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한다고 했잖아. 좀 믿어."
듣고 있긴 하는 건지 우악스럽게 턱을 잡아 입을 벌리게 만든다. 아, 잠깐. 심술 피우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참아주는 중이다. 이게 짐승이 교미하자 조르는 거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또 거기에 어울린다. 자신을 벽에 밀어붙인 그의 머리채를 잡아 장단에 맞춰주며 혀를 질척이게 섞었다. 아랫입술을 부러 아프게 깨물기도 했다. 그냥 넘어가나 했더니 기어코 침대에 자빠트려 버린다.
"윤정한, 정한아."
*
긴 복도를 지나는 한 인영은 그에게 모든 사람들 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 장본인이 아침 뉴스 주인공이라면 더더욱. 누가 봐도 '나 빡쳤어요' 하는 표정으로 차마 뛰진 못하고 그에 준하는 속도로 두 다리에 감정을 가득 담아 긴긴 복도를 지나고 나면 그렇게도 빨리 도달하고 싶었던 국장실의 문을 열어젖힌다. 구경꾼들은 알아서 시선을 거두고 그 자리를 재빠르게 피하기 시작했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이건 좀 놓고 얘기하죠. 나이는 어려도 내가 그쪽 상관인데."
"국장님이 언제부터 저랑 페어 맺은 가이드였는지 궁금한데요."
"오늘부터."
처음 기세와는 다르게 하극상을 그닥 즐기지는 않는 지성인답게, 훈련 잘 받은 군인답게 홍지수는 주먹을 움켜쥔 제 손을 웃는 얼굴로 툭툭 치는 손에 잡고 있던 제 상관의 멱살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나 가이드 맞아요."
"말이 안 돼. 그럼 처음부터 여기 소속이었어야죠. 갑자기 낙하산 타고 내려온 국장부터 시작할 게 아니라."
"공교롭게도, 내 피가 반은 황금색이라."
"......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요?"
"홍 소령 황실 좆같지 않아요?"
같이 무너트려 볼 생각 없나? 아니면 권력을 손에 쥐어볼 생각은? 나는 우리가 함께라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입꼬리만 당겨 웃고는 눈은 무미건조하게 저를 뚫을 듯이 쳐다봐 온다. 얼마 전 누구의 줄을 타고 내려왔는지도 모를 베일에 싸인 신임 국장 박정한은, 제가 타고 내려온 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지지대를 없애버릴 작정을 하고 내려온 포식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큰 먹잇감을 물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
박태산, 그러니까 현 대한제국 황제는 잘 만들어진 이미지 뒤에 그 이면을 잘 숨기고 살아온 대표적인 예라고 했다. 둘 있는 아들을 어려서부터 학대해 왔으며, 사고로 죽었다고 알려진 첫째 왕자는 사실 그의 학대로 인해 좋지 않은 선택은 한 거라고. 둘째 아들은 그로 인해 황위 계승을 포기해 궁을 나선 거라고 했다.
대를 이을 직계 아들이 다 떠나고 하나 남은 박태산의 손자는 아직 어려서 당장 황자로서 역할을 맡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 때문에 말이 유학이지 유배를 보내져 죽은 듯 살고 있던 자신의 혼외자식인 정한을 불러다 NSA(National Sentinel Agency) 국장 자리에 냅다 앉혀버렸다.
NSA는 대한제국 국방력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기관으로 하는 일의 특성상 국내 안팎의 주요 정보들을 꿰고 있고, 근무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개인마다 특별한 능력이 발현되어 훈련받은 센티넬이 주로 이루어져 있는 기관이다. 그만큼 권력의 주축이 되는 기관에 바다 건너에서 살던 혼외자를 불러다 앉힐 만큼 박태산이 급한 모양이었다.
"홍 소령님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나도 모르겠어."
"형이 모르면 어떻게 알아."
"박정한 국장이 가이드로 조회가 되긴 해?"
"블락 걸려있어."
"... 페어 승인이 이미 나 있다고?"
"응. 국장 권한으로 절차 생략하고 바로 패스시켰네."
담당 연구원인 원우를 찾아와 박정한에 대한 정보열람을 요청했는데 아무래도 국장이니만큼 보안등급을 뚫을 수 없었다. 기사로 먼저 접한 저와 박정한의 페어에 대한 내용도 연막만 친 줄 알았더니 정말로 페어 승인을 다 해놓은 상태였다. 치밀한 거지 내부에 누가 정보열람을 해서 밖으로 샐지 모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어. 페어를 맺긴 했지만 본인이 나랑 같이 현장 뛸 거야 뭐할 거야."
