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에 묻은 물을 탈탈 털고 정한은 탈색 모를 질끈 묶었다. 남의 머리통을 함부로 쓰다듬어주는 건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수입이 짭짤해서 그만둘 수 없었다. 내 머리는 하도 지푸라기 같은데 왜 남의 머리카락에는 이렇게 개기름이 많은 걸까? 중얼거리자 사람들이 미친 사람 보듯 스쳐 지나갔다. 난데없이 웃음이 나는 걸 보니 하루가 다 끝나가는 모양이다. 오늘도 별다른 일 없이 끝나서 다행이다. 거의 백발에 가까운 노란 꽁지머리가 느린 걸음을 따라 흔들렸다.
윤정한은 초능력자다. 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행운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초능력자가 은근히 자주 보이는 요즘, 티비에 나오는 누구는 하늘을 날고 또 누구는 건물을 들어 올렸다. 그들에 비하면 정한의 능력은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에는 기적과 축복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서 정한은 돈 받고 행운 빌어주는 일을 했다. 건당 행운 강도에 따라 만 원에서 오십만 원까지. 소소하거나 거대한 행운을 확실하게 보장해 드립니다. 다소 사기꾼 같은 멘트는 윤정한의 타고난 얼굴과 말빨, 부족한 신빙성을 채워주는 후기, 그리고 국가공인 초능력 인증서 덕분에 그럴싸한 광고 문구가 되었다.
오늘은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리는 신혼부부의 머리에 한 번씩 손을 올려놓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머리를 한 지 꽤 됐는지 딱딱하게 굳은 스프레이 감촉은 썩 좋지 않았지만 부부의 앞에서 정한은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척 보기에도 아름다운 부부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절반, 각각 오십씩 총 백만 원이나 내줘서 고마운 마음 절반을 담아 최선을 다해 행운을 빌어주었다. 아마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명은 주택청약, 한 명은 로또 2등에 당첨될 것이다.
초능력에도 쿨타임이라는 게 존재했다. 정한은 하루에 딱 3번까지만 행운을 빌어줄 수 있었다. 부부에게 두 번 썼으니 한 번 남았지만 또 의뢰를 받으러 움직이기는 싫었다. 벌써 백만 원이나 벌었는데 또 돈 벌어야 해? 만성적인 귀찮음이 도진다. 내일 되면 그냥 벌 걸 괜히 그랬다며 후회할 자신을 알면서도 정한은 집 방향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집 가는 길에 카페에나 들러야지. 빨래도 돌리고. 오늘 밥은 뭐 먹지. 좌석에 널브러지듯 앉아 사소한 생각이 머릿속을 채울 즈음에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다. 역 근처에 정한이 자주 가는 개인 카페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오늘도 아아예요?”
“네. 한 잔만 부탁드려요.”
카페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날락해서 알바생과도 안면을 튼 사이였다. 알바생 닉네임은 조슈아, 미국인이라 본명도 조슈아랬다. 조슈아 지수 홍. 정한은 알바생에게 이름을 듣자마자 “그냥 지수 씨라고 불러도 돼요?”하고 물어봤다. 한평생 조슈아로만 불렸을 알바생은 조금 당황하나 싶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라고 불리는 건 오랜만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정한은 그 카페를 더 자주 가게 되었다. 그전부터 이미 알바생 보러 가고 있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지수가 일하는 카페는 유독 손님이 드물었다. 오후 3시인데도 텅텅 비는 건 예삿일이었다. 손님만 드문 게 아니라 사장도 자주 ‘출몰’하지 않아서 대부분 지수 혼자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인적 드물고 정적인 장소를 선호하는 정한에게는 안성맞춤이다. 결제 후 카운터 바로 앞에 자리를 잡은 정한이 탁자 위에 냅다 엎드렸다. 덜 마른 빨래처럼 흐물흐물해지자 손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대령해준 지수가 정한의 팔을 톡톡 쳤다.
“오늘따라 더 힘들어 보이는데요.”
“체력 딸려요.”
“뭐 하셨길래.”
그 이상 대답할 힘도 없었다. 정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반절이나 쭉 들이키고서야 살 것 같았다. 행운 비는 일은 은근히 정신력과 체력을 깎아 먹는 일이었다. 오늘은 최대치의 행운을 두 번이나 빌어주었으니 힘든 건 당연했다. 지수가 서비스라며 스콘을 가져다주었다. 고개를 번쩍 든 정한은 생각했다. 하나 남은 행운, 그거 지수 씨한테 써줄까?
“지수 씨. 바빠요?”
“아뇨.”
“잠깐 와봐요.”
“잠시만요.”
“급해요. 빨리빨리.”
“뭔데요?”
지수가 정한의 앞자리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고개 숙여봐요.”
