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궤도
#우주SF #혁명물 #로맨스 #청게 #캠게 #BADCLUE #센티넬버스 #판타지 #네트워크수산 #새드 #HEAVEN #동화 #인외 #미확인장르 #아포칼립스 #스포츠 #운동권 #퇴마물 #리얼물 #종교 #환생 #공전궤도


천사기연

대지 1+벤.jpg

 

 

 

01.

 

안녕하세요. 혹시 천사를 믿으시나요? 홍지수는 지금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다행히도 상상만 했다. 실제로 그러다가는 사이비 취급받아 대답은커녕 이 새끼는 뭐지 하는 눈빛만 한 다발로 받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홍지수는 차라리 누군가가 제게 너는 천사를 믿느냐고 물어봐 주었으면 했다. 물론 대답하기엔 난감하다. 아니 그게 믿긴 하는데... 이름마저 여호수아의 영문 표기인 조슈아인데다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자를 믿었으나 천사를 믿진 않았다. 하나님의 사자=천사 아니냐고? 아니 그게 그게 아니라...

 

 

 

"너 또 이상한 생각하지 홍지수."

 

 

 

그래, 제 눈앞에서 말을 거는 저 애 말이다. 머리는 새하얀 백금발에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그 밑에 자리한 커다랗고 쌍꺼풀이 짙지만 조금 피곤해 보이는 눈, 피골이 상접해 푹 꺼진 볼과 조금 도드라진 광대까지 조화롭게 어울려 진짜 천사를 상기시키는 얼굴을 가진.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천사라 믿을 수밖에 없는 새하얗고 부드러운 날개가 등 날개뼈 부근에 자리 잡고 있는 애. 같이 살지만 풀네임은 몰라서(존나 불공평해) 편의상 한 or 하니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쟤는 뭔데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날개를 가지고 있냐고?

 

 

 

"여기 사람들 종특이라니까."

 

"그렇다기엔 밖에 나가서 눈 씻고 찾아봐도 날개 달린 사람은 너밖에 없는데 한아."

 

"근데 나 진짜 거짓말하는 거 아냐."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 그러니까 이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 상황을 조금 정리해보자면 약 한 달 전 쯤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구인 조슈아 지수 홍... 그러니까 홍지수는 평범한 어느 날 자신은 응모한 기억조차 없는 이벤트에 당첨된다. 물론 일정 금액 이상 구매 시 자동 응모 이벤트였지만 홍지수가 그걸 알았을 리가. 하여튼 운 좋은(?) 홍지수는 무려 1등 상품 우주 여행권을 받게 된다. 세상이 기술의 혁신을 일으키고 우주 산업이 뒤집힐 만큼의 엄청난 발견을 해 하루 만에 달은 물론 수광년 멀리 있는 별에 갈 수 있는 날이 왔다 해도 평범한 회사원 홍지수하고는 관련이 전혀 없었다. 그러면 뭐 하니, 나는 내일도 출근해야 하잖아. 아무튼 그랬는데... 뭐 그렇게 된 거다. 사실 별거 없이- 는 아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이게 끝이다. 우주'여행'권이지만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해 충동적으로 회사 사표 내고 집 빼고 그렇게 지구 생활 청산한 뒤에 이 별에 눌러앉은 건 비밀. 숙박도 홈스테이로 해주고 여행도 언제까지 다녀오라는 기간도 없었기에(이건 아직도 의문이다) 이 정도면 하늘이 내게 점지해주신 건 아닐까- 하며 왔지만, 홈스테이 호스트가 날개 달린 천사일 거란 건 상상도 못 했지 난.

 

 

 

"그러면 왜 너만 날개가 있냐니까."

 

"진짜 알고 싶어? 너 들으면 울지도 모르는데..."

 

"뭐래."

 

"지수야."

 

"."

 

"나는 날개가 없으면 죽어."

 

 

 

마시던 커피에 사레가 들렸다. 한이는 싱긋 웃으며 날 쳐다봤다.

