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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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성년퇴마열전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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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성년퇴마열전

 

 

 

 

 

제 인생도 퇴마가 가능한가요

 

신사동 어느 구석진 골목에 위치한 간판 없는 사무소에 당도한 김주영은 10분째 건물 입구를 서성이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이라 이 한심한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한 것에 안도하는 동시에 지금이라도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쪽팔리다는 핑계로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김주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냥 지금 돌아갈까? 여기까지 와서 뭘 하고 싶었던 건지 목적이 희미해져 걱정만이 남았다. 조퇴하고 나면 아픈 게 사라지듯 사무소 앞에 서니 별일이었던 것들이 점차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이젠 약 2주 사이에 일어났던 이상한 현상이 전부 직장인의 피로에서 파생된 스트레스 증상처럼 느껴졌다. 여길 올 게 아니라, 병원을 갔어야 하는 거 아닐까? 김주영이 입구를 서성인 지 15분째, 결국 여기까지 왔으니 무라도 썰어보자는 심정으로 계단을 올랐다. 초여름을 앞둔 날씨에도 건물 내부는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단순히 더위를 식히는 서늘함이 아니라 어쩐지 스산한 기운이 섞여 있어 몸을 떨던 김주영이 육중해 보이는 철문의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열린 곳, 그곳에는 선글라스를 낀 기묘한 청년이 김주영을 향해 인사하고 있었다. 손목엔 합장주가 과할 정도로 많아 움직일 때마다 절그럭 소리가 날 정도였다.

 

하이.”

 

초면에 왜 반말. 그러나 김주영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대충 손님석 같아 보이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퇴마사래서 어쩐지 돈줄인 귀신 불러 모을 정도로 햇빛 하나 안 드는 음침한 분위기에 사무소 곳곳이 부적으로 도배가 되어있을 줄 알았더니 예상외로 내부는 깔끔했다. 채광 또한 여느 비싼 아파트 못지않게 좋아 김주영은 어디 조명이라도 켜놓은 건가 궁금해 두리번거리다 말았다. 청년은 김주영 앞에 마주 앉아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고는 눈동자를 위아래로 굴렸다. “잘 찾아왔네.” 김주영은 위축됐던 어깨를 조금 펴고 사회성을 꺼냈다. “지도에도 안 나와서 찾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이 근처에 골목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는데.”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뭔 소리냐는 표정이 청년의 얼굴에 떠올랐다.

 

아니, 귀신 붙은 거 용케 알고 찾아왔다고요. 타이밍 잘 맞춰 왔네여.”

 

온몸의 핏기가 싹 가신다는 게 이런 말일까. 김주영은 사색이 되어 까무룩 기절했다.

 

김주영이 고치고 싶었던 건 본인의 인생이었는데. 이곳에 온다고 해서 자신의 암울한 취준 인생이 수리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문에 기대 퇴마 사무소를 찾아온 건, 잠이라도 잘 자야 인생을 다림질할 힘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2주 전부터 김주영은 자신의 방에서 또 한번 잠드는 꿈을 꾸곤 했는데 문제는 그 꿈에서 잠을 자려고 누울 때마다 어디선가 박박 긁는 소리가 난다는 거였다. 분명 잠들었다는 걸 아는데 꿈에서는 쉽게 깨어나지 못했고 기어코 침대와 바닥, 그 사이를 확인해야만 비명과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그것도 늘 같은 시간에. 새벽 344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던져버리려다가 나중에 치울 일이 더 걱정되어 참았다. 불 꺼진 방안에서 눈만 깜빡이다가 기절하듯 잠들기를 반복했다. 불을 켜고 자도 똑같았고, 바깥에서 잠을 자도 언제나 꿈은 자신의 방에서 시작되었다. 강아지도 고양이도 아닌 것이 벽과 바닥 사이를 긁는 소리는 너무 기괴해서 온몸이 풀 먹인 천처럼 굳어갔지만, 김주영은 꿈의 마지막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이 악물고 일어나 곧장 침대 바닥을 확인하기 위해 바닥에 발을 디뎠다. 김주영은 항상 비명과 함께 깨어났지만, 침대 밑에 있는 그것의 형체를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지레 겁먹고 냅다 비명 먼저 지른 탓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용기인지 객기인지 모를 것이 김주영을 감싸고 있어 눈 똑바로 뜨고 나가라고 소리 지를 요량으로 몸을 숙이려다 굳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잠들었던가? 저녁을 먹고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다 침대에 누운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제야 미처 끄지 못한 형광등이 제 등을 비추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평소보다 더 검게 보이는 침대 밑바닥이 김주영의 발목과 허벅지와 등허리와 팔을 묶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몸은 굳어 숨도 쉬기 어려웠다. 박박박박 긁는 소리가 조금씩 다가오듯 커졌다. 그림자인 줄 알았던 것이 조금씩 넘실대다가 밖으로 삐져나오고 있었다. , 기절하고 싶다.

 

번쩍 정신이 들자마자 보인 건 청년의 매끄러운 얼굴과 손에 쥔 부적이었다. 빨간 물감으로 글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게 그려진 부적을 한 장 건넸다. “이게 뭐죠.” 제 엄마가 가끔 가져오던 부적과는 확연히 다른 그림 실력이었다. 너무 개발새발이라 잘못 보면 부적인지 쓰레기인지 헷갈릴 만큼 청년의 부적 제작 실력은 형편없었다. “천장에 붙여놓고, 한숨 너무 많이 쉬지 마시구. 창문 열고 환기도 자주 시켜주시고요.” 김주영이 눈물 한 방울을 도로록 떨궜다. 봉투에 담긴 부적을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은 김주영이 비용을 내기 위해 지갑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그런데 왜 천장이죠?”

