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 홍지수네.”
아무 생각 없이 현관문을 열었던 나는 문 앞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장례식장에서나 보겠구나 하던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승관이가 미팅도 할 겸 겸사겸사 집에 들르겠다는 말에 월 패드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던 것이 나의 패착이었다면 패착이었을까.
“지수 집일 줄은 몰랐는데.”
내 앞에 있는 화상은 멋쩍은 듯이 오른손으로 눈가를 긁적였다. 내 집일 줄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는 말을 듣고 있자니 왠지 내가 바보처럼 느껴져서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하하하, 웃자 내가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이 새끼가 따라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하하하핫.”
“하하하하?”
“하하하.”
한참을 그 자식과 마주 웃던 나는 정색하고 현관문을 쾅 닫았다. 기세좋게 닫은 건 좋았는데, 그외부와 차단이 된 후에야 내 세포들이 자극에 반응했다. 너무 놀란 나는 현관문에 기대어 스르르 주저앉았다.
“저 새끼가 왜…?”
잠시 숨을 고르고 저 새끼가 왜 내 눈앞에 나타난 건지 고민하고 있는데, 벨소리가 상념을 파고들었다. 애써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후들거리는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계속 울리는 벨소리는 집요했다.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면전에서 그렇게 문을 쾅 닫으면 어떻게 해.”
“여긴 어떻게 왔어.”
내가 아는 그 새끼라면 내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계속해서 벨을 처누를 새끼다. 그렇게 되면 옆집에도 민폐라는 생각에 나는 문을 쾅 열었다. 내가 열어 줄 줄 알았던 건지 내 앞에 있는 얼굴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짜증이 솟구쳐 올랐지만 나도 그냥 따라 웃었다. 이 새끼는 이렇게 여유로운데, 내가 불안해하고 긴장하면 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잃지 말자, 미소. 정색하면 지는 거야.
“나 하루만 재워줘.”
쾅.
들을 가치도 없어서 그냥 문을 다시 닫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던 건지, 내가 문을 닫자마자 또 다시 집요한 벨소리가 집을 가득 채웠다.
나에게 또 천사가 왔어
‘졌다, 졌어.’
다시 만난다면 장례식장일 줄 알았다. 이왕이면 저놈의 장례식으로.
검정색 리본으로 꾸며진 그의 사진 앞에서 가능하면 애틋하게 눈물을 흘려 줄 수는 있었다.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내밀면서.
아니, 사실.
몇 번이나 ‘재회’에 대해 생각해 봤던 것은 사실이다.
길거리를 걷다가 서로를 스쳐지나다 애틋하게 돌아본다거나, 함께 자주 가던 카페에서 같은 메뉴를 시키다가 헛웃음을 지어본다거나. 이 신파로 범벅된 가정들에는 전제조건이 하나 붙었다. 이 모든 재회는 우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누가 보면 절절한 로맨스 찍고 있냐, 할 수도 있지만 윤정한과의 서사에서 이 정도는 바랄 수 있었다.
구남친이, 그것도 나를 아주 매몰차게 버렸던 개쓰레기 같은 놈이 나를 에어비앤비 호스트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건 나의 로망엔 하나도 없었다.
“지수야, 문 좀 열어 줘.”
벨소리에 이어 정한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이 소리들을 들으며 마른세수를 몇 번 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왜 이 새끼가 나를 찾아온 걸까. 그것도 하루만 재워 달라고 하면서. 오늘 무슨 날인가? 나는 결국 문을 다시 열었다. 내 안광 죽은 눈과 마주쳤어도 윤정한은 전혀 쫀 기색이 없었다.
“나 갈 데가 없어.”
“에어비앤비 어플 깔아. 호텔 가. 찜질방 가. 모텔 가.”
“지수야.”
짜증 나네. 이름 부르고 지랄이야.