 

 

 

 

 

 

 

 

 

 

 

날개가 없으면 죽긴 개뿔. 그 얼굴로 목소리 깔고 아련하게 말하니까 또 넘어갔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별 사람들 종특이 날개 달린 건 맞는데, 요즘은 그냥 어릴 때 다 날개를 제거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날지도 못하는 날개라(이게 날개냐?) 달고 있으면 미관상으로만 예쁘고 좋을 게 하나도 없긴 하네. 그리고 요즘은 지구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와서 살다 보니 혼혈들이 많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도 있다고 했다. 물론 아직 길거리에 돌아다니면 날개가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긴 하나 대부분 어린아이들이나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다. 그리고 한이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날개가 커서 제거 수술도 못 한다고 말하며 날개를 손으로 훑었다. 자칫 잘못하면 과다출혈+α로 죽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한이의 얼굴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날개는 유난히 새하얗게 빛났을까. 그리고 홍지수는 한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 날개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날개가 싫어?"

 

"아니? 난 좋아."

 

"그게 뭐야, 날지도 못하는데."

 

"예쁘잖아."

 

"...."

 

 

 

홍지수가 조막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다시 딸려 나오는 한이의 물음.

 

 

 

"그리고 나한테 잘 어울리지 않아?"

 

 

 

홍지수는 한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팔에 고개를 묻었다. 아무래도 홍지수는 한이에게 날개가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 정말 잘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 애만이 날개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이는 그런 홍지수의 마음은 모르고 그렇게 대답하기 싫냐며 장난스레 웃었다.

 

 

 

 

 

 

 

 

 

 

 

02.

 

한이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한다.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우주에는 이렇게 예쁘게 생긴 사람도 있구나- 였고, 그다음은 천사인가?-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싸가지 없네, 였지. 물론 그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첫 만남에 자기소개도 안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조슈아는 소파에 앉아 지구에서 들고 온 트윅스를 까먹으며 부엌 찬장을 정리하는 한이를 바라보았다. 만난 지 얼마나 됐더라, 이제 이 주 좀 넘었나?

 

 

 

"조슈아야."

 

"."

 

"데이트할래?"

 

 

 

... 홍지수가 황당한 얼굴로 한이를 쳐다봤다. 한이는 평범한 말도 이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너 진짜 웃긴다.

 

 

 

"지수 너 여기 제대로 구경한 적 없지?"

 

"그렇긴 하네. 근데 지구랑 별다를 게 있나?"

 

"그 말을 네가 하면 좀 이상한 거 알아?"

 

"그런가."

 

"나랑 놀자아."

 

 

 

한이는 어느새 부엌 조리대에서 양손을 턱에 괴고 날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여기 온 뒤로 너무 집에만 틀어박혀 있긴 했어. 종일 잠만 자고... 왜 그랬더라...

 

 

 

"그래."

 

 

 

홍지수는 트윅스 껍질을 꼬깃꼬깃 접으며 대답했다. 한이는 좋다고 또 미소 지었다.

 

 

 

 

 

 

 

 

 

 

 

시내는 지구랑 별다를 게 없었다. 지구랑 가장 비슷한 환경이라 쌍둥이별이라고 알려져서 지구 사람들도 많이 이주 오는 곳이니 당연한 건가. 날개를 제외하고는 지구인이랑 다를 거 없이 생겼는데 외계인이란 것도 믿기지 않았다. 사람들 피 색깔도 똑같은가?

 

 

 

"한아 네 피는 무슨 색이야?"

 

"넌 그런 무서운 질문을 하고 그러냐."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그건 됐구 여기 와서 좀 구경해봐. 너 이런 거 좋아한다 아냐?"

 

 

 

한이가 가리킨 곳에는 알록달록한 원석 비즈들이 있었다. 우와, 동대문 온 것 같아. 여기에도 진짜 있을 건 다 있구나. 홍지수는 큰 손으로 작은 비즈들을 만지작거리며 구경했다.

 

 

 

"예쁘다. 지구엔 없던 것도 많네."

 

"그치, 딴생각 그만하고 둘러봐봐."

 

"근데 너 나 비즈 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난 다 알지."

 

 

 

한이가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대답했다. 그 말 한마디에 느껴진 왠지 모를 이상한 기시감. 뭐야 이거. 한이의 눈동자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가 얘한테 말해준 적이 있었나.

 

 

 

"네 방에서 비슷한 거 봤어."

 

"."

 

"사고 싶은 거 고르면 계산해줄게."

 

 

 

고마워. 왜인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요새 너무 예민한가. 손안에서 작은 비즈들이 쏟아져 내렸다.