귀신이 거기 있으니까여.”

침대 밑이 아니라?”

에이, 침대 밑에 있으면 반응이 안 보이잖아요.”

 

청년이 싸늘하게 굳은 김주영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결제는 어떻게?”

 

 

와인엔 치즈

 

신사동에서 몇 안 되는 퇴마 사무소 중 하나를 운영하는 청년의 이름은 윤정한. 나이는 28. 대부분 조상 대대로 무당을 해왔거나 가문 자체가 퇴마사 집안인 것에 비해 윤정한은 개천에서 난 용처럼 평범한 집안에서 불현듯 발생해 퇴마사협회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퇴마사를 용이라고 비유하는 건 너무 콧대들이 높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윤정한은 굳이 그들의 자부심에 재를 뿌리진 않았다. 어쨌거나 남들 뒤처리 해주는 3D 직업인 건 맞았으니 그만한 프라이드 정도는 있어야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윤정한은 프라이드고 나발이고 오로지 보수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가장 성실한 퇴마사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요건을 달성해버린 셈이긴 했지만. 명성이나 지위 따위에 목매는 놈들보다 돈만 쫓는 놈들이 정년퇴직까지 가장 성실하게 일한다고, 몇 해 전 돌아가신 제 외할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 그런 현명한 외할아버지마저도 예상치 못한 것이 윤정한의 퇴마사협회 가입이었는데, 윤정한은 애초에 볼 능력을 타고난 선천적 인재가 아니라 어떤 사고로 인해 후천적으로 능력을 얻게 된 인재였다.

 

그것도 다 커서 한창 진로상담 할 시기에 친구랑 장난 친다고 2층에서 뛰어내렸다가 미끄러져서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뒤에 벼락처럼 능력이 생겼다. 터진 머리 꿰매고 병원에 누워있으니 모르는 얼굴이 하나둘 자신을 구경하러 오기에 커튼 좀 쳐달라고 했더니 헛소리하지 말라는 엄마의 타박이 돌아왔다. “아니, 환자를 왜 구경하냐고.” 윤정한이 투정 부리듯 짜증내자 점점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달려가 의사를 불러왔고, 의사 뒤로 우르르 몰려온 투명도 80% 정도의 귀신들을 발견하자마자 제가 본 게 헛것이었구나 깨달았다.

 

누구에게도 자신이 저승 사람을 볼 수 있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퇴마사협회는 어찌 알고 찾아왔는지 명함을 건넴과 동시에 계약서를 꺼내 들었고, 엄마를 어찌 구워삶았는지 한번에 보호자 서명란에 서명을 하게 만들었다. 당초 퇴마사라는 게 미디어에서 만들어낸 환상의 직업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직업인지, 사업자 등록은 제대로 되어있는지, 세금 신고는 제때 하는지 전혀 믿을 수 없었고, 괜히 그거 하겠다고 나대다가 죽는 건 아닐까 걱정이었다. 퇴마 그거 잘못하다가 다들 골로 가든데. 더욱이 윤정한은 스스로 한 몸 불살라 남을 구할 만큼의 정의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영웅에 걸맞는 인재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머리에 붕대 돌돌 감고 미심쩍은 얼굴로 볼펜 들고 고민하고 있으니 퇴마사협회장 신일용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한 건당 보수 ……만원. 기본급 보장.” 정의감이 밥 먹여 주는 건 아니지만, 돈은 밥을 먹여 준다지. 윤정한은 곧장 퇴마사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어쩌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귀신을 둘이나 끼고 다니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으나, 후자에 대해선 윤정한이 또 미친 짓 했구나 하는 쪽으로 힘이 실렸다. 그냥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거다. 윤정한은 종종 고생해서 잡은 악귀의 한을 풀어주겠다는 이유로 애써 잡은 걸 다시 놓아준다든가, 귀신을 제 몸에 빙의 시켜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다든가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짓을 해 협회를 기절초풍 하게 만들었으므로 당연한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 귀신 둘은 윤정한보다도 먼저 윤정한의 집에 거주 중인 지박령이었으므로,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퇴마하기엔 악의도 없고, 콘크리트 벽도 부수는 질풍노도의 나이에 깝치다가 다리 부러진 사실도 알만큼 어릴 때부터 지켜봤다며 정에 호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좀 약해져서 그냥 내버려뒀다. 그 덕분인지 가끔 와인에 안주로 나온 치즈가 맘에 드는 날이면 로또 번호처럼 슬쩍슬쩍 내일의 운세를 쳐주는데, 그게 또 기가 막히다는 거다. 윤정한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동업 조건으로 계약서를 내밀었다. 내일의 운세를 알려주는 대신 기가 막히는 술과 안주를 제공하기로. 거처는 덤이니 귀신들에게도 남는 장사였다. 뒤통수 때리면 둘 중 하나는 골로 가는 거였다.