윤정한의 빡대가리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플랜비를 친절하게 읊어주고 있는데, 윤정한이 별안간 진지하고도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을 막 불러대는 주둥이를 한 대만 시원하게 갈겼으면 소원이 없겠다.
“나 핸드폰이 없어.”
“개수작 작작 좀.”
“진짜야. 다 빠개져서 쓸 수가 없더라고.”
진짜 내가 계속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나.
“나 교통사고 당했어.”
“…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너밖에.”
이 새끼가 소설 쓰네.
윤정한과 짧지 않은 시간 사귀면서 이런 로맨틱한 대사는 처음 들어봐서 당황스러웠다. 한창 사귈 때 이런 대사를 정한이에게 듣게 되면 어떨따 했던 때도 있었다. 친구에서 시작했던 만남이라 마냥 달콤하지는 않겠지, 조금 소름도 돋겠지 했지만 이렇게 마냥 좆같을 줄은 몰랐다.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슥슥 쓰다듬었다.
“야, 너 진로 잘못 찾았다. 연기해, 정한아.”
“연기 아니야, 진짜.”
내 빈정거림에 정한은 무해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검지로 아래를 까딱까딱 가리켰다. 윤정한의 얼굴에 고정되었던 내 시선은 슬쩍 아래로 향했다. 윤정한의 비싸 보이는 캐시미어 가디건 아래엔 환자복이 입혀져 있었다.
너무 놀란 나는 정한의 팔목을 잡고 집 안으로 당겼다. 가볍고 종잇장 같은 몸은 나풀거리며 너무나도 쉽게 내 구역을 침범했다.
“자세히 말해 봐.”
“졸고 있던 덤프트럭이 선을 넘었대. 재수 없게 반대 차선에 내가 있었고.”
“기억이 안 난다는 건 무슨 소리야.”
“외상 후 기억상실증이래.”
가슴이 이상하게 조여왔다.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뒤꿈치로 문턱이 밟혔고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나를 따라 정한이 조심스럽게 쭈그려앉아서 내 안색을 살폈다.
“그러다 갑자기 네가 떠올랐는데, 답답해져서 병실 나왔어. 지갑만 챙겨서. 그리고 지갑에는 이 주소가 써 있는 종이가 있는 거야. 그래서 여기로… 왔어.”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이 집으로 이사온 지 얼마 안 됐다. 이 집 주소를 왜 윤정한이 가지고 있었던 걸까. 정한은 계속해서 내 눈치를 봤다.
“나 병실로 돌아가기 싫은데. 하루만 재워주면 안 될까.”
“응, 안 돼.”
단호하게 말한 뒤 나는 작업실 책상에 있는 스마트폰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윤정한 사고 스케일 정도면 뉴스에 떴을 것이다. 대가리 다친 건 저 자식인데 왜 내 머리가 아프지. 그런 내 뒤를 졸졸 쫓아온 윤정한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나한테 화난 거 있어?”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목소리는 정말로 윤정한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했을 때 내는 목소리였다. 윤정한에게 약했던 나는 얘가 이런 목소리를 내면 용서해 줬고. 내 가슴팍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내가 정말 참고 있다는 증거였다.
“화났냐고?”
“…내가 또 너 놀렸어? 아니면….”
“우리 헤어졌어, 윤정한.”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말하고 있을 윤정한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뒤돌아서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정한은 우리가 헤어진 걸 모르는 눈치였다. 내 입에 다시 우리의 이별을 담게 만드는 이 새끼 때문에 또 화가 났다.
내 말을 들은 윤정한이의 눈이 잔뜩 커지더니 별안간 촉촉해졌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이 관계에 있어서 명백한 희생자인데, 왜 가해자가 된 기분을 느껴야 되는지 모르겠다. 울고 있는 윤정한이 보기 싫어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정한아.”
“우리가 어떻게 헤어져. 내가 너한테… 어떤 마음으로 고백했던 건데!”
윤정한의 내 어깨를 잡았다. 윤정한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내 홈웨어가 바스락 구겨졌다. 나는 조소했다. 팔자 좋다. 본인은 다 까먹고 남 입으로 이야기하게 만들면 되니까.