 

 

 

 

 

 

 

 

 

 

 

저녁이 되니 거리는 사람들로 더욱 붐볐다. 어쩌다 보니 한이와 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걷는 중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한이에게 묻고 싶었으나 누군가와 문자를 하느라 휴대폰에 정신이 팔리고 있었다. 그냥 집에 가자고 할까? 이 정도면 나름 잘 논 것 같은데. 간만에 밖에 나온 홍지수는 한이에게 끌려다니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즐거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 됐다."

 

"? 뭐가-,"

 

 

 

한이가 제 손을 덥석 잡고는 어디론가 끌었다. 날개에 가려 한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한이의 손을 잡고 도착한 곳은 시내 조금 구석진 곳에 있는 바였다. 위치가 그리 좋지 않은데도 가게 내부에는 손님들이 곳곳에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나름 유명한 곳인가 봐, 분위기 좋다. 홍지수는 처음 오는 공간임에도 왜인지 모르게 뭔가 익숙하단 느낌이 들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칵테일 좋아해?"

 

"몇 번 먹어보긴 했는데 기억은 잘 안 나."

 

 

 

한이는 내게 몇 가지를 물어보더니 자연스럽게 바텐더에게 주문까지 마쳤다. 많이 와봤나 보네. 홍지수는 보랏빛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물든 한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왜, 잘생겼어? 하고 말하는 눈빛에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거뒀다. 웃겨 진짜. 별 볼 일 없는 작당을 나누다보니 어느새 주문한 칵테일이 나왔다.

 

 

 

"지수야."

 

"?"

 

"."

 

 

 

- 잔들이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칵테일 먹는데 짠이 뭐야, 무드 없어. 홍지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이름도 모르는 옅은 붉은빛의 칵테일을 마시니 살짝 상큼한 단맛이 났다. 마음에 들어? .

 

간만에 알코올이 들어가니 금방 얼굴이 달아올랐다. 피곤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빨리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칵테일 도수가 좀 세거나.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제 칵테일을 홀짝이는 한이를 보니 괜히 또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의 작은 소음에 묻혀 가며 잔이 반 조금 더 비워졌을 때 홍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만."

 

 

 

 

 

 

 

 

 

 

 

바깥은 금방 어둑해져 골목엔 고장 난 가로등이 깜박거렸다. 홍지수는 주머니 속 구겨진 담뱃갑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지구에서도 그다지 자주 피진 않았는데 이 별에 오고 나서는 처음 태우는 담배였다. 왜 피냐고 묻는다면... 그냥 그러고 싶어서. 기분이 구리다거나 스트레스받은 것도 없는데 그냥 그랬다.

 

 

 

"여기 금연 구역인데~."

 

 

 

옆을 돌아보니 언제 나왔는지 한이가 제 옆에 서 있었다. 저 큰 날개는 언제쯤 제 존재감을 숨길 수 있으려나.

 

 

 

"...미안."

 

"말만 번지르르하네, 홍지수."

 

 

 

미안하다고는 하면서 담배를 끄진 않는 저를 보고 한이가 타박하듯 말했다. 물론 얼굴은 또 웃고 있어서 장난으로 내뱉은 말이란걸 금방 알 수는 있었다.

 

 

 

"담배 피는 줄은 몰랐는데."

 

"그냥, 가끔...?"

 

"십자가 피어싱 달고 의외네."

 

"한 대 필래?"

 

"됐거든."

 

 

 

한이는 내 옆에 쭈그려 앉아 무릎 위에 모은 팔에 제 얼굴을 기대며 날 빤히 쳐다봤다. 물론 나도 한이의 날개가 벽이나 바닥에 닿아 더러워지면 어쩌나 싶어 쳐다보는 건 마찬가지라 또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나왔어? 너한테 담배 냄새 배면 안 되는데... 골목 사이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 하얗게 내리쬐는 가로등, 유독 별이 많이 보이는 밤하늘, 뿌옇게 올라가는 담배 연기와 바닥으로 떨어지는 담뱃재, 그리고 옆에 있는 날개 달린 천사까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반쯤 타버린 담배를 바닥에 비비곤 신발 뒤창으로 꾸욱 밟은 뒤 옆에 있는 작은 양철통에 버렸다. 여기 금연 구역 맞아? 그대로 한이 옆에 쭈그려 앉아 손을 탈탈 털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으니 한이가 말을 걸어왔다.

 

 

 

"지수야."

 

"."

 

"이거 선물."