"필요하면 뭐든 하죠."
"국장님이 여긴 무슨 일로...?"
"홍 소령님이랑 매칭 검사해야죠. 우리 페어 맺은 사이잖아."
"순서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 봐요?"
연구원님 지금 검사 되죠? 갑자기 연구실에 나타난 정한은 지수가 비꼬는 말은 가볍게 무시해 버리곤 그를 지나쳐 원우에게로 다가갔다. 뭐해요, 홍 소령도 이쪽으로 오세요.
"진짜 현장을 뛰겠다고요?"
"필요하면 뭐든 한다니까."
"나한테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 안 해요?"
*
"박정한 씨 훈련이라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잖아요."
"왜 없어요. 나 나름 외국에서 훈련받아서 총 잘 쏴요."
"그거로는 턱도 없어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고."
"그럼 홍 소령님이 나 지켜줘야죠. 우리 매칭률도 아주 높은데. 나 없으면 홍 소령이 손해라니까 이제?"
"그건... 됐고요. 저한테 숨기는 게 없었으면 좋겠는데."
첫 만남에서도 그렇듯 이번 대화에도 등받이에 늘어지듯 기대앉아 테이블 위에 두 다리는 쭉 뻗어 꼬아놓고, 말투도 듣는 표정도 남 일처럼 시큰둥하게 대하던 정한이 지수의 그 말에 자세를 고쳐앉았다. 언론에 내 얼굴을 알릴 거예요.
"이미 우리가 페어를 맺었다고 소문을 다 내놨으니 이제는 행동으로 보여줘야죠."
"국민들에게 신임을 얻겠다고요."
"네. 어쨌든 영웅과 그의 파트너는 다 좋아하니까."
정한의 계획은 이러했다. 대한제국 제일의 센티넬과 그의 가이드로서 활동하여 국민들의 신임을 얻고, 자신이 황가의 핏줄이라는 것을 밝힌다. 반쪽짜리지만 황위를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자신의 지지율은 올라갈 것이다. 오히려 혼외자를 여태 숨긴 것 때문에 박태산에게는 타격이 있을 것이고. 자격 같은 거 따질 필요 없이 국민들은 이미 그 전에 그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동정하거나 떠받들 테니 깔끔하게 여론은 자신을 선택할 것이고, 신뢰를 잃은 황제는 그걸 무를 명분이 없다. 자신의 손자는 아직 직위를 이어받을 수 없으니까.
너무 간단한데.
"제가 필요한 이유가 딱히 없는 것 같은데요. 그냥 영웅 파트너 그뿐?"
"에이, 아니지. 홍 소령이 너무 필요하지."
또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으로 싱긋 웃는 거. 박정한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매사에 가볍게 보여서 상대방에게 얕보이는 거. 그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도록.
*
지수에게 임무가 떨어졌다. 어쩌면 이 바닥에선 흔하다고 할 수 있는 인질극이었다. 지금도 어딘가 접경 지역에서는 전쟁이 한창이고, 인질을 잡아다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협박 정도야 예삿일이다. 군 비행기로 10시간 넘게 타고 날아온 이 지역은 수많은 난민 문제와 치안 문제로 국제사회의 큰 숙제인 나라였다.
"베이스캠프에서 기다려요."
"가이드는 안 따라갑니까?"
"고도로 훈련받은 가이드들은 현장에 같이 투입되기도 하지만, 박정한 씨는 안전하게 기다리다가 나에게 이상이 생기면 투입됩니다."
아마도 처음 조국의 전투복을 입어보았을 눈앞의 남자는 이 현장과 매우 이질적이다. 남의 옷을 입은 듯 불편해 보였고, 낯선 곳에 떨어진 이방인 같았다. 불쑥 아무 말이 없던 정한이 손을 건넨다. 잡아요.
"무슨..."
"혹시 모르니까 미리 채워놓고 나가요."
"저 지금 수치 나쁘지 않은데요."
"그래서 혹시라고 했잖아요. 만땅 채우고 나가요."