“네가 헤어지자고 했어.”
“잡았어야지!”
“잡았어!”
뻔뻔하게 구는 윤정한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축축했던 정한의 눈에는 어느덧 이글거리는 불이 남았다. 지 뜻대로 안 될 때 하던 눈빛을 보고 있자니 나도 이가 갈렸다.
“내가 몇 번 잡았는데. 그런데 네가 헤어지자며! 내가 방해된다며. 내가 뒤에서 너 기다리고 있으면 자꾸 뒤돌아보니까 그냥 안 보이는 곳으로 가라며. 네가 그랬잖아!”
“…내가?”
“그래. 네가.”
“무슨… 사정 같은 게 있었겠지. 내가 너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기억 상실증에 걸리니까 나와 자신의 서사가 정말 무슨 신파 막장 드라마 정도일 줄 알았나 보다. 지킬 수 없으니 떠나보내야 했고, 사랑하기에 이별한다는 그런 같지 않은 이유. 차라리 정말 길에서 우연히 스쳐 지났다면 그게 훨씬 더 웰메이드 드라마이지 않았을까.
“그런 거 없어, 정한아.”
“지수야.”
“그냥 너는 성공해야 됐고, 내가 방해물이었던 거야.”
“내 성공에 왜… 네가 없어?”
심장이 조였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저 순진하고 무해한 눈동자가 지금 나에게는 무익했다. 망각은 신이 주는 선물 같은 거라던데, 이 신이 사랑한 피조물은 이런 선물까지 받는 건가. 지금까지 윤정한을 잊으려던 내 모든 노력은 어떻게 되는 건지 너무나 허무했다. 나는 정한이 눈동자에서 모든 과거를 읽어낼 수 있는데. 모든 버릇이 어떤 감정을 경유하여 나온 건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미안해.”
“하루만이야.”
“….”
“하루만 있다가 병원으로 돌아가.”
내 눈빛에서 어떤 원망을 읽어낸 건지 정한이 결국 내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이야기했다. 정한은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다.
곧 출발하겠다는 승관의 메시지에는 미안하지만 다음에 와 달라는 답장을 남기고 급하게 뉴스를 확인했다. [윤정한 교통사고] 검색어를 넣자 온갖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고는 일주일 전 일어났다. 계승권 싸움에서 생긴 보복이라는 말도 있고, 치정에 연루되었다는 추측도 있었다. 지금까지 쉬쉬하고 있던 교통사고 기사가 이제와서 쏟아지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진짜 어떻게 된 건데.”
이미 그 졸음운전을 한 기사는 죽었다고 한다. 아마 bsk에서 어떻게든 조사하고 있겠지. 그게 bsk 내부의 일이라면 밝혀지지 않겠지만. 입을 가리고 기사들을 살피던 나는 윤정한이 기다리고 있을 거실로 향했다.
“집 좋다, 지수야.”
멀거니 서서 거실을 구경하던 정한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디까지 기억이 나는 건데.”
“어?”
“너 지금 몇 살이냐고.”
“나… 스물다섯.”
4 년 전이었다.
정한이 나에게 헤어짐을 고하기 딱 일 년 전.
Bsk에서 윤정한에게 접근했던 때.
윤정한은 첩의 자식이었다.
윤정한 어머니는 유독 아름다웠다. 다 큰 고등학생 아들이 있다는 걸 못 믿을 정도로 고운 사람이었다. 정한의 어머니를 만났던 친구들은 처음에는 누나라고 생각했고,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도 개념이 없는 놈들은 장난으로 정한이에게 내가 너의 새아빠가 되어 줄게라고 말할 정도로.
정한이 얼굴만 봐도 납득이 되는 이야기였다.
본인은 혼외자이고 첩의 아들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을 때는, Bsk 회장의 혼외자일 줄은 몰랐지.
