은 솔직히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두 번 보면 정말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밤이 되면 세상은 고요했다. 통금 때문에 밤은 조용했다. 숨쉬는 느낌이 들질 않아서 창문을 열어두고 있었는데, 분명 조용해야 할 밤에 소음이 들어왔다. 하얀색에 낮은 이층 주택 한 켠에 열어둔 창으로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에서 소리가 반대로 들어왔다. 윤정한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아래서 홍지수가 윤정한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윤정한!!!”

홍지수?!”

 

 

당장이라도 사랑한다고 말할 것 같은 분위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된 것 같은 장면에 홍지수가 소리쳤다. 야 이 멍청아!!!! 윤정한의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너는 내 말은 말 같지도 않아? 아니면 미련한거야?”

 

 

홍지수가 꾹 눌러왔던 말을 터트렸다. 솔직히, 윤정한을 만나면 제일 먼저 보고싶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잘생긴 얼굴 곳곳에 큼지막한 밴드가 붙여져서는 입술도 터져있고 한쪽 눈도 은근히 부어있는게 너무 속상해서 꾹 참았던 화가 먼저 튀어나와버린 것이었다. 혼자서 모든걸 책임지려 하지 말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네 곁에 있어주겠다고. 네가 나에게 그런 것처럼 나도 너에게 그러겠다고. 그랬는데도 윤정한이 제멋대로 행동한 것에 홍지수는 너무 속상하고 미안했다. 홍지수는 인쇄소의 석철 아저씨가 정한을 도와주다 끌려가서 더이상 걸을 수 없게 된 것도,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싶어 삼수까지 해서 의대에 들어온 전원우가 군인의 머리를 내리친 것도, 역사에 남아보자며 제일 크게 파이팅을 외치던 찬이가 자기도 시위에 참여하고 싶다는 동생에게 전화로 울면서 말렸다는 것도 전부 정한이 자기 잘못이라고 짊어지고 있는 꼴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홍지수는 윤정한이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윤정한네로 달려갔다. 제 자취방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뛰면서 홍지수는 홀가분함을 느꼈다. 숨이 차야하는데 오히려 숨통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홍지수가 아래에서 크게 소리쳤다. 뛰어내려! 내가 받아줄게! 그러면서 두 팔을 쫙 벌렸다. 그 모습에 윤정한은 가슴이 꼭 일렁이는 것 같았다. 파도를 타는 것처럼, 너무 일렁이는 탓에 토할 것만 같았다. 심장이 고장난 것처럼 홍지수한테 이끌린다. 홍지수한테 안기고 싶다고, 저기만큼 안락한 공간은 없을거라고. 윤정한이 씨익 웃으면서 창틀에 올라탔다.

 

 

바보야, 안 받아줘도 돼.”

 

 

정한이 뛰어내린다. 집이 높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정한이 가뿐히 착지하자마자 홍지수가 윤정한을 끌어안는다. 홍지수가 서둘러 윤정한의 입술을 찾았다. 윤정한이 홍지수의 뺨에 부드럽게 손을 올린다. 한참을 집중하고 있다가 둘이 손을 잡는다. 통금시간을 잡는 경찰들을 피해서 둘이 달린다. 가로등만 겨우 드문드문 켜진 사람 없는 거리를 둘이 막 웃으면서 달렸다. 지수야, 나 가출 처음해봐. 이게 가출이야? 의미 없는 대화가 밤을 가로지른다. 두 사람이 사랑과 낭만이 담긴 동방으로 도망쳐온다.

능숙하게 문을 따서 두 사람이 들어와 홍지수를 빨간 소파에 눕히고 그 위로 정한이 올라탄다. 그리고 홍지수의 윗옷 단추를 하나씩 툭툭 벗겨내려 하는데

.

소파가 무너진다.

 

 

씨발

?”

 

 

무너져내린 낡은 소파 위에 어정쩡한 자세로 누운 두사람이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다 또 웃음이 터진다. 멈출 생각이 없다. 밤이 충분히 긴데 두 사람의 웃음이 더 길다.

 

 

 

 

 

 

 

 

 

 

 

 

아침에 동방 문을 연 승관이 아주 경악을 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소파에 둘이 어정쩡한 자세로 꼭 껴안고 잠들어있는 모습은 말그대로 진짜 난장판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승관은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꾹 참고 윤정한!! 하고 소리쳐서 두 사람을 깨웠다. 큰 소리에 깬 정한이 부스스한 상태로 눈을 지푸리면서 몸을 일으키자 그 위로 승관이 정한을 꼭 껴안는다. 이 인간아, 내가 못살아 진짜! 그러는데 목소리가 떨리는게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지금 승관의 울먹이는 표정이 그려졌다. 승과니, 잘 있었어? 그러는데 승관이 대답 대신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형 걱정하느라 하나도 못 지냈다 어떡할래. 그러면서. 그 옆으로 막 잠에서 같이 깬 지수가 마른 세수를 하면서 입을 열었다. 쟤 너 끌려가있는 동안에 우리가 썼던거 다 필사했어. 쟤 명필이야. 명창에 명필. 처음에 소파 시트를 뜯어냈을 때 흰 종이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빼곡하게 적힌 대자보를 승관이 울면서 다 옮겨서 다시 반듯하고 예쁜 글씨로 썼다는 것이다. 내가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어어어, 하면서. 부승관의 귀가 빨개져서는 아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라며 소리를 꽥 질렀다.

뒤늦게 동방에 들어온 지훈과 석민도 돌아온 정한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 안겼다. 석민은 몰라도 지훈은 절대 먼저 안아주거나 애정표현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오죽 반가웠으면 정한을 발견하자마자 도도도 뛰어와서 정한을 안아줬을까. 밴드부 식구가 전부 모였다. 지훈이 씨익 웃었다. 드디어 베이스까지 같이 연주할 수 있겠네. 축제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연습 빡세게 해야해.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100년 뒤에는 세상이 바뀌어 있을까? 석민의 말에 전부 웃음을 터트린다. 100년은 너무 먼데. 지훈이 드럼스틱을 두드린다. , , , . 동방에서 경쾌한 음악소리가 울려퍼진다. 열어놓은 창 밖으로 기분 좋은 바람을 타고 밖으로 실려나간다.

 

 

 

 

내가 네 곁에 있을게

세상의 끝자락에서도

초록의 사막화에서도

 

 

내가 네 손을 잡을게

어떤 시련의 순간도

영원과 영겁의 찰나도

 

 

 

 

Stand by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