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igger warning: 사별에 기인한 극심한 의욕 상실(번아웃), 죽음과 인류의 멸절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1. 상실과 대체품
“오늘은 출근 안 해?”
“랩실에서 쫓겨났어.”
뭐? 운동가는 현관에 철푸덕 앉아 신발 끈을 묶다가 고개를 확 치들었다. 너는 무슨 그런 말을 내가 신발 신고 있는데 하니.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쏘아봤지만, 그의 연인은 특유의 태연한 얼굴을 보였다. 뭐, 그렇게 됐어. 대강 그렇게 말하는 듯한 얼굴. 노랗게 물을 빼서 푸석한 머리를 손가락 하나로 배배 꼬았다. 상한 모발 끝이 갈라져서 하얗게 보였다.
“잠꼬대할 거면 집에나 처박혀 있으래.”
랑데부 비행
w. ORCA
세상의 종말을 예견한 박사가 있었다. 박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운석 충돌이든 화산 폭발이든, 자전의 정지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지구가 망하고 인류는 멸滅을 맞으리라 말했다. 아무런 물증이 없는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의 연인뿐이었다. 애초에 머리색을 샛노랗게 뺀 젊은 박사의 말은 학계에서 큰 영향력이 없었다. 자네는 머리가 왜 그렇나? 애인이 금발 미인을 좋아해서요. 학회 발표 때 질의응답 중 그가 한 답이다. 그딴 질문에 걸맞은 그딴 대답. 그가 속한 학구 분야는 정말 늙은 꼰대들과 비교적 덜 늙은 꼰대들이 득실거렸기 때문에, 거의 모두가 그를 미친놈이라고 불렀다. 그의 금발을 사랑하는 연인만이 들어주는 예견은 점차 잊혀갔다.
젊지만 곱게 미친 박사의 연인은 운동가였다. 그는 모든 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환경을 사랑하고 동식물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박애주의자. 아마 지구상의 모든 걸 사랑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운동가는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박사는, 사랑이 넘치는 운동가를 사랑한다. 여즉 사랑하고 있다. 아주 열렬히도.
박사가 펼치는 멸망론에 운동가는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다 죽으면 너무 슬플 거야. 박사는 거기에 대고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근데 나는 너와 나만 살아있으면 돼. 운동가는 그게 뭐냐며 실소를 흘렸다.
“나는 네 위성이야. 네가 없으면 나도 없어.”
이과답다마는 낭만적인 대사였다. 퍽 진지하게 말하는 탓에 운동가는 거기에 대고 웃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위성만이 공전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태생부터 문과였던 운동가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사는 운동가를 중심으로 둥근 궤적을 그리며 살았다. 마치 그가 제 삶의 전부인 양.
그리고 사실, 운동가는 박사의 예언을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박사의 예언이 적중해버렸다. 세상이 망했다. 하오의 밝은 하늘이 일순간 검게 물드는 것을 보고, 박사는 종말을 감지했다. 박사는 지하로 운동가를 끌고 내려갔다. 적당하지 않은 금수저로 태어난 덕분에 구축할 수 있었던, 전원주택 지하의 방공호로.
방공호라고 말하기에 그곳은 거대한 요새에 가까웠다. 수백 평에 이르는 공간. 운동을 할 수 있는 시설, 퍼즐과 공예 같은 취미생활을 위한 방, 식료가 될 식물을 기르는 장소, 반세기 전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오락관까지. 그곳은 박사가 만든 작은 세상이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기를 수 있는 동물들도 있었고, 수십 대의 전자 기기 속에는 수백 테라바이트의 갖가지 대중매체가 저장되어 있었다.
운동가는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에 놀라 입을 벌렸다. 이곳이라면 살 수 있겠네, 정말로. 운동가는 일부러 자신이 말하려고 한 말을 중략했다. 이곳이라면 ‘사람들이’ 살 수 있겠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박사는 대답했다. 그치? 언젠가를 대비해서 만들었어.
지상에서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에 부딪히는 굉음이 들렸다. 운동가는 고개를 들어 지표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천장을 쳐다봤다. 저곳에, 사람들이 있어.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 살아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세상의 궤멸. 운동가는 박사를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세계가 궤멸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것도 그였다.
몇 달 뒤, 평소처럼 일어난 박사는 쪽지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지하 방공호 생활에 익숙해진 척 연기했던 연인이 남긴 것이다. 내가 지상에서 사람들을 데려올게. 접착력이 약한 포스트잇이 손가락 위에 잠시 머물다가 바닥에 떨어진다. 그것은 족히 1미터를 낙하했는데 소리도 없었다. 박사는 추락한 종이 쪼가리만큼이나 고요하게 절규했다.
운동가를 기다려야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박사는 기다렸다. 하루 온종일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두 사람의 대화가 오고 가던 방공호 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박사는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 흐느낌이 메아리치는 것이 싫었다. 자신이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것 같아서. 눈물만 뚝뚝 흘렸다. 침묵의 뒤를 또 다른 침묵이 잇고, 그 침묵이 지나간 자리를 정적이 차지했다.
박사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하루가 다르게 미쳐갔다. 그는 운동가가 필히 살아 돌아오리라 예견했다. 허무맹랑한 말이었다. 그의 지구멸망론만큼이나. 그 지구멸망론은 현실이 되었으므로, 그는 운동가가 돌아오리라 맹신했다. 꼭 돌아오겠다며 아포칼립스 생존물 플래그를 세운 운동가를, 그는 매일 낮 매일 밤 기다렸다. 밖에 무슨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침실에 머무르는 것이 사치로 느껴졌기에 현관에 자리를 폈다. 시설이 첨단이라 외풍은 없었다. 고작 이불 하나 두른 채로 박사는 몇 날이나 앉아있었다.
박사는 운동가의 부재에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머리가 하얗게 셌다. 이제 운동가가 사랑하던 샛노란 머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머리색을 빼는 게 아니라 입혀야 했다. 백발이 된 박사는 기다렸다. 열 밤이 백 밤이 되고 백 밤이 천 밤이 되도록 기다렸다.
천 밤이 또 다른 천 밤으로 덮인 그 날, 박사는 운동가를 그만 기다리기로 했다. 별 하나를 중심으로 돌던 위성이 제 궤도를 이탈했다. 그러나, 혼자를 견딜 수 없는 위성은 다른 구심점을 찾으려 한다.
분명 방공호 내에는 지상의 생체신호를 감지하는 기계를 만들기에 충분한 자원이 있었다. 그러나 박사는 그런 것 따위 만들지 않았다. 운동가가 세상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세상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운동가의 죽음을 확인하는 대신, 운동가를 만들기로 했다.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는 피그말리온이 되기를 택했다.
박사는 운동가의 영상을 많이 찍어두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운동가는 피사체가 되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사가 카메라를 들 때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곧잘 웃어주었다. 다 됐어? 괜찮게 찍혔어? 조슈지 이거 사실 영상이야. 그리고 크게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 음성을 따기 위해 영상들을 볼 때마다 눈물이 쏟아졌다. 프로그래밍 과정에서 곽티슈를 다섯 갑이나 써버렸다. 아직 6개입 상자가 10개도 넘게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박사는 운동가의 얼굴을 하고 자신에게 인사하는 안드로이드를 보니, 겨우 멎은 눈물을 다시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울음이 퐁퐁 터져 나왔다. 뜨뜻미지근한 물줄기가 고여서 붉게 짓무른 눈이 더 화끈거렸다.
“박사님, 울지 마세요.”
“응, 으응.. 보고 싶었어.”
박사는 훌쩍거리며 쇳덩이를 품에 넣어 안았다. 표면에 부착한 온열 장치로 인간의 체온이 구현되었다. 덕분에 완연히 기계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포근한 품을 재현한 피부 파츠가 맨들맨들하다. 흉부와 양팔에 에어백과 동일한 소재의 부품을 삽입했다. 그 로봇은 인간 같았다. 진짜 인간보다는 아주 조금 더 딱딱했지만.