“헤어져야 돼.”
“하, 나 참.”
나랑 정한이는 헤어지자는 말을 가볍게 했었다. 우리가 절대 못 헤어질 거라는 것을 믿고 그랬던 걸까. 걸핏하면 그러면 헤어져, 하며 장난식으로 이야기하고는 했다. 사실 처음 사귈 때만 해도 그런 장난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싸우기도 엄청 싸웠다. 그럴 때마다 정한은 그게 뭐 어때서 식이었다.
우리는 절대 안 헤어질 거니까.
“미안해, 지수야. 나 진짜 성공하고 싶어. 우리 엄마 첩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면서 평생 살았는데, 이제 그 시선 좀 막아주고 싶어.”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효자였다고. 그렇게 받아치고 싶었다. 맨날 장난으로 돈 많은 친구들한테 새아빠, 새아빠 하던 새끼가. 그러나 정한의 눈은 제법 진지했고,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땅의 거대한 중력은 내 발을 꽁꽁 묶어 놨다.
“딱 좋을 때까지만 기억하네.”
남자랑 사귄다는 걸 이미 bsk는 알고 있었다. 헤어진 척하고 몰래 만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한은 그곳에서 행복할 것이다. 비록 그 행복에 내가 없다고 해도, 그냥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가슴팍이 뻐근했다. 이런 감정이 싫었다. 오랜만에 나타난 윤정한은 다시 나를 뒤흔들었다.
“저기가 침실이야.”
“…너는?”
“나는 저기 작업실에 간이침대 있어.”
“작업실?”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라도 손님이라고 정한이는 침대에 재울 생각이었다. 나는 작업실에 설치해 놨던 간이침대에서 자면 되니까. 내가 작업실이라는 말을 꺼내자 정한이 눈을 반짝 빛냈다. 구경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모른 척하던 나는 결국 마음이 약해져서 작업실 문을 열었다.
“동화 작가?”
“…응.”
정한이와 헤어지고 2년 정도를 고생하다 결국 찾은 직업이었다. 워낙 아기자기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아는 동생인 승관이의 제안으로 그림책을 내기 시작했다. 승관이가 나에게 그런 제안을 했던 건… 내가 그린 토끼를 보고였다.
“이 분홍색 토끼가 주인공이야?”
그래.
정한이 내 책상을 들추고 있었다. 봐도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나는 터벅터벅 걸어가서 정한이 행동을 저지했다.
“왜? 보면 안 돼?”
“응. 이건 조금 무례한 것 같아.”
“우리 사이에….”
“정한아, 우리 사이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말에 정한이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닫았다.
“분홍색 토끼가 주인공 맞아.”
“예전부터 토끼 좋아하더니. 그래서 너 나한테 토끼 닮았다고 했잖아.”
차라리 책상에 있는 종이들을 들추는 게 나았다. 과거를 들추는 것보다. 이번에는 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뒤돌아섰다. 정말 기억을 잃은 윤정한은 나에게 너무나도 무익했다.
토끼를 좋아해서 너한테 닮았다고 한 게 아니라, 너랑 닮아서 토끼 좋아했던 건데.
저 자식이 뭐가 예쁘다고 밥을 해 주고 있지.
부엌에 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밥을 볶고 있었다. 그래도 교통사고까지 났다는데 굶길 수는 없잖아. 그렇게 스스로와 타협하고 있었다.
“김치볶음밥?”
“악!”
김치를 썰고 있던 나는 뒤에서 내 허리를 감싸는 손에 너무 놀라서 칼을 떨어트렸다. 고개를 돌리자 정한이가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연하게 떨리는 긴 속눈썹을 보고 있자니 떨렸다.
“너 미쳤어? 칼 들고 있는데 왜 난리야!”
치가.
“하하, 또 화났다. 매번 당하면서도 화를….”