“왜요?”
“아잇 그냥 해봐요.”
말할 때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습관이 있는 지수는 고개를 순순히 숙이면서도 눈을 치켜떴다. 지수 씨, 지금 좀 뱀 같다. 정한이 히히 웃으며 지수의 머리에 손을 턱 얹었다. 항상 웃느라 가늘게 접혀 있던 눈이 크게 떠졌다. 조슈아 지수 홍의 눈은 이렇게 생겼구나. 정한은 지수에게 행운을 빌어주며 처음으로 그의 눈동자 색을 알게 되었다. 남아있는 체력을 끌어모아 있는 힘껏 행운을 전해주고, 정한이 방전되듯 엎어졌다.
“뭐예요?”
“그냥 해보고 싶었어요.”
“아.”
“혹시 머리 만지는 거 싫어해요? 미안해요.”
“아뇨, 괜찮아요. 안 싫어해요.”
“그럼 다행이구.”
정한이 씩 웃으며 빨대를 물었다. 지수에게 초능력자라는 걸 벌써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까. 좋은 일이 일어난 후에 짜잔. 서프라이즈.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사실은 매사 웃는 얼굴인 지수의 얼떨떨한 낯이 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카페 알바생 미국인 조슈아 지수 홍은 손을 들어 자기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한동안 염색을 아끼고 살았던 터라 머릿결이 좋았다. 동시에, 자기와는 반대로 머릿결이 아주 개털이 따로 없는 누군가가 생각난다. 노란 장발이 잘 어울리는 예쁘고 잘생긴 손님. 오늘 아주 급한 듯이 불러놓고 마음대로 머리를 쓰다듬어준 윤정한이.
정한은 제멋대로 왔다가 제멋대로 지수의 머리를 만져주고 또 제멋대로 떠났다. 카페가 선불제라 다행이지, 만약 후불제였으면 지수는 정한의 페이스에 휩쓸려 돈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윤정한이 바람처럼 왔다 떠나간 자리에 지수만 덩그러니 남았다. 지수는 정한이 깨끗하게 비운 아메리카노 잔을 닦고, 조금 떨어뜨린 스콘 부스러기를 치우고, 정한이 앉았던 의자를 도로 각을 맞추어 정리했다. 그러고도 새로운 손님은 오지 않았다. 이상한 손님 생각을 할 시간이 늘어났다.
왜 뜬금없이 남의 머리를 만진 걸까? 싫지는 않았지만 조금 당황한 건 사실이었다. 친해져서 툭툭 장난을 거는 정도는 되었지만 그와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라.
돌이켜보면 윤정한이라는 손님은 처음 카페에 들어설 때부터 지수의 이목을 끌었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인사를 하는 또래 남자 손님은 많지 않았다. 대개 지수가 “어서 오세요.”하고 인사를 해야 간신히 받아주는 정도였는데, 정한은 지수가 말을 걸기 전에 상냥한 목소리로 먼저 인사해주었다. 아마 알바생에게 적당한 예의를 갖춘 사회생활용 말투였을 테지만 당시 지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때는 정한의 머리카락이 지금처럼 목을 덮을 길이는 아니었으나 노란 탈색 머리인 건 매한가지여서 윤정한은 홍지수의 뇌리에 ‘잘생기고 예의 바른 노란 머리 손님’으로 각인되었다.
노란 머리 손님은 거의 매일 카페에 오갔다. 돈이 남아돌아서 카페 차렸다는 사장이 대부분의 일을 위임하는 바람에 7일 내내 출근하는 지수와도 일주일 꽉 채워서 얼굴을 맞댔다는 말이었다. 얌전하게 생긴 것과는 다르게 친화력이 좋은 지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조용히 있다가 가는 손님에게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그건 손님 쪽도 비슷한 듯했다. 출석 도장을 찍은 지 10일째 되는 날에 손님은 평소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도중 별안간 지수에게 말을 걸어왔다. 카페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뒀던 건지 손님의 목소리가 조금 쉰 것 같기도 했다.
“닉네임이 조슈아예요?”
“네.”
너무 단답인가. 하지만 할 말이 없는걸. 지수는 이다음에 질문이 들어오면 최대한 다정하게 대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름 물어봐도 돼요? 전 윤정한이에요.”
“조슈아가 이름이기도 해요. 미국인이라. 조슈아 지수 홍이에요.”
“이름 예쁘다. 그냥 지수 씨라고 불러도 돼요?”
한국에서는 편의상 홍지수로 살고 있긴 했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란 지수는 부모님 이외의 사람들에게 ‘지수’라는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었다. 여태껏 ‘조슈아’가 이름이고 ‘지수’는 미들네임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정한의 목소리로 들으니 단순한 미들네임인 주제에 왜인지 더 달콤하게 들렸다. 지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정한 씨와 나만의 애칭 같다는 생각도 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금방 관뒀다. 고작 이름 가지고 손님에게 이게 무슨 실례람.