 

제 동거 귀신들에게 그러했듯, 체력이 후달리는 윤정한은 무력보다는 주로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세상살이 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꼭 그런 난이도의 의뢰만 들어오는 것도 아니라 벽 한쪽엔 퇴마를 위한 각종 물품을 구비 해놓을 수밖에 없었다. 온갖 미신에 나오는 것들을 전부 수집해 모양새는 고물상이나 다름없었지만, 효과만큼은 보장할 수 있었다. 엮은 지 100년 된 성경책이나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던 보리수나무로 만든 야구빠따 같은 것들이 그러했다. 신과 관련된 물건일수록 딜이 잘 들어갔다. 윤정한은 정공법을 택하기 보단 아이템주의자였으므로 그가 약간의 수집광 기질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의뢰는 위험도에 따라 보수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이번 의뢰 또한 단호하게 거절하지도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사무소를 나섰다. 걸린 돈이 상당했다. , 오늘은 누나들이 재수 없다고 했는데. 그러나 재수 없는 운세보다 무서운 게 실직인 인간 윤정한은 한밤중의 캠퍼스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뒤통수를 조심하세요

 

장사꾼 기질을 타고났다고들 말하지만, 윤정한은 동의하지 않았다. 장사꾼이란 무릇 사짜 냄새를 폴폴 풍기며 사람들 등쳐먹는 족속이 아닌가? 괜히 안 사도 되는 건강식품 사게 만들고, 안 쑤시는 관절 괜히 언변으로 쑤시는 기분 만들어서 장판 팔고. 윤정한은 두려움으로 장사하는 놈은 되고 싶지 않았다. 안 해도 되는 거 굳이 하게 만든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게 아니니까. 부적 하나로 해결될 일을 굿판까지 끌고 가지 않는다는 거다. 그런 신념의 연장선으로 항간에 떠도는 소문의 진상을 파악해야 하는 것 또한 윤정한의 업무 중 하나였다. 최근 들어 같은 캠퍼스 사람들한테서 비슷한 내용의 의뢰가 자주 들어온다며 협회에서 내려온 업무였다. 여러 명이 같은 장소에서 귀신을 봤다는데 없어졌나 싶으면 더 무서운 귀신이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의뢰의 주된 내용이었다. 영적 능력이 없는 일반인에게도 레벨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고 의뢰를 전달해주는 관리팀장이 덧붙였다. 위치는 D대 캠퍼스 예술관. 척 보기에도 건물의 그림자가 짙었다. 으레 예술이 귀신을 부른다고 하지 않던가. 예술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귀신이 출몰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도 협회는 굳이 윤정한을 보내 사실확인을 하려 들었다. 보통은 누군가가 상해를 입거나 사망하지 않는 한, 협회 자체에서 의뢰를 받는 건 드문 일이었는데 이번엔 뭔가 심상치 않은 감이 느껴진단다. 육감으로 먹고사는 인간들이라 그런가, 그런 허술한 주장에 이의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건이 벌어진 곳이 자신의 모교라는 이유로 차출된 윤정한이 선글라스를 콧잔등에 올려놓고 건물을 살폈다. 병원이나 학교나 기운이 처참한 건 퇴마사가 아닌 사람도 알 정도였으나 이건 심해도 너무 심했다. 본래 터를 지켜야 할 신이 전부 땅을 떠나 잡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안 봐도 될 인간이 자꾸 헛것을 보는 거라지.

 

몇이나 있을지도 모르는 잡귀를 다 때려잡는 건 무리였고, 대충 이 구역 짱처럼 보이는 큰 귀신 하나만 잡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자리를 뜰 텐데. 그러나 누군가 기운을 들쑤셔 놓은 건지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 찾기가 어려웠다. 집에서 와인 두 병은 기본으로 까 마시며 담소 나누고 있는 동거귀신 둘을 데려올 걸 후회했다. 누가 퇴마한답시고 깝친 게 분명했다. 분리수거 두 번 하는 심정이 되어 경비에게 미리 받아놓은 열쇠로 문을 따고 건물로 들어섰다. 도처에 깔린 기운이 묘했다. 보통 흡연 부스 마냥 탁하다 못해 폐를 찌르는 듯 지저분한 기운이어야 마땅한데, 군데군데 공기정화 식물이라도 놓은 것처럼 어느 지점에선 숨쉬기가 불편하지 않았다. 윤정한은 아무거나 집어도 꼭 이런 걸 집었다며 속으로 불평하곤 야구 빠따를 고쳐 쥐었다. 딜은 잘 들어가도 쓰고 나면 손이 아파 별로 선호하는 무기는 아니었지만 물리 퇴마에 효과적이었으므로 다시 사무소로 돌아가 무기를 교체하는 수고를 치르진 않았다.

 

선글라스를 올릴 때마다 손목에 걸린 합장주들이 절그럭거렸다. 건강, 애정, 재물, 소원 성취 따위로 목적도 다양했고 색도 다양한 합장주는 윤정한에게 아주 좋은 버프였다. 자잘한 잡귀들이 구석에 붙어 자신을 구경하는 걸 내버려 두고 연습실의 문을 하나씩 열었다. 텅 빈 연습실 거울에 비친 자신이 문득 더 음침하다고 생각하며 선글라스라도 벗을까 고민하던 윤정한이 뒤를 돌려던 순간 눈앞이 번쩍였다. , 소리가 빈 공간을 울렸다. 씨발. 몇 년 전 터진 머리가 다시 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힘이었다. 이 정도면 빠따로 갈긴 거 아냐? 무시무시한 힘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가격한 이는 분명 인간인 게 틀림없었다.

 

, 선글라스 끼고 기웃거리길래 귀신인 줄 알았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익숙했다. 둥글둥글한 목소리로 딜 넣는 게 딱 자신이 알던 어떤 남자가 떠올라 고개를 돌리니 역시.

 

정한아, 밤에 무슨 선글라스야. 보이긴 하니?”