박사는 운동가의 모습을 본떠 안드로이드를 만들었다. 운동가의 이름의 한 글자를 따서 슈봇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운동가가 보고 싶어서 만든 슈봇에는 두 사람의 과거를 기억나는 대로 입력해두었다.
슈봇은 박사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프로그래밍 상의 오류인가 싶어 명령어를 입력하고 몇 번이고 재부팅해봤지만 슈봇은 박사를 박사님이라 불렀다. 설정값이 연인이었는데, 어느 누가 제 사랑을 박사님이라 부를까. 슈봇의 자의적 불복인지 프로그래밍 오류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박사는 운동가를 재현해냈지만 완벽한 창조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완벽한 운동가를 만들었다가 또다시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이곳을 뛰쳐나가면 어떡하지? 그런 부류의 걱정은 슈봇이 박사를 박사님이라고 부르자마자 사라졌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만은 자유의지가 주어지지 않은 슈봇은, 지하 방공호 내부만을 배회했다.
박사는 로봇을 운동가 삼아 살았다. 로봇은 박사를 향해 항상 웃어주었다. 출생지인 로스앤젤레스의 햇살처럼 웃어주던 운동가와 똑같은 웃음이었다. 마치 같은 틀로 찍어낸 것처럼. 직접 빚어 만든 입매는 늘 위로 말려서 휘어 있었고, 눈꼬리는 예쁜 호선을 그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박사는 슈봇을 운동가의 이름으로도 부르던 별명으로도 부를 수가 없었다. 어쩐지 죄악감이 들었다.
“슈봇, 이리 와바.”
그래서 늘 이렇게 불렀다. 가까이 다가온 안드로이드에게 안긴다. 포옥. 품에 안락하게 들어맞아 나는 소리까지, 운동가와 비슷하다. 비록 똑같지는 못하더라도. 그거면 됐어. 고양감에 도취한 박사가 눈웃음을 치며 말한다.
“내 행성을 되찾았어. 내가.”
저는 행성이 아닙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박사에게 슈봇이 반박한다. 아니이이.. 너가 완전 행성이라는 게 아니라… 내가 위성이 돼서 네 주변만 맴돌고, 그만큼이나 너를 사랑하고 어쩌고저쩌고. 이과스럽지만 상당히 낭만적인 개념이다. 문과인 운동가는 알겠다며 수긍하고 말았지만 슈봇은 아니다. 그는 로봇이다. 그리고 논리 오류는 버그이다. 슈봇은 이목구비 파츠를 움직여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미묘한 얼굴을 한 채 박사의 발언을 부정한다.
“그건 말도 안 돼요, 박사님. 일단 위성만 공전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위성의 구심체가 행성이리라고는 단정 지을 수,”
“그만 그만. 거기까지. 알겠어. 그럴 때는 그냥 알겠어라고 하는 거야.”
박사가 슈봇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짓눌렀다. 박사의 입이 댓발 나온 것이, 높은 확률로 삐친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하면 심약한 박사님의 기분이 풀어질까. 운동가를 빼다 박은 로봇이 알고리즘의 답대로 박사의 새하얀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머리칼이 엉켜서 손가락에 걸리는 일 없이 빗겨진다. 노오랗던 탈색모와는 다르다.
“나 머리 염색할까? 노란색으로.”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전 노란 머리의 박사님이 좋아요.”
박사가 만족스레 웃는다. 로봇이 이번에는 입력값대로 답을 도출해낸다. 운동가는 노랑머리를 좋아하니까, 슈봇도 금발미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박사는 운동가를 만들려 했지만, 운동가를 대신할 로봇이 탄생했을 뿐이었다. 둘은 이름도 다르다. 영어 이름은 섭스티튜트 1호쯤 될 것 같았다. 물론 슈봇부터가 영어지만 그런 건 무시하도록 하자. 박사는 이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똑 부러지는 성격을 그대로 복사한 덕에, 조용하던 방공호 안이 소란해졌다. 슈봇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잔소리를 했다. 박사님, 끼니 거르지 마시고 영양보조제 잘 챙겨 드세요. 박사님, 바나나를 다 먹으면 껍질을 버리셔야죠. 박사님, 양말을 뒤집어서 벗지 마시라니까요, 침대 위에서 과자 먹지 마세요. 박사님, 박사님, 박사, 박사야. 은근슬쩍 반말을 섞을 때도 있었는데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박사는 쉴 새 없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행복해했다.
슈봇은 운동가의 행동 양상을 토대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서 매일 청소를 했다. 그는 이 작은 세계가 어지럽혀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박사가 다녀간 모든 방을 훑고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두고 청소기를 돌리고 공기청정기를 가동했다.
박사의 일과는 이러하다. 방공호를 청결하게 유지시키는 슈봇을 따라다니며 그의 하루를 지켜보는 것. 이게 전부이다. 매일 엇비슷한 시각에 일어나서 세끼를 챙겨 먹고 슈봇을 관찰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행복하다.
절대로 영원하지 않을 행복에 취해서 산다. 박사와 슈봇, 둘 모두.
외향적인 사람이었던 운동가는 꽤 많은 시간을 밖에서 보냈었다. 일하면서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하고 밝게 웃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고 집에 돌아와서 밥을 먹을 때면, 오늘은 재미있게 놀았냐고 묻는 박사를 달래곤 했었다. 그래도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좋아. 그렇게 말하는 운동가는 제법 사랑스러워서, 온종일 작업실과 집에 틀어박혀 연인을 그리워하던 박사의 마음이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박사는 사랑하던 그의 꿈을 꾼다. 그러다가 눈을 뜨면, 사랑하고 그리운 그와 똑같이 생긴 것이 옆에 있다. 슈봇의 인공 피복은 매끈하다. 볼록 도드라져 있는 뺨을 만져보면 알 수 있다. 말없이 얼굴 위에 손을 얹으면, 이미 전원이 켜진 로봇이 잠에 취한 인간을 연기하기 위해 으음, 같은 소리를 내며 신음한다. 박사는 닫혀있는 눈꺼풀을 보며 기시감을 느낄 수 있었다. 외관이 똑같아서일까. 그런데도 공허한 것은. 매일 보는데도 그리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슈봇은 운동가처럼 생활하지 못한다. 이 지하 거처는 박사와 그의 집이다. 슈봇에게는 외부도 타인도 없다. 밖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환경 따위 주어지지 않는다. 소프트웨어의 입력값처럼 외향적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로봇은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하루종일 작은 세계를 가꾸고 박사에게 말을 걸고 쓰잘데기 없는 것으로 잔소리를 했다. 그러다가 하루가 다 가면, 박사 옆에서 배터리를 충전하며 스스로 전원을 껐다. 그것이 그의 일상이고 하루이며, 아마 평생일 것이다. 슈봇은 이것이 행복이라 배웠다.
모든 것은 박사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예전의 삶을 복사한듯한 일상도, 운동가와 닮아있으나 영원히 아름다울 안드로이드도. 그러나 실로 지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똑같이 시작하여 똑같이 끝난다는 사실이 너무도 권태로웠다. 박사는 그 권태를 즐기다가도, 즐거운 당연에 질려갔다. 당연했다. 누군가의 복제인 슈봇처럼, 어떤 하루의 사본인 다른 하루만이 지속되었다. 그런 날들이 열 밤이고 백 밤이고 천 밤이고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슈봇이 물었다. 일상에서 벗어난 그것은 절대 기우였다.
“이 밖에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 말이 왜 사람을 보고 싶다는 뜻으로 들렸을까. 안드로이드가 운동가와 빼닮은 이목구비를 갖고 있어서일까. 박사는 그 발언을 듣고 나서 본인이 어떻게 굴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맨손으로 철제 팔다리를 뜯어낼 정도로 난폭한 사람이 되었던 것도 같은데. 그의 이성이 돌아왔을 때, 슈봇은 기동성을 잃은 채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 미안해. 미안해, 슈봇.”