이름을 알게 되자 윤정한과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가까워진 후 알게 된 정한은 낯을 꽤 가리지만 장난기가 넘치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유쾌함을 십분 살려 지수와는 종종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곤 했다. 카페에서 혼자 일하게 된 이후로 큰 소리를 내어 웃어본 적 없었는데 지수는 몇 달 만에 깔깔 웃는 자신을 발견하고 조금 기뻐졌다. 타지에 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귄 느낌이었다.
정한은 매일매일 카페에 들렀지만 고정된 시간대를 가진 건 아니었다. 주로 오후에 오긴 했지만 간혹 어느 날은 아침 아홉 시에, 또 어떤 날은 마감하기 직전에 나타나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 어느새 지수는 정한이 언제 올지 목을 빼고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쉽게 인정했다. 정한 씨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이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다고.
짝사랑을 시작하고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정한이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어주고, 잠시 그와 수다를 떠는 일상은 이어졌다. 윤정한은 보기와 다르게 담백하고 선을 잘 아는 사람이어서 지수는 그의 선의와 호의를 ‘착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난데없이 윤정한이 잘생긴 얼굴로 웃으며 조슈아 지수 홍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이다. 혼란스러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펑 터지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말랑말랑해진 마음은 외부 자극에 취약해서, 윤정한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수의 작은 우주에서는 빅뱅이 일어나고 새로운 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내일 정한 씨가 오면 똑같이 머리를 쓰다듬어야지. 당하고만 살지 않는 행동파 지수는 마음속에서 새로 만들어진 별을 발아래 두고 다짐했다.
녹초가 된 정한이 카페 문을 연 건 마감 시간인 11시를 두 시간쯤 남겨두었을 무렵, 그러니까 밤 9시쯤이었다. 평균적으로 이른 오후에 출몰한다는 걸 생각하면 아주 늦은 시간이다. 평소에는 경쾌하기만 한 종소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주문하고 정한이 예의 그 탁자에 고개를 댔다. 정한이 얼굴을 비추지 않을까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던 지수는 후다닥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정한의 앞자리에 앉았다. 사실 골목 끝에서 정한이 보일 때부터 포스기에 메뉴를 찍어두고 진작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윤정한 앞에서라면 지수는 한없이 부지런한 사람이 된다.
“왜 그래요?”
“힘쓰는 일을 좀 했더니만…….”
“힘이요?”
운동, 힘, 근육 따위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사람이 힘을 썼다니. 갑자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제 정한이 했던 것처럼 지수는 푹 숙인 정한의 머리에 살포시 손바닥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정한의 몸이 경직되는 게 얇은 살갗 아래로 다 느껴졌다. 어제의 조슈아 홍도 윤정한 앞에서 이랬을까. 속으로 쿡쿡 웃으며 지수가 살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릿결 관리를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지 개털 비주얼치고 손가락에 걸리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지수는 자기 때문에 윤정한의 안에서도 시끄러운 소란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양껏 머리를 쓰다듬은 것 같아서 손을 떼려는 찰나, 손목이 턱 붙들렸다. 손목을 잡은 손에는 힘이 거의 실려 있지 않았지만 왜인지 뿌리칠 수 없었다. 태연함을 가장하며 지수는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만 해요. 더 해줘요.”
“팔이 아파서.”
“조금만 더요. 저 오늘 힘들었단 말이에요.”
“알겠어요.”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힘이 나기라도 하는 걸까. 의문은 잠시 제쳐두고 손을 갈퀴 삼아 머리카락을 두어 번 빗겨주자 정한이 배부른 맹수처럼 눈을 끔뻑였다. 다시 손을 거두어도 이번에는 잡지 않길래, 지수는 아쉬움과 안도라는 양가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정한이 오면 그의 행동을 똑같이 되돌려 주겠다는 목표는 충분히 달성했으니 이만 만족하기로 한다.
“지수 씨. 오늘은 뭐 좋은 일 없었어요?”
좋은 일이라면 있었다. 사실상 카페를 혼자 운영하는 지수에게 괜히 미안했는지 사장이 직급을 알바생에서 매니저로 올려주고 월급을 더 주겠다고 했다. 계약서도 다시 작성했다. 정한이 오면 자랑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완전히 까먹을 뻔했다. 지수는 들뜬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을 늘어놓았다. 윤정한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도 모르고. 정한의 속눈썹이 팔랑이다 완전히 잦아들었을 때, 지수는 꿈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꼭 행운 같아요.
“다행이다. 제대로 작용했네.”
“뭐가요?”
“제 초능력이요…….”