 

 

 

한이가 제 셔츠 주머니에서 뭔갈 꺼내더니 카드 건네주듯 제게 내밀었다. 혹시 이거 주려고 따라 나온 건가. 홍지수가 받은 것은 겉에 자잘한 큐빅이 박힌 작은 링 피어싱이었다. 한이는 제 목덜미를 쓸면서 말했다.

 

 

 

"피어싱 자국 있는데 십자가 말고는 안 하고 다니길래, 생각나서 샀어."

 

","

 

"잘 몰라서 그냥 무난한 걸로 골랐는데.

 

"...그렇구나"

 

 

 

홍지수는 피어싱 하나에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이게 뭐라고, 그냥 선물 준 것뿐인데. 자신과는 다르게 깨끗한 한이의 귀를 보면서 홍지수는 아침에 곧 막힐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던 제 피어싱 자국을 만지작거렸다.

 

 

 

"고마워 한아."

 

"."

 

 

 

한이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이제 슬슬 갈까. 한이의 얼굴 위로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이 드리워 잠깐 빛났다 사라졌다.

 

 

 

 

 

 

 

 

 

 

 

03.

 

"누구야 형, 새 애인?"

 

"그냥 같이 사는 애야."

 

"뭐래, 저번에도 같이 사는 사람이라 해놓고 연애하는 것처럼 굴었으면서."

 

"아니잏, 진짜로 안 사귀었다니까?"

 

"네네~."

 

"일방적인 구애였지."

 

 

 

뒷말은 못 들은 척 승관이 글라스를 닦는다. 구애는 개뿔, 네 전 애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편의상의 호칭이다)이 나보고 뭐라 말했는지 넌 알기나 하냐 윤정한? ...근데 윤정한이라면 말 안 해도 대충 다 알 것 같긴 해서 더 얄밉다. 어쩌자고 자꾸 사람을 들이는 건지.

 

 

 

"너 방금 속으로 나 욕했지."

 

"아니거든."

 

"근데 사 개월이면 나도 혼자서 힘들었단 말이야."

 

"출근도 잘 안 하면서 뭐가 힘든데."

 

"넌 모른다 승관아~."

 

 

 

또 구시렁대며 눈으로 윤정한을 욕한다. 근데 뭐 진짜 내가 모르는 부분들은 많겠지. 승관이 윤정한을 봐온 지는 3년 조금 덜 됐나, 여튼 윤정한의 '한이' '하니' 같은 별칭을 제외한 진짜 이름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승관도 이 별에서 난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윤정한을 처음, 그니까 이 바에 면접 보러와서 윤정한을 마주했을 땐 천사라고 착각도 했었다. 날개 달린 사람들은 종종 봤지만 윤정한은 진짜 천사 같았지. 물론 그 뒤로 면접 붙고 친해졌을 때는 그냥 악덕 사장으로 승관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지만... 말은 이렇게 해도 승관은 정한이 어딘가 채워져 있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이걸 뭐라 표현해야 하지? 결여? 결핍?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거창한데. 자기도 모르게 사랑을 회피했고 꼭 그걸 잃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형 어쩌면 좋지 승관아. 내가 물을 말인데. 평생 이렇게 사는 거 아냐?

 

 

 

"형이랑 비슷한 사람을 한 번 찾아봐."

 

"잘 모르겠어."

 

"더 지내다 보면 알겠지."

 

 

 

승관은 정한이 자꾸 손안에서 만지작거리는 피어싱을 바라보았다. 귀를 뚫지도 않은 윤정한의 것은 당연히 아닐 테고 아까 그 사람 주려고 산 건 가보네.

 

 

 

"그냥 지금 나가서 빨리 주지?"

 

"...그래야겠다. 승관아 고마워."

 

"뭘 또."

 

 

 

윤정한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아아, 미련한 윤정한. 제 주제도 모르고 또 이름 모를 사랑을 시작해버린 윤정한. 제발 이번엔 좀 사랑해보길.

 

 

 

 

 

 

 

 

 

 

 

04.

 

"너 자연 금발 아니었어?"

 

"아닌데?"

 

 

 

그건 늦은 오후 함께 집에서 영화를 보며 살짝 버석버석한 한이의 머리칼을 헤집다가 발견한 사실이었다. 홍지수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한이가 제 정수리를 만지작거렸다. 벌써 뿌리가 자랐나, 하는 손짓이었다. 얼굴 때문인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냥 그렇게 태어난 줄 알았지. 날개도 있는 마당에 안 될 건 뭐람. 홍지수는 약간 밝게 염색한 한이의 눈썹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간지러워 지수야.