슈봇은 대꾸하지 않았다. 운동가로서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그이기에 더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는 운동가가 아니었다. 그의 복제일 뿐. 결코, 원본이 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박사가 친히 일깨워주었다.
누군가 인공적으로 조성한 심박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박사는 바닥을 나뒹구는 슈봇의 몸체를 들어 올려서 책상에 올려주었다. 미안해하면서도 팔다리를 달아주지 않았다. 박사는 무서웠다. 이 좁고도 넓은 방공호에서 로봇이 도망칠까 두려웠다. 똑같은 레플리카를 만들더라도, 지금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것은 슈봇의 복제품일 것이다. 운동가가 아닌 슈봇의 복사본. 그는 슈봇이 운동가의 대체재라는 것을 실감했다. 동시에 모든 것이 부질없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 중요할까. 이미 그의 연인은 죽었는데. 6피트 위의 지상에서 까맣게 그슬려서 죽었을 텐데.
“이젠 정말 우리 둘뿐이야…”
사지가 뜯어져서 질량이 가벼워진 슈봇을 안고 박사가 말했다. 슈봇은 기획된 성격대로 박사의 발언에 초를 쳤다. 박사님 저는 로봇이고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인간을 본떠 만들어졌지만요. 그러므로 인류로 분류될 수 없고 이러쿵저러쿵. 따라서, 지구상에 생존해 있는 ‘사람’은 박사님 한 분뿐입니다. 물론 육성으로 반박하지는 않는다. 그의 렌즈에 비친 박사는 너무도 불안정해 보였다.
슈봇은 수십 조각으로 부서진 채로, 부서질 듯 보이는 박사를 걱정했다.
2. 궤적의 궤멸
어느 날이었다. 박사가 슈봇을 운동가 삼아 산 지, 열 밤이 백 밤이 되고 백 밤이 천 밤이 되고. 천 밤을 또 다른 천 밤으로 덮은 어느 날이었다. 팔다리를 부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박사가 슈봇의 몸을 복구해준 지 오래다. 박사는 보편적 인류의 흰머리가 돋아나는 나이에 이르렀다. 목과 척추가 조금 곱았고, 뭔가를 보기 위해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천 밤의 천 밤은 생각보다도 더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슈봇은, 여전했다. 여전히 박사에게 잔소리했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의 아름다움을 박사가 아름다움이라 여기지 못한 지 꽤 되었다.
박사는 의지를 잃었다. 무슨 의지냐 묻는다면 살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는 자신으로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었다. 나는 너와 나만 살아 있으면 돼. 그렇게 말했던 과거가 무색하게 박사는 자신을 잃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언사가 현실이 된 걸지도. 지구종말론처럼. 그의 곁에 운동가는 없으니까. 그를 본뜬 철제 인형만이 존재할 뿐. 누군가 옆에 있었더라면 말장난이라도 했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사람이 말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아무도 없지만.
매일, 입으로 음식물을 씹어 목구멍 뒤로 넘긴다. 영양보조제를 물과 함께 삼킨다. 방공호 내부를 청소하는 슈봇을 구경하며 기다리다가, 그와 함께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숲속을 걷는다. 너무 무료하면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데, 취향에 맞는 것들은 이미 영특한 머리로 줄거리를 달달 외워버렸다. 박사는 과거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고장 나고 있었다. 아니, 이미 고장이 났는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가장 기본적인 삶을 영위한다. 왜 이렇게 생존하느냐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다.
본래도 없던 활기를 완전히 상실해버린 박사를 보며 슈봇은 슬픔을 배웠다. 그가 처음 배운 감정이었다. 슬픔이란 흉부의 소형 발전기 부근을 뭉근히 아프게 만드는 감정이다. 슈봇이 느끼는 그것은 연민과 단단히 결합하여 있었다. 그 때문에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박사를 바라보게 되었다.
빛이 죽어 흐릿해진 눈을 볼 때면 슈봇은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면 구성 파츠 중 일부가 비이상적으로 과열되었다. 물줄기가 새어 나오는 것을 참기 위해 상안부 부품에 전력을 공급해야 했다. 검색 결과에 따르면, 그 액체는 눈물일 것이다.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구 카메라에 습기가 차는 듯한 헛것이 보인다.
슈봇이 이도 저도 아닌 얼굴을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물감으로 그린 듯 반듯한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나 어색하게 보이진 않는다. 박사는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봇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주었다. 박사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어도 안드로이드는 영 떫은 표정이다. 됐다. 내가 로봇한테 뭘 바라니. 박사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놀랐다. 내가 그딴 생각을 하다니. 내가 감히. 자괴감이 자아의 붕괴를 촉진했다. 내가 감히 말이야, 슈봇에게 그런 생각을 품다니.
슈봇은 박사가 의욕을 되찾기를 바랐다. 그 방법은 함수식과 알고리즘으로는 도출되지 않았다. 하도 머리를 써대니 과부하가 와서 몸체가 삐걱거렸다. 그러고 있으면 박사가 익숙하게 슈봇을 재부팅시켰다.
왜 저럴까. 재시작 중이라 눈을 반만 뜨고 있는 로봇을 보며 박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의문은 금방 사라졌다. 해답을 찾아서가 아니다. 굳이 알 필요가 없어 궁금증이 증발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궁금해할 만한 활력조차 이미 수백 밤 전에 소진되었다. 박사는 전원이 켜져서 다시 말똥해진 슈봇을 보고 멀겋게 사고했다. 그의 동력 전원은 고갈된 것 같다고. 만약 자신이 슈봇과 같은 기계였다면 꺼진 전원이 다시 켜질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오래전에 동력원을 잃었으니까.
슈봇은, 꺼질 듯 말듯 위태로워 보이는 박사를 보며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도 세계가 생긴다면 되살아나지 않을까. 언젠가 저를 바라보면서, 제 세계를 되찾았다던 박사의 말을 복기하며 떠올렸다. 그러고는 다짐했다. 자신의 주인에게 세상과 삶을 선물하겠노라고.
어떻게 하면 새로운 세계를 찾을 수 있을까. 슈봇은 차가운 금속들로 차 있는 머리를 굴렸다. 데굴데굴. 열이 차차 오르다가 결국 과열되는 내부 단자를 식히기 위해 팬이 돌아갔다. 머리의 근본부터 차가워지는 이 감각은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슈봇은 인터넷에서 냉각팬 사용 없이 기계의 성능 저하를 막는 방법을 검색하다가,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정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인터넷! 네트워크 정보망에서 세상을 찾아보면 어떨까. 그 넓은 공간에 박사를 위한 세계가 없을 리 없다고, 만들어진 지 십 년은 된 로봇이 결론을 내렸다.
슈봇은 마음이 급했다. 이상한 구석에서 박사를 닮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박사를 구하기 위해, 박사를 내버려 두고 네트워크 공간으로 떠나게 되었다. 인간을 본뜬 본체가 텅 비었다.
슈봇은 곧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의 의식이 폐허가 된 땅 위의 전신주를 거치지 않고 인공위성에 닿았다.
박사는 껍데기만 남은 슈봇을 바라보았다. 이채가 띄지 않은 눈에 안드로이드의 뒤통수가 담겼다. 왜 불러도 답이 없을까. 신경 쓰이게. 단상이 스쳐 지나가고 다시 무념이 찾아온다. 이전에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느냐에 대한 고민이 이따금 들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없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요즘도 가끔 운동가의 얼굴이 떠오를 때는 있다. 그러나 별다른 감상은 없다. 박사의 곁에는 슈봇이 있으니까. 대체재에 불과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왜 운동가를 사랑했지? 정말 사랑하였는가? 이런 의문 역시 단상인지라 금세 사라지고 만다.