하, 그래요. 지수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정한의 손을 잡았다. 등급이 높은 만큼 상성 맞는 가이드가 없던 홍 소령은 센티넬로 국가에 이바지한 14년 만에 가이딩 다운 가이딩을 받았다. 정한으로부터. 몸이 가뿐해지고 묘하게 따뜻하면서 포근한 것이 이 느낌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게 했다. 마치 겨울에 따뜻한 물로 샤워할 때 계속해서 물에 몸을 대고 있는 것처럼. 비유가 그런가.
"A동 진입하겠습니다."
정한은 지수의 가슴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서 현장을 지켜봤다. 깜깜해 시야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는 환경이라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하기 때문에 초록색으로 현장을 보고 있지만 일반인이 처음으로 특전사들의 작전을 보는 것은 나름대로의 충격이었다.
"최소 A급 센티넬 있는 것 같습니다."
감지 센티넬이 그 말을 하는 순간 지수는 걸음을 멈추고 상황을 파악했다. 감각이 예민한 센티넬들이었다. 집중만 하면 일반인들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너머까지도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근데... 들었어?"
"네. 3개, 아니 4개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맥락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인기척은 없는데 센티넬이 감지되고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보다 심각해 보이는 상황에 정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손에서 땀이 나고 있었다. 그 순간 허공에 지수가 손을 뻗는 게 보였다. 다들 피해!!!
별안간 보이지 않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며 동시에 화마가 치솟았다. 투명화 센티넬이 자신과 폭탄을 숨겼다가 지수가 눈치채 능력을 쓰니 모습을 드러내면서 폭탄의 기폭제를 누른 것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능력을 쓴 지수지만 4개의 폭탄이 한 번에 터지면서 그 위력이 가히 거대했다.
방심했다. 단순 민간단체의 인질극인 줄 알았다. 염력 센티넬인 지수는 혼자서 아군에게 퍼지는 불길과 폭탄이 터지면서 무너지는 건물을 지탱해야만 했다. 투명화 센티넬은 자신이 터트린 폭탄의 중심지에서 화마에 휩쓸려서 사라져 버렸다.
"물 속성 안 왔어?!"
"B동에 있습니다. 지금 온답니다!"
"일단 너희 먼저 이곳을 빠져나가."
"네? 하지만,"
"너희가 나가야 내가 어떻게든 할 거 아냐!!"
그 모든 상황을 화면으로만 지켜보던 정한은 다리를 떨고 있었다. 홍지수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혼자서 뭘 어쩌겠다고... 아군이 다 빠져나간 걸 확인한 지수는 억누르고 있던 화마를 최대한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억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 위로 능력을 쓰며, 달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필사적으로.
화면이 엄청나게 흔들려서 어지러울 정도로 달린 홍지수는 기어코 건물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힘에 부치는지 숨을 엄청 헐떡거렸다. 체력만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건물을 나왔음에도 능력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저대로 능력을 멈추면 억눌렀던 것들이 폭발해 일대가 쑥대밭이 될 것이었다.
"홍 소령 수치 많이 떨어집니다."
"가이드 현장 투입해야 합니다!"
불안한 눈으로 계속해서 화면을 바라보던 정한은 수치가 떨어진다는 말만 듣고 벌떡 일어섰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헬멧을 썼다. 물 속성 센티넬 도착했습니다. 화재 진압합니다. 그 와중에도 무전으로 들린 소식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홍 소령님은 계속 안 좋습니다. 가이드 빨리 와야 합니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현장이었다. 자꾸만 희비를 엇갈리게 했다. 심장이 너무 뛰어 터질 것 같았다.
"홍지수!!"
"하아... 하,"
현장에 도착하니 불길은 사라지고 그 와중에도 홍지수가 능력을 써 무너지는 건물을 안전하게 내려놓은 것 같았다. 다 무너져 있었지만 모양새가 깔끔했다. 평소와 같은 상태였으면 뭐라고 대꾸라도 했을 텐데 무너진 몸과 금방이라도 지쳐 눈을 감고 쓰러질 듯한 표정으로 정한을 간신히 바라보기만 한다. 그대로 그의 상체를 안아 올렸다.
어깨를 잡은 손이 축축했다. 손을 떼어 보니 피가 묻어났다. 알아서 잘할 것처럼 굴더니 이건 언제 다친 거야. 그의 방탄조끼를 벗기고 전투복 지퍼를 내리고는 어깨 부분을 젖혔다. 미안, 잠깐만 조금만. 망설일 새도 없었다. 그 어깨 위로 입술을 내렸다. 홍지수는 죽은 듯 정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였다. 점점 안정되어 가는 듯한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정한도 눈을 감았다. 다 무너진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았다.