초능력?
헉. 정한이 숨을 몰아쉬며 눈을 번쩍 떴다. 익숙하고 따뜻한 공기. 은은한 커피 향. 지수가 일하는 카페였다.
웬일인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오십만 원짜리 행운 의뢰가 두 번이나 들어왔는데 하필 장소가 극과 극이었다. 남의 소원 하나 빌어주러 서울의 끝에서 끝까지 지하철을 3번이나 갈아타고 이동했더니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았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었지만 혹시나 지수가 기다리고 있을까 카페에 들렀던 거였는데, 피곤했던 나머지 대화를 나누다 엎드린 채 잠들었던 것이다.
눈이 뻑뻑했다. 정한이 눈두덩을 마구 비볐다. 지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눈앞에 앉아 있었다. 기억이 희미했지만 얼핏 듣기로는 직급이 바뀌었고 월급이 올랐다고 했던 것 같았다. 지수 씨 매니저 됐다면서요? 축하해요. 그리고 ‘요’ 자를 말하기 무섭게 잠들기 직전 지껄였던 문장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 말했구나. 초능력. 정한은 순식간에 사색이 된다. 크게 내쉬는 지수의 한숨이 무겁고 무서웠다.
“정한 씨. 초능력자예요?”
“네…….”
“왜 숨겼어요? 저 조금 서운해요…….”
지수를 알게 된 이래로 처음 본, 진심으로 속상해하는 낯빛이었다. 정한은 황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속이려던 게 아니라, 지수 씨한테 깜짝 선물처럼 행운을 선물해주고 그다음에 알려주고 싶었어요. 이게 뭐라고 속여요. 일부러 감춘 거 아니에요. 진짜요. 미안해요, 믿어줘요……. 평소 썩 좋지 않았던 발음이 마음이 다급해지자 죄 뭉개졌다. 입을 다물고 흘긋 살핀 얼굴은 그렇게까지 화나보이지 않았다. 정한은 아주 조금 안도했다. 속아서 화가 났다면 감정 표현에 솔직한 홍지수는 정한을 이 자리에 그대로 앉혀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엉덩이를 걷어차 카페 밖으로 쫓아냈겠지.
지수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눈을 조금 느리게 감았다가 뜨고, 이따금 차분한 호흡을 뱉을 뿐이었다. 정한은 끈질기게 지수를 기다렸다. 말 안 한 게 딱히 중죄는 아니지만 어쨌든 한 짓이 있기에.
“화 안 났어요. 그냥, 일부러 숨겼나 싶어서. 근데 숨겼다기엔 저한테 초능력 쓴 것도 이상하고. 암튼 그랬어요.”
“아녜요, 진짜로. 저 지수 씨 하나도 안 불편한데.”
“그렇게까지 부정하면 더 수상한 거 알죠.”
지수는 농담 섞어 말했겠으나 정한은 웃을 수 없었다. 진짜 안 불편한데.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지수는 픽 웃으며 긴 숨을 뱉었다. 안 싫어하면 그걸로 됐어요. 저한테 초능력도 써줬잖아요. 고마워요. 어떤 감사 인사는 죄책감을 극대화하기도 해서, 정한이 다시금 미안하다며 지수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저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에. 다 물어봐도 돼요.”
지수가 조금 뜸을 들였다. 무슨 질문을 하려는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초능력자는 다 공무원이에요?”
호기심을 가득 담은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햇빛에 비친 유리알처럼 반짝거렸다. 바짝 긴장하던 정한은 푸핫 웃어버리고 말았다. 간식을 앞에 둔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고 대답을 기다리는 홍지수가 귀여웠던 탓이다. 지수는 정한이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 쓰다듬어도 돼요? 먼저 동의를 구하자 지수가 강아지처럼 머리를 들이밀어 주었다. 오늘도 윤정한의 마지막 행운은 홍지수가 차지했다.
“아뇨. 초능력자는 전부 등록되어 있긴 한데, 전 자영업자예요.”
아마 지수가 생각하는 ‘초능력자’는 인명 구조 작업을 돕거나 국가에 크게 이바지하는 대단한 사람들일 것이다. 대중매체가 초능력자의 이미지를 나라에 귀속되어 한평생 소모품으로만 살다 버려지는 특수요원 정도로만 다루는 바람에 미디어에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정한의 능력은 그런 종류가 아닌 데다 비교적 사소했기 때문에, 국가에 등록만 하면 민간인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정한은 지수에게 초능력 인증서, 사업자 등록번호, 일반인용 초능력 의뢰 플랫폼과 앱을 보여주었다. 인간 네잎클로버가 되는 건 고도로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일이라 보기보다 체력 소모가 심하다는 것까지 말해주자 경청하던 지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상할 정도로 영혼이 나가 비척비척 걸어 다니던 좀비 윤정한의 모습을 그제야 이해한 것 같았다.