 

천사처럼 웃는 자신의 엑스 보이프렌드가.

 

비유는 천사였으나, 조슈아 지수 홍은 몇백 년에 겨우 한 번씩 태어난다는 석가의 그릇으로 중생을 구제할 운명을 업은 채 태어났다. 크리스천 집안에서 태어난 석가는 자신이 어떤 운명인지도 모른 채 열심히 헌금하며 신앙생활을 이어왔는데. 그런 홍지수가 왜 싯타르타 기운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뒤통수를 갈겼는지 윤정한은 알 수 없었다. 한때 아주 가까웠던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이 섣불리 사연을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슬그머니 선글라스를 벗어 목에 걸어놓은 윤정한이 느슨하게 힘을 풀어 빠따를 앞뒤로 흔들었다. 전 남친과 조우하게 되는 상황은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것이라 윤정한은 사고가 멈춰 버렸다. “너 왜 여기 있어?” 같은 내용을 담은 말이 단어만 바꿔 수십 개가 생각났다. 지금 당장 묻고 싶은 건 딱 그것 뿐이었다.

 

“LA에서 다신 안 돌아올 것처럼 날아갔으면서 왜 왔어?”

 

홍지수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그런 것까지 말해야 되는 사이야, 우리?”

 

못 본 사이 더 신랄해진 언행에 윤정한은 입술을 꾹 감쳐 물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지만 택도 없었다. 홍지수는 손을 털며 음산한 기운이 짙은 복도의 끝으로 향했다. 윤정한이 들고 있던 빠따로 홍지수의 엉덩이를 툭 때렸다. . 돌았냐는 표정. 큰 눈이 더 크게 뜨이고 황당하다는 듯 윤정한을 바라보는 표정은 진짜였다. “꿈인 줄 알았어.” 황당하게도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축축해서 홍지수는 튀어 올랐던 욕을 삼켰다. “오늘은 임시 파트너로 온 거야.” 파트너라함은 일을 함께 진행하는 협력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홍지수 또한 윤정한과 같은 신분으로 이 건물에 입성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퇴마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보이는 홍지수가 도대체 왜?

 

지수야, 너도 연봉 듣고 들어왔어?”

내가 너니?”

아니이. 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지수는 나 같은 사람 아니지.”

얘가 나 맥이네.”

 

히히 웃은 윤정한이 은근히 자세한 내막을 듣고싶단 기색을 비쳤다. 멀리서 낮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초여름인데도 어디선가 칼바람이 새어 나왔다. “집 간 지 얼마 안 돼서 협회장이 스카웃 하고 싶다고 LA까지 날아왔더라. 그래서 그냥 한다고 했어. 마땅히 취직할 곳도 없어서.” 말해주기 싫은 사람치고는 자세한 설명이 끝나자마자 윤정한이 빽 소리 질렀다. “근데 왜 나한테 한국 왔다고 말 안 했어?” 이번엔 어처구니없다는 시선마저 날아오지 않았다. 개무시하는가 싶던 홍지수가 중얼거렸다. “헤어졌는데 그런 걸 왜 말해.” 가슴에 말뚝이라도 꽂힌 듯 뻐근하게 아려왔지만 윤정한은 딱히 반박할만한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부적 한 장 쥔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박은철이라는 청년은 후회했다. 집에 얌전히 쳐박혀서 토익 공부나 하라는 엄마 말씀 잘 들을걸. 왜 주제도 모르고 깝쳐서 이 험한 꼴을 당해야 하나. 물론 자신이 불러온 재앙이었다. 목숨이 위험한 상태에서는 주마등이 스쳐 지난다고 했던가. 그 주마등 속에서도 백드롭 날리는 귀신에게 대처하는 방법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귀신이 백드롭을 날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애초에 귀신이 물리적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박은철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으나 옆에서 쌕쌕 숨을 내쉬는 그림자에 기색을 감추려 애썼다. 억울했다. 그래도 나쁜 일 하려고 까분 건 아니었으니 신이 있다면 구세주를 내려주지 않을까? 시간은 몇 주 전. 박은철은 실음과 학생 아무개가 연습실에서 연습하다 귀신과 함께 합창했다는 소문을 접하게 된다. 실체가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저 목소리뿐이라, 스트레스니 뭐니 요란하게 의견을 덧붙이는 동기들을 가만히 보고 있던 박은철은 난세의 영웅이 되기 위해 귀신을 퇴마할 계획을 짜게 된다. 문제는 박은철에게 주어진 관종력에 비해 영능력이란 눈곱만큼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다 못해 현재 모친까지 무당의 길을 걷고 있음에도 박은철만큼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을 타고나서 제 모친에게 안도를 가져다줬지만 어쩐지 크면 클수록 귀신을 때려잡고 싶은 관종 기질이 돋보여 걱정을 배로 샀다. 아니나 다를까 부적함을 털어 퇴마한다고 깝칠 줄은.

 

모친의 부적함에서 훔쳐 온 부적을 한 장씩 남발했다. 보지도 못하는데 공생관계에 놓인 지박령이나 귀신들을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어 무작정 연습실마다 붙이고 다녔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박은철의 모친은 꽤 실력 있는 무당이었고 때문에 잡귀 아닌 잡귀들은 그 기운에 걸려들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이 재앙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박은철은 몰랐다. 귀신이 맘만 먹으면 보지 못하는 사람 눈에도 훤히 보인다는 것을. 평소엔 제법 젠틀하게 존재를 감추고 다니는 거였구나. 그걸 몰랐네. 눈 감고 쓰게 웃었다. 나는 어떻게 죽을까? 초여름에 얼어 죽을지도 모르겠다. 복도 끝에 위치한 연습실에 박은철을 처박아놓은 귀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지레 겁먹은 박은철이 졸음을 실신의 전조 증상으로 인식해 눈을 감으려던 찰나, 문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헤어진 사이라 미안하지만, 지수야 내가 먼저 들어가도 될까?”