 

 

 

"너 얼굴로 사람 홀리는 거 진짜 잘한다."

 

"그렇게 느끼면 그런 거겠지."

 

"재수 없어."

 

 

 

홍지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웃었다. 한이도 따라 웃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05.

 

한이는 홍지수가 우리 무슨 사이야? 하고 물으면 한참 동안 정적에 있다가 딴소리를 하며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래서 홍지수는 진작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을 포기했다. 애초에 할 생각이 없었기도 하고. 그냥 한이의 책장에 있는 흔해 빠진 클리셰의 로맨스 소설을 읽다가 떠올린 것이었다.

 

 

 

"한아."

 

"."

 

"?"

 

"아니."

 

"이 책 네가 산 거야?"

 

 

 

책으로 얼굴을 덮고 누워있던 한이가 슬쩍 얼굴을 들었다. 커다란 날개가 이불처럼 상체를 뒤덮고 있었다. 책 제목을 확인하더니 아, 하곤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 뒤통수가 배게 위로 풀썩 엎어졌다.

 

 

 

"예전에 같이 살았던 애가 두고 간 거네."

 

"예전에?"

 

"."

 

"...남자?"

 

"아니, 여자."

 

 

 

여자랑 같이 동거했다고? 지금 홍지수는 한이의 말에 자신이 충격을 받았나- 생각했다. 옆을 돌아보니 한이는 태연하게 양손에 휴대폰을 들고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손에 힘이 빠진 듯 휴대폰을 놓쳐 한이의 얼굴로 떨어졌다. 모서리가 정확히 밑 입술을 찍으면서 한이가 맥아리 없이 짓눌린 비명을 냈다. 홍지수는 붉어진 한이의 입술을 보며 제 입 안에서 피 맛이 나는 것처럼 느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다 불현듯 얼마 전에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웬 머리 끈?'

 

'나 머리 길었을 때 받은 거. 옛날 사진 보여줄까?'

 

 

 

그 머리 끈. 노란 고무줄도 아니고 마트에서 흔히 파는 검은색 머리 고무줄도 아닌 보라색 실크 재질의 헤어 스크런치. 그것도 그 애가 준 거겠지. 홍지수는 한이에게 묻고 싶었다. 그 여자애랑은 무슨 사이였어? 걔도 지구인이야? 얼마 동안 같이 살았어? 언제 떠났는데? 머리끈은 왜 아직 가지고 있었어? 좋아했어? 아니면 사랑했어? -갓 연애 시작한 어린애들도 요즈음은 하지 않을 만한 그런 유치한 질문. 아니, 나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 왜 이러고 있는 건데? 홍지수 사실 알고 있었다. 진짜로 상관이 없었다면 여태껏 해왔던 홍지수의 모든 말과 행동들이 갈 곳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돈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더 외면 중이라는 것을.

 

 

 

"지수야."

 

"."

 

"우리는 그냥 우리지."

 

 

 

뜬금없이 질문도 뭣도 아닌 애매한 말.

 

 

 

"다른 거 아니고 그냥... 너랑 나."

 

"..."

 

"난 그게 좋아."

 

 

 

그게 무슨 말이야 한아.

 

 

 

 

 

 

 

 

 

 

 

06.

 

한아, 네가 이 바 사장이었어? 너 놀고먹는 백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그때 가게에서 익숙한 느낌이 든다 했더니 향이 묻어서 그랬네. , 그럼 승관 씨는 한이랑 일하는 거예요? 힘들겠다...

 

한아, 혹시 이거 도수 높은 거야? 나 술 별로 못 마시는데. 얼굴은 원래 술 먹으면 좀 그래. 기다릴 테니까 집 같이 가자.

 

한아, 나 생각 정리할 게 있어서 왔는데, 너 때문에 다 망했어. 어딜 가도 네가 있네.

 

한아, 넌 왜 이렇게 사람을 외롭게 만들어.

 

한아, 지금 무슨 말 하고 있어? 아니, 너 말고 나. 사실 잘 모르겠어.

 

 

 

 

 

 

 

 

 

 

 

07.

 

홍지수는 이카로스를 떠올렸다.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에 닿으려다 날개가 녹아내려 에게해에 추락해 죽은 그리스 신화 속 인물. 이카로스와 한이의 공통점은 이랬다. 1. 날개를 달았다. 2. 추락했다.