정한은 하루 3번만 초능력을 쓸 수 있었으므로, 앱을 통해 의뢰가 들어오면 일단 내용과 금액을 확인하고 거리가 가까운 곳으로 골라서 가고는 했다. 특별히 십만 원어치 이상 행운일 경우에만 먼 곳까지도 출장을 나갔다. 카페에 들르는 시간이 들쭉날쭉한 이유였다. 제가 맨날 카페에만 있어서 다행이에요. 정한 씨가 언제 오든 전 항상 이 자리에 있잖아요. 우리 카페는 손님도 없으니까 항상 얘기도 할 수 있고. 지수가 말했다. 본인이 말해놓고도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예상치 못한 프러포즈를 받은 기분으로, 정한은 눈을 접어 웃었다.
마주 보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감할 시간이었다. 지수가 구석구석 쓸고 닦는 사이 정한은 삐뚤어진 탁자와 의자를 정리했다. 소등 후 카페 문을 잠그자 골목길에 어두움이 내려앉았다.
“정한 씨.”
“네?”
“저 핸드폰 번호 좀…….”
꼭 썸이라도 타는 것처럼 심장께가 간질거렸다. 내민 휴대전화에 열한 자리 숫자를 꾹꾹 눌러 돌려주자 지수가 전화를 걸었다.
“카페 못 오는 날엔 개인 번호로 연락 주세요.”
역 앞에서 지수와 헤어졌다. 정한은 카페가 집 근처였지만 지수는 지하철로 한 정거장을 더 간다고 했다. 개찰구로 내려가는 지수를 배웅해주고 집으로 가는 길에 정한은 지수에게 문자를 남겼다. 내일도 행운을 빌어요. 네잎클로버 이모티콘 7개가 되돌아왔다.
전화번호를 교환하긴 했는데 전화할 일이 과연 생길까. 이 고민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십만 원짜리 일감이 또 들어왔는데 장소가 부산이라 KTX를 타고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큰 건이 여럿 들어온 덕분에 통장 사정은 괜찮았지만 오십만 원 벌려고 왕복 십만 원을 푯값으로 내려니 어쩐지 큰 타격을 입은 기분이었다. 아니 이 정도 거리면 교통비도 줘야 하는 거 아냐? 정한은 전화번호부에서 지수의 전화번호를 찾으며 구시렁거렸다.
“지수 씨, 저 윤정한이에요.”
오늘은 사장이 출근했는지 전파를 타고 넘어오는 지수 목소리 뒤로 물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나왔으면 지수 씨 좀 쉬게 해주면 안 되나. 그런 생각을 했다가 남의 가게 사장 원망하기 양심에 찔려서 곧 관두었다. 정한이 시무룩한 어투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카페에 못 간다고 투정을 부리자, 지수가 “잠시만요.”하고 대꾸했다. 사장과 뭐라 뭐라 대화하나 싶더니 이내 돌아온 지수는 같이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기껏해야 응원이나 해줄 줄 알았지 동행이라니. 지수가 같이 가준다면 정한으로선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지만, 당일에 정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해서 당황스럽기는 했다.
“아니 전 좋긴 한데 사장님이 허락해주셨어요? 아 맨날 일했으니까 오늘은 친구랑 좀 놀라고 했다고요. 어 제 자리가 어디냐면…….”
나태해도 직원 복지는 잘 챙겨주는 사장이긴 했는지 지수는 사장이 혼자 일 시켜서 미안하다며 사비로 기차 왕복표를 구매해줬다고 했다. 곧 역으로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가 끊겼다. 지수 씨, 은근히 계획 없고 불도저 같은 면이 있네. 까맣게 물든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정한이 허허 웃었다.
결국 부산까지 나란히 앉아 가게 되었다. 지수는 KTX를 오늘 처음 타본다며 들뜬 기색이었다. 서너 시간 동안 정한은 가끔 졸았고 잠들었던 시간보다는 더 자주 지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몇 달간 카페에 드나들며 알게 된 것만큼 지수를 많이 알 수 있었다. 본가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고, 외동아들이며, 한국에는 공부하러 들어왔고, 잠깐 쉬며 카페에서 일하는 중이라는 것까지. 정한도 지수만큼 말을 많이 했다. 고등학교 다닐 땐 이과였는데 그냥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광고홍보학과에 진학했고, 초능력을 살려 1인 창업을 시작하자 주변인이 모두 말렸지만 보란 듯이 잘 먹고 산다는 걸 지수에게 알려주었다. 열심히 살았네요. 지수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수는 동갑이라는 걸 알았는데도 정한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그 점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오늘의 의뢰인은 먼 길 오게 해서 미안하다며 미리 부산역 근처 카페에 자리잡고 있었다. 정한은 익숙하게 초능력 인증서를 보여주고, 입금을 확인한 다음, 의뢰인에게 어떤 종류의 행운을 얻고 싶은지 묻고서야 의뢰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오랜만에 딸을 만나기 전에 큰 행운을 돈 주고서라도 얻고 싶다기에 정한은 의뢰인이 딸과 함께 행복해지도록 행운을 빌어주었다. 효과가 빨리 나타났으면 좋겠다. 딸을 만나러 종종걸음을 옮기는 의뢰인의 등에 대고 정한이 중얼거렸다.