미안하면 말을 하질 마. 그리고 내가 먼저 들어갈 거야.”

그래도 입이 있는데 어떻게 말을 안 하니. 됐고, 내가 먼저 들어갈게.”

 

들어오진 않고 한참을 문 앞에서 지들끼리 싸우는 소리에 말똥해진 정신의 박은철이 눈썹을 찌푸렸다. 저 시간에 나 구하고도 남았겠네. 그리고 드디어 문고리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구세주에게 황금빛 스포트라이트는 내려오지 않았지만 박은철은 그 누구보다 감격적으로 부르짖었다. “살려주세요!”

 

잡귀들의 음기가 똘똘 뭉쳐 기운이 짙었던 거지, 가장 덩치 큰 녀석이라 해도 빠따 스윙 한 번에 튕겨 나갈 수준이었다. 물론 윤정한과 홍지수에게는 만만한 상대였다는 거다. 공포심은 인간을 안팎으로 무르게 만드니 뒤흔들기도 쉬웠을 거고, 더욱이 안 보던 인간이 처음으로 귀신을 마주하는 상황에선 누구나 홀리기 마련이라. 박은철은 그야말로 하룻강아지가 호랑이 잡겠다고 스스로 호랑이굴에 들어간 셈이었다. 윤정한 빠따 한번, 홍지수 주먹 한번에 악귀 축에도 못 끼는 잡귀는 눈물의 성불을 마쳤다. 사건의 규모에 비해 해결이 너무 쉬웠다.

 

그러니까 이 건물에 흐르는 기운을 전부 들쑤셔 놓으셨다고여?”

 

박은철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한 마디라도 했다간 이 인간들이 자신을 요리조리 뼈를 살살 발라 쌈까지 싸먹을 거 같아 무서워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검은 머리 청년은 빠따를 툭 내려놓고 아이고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아까부터 은은하게 웃고 있는 청년은 눈으로 쌍욕을 날리는 기분이었다. 잘못한 건 맞았지만, 지들보다 어린 애한테 눈치 더럽게 주네. 라고 생각한 박은철에게 홍지수가 말했다. “쏘리. 힘들어서 그래요. 눈치 보지 마세요.” 속마음을 간파당한 박은철이 겨우 힘이 들어온 다리로 일어서 홍지수를 따랐다. “윤정한, 안 오면 버리고 간다.” 빠따남 윤정한은 한참을 업어달라며 징징대더니 결국 껄렁껄렁 스스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박은철을 협회 차량에 실어 보내고 남은 두 사람은 일단 새벽녘 동이 트는 걸 바라보며 걸었다. 캠퍼스를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도 말이 없다가 윤정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동업할래?” 홍지수가 코웃음 쳤다. 동업 같은 소리 하네. 그러나 잠시 후 질문했다. “정한아, 73이지? 당연히 7이 나.” 윤정한이 손가락으로 홍지수를 가리키며 눈을 찡긋거렸다. “무슨 소리야. 64. 당연히 6이 나야.”

 

“82.”

“6.53.5.”

“91?”

 

윤정한이 악 소리 질렀다. “얘 진짜 양심 없네?” 홍지수가 깔깔 웃었다. “싫으면 제안하지를 마.”

 

, 그래. 73.”

동업인데 그냥 55 하자, 정한아. 깔끔하게.”

 

홍지수한테 돌돌 말렸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혼자 남겨진 상태였다. 작은 뒤통수가 점점 멀어졌다. 미련 없이 떠나는 홍지수가 야속했다. 홍지수는 언제나 떠날 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를 돌았다. 한번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윤정한은 홍지수가 한번이라도 뒤돌아본다면 언제든 달려가 잡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 말은 즉, 먼저 잡을 용기 같은 건 없다는 뜻도 되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장님 퇴마는 재미로 하셔야 합니다

 

어떤 귀신들은 틈을 좋아한다는 이야기. 옷장과 천장 사이의 공간이나 벽과 침대 사이, 또는 건물과 건물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도 마찬가지였다. 둘 이상이 나란히 누우면 사이에 꼭 누군가 끼어들기 마련이다. H 유치원의 교사로 근무 중인 장보현은 삼일 밤낮 없이 일을 하고, 밤새 색종이를 오려가며 철야를 해도 무리 없는 튼튼한 신체의 소유자였으나, 최근 들어 살이 쪽쪽 빠지며 수척해지고 있었다. 낮잠 시간마다 아이들이 한 명씩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통에 늘 긴장하고 있던 탓이었다. 단순히 긴장하는 것만으로도 사람 몸 상태가 망가질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긴장은 스트레스를 유발했고, 스트레스는 장보현의 위장에 둥글게 뭉쳐져 속을 뒤집었다. 게다가 걱정하는 일 또한 100%의 확률로 일어나니 스트레스가 배가 됐다. 아이들은 단순히 잠에서 깨서 울음을 터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라 뒤집어지듯 울어 재껴 곤혹을 치렀다. 이제 막 말이 트이기 시작한 해바라기반 원생들은 옹알대며 쉽게 그치지 않았고 한명이 울면 멀쩡하던 아이들도 덩달아 울기 시작해 달래느라 진을 뺐다. 대체 뭐가 그렇게 무섭게 만드는 걸까. 전날 울던 아이 옆에서 함께 낮잠을 청해도 봤지만, 그러면 장보현과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이가 울며 깨어났다. 상황은 반복됐고, 장보현은 말라갔으며, 원장 또한 이 일에 대해 자꾸만 눈치를 줬다. 해결법 따위는 없었다. 나 몰라라 하는 태도에 열이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것이라, 퇴근길 통화로나마 한탄을 하니 발이 넓어 소문에도 빠삭한 친구가 넌지시 물었다. “그럼 너 거기 가볼래? 용하긴 엄청 용한데…….”