 

그러니까, 승관의 말로는 그건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라고 했다. 사고가 일어날 당시 홍지수는 집에서 조금 늦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요란한 구급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뜸과 동시에 휴대폰에서는 한이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뒤척이다 휴대폰을 집어 든 순간 받지도 못한 전화가 뚝- 끊겼다. 다시 잠을 청하려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또 걸려 오는 전화. 그리고 홍지수가 전화를 받자 들려오는 건 나른한 한이의 목소리가 아닌 다급한 승관의 목소리.

 

 

 

"여보세요? 홍지수?"

 

"너 승관이 아냐? 왜 반말-,"

 

"지금 윤정한 사고 났는데 병원 주소 찍어줄 테니 빨리 와!!"

 

"?"

 

 

 

승관이 평소답지 않게 앞뒤맥락상황설명 다 잘라먹고 말했다. 윤정한이 사고가 났다고? 윤정한이 누군데,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 하지만 홍지수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임에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윤정한, 정한, 한이, 한아, 한이야, 하니야.

 

 

 

"한아,"

 

 

 

홍지수는 지독하게 평온한 얼굴로 허공에 대고 한이의 이름을 불렀다. 숨소리같이 짧은 음절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바깥은 비가 쏟아지듯 내리고 있었다.

 

 

 

 

 

 

 

 

 

 

 

', 왔어? 미안 형, 일단 설명 듣고 여기 사인 좀 해줘. , 거기 보호자 란에. 다른 건 내가 다 써놨어. 여기요 선생님. , 네 감사합니다. 수술 동의서, 생각보다 너무 많이 다쳐서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대. 여기는 지구랑 다르게 등록만 똑바로 잘하면 동거인도 보호자 범위에 속하니까. 미안, 비도 많이 오는데 갑자기 불러내서. 일단 좀 앉자, 정신없지. ...가게 옥상에서 떨어졌다는데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도 보지는 못했어. 어쩌다가 떨어졌는지는 모르는데 사고인 건 확실하대. 원래 그 정도 높이에서 이렇게까지 다칠 일은 아닌데, 잘못 부딪히기도 했고 뭣보다 날개 때문에 더. 어떡하지 형, 윤정한 안 죽겠지? 아냐 안 죽을 거야. 안 죽어...'

 

 

 

승관이 비에 쫄딱 젖은 차림새로 말을 쏟아냈다. 고개를 푹 숙여 제 머리를 감싸 쥐고 뭐라 더 중얼거리긴 했으나 홍지수에게 잘 들리진 않았다. 홍지수는 대충 승관이 한 말을 이해하긴 했지만 아직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지 정신이 멍했다. 현실감이 없었다. 손에 쥐고 있는 우산에서 빗물이 손을 타고 뚝뚝 흘렀다. 비가 식어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소란스러운 주변 소리가 그대로 귀에 꽂혔다. 사람들의 움직이는 발걸음, 하얀 대리석 바닥, 피에 젖은 승관이의 스니커즈와 옷이 시야에 들어찼다. 코를 찌르는 병원 소독약 냄새에 섞인 옅은 비 냄새. 모든 게 다 느껴지는데 한이만 와닿지 않았다.

 

 

 

 

 

 

 

 

 

 

 

한아, 천사는 추락해도 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지수야 너 그거 편견이야.

 

 

 

 

 

 

 

 

 

 

 

한이는 죽지 않았다. 날개도 그대로였다. 이카로스와 한이의 차이점은 그랬다.

 

 

 

 

 

 

 

 

 

 

 

08.

 

안녕 지수야? 나 한이야. 왜 갑자기 편지를 쓰냐고 물으면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 네가 떠나서 그런 거 아닐까? 물론 네가 다시 이곳에 온다면 이 편지는 수취인 부재, 혹은 불명으로 영영 전해지지 못하겠지. 우주 우편은 시간이 꽤 오래 걸리니까 말이야. 나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 적힌 말들은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들이자 네게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말들이야. 나는 글재주가 없어서 횡설수설할지도 모르지만 늘 그랬듯 '한이는 이상해' 하고 넘겨주면 나는 마음이 편할 것 같아. 혹시라도 그러지 못한다면 그냥 편지를 덮어줘. 그리고 네가 보고 싶을 때 봐.