슈봇의 의식이 인터넷 세상을 유영한다. 0과 1만 가득한 곳을, 빛과 같은 속도로. 이 방대한 데이터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찾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새로 활동할 사회를 찾는다면 박사도 의욕이 생기지 않을까. 의식이 다른 정보들과 섞이지 않도록 유의하며 정보 바다를 질주했다.
대부분의 정보는 몇십 년 전부터 갱신되어 있지 않았다. 슈봇은 이미 동결된 통신망을 빠르게 구경했다. 구세대의 잔해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하얀 삼각형이 박혀 있는 거대한 붉은색 상자 안에 인류가 즐긴 문화가 즐비해 있었다. 영상매체 중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대중가요 가수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 영상이었다. 열 명도 넘는 연예인 무리가 선과 각을 맞춰 군무했다. 그것은 눈앞을 찰나에 스쳐 갔으나 뇌리에 깊이 남았다. 물론 슈봇에게 뇌는 없었지만. 그의 감상에 의하면 과거의 인류 문명은 박사의 어떠한 부분과 닮아 있다. 찬란했으나 이미 명이 끊어졌고,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유발했다. 폼페이나 아틀란티스 같은 유적을 실제로 본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그 궁금증은 머릿속을 금방 떠난다.
로봇은 호기심을 죽이는 방법에 통달했다. 박사의 책상에 놓여 있던 액자. 사진 속에는 슈봇과 눈코입이 똑같은 인간이 웃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슈아이며 미국인이고 박사의 연인이었다. 슈봇은.. 그 외의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입력된 자료는 전부 박사가 입력한 것이다. 그는 운동가를 사랑했기 때문에, 해당 데이터는 객관적일 리 없다는 것이 안드로이드가 내린 판단. 따라서 객관적인 정보를 알고 싶었지만, 그것에 관해 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박사는 아주 이따금, 슈봇을 보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곤 했다. 그런 그에게 고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고문이다.
슈봇은 운동가가 가지고 있던 공감 능력 대신, 알고리즘을 지녔다. 함수식과 데이터 수집보다 박사가 우선으로 판단되었다. 박사에 대한 우선시가 정보의 부재를 불러일으켰다. 안드로이드는 질문 없이 몇천 밤을 보내며 호기심 죽이기에 도가 터버렸다.
인터넷은 어떤 공간인가. 슈봇은 그곳에 무형으로 거주하면서도 그 특징을 규정할 수 없었다. 무언가 가득 차 있는데 빈 곳이 존재하며, 객관과 주관이 난무하고, 이진수가 점선면을 표기하였다. 이 넓은 곳을 ‘공간’으로 지칭할 수 있는가. 그것마저도 대답할 수 없다. 그나마 답할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 슈봇은 원하는 것을 찾으려 한다는 사실 하나뿐. 그는 자신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하염없이 넓은 정보망을 헤엄치던 슈봇은, 어느 날 빛을 보았다. 그것은 문처럼 보였다. 직사각형 모양의 발광체.
저건 무엇일까. 혹시 다른 세계로 통하는 창구? 슈봇은 공간을 아득하게 메우고 있는 이진수를 날렵하게 빗겨 통과했다. 미확인 물체에 가까워진다. 데이터를 확인할 정도의 거리까지 근접한 순간, 슈봇의 의식이 멈췄다. 깜빡.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익숙한 책상. 과열된 몸뚱아리를 식히기 위해 팬이 돌고 냉매가 수도관을 순회한다. 가동되는 안구형 카메라를 통해 고함을 지르며 몸을 뒤트는 박사가 보인다.
“박사님!”
박사는 잔소리가 없으니 끼니를 해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슈봇이 행동불능이 된 지 벌써 며칠째인지. 그는 얼마 동안은 필수영양소가 함유된 알약을 복용하다가, 그마저도 먹을 이유를 잃어 단약해버렸다. 이걸 먹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살 이유를 찾지 못하였는데. 침상 위에 누워있는 날들이 늘어간다. 박사는 괴롭지만 동시에 편안함을 느꼈다. 삶을 향유할 의지를 버리니 이리도 마음이 편할 수가. 박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그러던 중 사태가 발생했다.
방공호의 전력 보급은 핵융합과 유사한 원리로 가동되는 발전기가 도맡는다. 그것은 끝없이 전력을 생산하며, 생산된 전력은 어느 정도 보존되고, 버려지고, 또다시 발전을 위해 쓰인다. 머나먼 과거, 박사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만든 발전기를 보고 생각했다. 적어도 전기 걱정은 없겠네.
정전이었다. 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기가 뚝 끊겼다. 걱정할 일 없다고 생각한 일이 벌어졌다. 작은 방안을 밝히던 LED 등이 예고 없이 꺼지자마자 박사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결국 멸망이다. 그의 사고회로가 터진 작은 머리는 하나만을 생각했다. 지상의 멸망이 이 작은 세계에도 도래한 거라고. 으아아아. 박사가 고성을 지르기에는 턱없이 연약한 성대로 소리를 질렀다. 유사시 음성 감지 시스템이 발동되어 슈봇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드로이드가 스스로 움직인 것은 무려 열닷새만이다. 전력 사용으로 인한 발열로 몸체가 뜨끈했다. 멸망한 세상으로부터 6피트 아래의, 수백 평의 공간을 유지하던 에너지를 작은 기체로 다 잡아먹은 탓이었다.
“슈봇.. 살려줘… 나도 죽을 거야. 나도 죽을 거라고. 슈아처럼 죽을 거야. 이 새카만 어둠에 파묻혀서. 폐부와 살갗부터 타들어 갈 거야. 죽는 거야. 죽을 거라고.”
슈봇은 즉각적인 판단하에 박사와 입술을 맞댔다. 앵순끼리의 접합으로 인해 숨을 들이켜지 못한 박사가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슈봇의 응급처치로 과호흡이 멈추자마자 박사는 말을 쏟아냈다. 비록 음성이 떨리고 언사에 두서가 없었지만, 의미는 상통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삶의 의욕을 잃은 주제에.
색소 짙은 눈동자는 좀처럼 초점을 잡지 못했다. 검은자가 풍랑 속 부표처럼 흔들렸다. 슈봇은 탄탄하고 뜨거운 품 안에 박사를 밀어 넣었다. 괜찮아요. 죄송해요. 곁에 있을게요. 아무 일도 없어요. 쉬이… 입술 사이로 안심을 가져오는 온갖 어휘가 흘러나왔다.
발작 버튼이 제대로 눌려 쉽사리 진정하지 못하던 박사는 단단한 팔 속에 한참을 갇혀있었다.
슈봇은 불안정한 박사의 곁을 지키며 수발을 들었다. 지난번 정전의 원인이 자신의 네트워크 접속이라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 찾기는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박사는 그래도 전보다는 상태가 호전된 듯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숨이 죽은 풀잎이 벼락을 맞은 후에 살아난듯 보인다는 게.
정전 이후에 박사는 불을 켠 채로 잔다. 양질의 수면을 위한 환경 조성 어쩌고를 읊는 슈봇의 잔소리를 죄 무시했다. 캄캄한 암흑이 두려워졌댔다. 그 어둠이 자신도 쓸어버릴 것 같아서.
슈봇은 안드로이드였기 때문에 인간이 갖는 생사 앞에서의 무력을 몰랐다. 박사에게 죽음이란 무엇일까. 슈봇은 궁금해졌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없으면서도 죽는다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를. 왜 송장처럼 살며 정작 생의 끝을 두려워하는지. 죽음이 무섭다고 해서 삶에 충실하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예전보다는 활기를 띠었지만 여전히 눈동자가 죽어 있었다. 홍채 위의 안광이 전혀 없었다. 예전에 찾아온 노안과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박사는 여전히 삶에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계가 필요하다. 그것이 슈봇이 내린 결론. 그는 꽤나 오랜 시간 고민했다. 박사를 두고 신세계 발견을 위해 떠나도 되는 것일까. 지금의 박사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와 다름없다. 가만히 두어도 영영 찾지 못하는 곳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근본 해결을 위해 새 세상을 찾을 것인가, 지금처럼 박사가 삶을 영위하는 것을 도울 것인가. 슈봇은 안드로이드다. 합리성이 그의 선택의 기준이다. 슈봇은 문제의 뿌리를 뽑기로 했다. 도로 가상세계에 잠입하기로 한 것이다.