“직접 보니까 어때요? 딱히 대단한 건 없죠?”
“네. 근데 나름 체계적이라 놀랐어요.”
“그렇긴 해요. 나름 서비스업이라.”
“이거 하러 부산까지 온 거예요?”
“네. 놀랍죠.”
“......생각보다 사람들이 초능력을 많이 필요로 하네요. 믿기도 하고.”
지수 씨도 믿잖아요. 대충 대답하긴 했지만 안 그래도 그 점이 내심 켕기던 참이었다. 지수가 “맞아요. 저도 믿죠.”라고 대답한 건 들리지도 않았다.
세상엔 초능력 같은 기이하고 마치 미신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초능력은 실존하고 윤정한이 살아있는 증거지만, 정한 역시도 물증 없는 ‘행운’을 어떻게 믿고 큰돈을 턱턱 입금하나 싶긴 했던 터라. 정한은 자신에게 능력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윤정한에게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데에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능력을 쓰고 나면 힘이 쭉 빠지는걸. 어제도 홍지수에게 행운을 전해주고 집에 기어가다시피 돌아가기까지 했다. 분명히 실재하지만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힘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마법과 현실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윤정한은 두 군데에 모두 소속되어 있는데도. 이상한 구석에서 한번 생긴 사소한 고민은 몸뚱이를 불려 폭풍처럼 밀려왔다. 축 처진 정한을 느꼈는지 지수가 팔을 토닥거렸다.
“그래도 어제 정한 씨가 저한테 또 초능력 써준 덕분에 제가 부산도 와 보네요. 오늘 사장님이 안 오셨으면 전 못 왔을 거 아니에요. 사실 원래 안 오겠다고 하셨었거든요. 이게 행운이 아니면 뭐겠어요.”
“저 때문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런가? 뭐 어때요. 행운의 힘이 아니더라도 저는 행복해요.”
괜히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려 정한은 일부러 부산스럽게 행동했다. 열차 15분 남았대요. 일어날까요? 지수가 같이 올 줄 모르고 이른 시간대 기차를 예매하는 바람에 부산까지 내려왔는데도 밥 한 끼 먹지 못했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그 뒤 시간 기차는 전부 매진이어서 집에 가려면 어쩔 수 없이 예매한 대로 타야 했다. 다음에 같이 또 와줘요. 좌석에 앉아 분주히 발 받침대를 내리고 겉옷을 벗던 지수가 말했다. 홍지수가 발화하는 모든 문장에는 그를 믿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 내용이 미래를 기약하는 등 겉치레일 뿐이라도. 저것도 초능력일까. 그렇다면 두 팔 벌려 당할 용의가 있다. 정한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지수는 정한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 정한은 지수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어깨를 조금 내렸다. 그리고 빠르게 변화하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유독 귀찮음이 많았지만 정도 그만큼 많았던 대학생 시절의 윤정한을 회상했다.