 

난 사실 네가 이 별에 오기 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어. 네가 자주 애용했던 소품샵인가 잡화점인가(나는 아직도 이 가게가 뭘 파는지 모르겠어) 여튼 그 가게 있잖아. 이벤트 1등에 당첨되어 우주 여행권을 줬던 그 가게. 사실 내 여동생이 그 가게 주인이야. 그러니까 네가 1등에 당첨된 것도, 이 별에 오게 된 것도, 이상하게 숙박을 홈스테이로 잡아준 것도, 그 집 호스트가 나였던 것도 모두 다분히 의도된 거였다고. 동생은 유별나게 이 별에 차렸던 가게를 그 많고 많은 행성 중에서도 지구를 골라 똑같이 차렸지. 그래서 내가 너를 알게 됐고. 원래는 온라인 쇼핑몰만 있었다가 오프라인 매장이 오픈했었잖아, 그래서 이벤트를 열었고 나의 착한 동생은 내 부탁을 들어주었어. ,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내가 널 스토커 짓 하고 그런 건 아니야. 동생 일을 자주 도와주다 보니까 단골들 이름 정도는 외워두고 있었고 그때까지도 네 얼굴은 몰랐으니까. 난 그냥 내 입안에서 굴러가는 '홍지수'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널 고른 것뿐인데, 동생은 나한테 혹시 사람 붙여서 호구조사라도 했냐고 물어봤었다? 그만큼 네가 나랑 어울려 보였나 봐. , 이런 말은 좀 그런가. 하여튼 그랬어. 네가 비즈 좋아하는 것도 그래서 알았던 거야.

 

지구... 그러니까 LA는 어때? 네 고향이라고 말해줬잖아. 나한테 LA에 대해서 말해줬던 거 혹시 기억해? 네가 어렸을 때 기억하던 모습과 다를 것 같아서 떠나온 이후로 못 갔다고 했었지. 그래서 기억도 추억도 없는 이 별에 왔다고 했고. 널 우리 집에 데려오고 나는 한국에서 네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어. 가끔 보면 넌 꼭 네가 떠나왔으면서 무언갈 떠나보낸 사람처럼 굴었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난 그런 너를 보며 종종 슬퍼졌어. 내가 네 외로움에 가세한 것 같아서 말이야. 이 별에서 완전히 행복해지지는 못하더라도 외롭진 않고 싶었을 텐데. 뭐가 잘못되었던 걸까?

 

이제 와서 말하지만 난 나의 날개를 좋아하지 않았어. 미안해, 거짓말해서. 내 등에 달린 날개는 그냥 거추장스럽고 날 이 별에 묶어놓는 족쇄일 뿐, 날지도 못하고 어떨 땐 꺾이기까지 했지. 비 오는 날엔 습기와 미처 우산으로 막지 못한 빗물 때문에 걷는 것도 버거웠어. 그래서 그날 떨어질 때 차라리 확 잘못돼서 어쩔 수 없었다는 명목으로 날개를 떼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근데 네가 날 바라보던 눈빛이 생각나서, 네가 내 날개를 쓰다듬는 그 시간과 순간의 낭만들이 생각나서 마음을 고쳐먹었어. 난 날개가 없게 된다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보면 넌 네게 살 이유가 되어준 거지. 이런 말은 네게 너무 무거울까.

 

있지 지수야, 넌 내가 네게 좋지 않을 거란 걸 알았지? 내가 너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 난 네가 떠나는 게 무섭지 않아. 그렇게 보였으면 좋겠어.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옥상에서 떨어져 사고 났던 거 기억나? 하마터면 죽을 뻔했었는데 그때 네가 내게 무섭지 않았었다고 말해줬었잖아. 지금 내 심정은 그날 네 마음이랑 언뜻 보면 비슷한 것 같아. 우리는 비슷해 보였지만 속을 파고들면 다른 부분이 너무 많았지. 근데 또 어떻게 보면 지독하게 닮기도 했고. 아마 지금도 그럴 거야. 그래서 우린 만날 수도 헤어질 수도 없어. 너무 복잡하다. 그렇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끝일 거야, 아마. 적고 나니 생각보다 별거 없네. 더 생각나면 나중에 또 말해줄게. 난 항상 너 보고 싶더라.

 

 

 

추신: 네가 피우는 담배 진짜 독하다.

 

 

 

 

 

 

 

 

 

 

 

09.

 

한아, 넌 진짜 이기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