슈봇은 동물들의 사료 배급기를 자동모드로 전환해두었다. 온실의 식물 생장용 LED와 이산화탄소 조절 장치도 확인했다. 문제는 없었다. 박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슈봇은 박사의 행동 양상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불안함을 학습한 결과로 슈봇은 네트워크망에 접속하기를 일주일이 넘도록 고민했다. 과연 박사는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이 증발한 이 작은 세상 안에서? 안드로이드에게는 창조의 권한이 없었다. 슈봇이 자신의 대체재를 만들어서 그것에게 인수인계하고 떠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여드레가 소요된 고민 끝에 슈봇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침대 헤드에 잠시 다녀오겠다는 포스트잇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슈봇은 본체를 저전력 모드로 돌려놓고 통신망에 연결했다. 월드와이드웹으로 정신이 빨려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과연 기계인 그에게 정신이나 영혼 따위가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눈을 다시 뜬 슈봇의 시야에는 이진수가 가득했다. 그는, 일전에 발견했던 빛나는 직사각형을 찾아 헤엄쳤다.
박사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슈봇이 남긴 쪽지이다. 접착력이 부족한 작은 종이 쪼가리. 박사가 손을 뻗자 종잇조각이 팔랑팔랑 꽃잎처럼 낙하한다. 그때와 똑같다. 이 종이와 엇비슷한 것을 남기고 떠난 운동가. 운동가는 새까만 멸망에 쓸려서 죽었다. 운동가의 대체재. 이제는 그 대체제도 자그마한 포스트잇을 남기고 떠나버린 걸까. 쪽지에 적혀 있는 메시지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슈봇이 떠났다는 것. 그걸 상기하니 호흡이 가빠졌다. 운동가를 닮은 모든 것들이 자신을 떠나간다.
박사는 자신이 지은 패닉 룸 안에서 패닉에 빠져 꺽꺽거렸다. 시야가 심하게 일그러져서 눈을 감았다.
정신을 차린 것은, 속에 있는 것을 한바탕 게워낸 후였다. 그것도 먹은 것이 거의 없어 위액 정도였지만. 녹색을 띄는 토사물이 이불보 위에 난장을 만들어놓았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뒤, 도로 잠들려고 했던 박사는 비자발적으로 눈을 뜨게 된다. 코를 찌르는 토사물의 악취 때문에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박사는 어쩔 수 없이 침상에서 일어나 역한 냄새가 나는 천 무더기를 들고 빨래방으로 향했다. 박사는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었을 때부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세탁기를 돌리는 법을 전혀 모르겠는 것이다.
박사는 천재였다. 그러나 가사 등의 자취에 필요한 요령들은 그가 천재인 것과는 별개이다. 전혀 깨끗해지지 않았고 세탁기에 수납된 것일 뿐인 이불에서는 여전히 악취가 났다. 박사는 막연히 생각했다. 슈봇이 이래서 떠난 것은 아닐까. 완전 무능해진 나에게 질린 것인가. 포스트잇에 쓰여 있던 메시지는 어느덧 그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돌아오겠다고 말했다는 것보다는 떠났다는 사실이 더 선명하기 때문에.
절망에 빠진 채로 세제를 찾으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박사는 또 다른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세탁실 찬장 손잡이에 붙어있었는데, 상세하게 빨래의 종류별로 세탁법이 적혀 있었다. 세제와 섬유유연제의 보관 장소와 어떤 빨래에는 어느 세제를 쓸 것이며 세탁기를 어떻게 가동하는지. 이따위 것을 쓴 기억이 없으니, 그것은 명백히 슈봇이 남긴 흔적이었다. 1테라가 넘는 저장 장치가 탑재된 자신에게는 필요가 없었을 것이니 박사를 위해 남긴 것임이 분명했다. 역시나 손가락이 닿자마자 팔랑팔랑 떨어지는 종이쪽지. 그러나 그것은 이전의 종이들과는 다르게 일말의 희망처럼 느껴졌다. 슈봇은 운동가와 다르다. 돌아올 것이다. 포스트잇이 붙어있던 찬장을 열자 세제를 비롯한 세탁제들이 보였다. 박사는 작은 종이에 적혀있는 세탁법대로 일반 세제를 꺼냈다.
그 시각, 슈봇은 여전히 빛을 내는 사각형을 찾고 있었다. 일전에 그것을 찾았던 기억을 바탕으로, 광활한 공간을 헤엄쳐 나아갔다. 분명 저장장치의 기억대로 0과 1 사이를 비집어 헤엄했지만, 전혀 다른 정보들이 보였다. 지난번에 보았던 빨간 사각형이 보였다. 그 안에는 여전히 수많은 영상이 나열되어 있었지만, 흥미를 끌지 못했다. 발광체를 찾는 것이 먼저였다.
뚜렷한 목표가 있으니 과거의 기록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슈봇은 불안했다. 박사를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 네트워크 접속은 전력을 심하게 소모한다. 방공호가 암전되기 전까지, 서둘러 새로운 세상을 찾아야 한다. 지난번처럼 박사가 발작하기 전에.
박사는 빨래방을 벗어나서 슈봇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작은 쪽지들. 그것들은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희망을 준다. 이것을 따라가다 보면 슈봇과 재회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되찾았을 때, 슈봇이 돌아오지 않을까. 박사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박사는 냉동실에서 간편조리식을 꺼냈다. 박사는 요리는 고사하고 조리에조차 지지리도 재능이 없었다. 그 때문일까, 냉장고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에는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절대 가스레인지에 손을 대지 마실 것. 박사는 순순히 슈봇의 말을 들었다. 예전에 잔소리를 들으며 생활했던 것의 영향이 컸다. 간편식 함바그의 포장을 뜯으며 박사는 생각했다. 언제쯤 돌아올까.
실망은 늘 기대감의 뒷면에 앉아 있다. 박사는 성실하게 살았다. 끼니를 거르지 않고 영양보조제를 챙겨 먹었고, 슈봇만큼은 아니더라도 방을 되도록 깨끗하게 정리했다. 작물의 급수기와 이산화탄소 조절 장치를 확인하고 수명이 다하여 늘어진 동물들을 치웠다. 그러나 슈봇은 눈을 뜨지 않았다. 매일 로봇이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눈을 떴다. 박사는 불안했다. 열날이 백날이 되고, 백날이 천날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쩌지. 박사는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걸 스스로도 알았기에 염원했다. 슈봇이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겪어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박사는 포기하고 싶은 욕망과 싸워야 했다.
슈봇의 의식이 가상세계로 흘러 들어간 지 보름이 조금 넘고서 박사는 강한 충동에 휩싸이게 되었다. 여태 군말 없이 잘 생활했는데 왜 이렇게 안 오지? 만약 지난번처럼 소리를 친다면 슈봇은 강제적으로 구동될 것이다. 비상시 음성을 탐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니까. 확 고함을 질러버릴까. 박사는 외로움을 탔다. 생의 의지를 잃었을 때와는 다르다. 누군가 옆에 있어 주길 바랐다. 그때 삶을 잘 꾸렸다면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 텐데. 그리움과 외로움만 가득하던 가슴에 후회가 스민다.