발로 뛰는 네잎클로버 서비스는 졸업을 앞둔 윤정한이 뭐 해 먹고 살지 고민하다 대충 틀만 가지고 시작한 일종의 부업이었다. 초능력은 3회 제한이 있으니 남발할 수 없었고, 매일매일 일 나가기는 싫고,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은 보고 싶었으니까 돈 받고 행운을 팔면 서로 윈윈이 아닐까 결론 내린 결과였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고 본업이 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 없었지만 막상 코앞에 닥친 삶을 살아보니 그다지 나쁘지 않아서 이대로 살고 있다. 전공 평점 4.1이라는 제법 우수한 성적과 재학하는 동안 착실히 채웠던 포트폴리오를 살려 취업할 기회도 여럿 있었으나 모조리 고사했다. 정한은 아직 사람들에게 행운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들이 대가로 지급한 금액보다 조금 더 강력한 행운을.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지만 우연이 거듭되면 필연이 되니, 초능력으로 만들어진 행운에도 인과율이나 타당성 따위가 생길 것이라는 철학적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퇴근할 때마다 들르는 카페에서 지수를 만났으니 착한 일을 많이 한 정한에게도 행운이 찾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그냥 그렇게 여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요즘 들어 특히 윤정한의 사고는 돌고 돌아 홍지수로 귀결되고는 했다. 지수는 만물에게 다정했다. 생판 남인 단골손님이 멀리 일하러 간다니까 기꺼이 따라나서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 싶었다. 그러니 습관처럼 배인 지수의 친절과 상냥함을 연애 감정이라고 곡해하는 착오는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홍지수와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정한이 지수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살살 헤집었다. 복잡한 속내는 숨기고, 그저 지수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만을 담아 잔잔한 행운을 전해주었다. 이왕이면 좋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정한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게 일과로 완전히 자리 잡았을 무렵에 카페 사장은 지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남자친구야? 지수는 기겁하며 대답했다. 절대 아닌데요? 강력한 부정은 강력한 긍정이라던데. 말끝을 늘리며 사장이 능글맞게 웃었다. 남자친구가 아닌데 머리는 왜 쓰다듬어줘? 지수 씨는 저 손님 좋아하지? 얼굴을 토마토색으로 물들인 채, 지수는 겨우겨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솔직함은 때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한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당연히 긍정이겠으나, 맹세컨대 윤정한과 어떤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짝사랑에 대가를 바랄 만한 나이는 이미 지난 지 오래다. 지수는 딱 현상 유지만 바랐다. 지금처럼 가끔 연락하고 얼굴을 보는 친한 친구로만 남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만 같았다.
“지수 씨, 근데 누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머리를 그렇게 쓰다듬어요?”
“저 손님은 하더라고요.”
정한이 허락을 받지 않고 함부로 남의 초능력을 말하고 다닐 수 없다. 지수는 대충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행운을 줄 수 있다니 아무리 초능력이지만 이렇게까지 마법 같을 수가 있나. 어쩌면 곧이곧대로 말했어도 사장은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장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흔들고 창고로 들어갔다.
“어차피 손님도 얼마 없는데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어, 저 진짜 가도 돼요?”
“그 손님도 봤으니까 더 안 남아있어도 되잖아요.”
하필이면 사장이 출근하는 날마다 정한이 늦게 와서 지수의 퇴근도 덩달아 늦춰지고는 했었는데, 퇴근하라고 해도 오만 핑계를 다 대며 정한이 오기까지 기다렸던 걸 들켰나 보다. 지수는 순간 화끈해진 뺨을 눌렀다. 빠르게 짐을 정리하고 “퇴근할게요!” 외치자 사장이 창고에서 손만 빠끔 내밀고 인사했다.
오후 4시였다. 태양이 기분 좋게 인사하는 시간이었지만 지수의 우주가 또 소란스러워진 바람에 햇빛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가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집 현관문을 여는 순간에도 지수는 윤정한 생각을 했다. 주제는, 초능력으로 밥 벌어먹는 윤정한은 어째서 대가 없이 조슈아 지수 홍에게 행운을 주는가. 정한은 지수의 머리를 헝클어뜨릴 때 단 한 번도 지수가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부산에 무작정 따라가 정한의 일을 구경했을 당시, 정한이 얼마나 차분하게 의뢰인의 설명을 들었던지를 떠올려본다면 어딘가 이상한 게 분명했다. 지수는 ‘설마 윤정한이 나를 좋아해서 이러나?’까지 접근했다가 기겁하고 모든 상상을 흩어버렸다. 이루어지지 않을 꿈은 처음부터 꾸지 않는 게 맞았다. 사장이 너무나 의미심장하게 지수를 찔러본 덕분에 쓸데없는 화제에 잠시 골몰했을 뿐이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그리고 윤정한이 안겨준 선물만큼 언젠가는 꼭 보답을 해줘야지. 쿠키라도 조금 더 챙겨주든지. 클로버 틀이라도 구해봐야 하나. 막연히 그런 다짐을 한다. 지수가 바닥에 벌러덩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한의 얼굴이 구름처럼 부풀어 천장을 가득 메웠다가 이내 사라졌다. 오늘도 봤는데 괜히 또 보고 싶었다. 대가는 바라지 않지만 눈에 조금이라도 더 담는 건 바라도 되는 거잖아. 합리화하면서.
그날 밤에 지수는 아무도 없는 카페에서 윤정한과 입 맞추는 꿈을 꾸었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찬물을 한 컵 마시고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정한 씨는 남의 행운을 빌어주는 초능력자라고 했잖아요.”
“그쵸.”
“그럼 정한 씨의 행운은 누가 빌어줘요?”