 

그리하여 장보현은 윤정한의 퇴마 사무소에 방문하게 된다. 머리띠처럼 선글라스로 머리카락을 싹 넘긴 윤정한은 장보현을 맞이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여?” 직장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 때문에 살이 5kg이나 빠졌다. 예삿일이 아니라고 판단되어 찾아왔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혹여나 비웃을까 이런 건 원래 믿지 않는다고도 덧붙였으나 윤정한은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얘기 하라는 뜻이었다. 장보현은 눈치 있게 제스처를 알아듣곤 말을 이었다. “원랜 낮잠 시간에도 잠투정 하나 없던 애들이었거든요. 근데 어느 날부터 한명씩 돌아가면서 깨더니, 처음 들어보는 울음소리로 울면서 깨어나구요. 이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울어요. 그러다가 아이들이 전부 잠에서 깨어나면 언제 울었냐는 듯이 그치고. 매일 그래요, 매일매일. 그리고 저도 본 거 같아요. 아니, 만진 거 같다고 해야되나. 만져졌다고 해야되나.” 장보현은 아직도 그날의 소름이 가시지 않은 듯 몸을 떨었다.

 

친구에게 퇴마 사무소의 연락을 받아놓은 다음 날, 어김없이 찾아온 낮잠 시간에 장보현은 체념한 얼굴로 아이들을 재우곤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자신에겐 별일 없었으니 어쩌면 방심한 탓이었다. 분명 가장자리에서 자고 있던 장보현의 왼편에서 누군가 사부작 사부작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제 옆에 살며시 앉더니 배를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손길은 따뜻하지도 안락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힘이 너무 세서 어른인 자신마저 배가 아리다고 느낄 정도라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면서도 잠에서 깨지 않아 몽롱한 상태였는데 눈을 감고 있어도 옆에 누군가 눕는 게 느껴져서 벌떡 일어났다. 어떤 아이도 울고 있지 않았다. 호흡 소리가 일정하게 해바라기반을 울렸다. 아이와 장보현 사이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꼬집힌 듯 붉어진 손등을 쥐고 비명을 꾹 참았다. 그날 이후로 장보현은 원장에게 건의해 당분간은 낮잠 시간에 키즈용 애니메이션을 틀었다. 아이들이 깜빡 졸아도 울면서 깨는 일은 없었다.

 

선글라스를 툭 내려 코에 걸친 윤정한이 질문했다. “혹시 유치원에 뭐 새로 들여온 물건 있어여?” 매번 낡은 물품이 버려지고 새로운 물품을 사들이는 탓에 어떤 걸 새로 들여왔다고 말해야하나 고민하던 장보현에게 선택지를 좁혀줬다. “최근에 큰 물건 새로 들여온 적 없어요? 수납장이나 책장, 거울 이런 거.” 장보현이 벌떡 일어났다. 한 달 전, 원장이 싸게 구매했다며 가져온 분홍색 4단 책장이 떠올랐다. 대형폐기물 스티커를 박박 뜯어낸 자국이 선연했던 어딘가 구질구질했던 책장. 사온 게 아니라 주워온 게 분명했다. 이런 걸 왜 주워왔느냐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피고용자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장보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갈 곳을 잃은 동화책을 꽂아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귀신 들린 물건이 원래 그래여.”

 

짐작은 했지만, 타인의 입으로 정체를 직접 들으니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괜히 온 건 아니네요.” 결국 터져나온 속마음을 한 마디로 뱉은 장보현의 안색이 희게 질리는 걸 발견한 윤정한이 부들부들한 태도로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그래도 그런 애들은 나오기만 하면 금방 끝나요. 한숨 자고 오면 되겠다.” 대걸레 들고 바닥 닦는 것보다 더 쉽다는 뉘앙스에 장보현은 어지러운 머리통을 붙잡고 겨우 밖으로 나섰다.

 

휴일 오후 4시의 해바라기반은 고요했다. 윤정한은 오지 않는 잠을 청하려 애쓰지 않았다. 장보현은 유치원 문만 열어준 뒤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자신이 없어도 퇴마는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굉장히 안도한 듯 보였다. 파트너 하잔 소리가 농담이 아니었는지, 휴일에 불러낸 윤정한에게 쌍욕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은 홍지수가 얌전히 자리에 누웠다. “지수야, 내가 이불도 펴놨어.” 여기를 무덤으로 쓰고 싶다는 뜻인가. “진짜 파트너 하자는 거야?” 지수, 영어 발음 여전히 좋네. 빙빙 웃은 윤정한이 홍지수의 탄탄한 복부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천장에 붙은 야광별을 구경하다 고개를 돌려 홍지수의 어깨에 머리를 콕 박았다. “저 야광별은 누구 보라고 붙인 거지? 애기들은 밤에 없잖아.” 가만히 눈 감고 숨 쉬던 홍지수가 스르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잠이나 자. 자야 나온다며.”