점점 구겨지는 내 얼굴을 봤는지 정한이 문장을 채 끝맺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또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서 나는 칼을 던지듯 내려놓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문을 쾅 닫고 쭈그려 앉아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지수야, 미안해. 내가 깜빡했어.”
정한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이제야 내가 누굴 집으로 들였는지 실감이 났다.
그러니까 저건 일종의 버릇이었다.
보통 집에서 음식을 하는 건 내 몫이었다. 고기 같은 건 잘 구워도 요리 같은 건 영 솜씨가 없었으니까. 하면 잘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내가 요리가 취미기도 해서 요리는 내몫이었다. 내가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면 정한이 저렇게 뒤에서 안아오고는 했다.
“미쳤어, 미친 거야.”
정한은 25살에서 기억이 멈췄으니 저런 행동들이 자연스럽겠지만 그 버릇들을 지우느라 4년의 시간을 쓴 나로서는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고 아픈 기억들이었다. 자기야 또 기억 되찾고 헤렐레 떠나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다시 또 혼자 남겨진다.
‘나쁜 새끼….’
갑자기 나타난 bsk의 서자는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게다가 쟤가 좀 예쁘고 잘생겼어? 스캔들도 엄청 났었다. 아주 아나운서 A, 배우 B, 프로골퍼 C 직업도 다양했다. 약혼녀 후보도 추려졌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 모든 걸 나만 다 알고 있었다. 정한은 기억을 못하고 나만 이렇게 가슴이 아프다.
잠시 숨을 고르던 내가 밖으로 나왔는데 정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네 얼굴이 그래?”
“꼭 그렇게 티를 내야 돼?”
“무슨 티.”
“우리 헤어졌다는 티.”
진짜 이 새끼가 미친 걸까.
선을 넘는 윤정한의 태도에 내 입만 벌어졌다. 진짜 이게 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고 있을까?
“헤어졌으니까 티를 내지.”
“모르겠어. 내 기억 속에 우리는… 안 헤어졌으니까.”
“누가 기억 잃으래?”
“나 너무 가슴이 아파, 지수야.”
자신의 빈약한 가슴팍을 꽉 쥐는 정한의 표정이 정말로 애처롭기 짝이 없어서 더 화가 났다. 정한이 나에게 애원하듯이 말했다.
“나 좀 도와줘.”
“…내가 뭘.”
“나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그냥 머릿속에 너만 가득해. 그러니까 내가 기억 되찾을 때까지만 도와줘.”
“진짜 뻔뻔하다, 너.”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불쌍한 놈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좀 도와주라.”
bsk 계열사 하나 가질 놈이 뭐가 불쌍하다고 도와달래.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너 정말 기억 안 나…? 지금 네 직업도?”
“어…. 나 지금 뭐 하고 있어?”
나는 주먹에 힘을 풀었다.
“우리 헤어지고 소식 끊겨서 나도 몰라.”
“…그렇구나.”
“어.”
“그러니까 기억 되찾을 때까지만 도와줘. 되찾으면 내가 사례할게.”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른다. 나를 그렇게 버리고 갔던 윤정한에게 복수할 기회.
“그래. 알겠어.”
그래서 너무 허무하게 허락해 버렸다.
“대신 자꾸 헤어졌다는 티 내지마.”
이 제멋대로인 도련님에게.
가장 먼저 나는 TV를 처리해 버렸다. 고장 나서 안 나온다는 핑계를 대면서. 정한이 그러면 자기는 뭐 하냐고 묻자, 나는 각종 OTT가 연결되는 빔 프로젝터를 꺼내줬다. 그냥 닥치고 영화나 드라마나 보라고. 괜히 뉴스를 보고 자기가 누구인지 알면 곤란하니까.
그러는 나는 네이버로 맨날 윤정한의 이름을 검색했다. 정한의 교통사고 기사만 쏟아질 뿐 정한이 실종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 정한이가 사라졌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집에 왔었다는 것을. 정한과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bsk에서는 나에게 엄청 큰 돈을 계좌로 보내왔다. 우리의 만남이 0들로 정리된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걸 핑계로 정한이에게 전화했을 땐 그거라도 받아두라고 했다. 자신이 마음 편할 수 있게.