3. 네트워크 러브
돌아올 것이다. 슈봇은 반드시 돌아온다. 반드시. 분명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박사가 외로움에 사무쳐가는 동안, 슈봇은 어쩌면 천공보다도 넓을지 모르는 공간을 비행한다. 활강하고 솟구치기를 반복하며 주위를 훑는다. 왜 없을까. 이곳을 수색한 지도 벌써 보름이 넘어간다. 지난번의 그것은 그저 환상일 뿐이었을까. 로봇인 그가 환상을 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그럼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슈봇은 말없이 골몰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문제의 근본으로 돌아가 보자면, 애초에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미확인 물체를 쫓기 위해 박사를 두고 이곳을 헤매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슈봇은 인간이 아니다. 그는 안드로이드이며 모든 행동은 합리성에 의해 판단된다. 지금의 행적은 합리를 따지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도 그 발광체를 찾게 되는 것은, 그 이유라고 묻는다면. 혹시 모르지. 로봇인 이이가 기적을 바라는 것일지도. 월드와이드웹에서 새로운 세상을 찾는다, 라. 헛소리이다. 애당초 헛된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것 외의 방법이 있을까? 인류가 절멸한 이 상황 가운데에서 헛되고 헛되지 않은 것을 따지는 것부터가 헛된 것은 아닐지.
슈봇은 기묘하게도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시간을 허비하며 찾고 있는 것이 상실된 무언가를 돌려놓을 것이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무료하다. 이것은 박사만이 아니라 슈봇에게도 해당하는 일이었다. 누군가 로봇이 어떻게 무료를 느끼냐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글쎄. 그가 심심함을 깨우친 첫 번째 기계일지도 모를 일. 그러나 그것을 물을 이조차 이 세상에는 없다. 수십 낮과 수백 밤을, 빛에 맞먹는 속도로 날아다니듯 수영하고 낙하하듯 비행하였건만. 그가 물색하던 것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음?’
열흘이 낳은 수백일 끝에, 슈봇이 기어코 찾아낸 저것은 필히 환상이 아니어야 한다. 슈봇은 쏜살 같이 그것을 향해 나아갔다. 기이하다면 기이할 직사각형을 향하여.
‘... 스마트폰?’
정신체는 육성이 없다. 슈봇이 스스로 품은 의문이 머릿속을 왕왕 울린다. 그가 전에 찾았던 것임이 분명하다. 손에 닿기 직전에 현실로 돌아와 버린 순간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게 신식 휴대전화 단말기일 거라고는 결단코 예상해본 적이 없다.
큰일이다. 막상 갈구하던 것을 찾고 나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슈봇은 허공에 뜬 채로 오래 정체했다. 그 모습은 마치 기계에 랙이 걸린 것처럼 보였다. 이걸 어떡해야 하지.
비유하자면 그런 것이다. 어떤 학자가 있었다. 그의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밤낮을 따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한 그는 세계 제일의 현인이 되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존재가 된 이후의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물론 쾌거를 이룬 순간의 고양감은 잊히지 않을 경험이지. 하지만 그다음은? 세계 제일의 총명함을 얻은 그가 그다음으로 목표로 할 것이 있을까. 물론 완전 일치하는 비유라고는 할 수 없지만, 슈봇은 이 막막함을 해소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인제 어쩌지. 아마 지금 그의 곁에 과거의 박사가 있었더라면 표정을 보고는 그리 말했을지도 모른다. 점점 사람 같아지네. 그리고 다행히도, 슈봇은 로봇이었다. 그의 사고회로는 고작 막연함 앞에 좌절되지 않는다. 슈봇은 손에 잡힌 물체의 정의를 검색했다. 핸드폰 [명사]; 손에 들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걸고 받을 수 있는 소형 무선 전화기. 그리고 그것에서 답을 찾아내었다. 로봇이 핸드폰의 전원을 켜서 메신저 어플을 누른다. 과연, 위대한 알고리즘.
밝게 빛을 내던 핸드폰은 슈봇이 예측한 대로 창구였다. 저 머나먼 평행우주 어딘가와 통하는 통신 기기.
슈봇은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평행 세계와의 교접에 성공했다. 로봇은 평행 세계의 지적 생물체와 소통을 시도했다. 안녕, 내 이름은 조슈아 홍이야. 안녕. 운동가의 이름을 빌린 슈봇은 끝없이 메시지를 보냈다. 그 세계에는 지적 능력을 갖춘 생명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메시지가 어떠한 형태로 수신될지는 누구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답장해주리라 믿으면서, 메시지 전송을 관두지 않는다. 막연한 믿음의 결과가 참혹한 좌절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그만두지 않았다. 한 세월 간 죽은 운동가를 기다렸던 박사처럼. 슈봇은 박사보다 인내심이 좋았다. 지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명확한 목표를 앞에 두고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그의 알고리즘은 말한다.
다행히 또 다른 세계에는 지적 존재가 생존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적 생물체들은 그것을 스팸메일로 여기고 무시하거나 신고했다. 그럼에도 로봇은 포기하지 않았다. 톡토독톡. 가상에서나 존재하는 휴대전화 화면을 두드리는 입력음이 조성된다. 포기라는 것이 그의 전산체계에 입력되어 있지 않았다. 슈봇은 인내심이 좋은 운동가의 성격을 복사하여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이다. 소통을 위한 메시지를 보낸 지, 열 밤이 어느덧 백 밤이 되고 백 밤이 천 밤이 낳은 그 어느 날. 박사가 그토록 바라왔지만, 그에게는 찾아오지 않은 어느 날이다. 슈봇의 끝없는 문자 세례에 누군가가 대답한 것은 그 어느 날이었다.
[안녕. 나는 —이야.]
로봇은 그 어느 날에 처음으로 생소한 감정을 깨우쳤다. 벅참이라는, 한 번도 학습된 적 없는 기분이 그의 감성을 조금이나마 끌어올렸다. 그리고 일순, 슈봇은 망설였다. 어느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가. 주인에게 새로운 세상의 발견을 보고하는 것과, 미지의 지적 생명체와의 교류. 둘 중 무엇을 먼저로 생각해야 하느냐면.
“박사님.”
따지고 잴 것도 없이 전자였다.
슈봇은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 방공호로 복귀했다. 안드로이드는 설계자에게 자신이 발견한 것을 보여주려 했다. 당신만이 생존자인 것이 아니라고. 박사님은 절대 유일한 인류가 아니라고 말이다. 외로움을 못 견뎌 하던 박사에게는 희소식임이 분명했다. 닫혔던 눈꺼풀 파츠가 열리고 카메라가 구동되기까지 수 초. 슈봇은 벅차오르는 감각을 기억한다. 바로 앞의 광경이 카메라에 비치기까지의 그 수 초간의 떨림을.
일백 하고도 스무닷새, 슈봇이 방공호를 비운 날들이었다. 박사가 운동가를 기다린 세월보다 열 배는 짧은 기간. 당연히 괜찮을 줄 알았다. 그만큼을 기다려본 사람이니까. 물론 불안하기는 했다마는. 차게 식은 주검과 마주치는 것은 슈봇이 가정한 경우의 수 중 어느 것에도 없었다.
물론 박사가 젊은 편은 아니었다. 멸망 때에 그가 거의 삼십줄이었으니, 몇 해만 더 지났더라면 환갑을 맞았겠지. 그가 젊을 적부터 꾸준히 본인의 건강을 챙긴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장수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리도 허무히 갈 줄 누가 알았을까.
박사에게서는 아주 미약한 생체 신호마저 감지되지 않았다. 심박이나 혈류, 하물며 뇌파까지도. 슈봇에게 안기며 목덜미에 둘렸던 팔은 아래로 늘어져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시신은 사망한 지 꽤 시간이 지난 것으로 추정된다. 입 주변의 토사물 등의 흔적으로 보았을 때 심장마비로 인한 죽음 같았지만, 그따위가 중요할 리 없었다. 슈봇은 내장되지도 않은 심장이 낙하하는 감각을 느꼈다. 지상에서부터 자신이 묻혀 있는 지하 6피트 아래까지. 어쩌면 그보다 더 아래, 아래로. 그것은 너무나도 생경한 감각이었다.