음. 정한이 턱을 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였다. 본인에게 능력을 쓰지 못하는 핸디캡은 차치하더라도, 정한은 굳이 초능력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늘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괜히 윤정한의 별명이 ‘운정한’이 아니었다. 수능에서도 틀린 줄 알았던 문제가 복수정답 처리되어서 상향으로 지른 대학에 붙었고, 게임이든 운동이든 하는 족족 이겼으며, 아주 사소하게는 라면 봉지를 뜯는 족족 다시마가 두 개씩 들어있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기본 스탯이 좋아서 그런지 빈말로라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게, 제 행운은 누가 빌어주죠? 턱 괸 자세 그대로 말하느라 웅얼거렸는데, 지수는 정한이 감성에 젖어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대답하기 불편하면 안 해도 돼요.”
“불편한 게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요?”
지수가 정한처럼 턱을 받쳤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정한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지수의 미간을 문질러주었다.
“나한텐 아무도 빌어준 적이 없어요. 나는 원래도 운이 좋은 사람이라. 별명도 운정한이거든요.”
심각해지는 분위기를 읽고 정한이 손사래를 쳤다. 아냐아냐아냐, 그런 거 아니에요. 나 친구 없고 그런 사람 아니에요. 단지, 뭐든지 시키는 족족 평타 이상 치니까 아무도 윤정한에게는 그런 말을 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정한은 웃으면서 말해주었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지수의 미간에는 주름이 깊게 팼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애정이 찰랑찰랑 차오르는 것 같아서 정한이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지수가 입을 여러 번 뻐끔거리다가 아주 긴 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그렇게 착하게 살면 안 되는데.”
“에?”
“정한 씨는 저한테도 돈 안 받고 초능력 그냥 써주잖아요. 밖에 나가면 못해도 만 원은 버는데.”
착하게 산다니. 열심히 산다, 노력한다, 잘한다. 이 정도는 들어봤어도 착하게 산다는 건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정한이 부스스한 노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홍지수가 윤정한 걱정을 해준다. 심지어 자기한테 초능력 쓴다고 착하단다. 지수에게 초능력을 쓰는 건 그를 좋아해서였으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지만, 피식피식 새는 웃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손을 들어 기침하는 척 입을 가렸다.
뚱한 얼굴로 앉아 있던 지수가 벌떡 일어났다. 척척 걸어가 포스기를 찍고 계산한 다음, 진열대에서 쿠키를 한 움큼 집어 모조리 정한의 쪽으로 밀어주었다. 어리둥절한 낯으로 정한이 세잎클로버 무늬가 찍힌 쿠키와 지수를 번갈아 보았다. 정한 씨가 단 거 안 좋아하는 건 아는데, 제가 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으니까. 이거 제가 다 만든 거예요. 그래도 안 단 걸로 골랐어요…….
“저는 행운은 줄 수 없지만 행복은 빌어줄 수 있어요.”
“…….”
“그러니까 정한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
“정한 씨는 네잎클로버잖아요. 세잎클로버 꽃말은 행복이니깐…….”
정한이 할 말을 잃고 결연한 이목구비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지수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와, 진짜 키스하고 싶다.”
조용한 카페에 육성이 울려 퍼졌다. 무의식적으로 문장을 뱉은 정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나치게 남사스러운 ‘키스’ 두 글자가 변명도 못 하게 선명히 들렸다.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은 지 1분도 안 됐는데. 뻣뻣하게 굳어 절연을 걱정하는 사이, 오후 11시가 넘은 시간을 확인한 지수가 스르르 일어나 카페 블라인드를 내리고 문에 걸려 있는 팻말을 CLOSE로 바꾸었다. 멍한 시선이 지수의 경로를 따라 다녔다. 뒤돌아본 지수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담담했다. 귓가는 여전히 새빨갰고.
“안 할 거예요?”
“뭐, 뭘요?”
“키스하고 싶다면서요.”
“……해도 돼요?”
지수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짓밟아버린 바람에 자취를 감추었던 자신감이 다시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정한이 카페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지수에게 다가가 한쪽 뺨을 감싸 쥐었다.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에 손을 얹자 지수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지금은 초능력 안 써요. 웃음기와 떨림이 섞인 속삭임이 멎자 입술이 맞물렸다.
초능력이 존재하는 우리 세계에서 그 어떤 개입 없이 사랑이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다. 윤정한은 그걸 경험적으로 알았다. 그렇다면 이것도 어제 홍지수에게 퍼부은 행운의 덕일까.
“저 얼마 전에 정한 씨랑 키스하는 꿈 꿨는데.”
지수가 몽롱한 얼굴로 속삭였다.
“예지몽 아니에요?”
“그런가. 그땐 그냥 제가 정한 씨를 좋아해서 그런 건 줄 알았어요.”
고작 말 한 마디에 이 상황이 초능력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게 된다. 숨을 고르던 정한이 새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기꺼운 마음으로 남의 행복을 빌어주겠다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한 사랑이 그 안에 고여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