정한은 그날 이후로 집에서 조용하게 지냈다. 너무 조용해서 가끔 집에 정한이 왔었던 것이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문득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다가 밖으로 나가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영화를 보고 있는 정한이 보였다. 원래 영화 같은 걸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런 광경이 말도 안 되게 느껴졌다.
“일 끝났어?”
“아직.”
“많이 바빠?”
“아니.”
내가 단답형으로 대답하자 정한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저렇게 기억을 잃어도 아주 자기 멋대로인 건 여전하다. 내가 서서 한숨만 내쉬고 있자 정한이 자신의 옆에 앉으라는 듯 소파를 툭툭 두드렸다. 무시할까 생각하다가 자신에게 헤어졌다는 티를 내지 말라던 정한이의 당부가 떠올라 떨떠름하게 앉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앉자마자 정한이는 내 허리를 안고 허벅지에 누워 버렸다. 이 버릇이 또 원래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정한이가 하던 자세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내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정한이 내 허벅지를 두 번 두드렸다.
“내가 티 내지 말라고 했잖아, 지수야.”
“진짜 짜증 나.”
“지수 냄새 나. 왜 여전하지.”
내 배에 얼굴을 묻은 정한이 내 냄새가 좋다며 코를 두어 번 킁킁거렸다.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고, 너무 익숙한 버릇인데 또 낯설었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정한이 부러웠다. 나도 어디에 머리 박으면 기억을 잃을 수 있을까. 그러면 정한이처럼 이렇게 편해질 수 있을까.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어도 나는 정한이를 찾아갈 수 있었을까.
“아!”
괜히 불쾌해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심한 채로 내 허벅지에 누워 있던 정한이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작업실로 돌아갔다.
나는 여전히 작업실 침대에서 잔다. 정한은 자신과 같은 침대에서 자기를 원했지만, 그것까지는 허락해 줄 수 없었다. 나는 갈수록 정한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정한이와 헤어졌던 날보다 만났던 날이 더 많기도 하고 25살에 기억이 멈춘 정한이가 나를 너무 자연스럽게 대했기 때문에 나도 편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침대에서 한 이불 덮고 자는 것까지는 정말 못하겠다.
씻기 위해서 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묘한 탄내가 났다. 아일랜드 식탁 너머로 부엌을 바라보자 당황한 뒤통수가 보였다.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서 그 등을 퍽 쳤다.
“너 뭐 하는 짓이야.”
“아니…. 파스타 해 주려고 했는데.”
파스타 면에 불이 붙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찬물을 끼얹었다. 활활 타올랐던 불이 식자 재만 남았다.
“지수 네가 파스타 좋아하니까….”
“….”
“그런데 막상 하려고 하니까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거야. 눈 감고도 했는데.”
정말 당황했는지 혼자서 우물거리는 정한이를 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했다.
가끔 정한이 특식이라며 파스타를 해 주고는 했다. 내가 정말 기분이 상했거나 했을 때 정한이 보내는 화해 신호였다. 25살 때는 나한테 워낙 잘못한 일이 많아서 눈 감고도 했다는 정한이 말이 맞았다. 지금 이 파스타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낯설다는 것을 기억을 잃기 전까지는 해 본 적이 없었던 거지.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에 결석처럼 박혀 나오지 않는다. 나를 바라보는 울망울망한 눈을 열없이 바라보다가 그대로 입맞췄다.
당황한 듯한 정한이는 이윽고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정한이의 혀가 내 입술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키스 이후로 우리는 예전 사이로 돌아갔다. 이주일이 지났는데도 정한이의 기억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나는 정한이가 외부 소식에 접촉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밤에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한이는 여전히 나를 안고 영화를 봤고, 우리는 가끔 티격태격했으며 가끔 키스를 했다. 가끔 정한이의 살가운 행동에 뚝딱거리는 나를 정한이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정한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정한이가 내 곁에 있다는 게 좋았다.