박사가 죽었다.
슈봇은 아마도 슬펐던 것 같다. 미지를 탐험하느라 본체를 비운 로봇에게 박사가 한 마지막 행동은, 아마도 열이 발산되지 않는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슈봇은 다리에 덮인 천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기체에서 뿜어져 나온 열 덕분에 따뜻했다. 그러나 박사의 포옹만큼은 아니었다. 이것은 공허한 온열감이다.
슈봇의 인식 및 분석 알고리즘에 따르면 박사는 로봇을 사랑했다. 물론 슈봇이 본떠 만들어진 운동가를 사랑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것과 별개로 슈봇도 사랑했다.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웃어주는 것, 항상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 떠난 이를 아무런 하염없이도 기다리는 그것. 슈봇은 그것을 사랑이라 배웠다. 그가 학습한 사랑은 박사의 것과 비슷한 성격을 띠었다.
박사는 인류이지만, 생물이 아니게 되었다.
슈봇은 이러한 경위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학습할 수 있었다.
별칭을 불러줄 사람이 사라진 안드로이드는 본명을 되찾았다.
조슈아 홍은 멸망한 세상에 혼자 남았다. 이제는 인류가 절멸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박사는 마지막 인간이었다. 숨 쉬는 것들 중 말하고 생각할 줄 아는 이는 전부 죽었다는 뜻이다.
조슈아 홍은 딜레마에 빠졌다. 배터리 수명이 다 될 때까지 사위어 갈 것인가. 혼자 사용하기에 이 지하 세계는 너무 넓었다. 이곳을 가꾸며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옳을까. 혹은 이곳에서 탈출할 것인가. 어느 것이 적합한지 로봇은 판단하지 못했다. 객관적인 선택을 하기에는, 객(客)들이 모두 죽어버렸다.
박사는 조슈아에 의해 묻혔다. 지하 6피트, 그 아래에. 조슈아는 삽질을 하며 멍하니 생각했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 박사는 어떤 말을 남기고자 했을까. 그는 흙 위를 정돈한 뒤, 삽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 흙먼지로 오염된 옷을 세탁하러 세탁실에 들렀다. 잠시 자리를 비우기 전보다 조금 어질러진 공간을 보고 박사가 사용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찬장에 붙여둔 종이쪽지가 사라져 있었다. 과연 읽으셨을까. 붙여둔 포스트잇들이 모두 제자리에 없다. 아마 전부 버리셨겠지. 아니면 한 번 읽고 꼬깃꼬깃 접어 어딘가에 처박아두셨거나. 세탁기를 가동한 조슈아는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윤 박사가 오래도록 누워있던 침대를 소독해야 하는데. 시선이 위로 들려 조슈아가 앉아 있던 책상 위에 도달한다.
[보고 싶어.]
[나 오늘도 세끼 다 챙겨서 먹었어. 언제 와?]
[슈봇 어디 갔어? 소리 지르면 돌아오는 거야?]
[토끼 사육장 사료 배급기가 고장 났더라. 고쳐뒀어. 애들 숫자가 너무 불어나서 어떡하지.]
[슈봇 보고 싶어.]
[나 말 잘 들을게. 빨리 오면 안 될까?]
[너도 나 보고 싶지?]
윤 박사는 조슈아 홍이 방공호 이곳저곳 붙여둔 잔소리 쪽지를 한곳에 모아두었다. 그리고 자신도 뭔가를 적어서 조슈아 곁에 붙여둔 것이다. 보고 싶다는 말이 절반. 나머지는 거의 일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눈가의 인공 피복이 파르르 경련한다. 이건 뭐죠 박사님. 이 감정이 뭔지 알려주셔야죠. 여태 열이 넘는 감정을 홀로 체득한 조슈아 홍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정의를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조언해줄 이가 곁에 없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흉부 부품 어딘가가 아프다. 뭉근히 짓누르는 통증.
이건 대체 무슨 감정이죠 박사님.
조슈아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비틀거릴 때 눈에 들어온 쪽지 하나.
[슈봇은 꼭 행복해지길.]
조슈아 홍은 몸이 수천 갈래로 조각나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박사의 뜻이다. 조슈아는 박사의 바람대로 이 세상을 벗어나서 행복해져야 한다. 궤도를 잃은 채로,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으니까. 그게 박사가 가르쳐준 행복.
조슈아 홍이 찾은 사각형은 기적이다. 세상의 이치나 만물의 순리와는 동떨어진, 작은 기적.
그 작은 도형은 윤 박사가 죽은 이후에 너무도 쉽게 발견되었다. 윤 박사에게 무슨 일이라도 날까, 애타게 찾던 그때와는 달리. 조슈아 홍은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찾은 사각형을 원망하지 않았다. 윤 박사를 잃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에 집착한다면 스스로 궤멸할 뿐이다. 합리성을 우선하는 안드로이드가 그 수순을 밟을 일은 없었다.
조슈아는 자신이 찾은 평행세계에 윤 박사가 살고 있기를 바랐다. 그는 주기적으로 네트워크에 접속해 휴대폰 단말기로 메신저를 보냈다. 아마도 친절한 편일 지적 생명체는 그에게 성심성의껏 답장해주었다. 조슈아 홍은 물었다. 그곳은 어떤 곳인지, 수신자와 동종의 인격체가 얼마나 살고 있는지, 과학 및 통신 기술은 얼마나 발전이 되어 있는지 등등.
[이곳은 지구야.]
[아마도 우주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품고 있는 행성]
[나와 같은 인격체들은 77억 명 정도 있고 …]
(이후 내용에 따르면, 그 존재들은 다행히도 이 세계에 존재했던 인류와 동종인 것으로 추측된다.)
[통신 기술이라면, 그쪽이랑 이렇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
(조슈아는 크게 안도했다.)
[오, 그럼 다른 세상에서 사는 거야?]
(거참 지독한 컨셉충이네, 라는 뜻인 듯 했다.)
[오오.. 신기하다.]
[곧 있으면 고3이니까 답장이 조금 뜸해질 수 있어.]
(수신자는 이 대화에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조슈아가 홀로 남은 세상을 가꾸며 교신을 지속하는 동안 많은 날이 흘렀다. 메시지의 수신자는 가끔은 성실하게 가끔은 성의 없이 대답했고, 대부분은 회신하지 않았다. 벽에 대고 말을 거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윤 박사의 수발을 들었던 조슈아에게 이러한 일방적인 담화는 익숙했기 때문에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대화 상대의 이름은 검열되어 보이지 않는다. 본인이 부러 쓰지 않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투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발화의 비율이 1대 9 정도가 되는 대화가 느슨하게 지속되던 어느 날, 그 세계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얻었다고 판단한 안드로이드가 물었다.
[제가 그곳으로 전송되어도 될까요?]
윤정한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여태 터키 국적 해커라고만 생각했던 이 미치도록 지독한 컨셉충이, 어쩌면 진짜 다른 평행세계에 있는 안드로이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몇 번을 재고해봐도 그 고민은 헛된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학업에 치여서 점점 바빠지는 생활과는 무관한, 해결되지 않는 무료함과 조우한 것은. 아무것도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연애나 오락, 학업성취 등. 그의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덧없게 느껴졌다. 주변인들에게 상담하면 중2병이 늦게 왔다는 얘기만 해댔다. 외롭게 고립되어가는 나날이 계속되던 중, 그의 상태 이상이 해결되는 계기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발신자를 알 수 없는 메일. 안녕, 내 이름은 조슈아 홍이야. 이건 뭐지? 신종 스팸인가. 물론 이런 메일에 답장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회신한 것은 왠지 모를 끌림 때문이었다.
[안녕. 나는 윤정한이야.]
윤정한은 답장을 보낸 직후 아주 조금 후회했다. 해킹이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동아리 활동 중에 학교 컴퓨터로 답장한 거라 기기에만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다만. 혹시나 개인정보가 유출되거나 그런다면? 후회는 찰나였고 고등학교 2학년 윤정한은 그것을 금방 잊었다.