지수 너가 자면 되잖아.”

너 잠들면 튀게.”

그럴 줄 알고 안 자고 있었지이.”

 

아예 홍지수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가 툭 밀치는 손길에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천장만 보면 재미없는데. 징징거리는 말에도 묵묵부답. 휴일에 불러낸 게 열 받은 건지, 아니면 불러낸 사람이 윤정한이라 그런 건지. 그렇다면 왜 순순히 나와줬는지. 묻고 싶은 게 좀 많았으나 떠들어봤자 일만 지체될 뿐이었다. , . 닿는 손등을 건드리다 강아지 쓰다듬듯 부드럽게 쓸었다. 따뜻한 온기가 점점 윤정한의 손등으로 퍼졌다. 이렇게 나란히 누워본 게 얼마만인지 아득했다.

 

저런 조명 내 집에도 있었는데.”

아아, 그거?”

 

윤정한은 홍지수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채고 아는 체했다. “맞아. 너네 집에도 저거랑 똑같은 거 있었지.” 홍지수가 발끈했다. “저건 스티커고, 그건 무드등이란다. 이 무드 없는 놈아.” 역시나 애지중지하던 별 조명등이었다. 사기 일주일 전부터 이것저것 따져가며 윤정한을 괴롭히다가 결국 구매한 조명등은 비싼 값만큼 아름다웠다. 틀을 갈아 끼우면 별자리까지 볼 수 있어서, 한동안 홍지수는 퇴근하고 염소자리를 천장에 띄워놓은 채 구경하다 잠들었다. 옆자리에 함께 누워있다 조명등을 꺼주는 건 윤정한의 몫이었다.

 

 

윤정한의 자택 위층으로 이사 온 홍지수는 요즘은 드물다던 이사 떡을 돌리는 친절한 이웃이었는데, 그가 온 날부터 윤정한은 층간소음에 시달려 통 잠을 자지 못했다. 이사 첫 주는 티비를 틀어놓으면 잘 모를 정도로 작게 쿵쿵거리는 소리였다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졌다. 위층에 고릴라가 사는지 궁금해 찾아가 문을 두드려 볼 정도로 무시할 수 없는 소음이라 윤정한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비과학적인 심령현상을 해결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어서 그런가 괴랄할 정도로 엄청난 층간소음이 그것과 관련이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상식선에서 벗어난 일을 겪다 보면 사고가 조금 비틀어지게 된다. 나중에야 이 정도 소음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맨손으로 바닥과 천장 사이에 구멍을 뚫어놨겠구나 알 수 있지만 그땐 사고가 그렇게 돌아가질 않았다. 냅다 위층으로 쫓아가 문을 두드렸다. “저기여, 아래층도 사람 사는 집이거든여.” 아직 문을 열고 나오지도 않은 홍지수에게 냅다 한 마디 하니, 그저 황당한 표정의 홍지수만 밖으로 나왔다.

 

집에 고릴라 키우세요?”

?”

너무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요, 제가.”

 

홍지수가 윤정한을 위아래로 훑으며 문에 기댔다. “재워드려요?”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매끄럽지 않은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홍지수가 눈을 마주친 채로 고개를 까딱 숙였다. “안녕히 가세요.” 윤정한을 남겨둔 채 복도의 센서등이 탁 꺼졌다.

 

분노의 수치를 계산해보자면 지금 당장 있는 짜증, 없는 짜증 다 내며 위층을 뒤집어야 마땅하겠으나, 윤정한이 택한 건 일주일간 사무소에서 잠을 청하는 평화로운 방법이었다. 소리가 날 때마다 윗집을 두드려도 별 소용 없을 게 뻔했다. 그게 진짜 윗집에서 나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란 말인가. 동거 중인 귀신 누나들에게 물어도 모르겠다는 답만 돌아왔다. 그들도 직접 올라가서 확인해보긴 귀찮았던 것이다. “, 누나가 좀 어떻게 해줘여. 시끄러워서 와인을 마실 수가 없겠다매.” 혹시 모르니 부적이나 붙여놓을까 했지만 그런 건 소용 없다는 힌트에 붓을 내렸다. 해 떨어졌을 때 집을 나와 사무소에서 잠을 잔 뒤, 해가 뜨면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했다. 낮엔 귀신같이 조용해지는 게 더 얄미웠다. 일부러 계단을 쿵쿵대며 오르는데 메아리치듯 소리가 돌아왔다. 내내 윤정한을 괴롭히던 소음이 어쩐 일로 대낮에도 기승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건물 내부는 고요했고, 바닥 치는 소리만이 윤정한의 고막을 때렸다.

 

소음공해유발자의 집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짧게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소음이 멎었다. 그제야 윤정한에게도 존재하는 육감이라는 게 곤두서서 머리털이 쭈뼛했다. , 미친. 헛다리 제대로 짚었다. 옆에서 문이 열렸다. 옆집에서 나온 홍지수가 정색하는 게 곁눈질로도 훤히 보였다.

 

남의 집 앞에서 뭐 하세요?”

 

윤정한에게 들러붙는 잡귀가 없는 것처럼, 이런 기운을 가진 남자한테도 잡귀가 붙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첫인상은 처음 마주한 순간을 기준으로 정립되는 것이 아닌,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을 기준으로 정립되는 거라 믿었다. 홍지수에 대한 첫인상은 그날을 기준으로 젠가처럼 쌓였고, 블록을 하나씩 뺄 때마다 드러나는 홍지수의 빈틈이 재밌다고 생각했다.