*
"홍 소령 앞으로 현장 투입 금지입니다."
"공사 구분은 해주시죠."
"지극히 공적인 명령인데."
"저 같은 인재가 임무를 나가지 않는 게 공적인 처사입니까?"
"네.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이 나라에 S급 센티넬이 홍 소령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현장에 괜히 데려갔네."
"그때 나 없었으면 홍 소령 큰일 날 뻔했어요."
"약으로 대체했어도 됩니다."
"그게 부작용이 얼마나 심한데 약을 먹는다는 소리가 나와요."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어요."
정한은 할 말을 잃었다. 상성 맞는 가이드가 없을 시, 위급할 때 먹으라고 만든 가이딩 대체 약물이 있었다. 하지만 약물은 진짜를 완전히 대체할 수 없고 그만한 부작용이 따랐다. 수면 부족과 일시적인 부정맥 증상이 대표적인데, 센티넬도 본질은 인간이기에 그에 따르는 리스크가 고스란히 동반됐다. 홍지수는 괴물인 걸까. 혹시 다른 세계에서 온 외계 종인가. 너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 나처럼 위태로웠나, 괴로웠을까.
"앞으로는 나한테 와요. 고민하지 말고."
"... 봐서요."
*
황실에서 기념하는 행사 중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하는 행사가 열리는 날이다. 바로 황립기념일. 의미 있는 날이기에 이날은 공휴일이고, 그만큼 참석해서 행사를 즐기는 국민들이 많았다. 박태산도 참석해 자리를 빛낼 것이고, 각 부처 장관들과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낼 것이다. 정한도 그중 한 명이었다.
황제를 비롯한 중요한 명사(名士 )들이 자리하는 만큼 행사의 보안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국내 의전서열 1순위가 자리한 만큼 S급 센티넬들이 차출되어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지수도 당연히 같은 임무를 맡았었다. 원래는 미리 행사장에 가서 팀원들과 현장 자리를 지켜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자신은 정한과 같은 차를 타고 함께 행사장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보나 마나 권력 남용이겠지 뭐.
"굳이 같이 가야 할 필요가 있나요?"
"오늘 내 경호는 홍 소령이 맡았거든."
"저는 원래 현창 총괄이었는데요."
"우리는 오늘 함께 보여야 해."
"제 얼굴은 기사에 실릴 수 없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라서."
"알지. 나는 '박정한 NSA 국장이 그의 페어 센티넬로 알려진 홍 소령과 동행하였다.' 이 한 줄이 필요해."
NSA에서 행사장은 거리가 꽤 멀었다. 한창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홍지수는 운전석에, 박정한은 뒷자석에 함께했다. 대화가 끊긴 차 안은 답답할 정도로 적막이 일었고, 정한은 피곤한 듯 눈이 풀려 있었다. 룸미러로 힐끔 정한을 살핀 지수가 입을 열었다.
"자도 되는데."
"나는 남이 모는 차에서 잠 못 자요."
"왜,"
끼익-쾅!! 그 순간이었다. 직진하고 있던 두 사람의 차를 큰 화물차가 옆에서 덮쳐버린 게. 순발력 좋은 지수가 능력을 쓰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차가 전복되어 뒹굴었을 것이다. 차를 안전하게 내려놓고 재빠르게 벨트를 풀어 내린 지수는 상황을 파악했다. 박정한 나오 지마 거기 있어.
동시에 화물차에서 내린 운전자가 총을 들어 저희 쪽을 향해 무작위로 난사했다. 당연히 그 어떤 위해도 가해지지 않았다. 지수가 손쉽게 총을 빼앗고 운전기사를 제압해 눕혔다. 어느새 차에서 나온 정한이 지수의 옆에 섰다.
"말해. 누가 시켰어."
"그런 거 없, 으아악-!"
지수가 범인을 바닥에 억누르고 있던 능력의 힘을 더 가했다. 대범하게 일을 벌여놓고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것은 너무 뻔한 전개였다. 오늘 정한의 차를 운전한 사람이 그냥 수행원이었다면, 아니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능력의 다른 센티넬이었다면 정한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누가, 왜, 무방비한 상태의 NSA 국장을 죽이려고 했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됐어, 어차피 용의자는 많지 않으니까. 챙겨."