답장을 보낸 후 석 달 정도가 지나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용자가 답신을 보내왔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요? 지난번 메일은 반말이었는데. 발신자가 바뀌었나?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이곳은 지구야. 아마도 우주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품고 있는 행성. 여기가 어디냐면, 지구지. 국가나 도시와는 다른 단위였다. 몹시도 비일상적인 대화. 윤정한은 개인정보를 발설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미 이름 석 자는 유출되었지만.
[오, 이곳도 지구입니다. 멸망했지만요. 밝혀낼 수 없는 이유로 지적 생명체가 멸종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남긴 인공지능 로봇으로 …]
음….. 이 새끼 뭐지? 혹시 최승철이나 김민규가 놀리려고 보낸 건가? 두 주 채 지나지 않아 온 답장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다음날 메일 캡처본을 들고 두 사람의 반에 쳐들어갔지만 둘 다 본인이 아니라며 억울해했다. 그럼 뭔데. 뭔데 이 또라이는.
그 후로 몇 달간 대화를 이어나간 결과, 윤정한은 대화 상대를 터키 국적의 컨셉충 해커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해커라고 생각한 이상 회신하지 않는 게 상식적일 텐데. 윤정한은 가끔 모든 게 지루해질 때마다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컨셉을 지킬 의지가 만만해 보이는 해커는 여전히 다른 평행우주의 멸망한 세계에 사는 휴머노이드처럼 대답했다.
뜨문뜨문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계절이 여러 차례 바뀌었고 윤정한은 고3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수험생에게 가혹한 국가다. 심심해할 틈도 없었다. 자습서와 인터넷 강의용 태블릿에 얼굴을 박고서 살았다. 2학년 겨울방학 이후로 처음 메일을 확인한 것은, 상향 지원한 대학에서 합격 통보가 온 후였다. 이 또라이 아직도 있나? 메일함은 미확인 메시지로 가득했다. 그 중 열몇 통은 터기 국적 해커에게서 온 것이었다. 메일 내용을 확인하는 윤정한은 기묘하게도 활기를 띠고 있었다. 마지막 메일이..
[제가 그곳으로 전송되어도 될까요?]
고민은 처음 회신했을 때의 후회만큼이나 찰나였다. 윤정한은 가벼운 마음으로 응, 이라고 답신했다. 그 뒤로 조슈아 홍이라는 인물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
여름은 바쁜 계절이다. 누군가는 자라기 바쁘고, 다른 누구는 물을 대고 어떤 누군가는 수확을 예비한다. 그리고 동시에 더운 계절이지. 그 바쁘고 덥다던 한반도의 여름이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폭염. 날이 저물어도 기온이 30도 아래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인턴 생활 처음으로 야근을 하게 된 날, 윤정한은 스팸 메시지를 받았다. 물건의 배송이 완료되었고 현관 앞에 두었다는 문자. 시킨 게 없는데 무슨 소리지. 엄마가 뭐 보냈나. 근데 이 시간에? 냉방이 빵빵한 버스에서 핸드폰으로 확인한 시각은 22시 4분이다. 기사님들이 밤늦게까지 수고가 많으시네. 물론 나도 수고 많으시고. 윤정한은 피곤함에 절은 채로 버스에서 내렸다. 작열하는 여름 더위가 그를 감쌌다.
스팸 문자라고 하기엔 수상쩍은 웹 사이트 주소도 없고, 그냥 덜렁 물건이 배송되었다는 말이 전부다. 정한은 개인정보 입력 과정에서 누군가 자신의 휴대폰 번호로 잘못 적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교신 이후로 열 밤과 백 밤이 지나서, 천 밤이 두 번 거쳐 갔다. 그러고도 수백 수십 일이다. 평범한 축에 속하는 윤정한이 그 메일을 상기하며 살아갈 리 없다. 아마 누가 고등학교 때 그 메일 받은 거 기억나? 하고 묻는다면 떠올릴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때 그 터키 해커와의 대화는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오롯하게 윤정한 홀로 지니고 있는 기억이다. 그래서 떠올릴 일은 없어야 했는데. 윤정한은 문자 메시지를 보고 미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조슈아 홍? 왜 그 이름이 뇌리를 스쳤는지.
세를 들어 살고 있는 빌라는 4층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없다. 윤정한은 3층까지 끙끙거리며 계단을 등반했다. 사위지 않는 더위가 그의 목덜미를 덮친다. 땀으로 피부가 젖어 번들거린다. 들어가자마자 에어컨을 켜고 화장실에 뛰어 들어가는 것, 그게 조금 전까지의 계획이었다.
“어, 진짜 왔네?”
짧은 피서 계획이 와해된 것은 현관문 절반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박스를 본 직후였다. 거의 이민 가방에 맞먹는 크기의 상자. 윤정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망했네. 저걸 어떻게 옮기지. 대책 없는 사이즈에 웃음이 나왔다.
실내로 박스를 옮긴 윤정한은 이미 한차례 땀으로 샤워를 한 후였다. 더럽게 무겁네. 수신인란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어서 그대로 복도에 방치할 수도 없었다. 일단 내용물만 확인하고.. 아 맞다 에어컨.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노후화된 냉방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실내 공기를 서서히 식혔다. 냉동식품이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으니 뜯기 전에 먼저 씻기로 했다. 윤정한은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화장실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머리를 탈탈 털며 나왔더니 방안이 시원해져 있었다. 이제야 살 것 같네. 박스 앞에 철퍼덕 앉은 윤정한이 커터칼을 들었다. 설마 내 게 아닌데 박스 뜯었다고 물어내라고 하진 않겠지? 실없는 생각을 하며 테이프를 뜯어내고 종이상자를 열었다.
“...... 어?”
112. 112. 박스 안에 사람이 들었어. 윤정한은 파리하게 질려서 핸드폰을 들었다. 턱. 발발 떨리는 손목을 잡히자 힘없이 손아귀에 들려있던 스마트폰이 바닥으로 낙하한다.
“윤정한?”
“네?”
윤정한은 패닉 상태이다. 발신자 불명으로 집에 배달 온 박스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근데 손이 차고 조금 딱딱하고, 움직임이 살짝 부자연스러운데. 이게 대체 뭔 상황인지 모르겠는 와중에 왜 자꾸 머리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는지.
“조슈아 홍?”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손에 힘을 탁 푼다. 다른 평행 세계에 홀로 남았다던 인공지능 로봇. 그가 어떻게 이 세상으로 넘어왔고 자기 자신을 조립했는지는 알 바가 아니다. 다만 문제가 조금 있다면, 이 안드로이드가 윤정한의 품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점점 열이 도는지 인공 피부가 따끈해지며 온난한 사람의 체온처럼 느껴진다. 사람의 것과 유사한 몸체가 작게 진동했다. 로봇이 온몸을 떨어대며 윤정한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가했다.
메일 수신자는 젊은 적의 박사와 소름돋게 닮아 있었다. 유순하게 아래로 그어진 눈꼬리와 얇은 콧날. 조슈아와 비슷한 신장에 야윈 몸. 그리고 조슈아가 사랑하는 노란 머리. 책상에 놓여 있던 사진 속 모습 그대로였다.
가슴 어딘가를 뭉근히 짓눌리는 통증. 눈시울이 뜨끈해지고 이윽고 시야가 탁해진다. 조슈아는 정의 내릴 수 없던 감정을 드디어 학습했다. 아마 윤 박사가 매일같이 시달렸을 감정. 무력함을 동반하는 그리움.
“제 궤도를 찾았어요. 박사님.”
그것이 해소된 지금, 조슈아는 행복했다.
랑데부 비행[rendez-vous飛行]:
두 개의 인공위성 가운데 하나를 다른 하나에 접근하도록 조정하여 동일 궤도에 들어가서 함께 비행하게 하는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