“좀 자. 피곤하지.”
오늘도 내 허벅지에 누워 영화를 보던 정한이 내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걸 알았는지 일으켜 자세를 반대로 잡았다. 내 허벅지에 정한이 눕는 건 그래도 낯설지 않았지만, 내가 정한이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는 건 정말 처음 있는 일이라 생경했다. 정한이 내 팔뚝을 두어 번 토닥거렸다. 나는 가물가물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 일어났을 때 내 머리에는 정한이의 허벅지가 아닌 베개가 있었다.
“정한아?”
혹시 내가 꿈을 꾼 걸까?
그 사람이 너무 그리워서, 이렇게 꿈을 꾸고서는 못 견뎠던 걸까? 심장이 뻐근해져 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봐, 또 이렇게 나만 혼자 남겨지잖아.
너는 그냥 떠나면 그만인 거잖아.
누군지 몰라도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는 말을 한 사람은 바보다. 익숙해지지 않는 일도 있다. 윤정한이 없는 세계에 남겨지는 것. 윤정한에게서 버림을 받는 것.
“지수야, 왜 울어!”
장을 봐왔던 모양인지 정한이 손에 있던 에코백이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나에게 급하게 달려온 정한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내 뺨을 쓰담는 그 손을 뿌리쳤다.
“지수야.”
“너 가.”
“왜 그래.”
“너 bsk에서 친자로 인정해 줬어. 돌아가. 네가 바라던 복수잖아.”
내 말을 들은 정한이 표정을 굳혔다. 왜 그런 말을 하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정한이의 뺨을 가볍게 툭 쳤다.
“가라고! 또 기억 되찾고 간다고 하지 말고, 내가 보내 줄 때 가!”
“안 갈래.”
“제발 좀 그냥 가!”
“네가 말 안 해 줘도 다 알고 있었어.”
네가, 네가 어떻게 다 알았는데.
내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정한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정한이의 정수리를 보고 있다가 얘는 정말 정수리도 에쁘네,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해 버렸다. 울음이 났다.
“너… 너 그 새끼한테 복수한다고 했잖아.”
내가 정한이를 마냥 잡을 수 없었던 이유. 정한이는 본처의 자식에게 복수하러 들어간 것이었다. 그 자식이 bsk를 물려받을 수 없게 말이다. 그렇게 애처롭게 성공을 말하는 정한이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날개를 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한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만 있으면 돼.”
“미친놈아 그러지 마.”
“지수야. 나는 진짜 이제 알았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지 마. 나 버리고 간 거잖아. 그거 때문에. 너 보냈던 내가 뭐가 돼.”
“그때 내가 머리 어디 박았나 봐.”
“머리 박은 건 지금이야.”
“머리 박고 제정신 찾았나 보다, 지금.”
나와 정한이는 눈물을 흘리다, 웃다가 했다.
“보내 줄 때 가. 그때는 못 보냈지만 지금은 보내 줄래.”
“그때 보냈잖아. 지금 보내지 마.”
그리고 이미 못 가, 지수야.
왜?
“사실 다 알고 왔어. 이미 기억을 되찾기 전 윤정한이 다 정리했더라고. 너한테 돌아가려고. 그래서 그렇게 사고를 냈나 봐.”
그래서 지갑에 넣어놨던 내 주소를 찾아서 나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기억을 잃고도 모든 상황 판단을 마치고 나에게로 온 이 윤정한이 가슴 벅차도록 대견했다. bsk는 그 새끼가 아니라 전문 기업인들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아마 교통사고가 그렇게 난 것도 그 이유에서 기인한 거겠지.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결국 울어 버렸다. 정한이 나를 꽉 껴안았다.
“아기 토끼 쫑쫑이가 모험을 끝냈어.”
기억을 되찾은 정한이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거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