"행사는 불참 소식 알리겠습니다."
"아니, 가야 해."
"가긴 어딜 간다는 거예요. 행사장보단 병원을,"
"행사 끝나고 의무대 들를게. 이미 차 불렀어."
핸드폰 꺼내서 무언갈 만지는 것 같더니 그새 사람을 부른 모양이었다. 왜 박정한을 죽이려고 할까. 누가? 박정한을 죽일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 박정한의 진짜 정체를 아는 사람... 박정한은 아직도 홍지수에게 숨기는 게 많았다.
*
정한은 지수가 능력을 쓴 게 신경이 쓰이는지 운전하는 이가 눈치도 못 챌 정도로 지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포갰다. 둘 다 행사장으로 향하는 내내 아무 말은 없었다. 차에서 내릴 때 정한 옆에 자리한 사람이 그 센티넬이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안 그래도 눈 좋은 센티넬에게 쏟아지는 엄청난 빛이 지수를 잠시 어지럽게 했다. 이래서 이런 자리 싫어하는데. 정한이 원하는 대로 오늘 또, 정한과 저의 이름이 나란히 상단에 올라 포털 메인을 장식할 것이다.
"박 국장, 좀 늦었네?"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사고가 나서요."
"뭐? 몸은 괜찮나? 병원도 안 가고 바로 온 건가?"
"네. 괜찮습니다."
총리는 정한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봐왔던 제 아비의 수족이니까. 연기를 잘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알 길이 아직은 없다. 이 사람의 연륜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정한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정한이 왜 다시 조국으로 불려왔는지 아는 사람. 박태산을 제외하고 총리가 유일하다.
정한이 옆에 있는 지수에게만 들리도록 아주 작게 말했다. 홍 소령, 총리를 잘 지켜봐요. 지수는 듣자마자 무슨 소리인지 알아챘다. 총리는 박정한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가. 하긴, 아주 예전부터 총리는 현 황제의 사람이라는 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치만 총리가 박정한을 죽일 이유가 있나? 정한이 없으면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이번에 하버드를 졸업했다는 아들을 위해? 그러기엔 정한은 알려지지 않은 혼외자라 당장은 위협이 되지도 않을 텐데. 박태산이 정한을 직계에 올린다고 언질을 줬나?
"홍 소령님, 반갑습니다. 조국에 대한 당신의 헌신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지요."
"알아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총리가 정한의 옆에 서 있는 지수에게도 인사를 건대며 악수를 청했다. 조국에 대한 헌신이라니 웃기는 소리다. 나는 조국에 헌신한 적이 없다. 살고 싶었을 뿐이다. 대한제국의 전투복을 입고 죽거나, 신분도 없이 죽거나, 죽어도 제대로 된 사인을 밝히지 못한 채 죽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저 그런 노력이었다.
*
행사장에서 박태산은 행사 초반에 인사말과 축사를 하고 제 할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사라졌다. 박태산의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는 소문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자세히 살피면 거동이 불편해 보이고 전보다 안색이 많이 죽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빨리 다음 후계를 정하느라 바쁘겠네.
"처음 아니죠."
"뭐가요."
"오늘처럼 죽을 뻔한 거. 그래서 남이 모는 차에서 잠도 못 자고, 아까 죽을 뻔한 상황에서도 전혀 그런 사람으로 안 보일 만큼 침착했고."
"걱정 마요. 내가 운 하나는 끝내줘서 잘 살아남으니까."
"당분간 경호로 동행하겠습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홍 소령 말대로 이런 인재를 내 개인 경호로 쓰기엔 너무 과하지 않나."
"한배를 타자면서. 조종키를 잡을 사람이 죽어버리면 어떡해."
아하하하-! 정한이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혹시 몰라 행사가 끝나고 바로 정한을 끌고 의무대에 왔다. NSA의 의무대는 여느 3차 병원 못지 않게 의료시설이 잘되어 있는 곳이다. 센티넬들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NSA 외의 병원에서 치료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CT 촬영을 억지로 시키고 끝내 나오는 정한에게 지수가 물었다. 정한은 웃느라 잠시 젖혔던 고개를 바로 하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네. 우리 홍 소령님이 나 지켜줘야 겠네.
홍 소령님 내가 목숨 구해줬으니까 뭐 하나 알려줄까요. 내 진짜 이름은 윤정한이에요.
당신만큼은 나를 그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