 

홍지수의 집에서 발생한 소음인 줄 알았던 것은 그의 옆집에서 발생한 것이었고, 집 채만한 잡귀가 쿵쿵대는 통에 홍지수 또한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결국 못 참겠다 싶어 옆 집에게 양해를 구하려 문을 두드리니 그 집 세입자도 다 죽어가는 몰골이라 겸사겸사 때려 잡아줬다는 이야기까지. 한여름에 냉면을 사이에 두고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오해를 풀었다. 정식으로 협회에 가입한 사람도 아닌데 귀신을 때려잡을 수 있나? 물었더니 자기 기운이 좀 특별하단다. 윤정한은 딱 봐도 알겠다며 부가설명을 바라지 않았다. “왜 더 안 물어봐?”

 

너 귀가 딱 부처님 귀야.”

그런 게 진짜 있어?”

넌 방금 귀신도 때려잡아 놓고 그런 걸 묻니.”

 

살면서 자기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 타인이 소음을 들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고 하는 말에 윤정한은 답지 않게 생색을 냈다. “원래 제가 잡아주려고 했거든여.” 겨자 두 바퀴, 식초 두 바퀴를 돌리던 홍지수가 비웃었다. “완전 허접처럼 보이던데.” 귀신이 둘이나 붙어있는데 보내지도 못하고 끼고 사는 걸 보니 한숨이 났단다. 옆집 다 때려잡으면 아래층에도 내려갈 생각이었다기에 윤정한이 두 손 흔들며 극구 만류했다. 이쪽도 오해는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홍지수가 아래층 문을 두드리며 윤정한을 불러냈다. “보여줄 거 있어서.” 번호까지 주고받아 연락까지 하는 사이에 이렇게 찾아오는 건 또 신기해서 좋다고 따라나섰더니 홍지수의 집 앞이었다. 실내가 어두운 탓에 신발장에서 엎어질 뻔한 윤정한이 스위치를 찾으려 벽을 더듬거리자 홍지수의 손이 겹쳐왔다. “아 잠깐만.” 아예 손을 잡고 소파로 끌어당겨 이끄는 대로 착석했더니 들뜬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나둘셋. . 깜찍한 구호와 함께 조명등을 켰다. 하늘보다 한참이나 작은 집에 별이 떠올랐다. 어스름한 빛 사이로 홍지수의 행복한 얼굴이 보여서 윤정한은 주책맞게 와아, 소리 내며 끌어안기 위해 달려나갔지만, 제지하는 손길에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봐야지. 너 별자리도 띄울 수 있어.” 윤정한은 자신의 별자리가 무엇인지,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평생을 살아왔으나 단지 신난 홍지수가 귀여워서 얌전히 구경했다. 열심히 뭔가를 자랑할 때 귀엽다. 윤정한의 동거 귀신들과 함께 와인에 대해 논할 때도 제법 귀여웠고, 누나들이 알려준 와인이라며 함께 마시자고 가져왔을 때도. 쌓인 추억 중에 몇 개를 골라 특별하다고 직접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홍지수는 떠났다.

 

LA로 돌아간다고 말한 건 홍지수였지만, 이별을 통보한 건 윤정한이었다. 떨어져 있을 동안 마음이 변하는 게 무서워서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는 윤정한을 잡을 이유는 홍지수에게도 없었다. 헤어지자고 말하는 상대에게 그러자고 답하는 게 힘든 일일지, 헤어지자고 말해놓고 삽질하는 게 힘든 일일지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윤정한은 뭐가 됐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봐야 하는 게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으므로, 차라리 이별을 고한 게 다행이라고 애써 합리화했다. 그런 속마음까지 말하기에 유치원이란 공간은 너무 아기자기해서 거기까진 말하지 못하고 삼켰다. 옛 생각에 잠시 물렁해진 홍지수도 분위기를 읽은 듯 윤정한을 재촉하지 않았고 추억팔이는 미지근하게 끝이 났다. “우리 좋았지이.” 한숨처럼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던 홍지수가 정색했다.

 

정한아, 지금 분위기 좋긴 한데. 내가 손 잡으라고 한 적은 없는데.”

나 손 안 잡았는뎅.”

 

말이 끝나자마자 홍지수가 벌떡 일어나 모기 잡듯 손등을 쩍 소리 나게 때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뭔가 휙 움직이더니 책장이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노을이 창을 투과해 길게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동화책이 빽빽하게 꽂힌 기다란 책장 사이에 뭔가 괴상하게 몸을 구겨 넣은 게 보였다. 손등 벌게진 홍지수가 거침없이 다가가 뒤통수를 잡고 잡귀를 끌어내자 괴이한 울음과 함께 발악했다. “으엑. 성질 진짜 드럽다.” 멀찍이서 구경하던 윤정한이 발로 쓴 부적을 하나 꺼내 붙이자 잡귀는 화려하게 모습을 감췄다. “패려고 했어?”

 

, 물리퇴마.”

힘이 남아도니, 홍지수야.”

몸이 간지럽네.”

 

한 마디도 안 지는 엑스보이프렌드의 성격을 잊고 있었다. 책장 사이에 끼어 살던 잡귀가 그대로 유치원까지 따라오게 되어 벌어진 일 같았다. 어차피 대화도 안 통할 만큼 혼이 날아간 모양이라 윤정한은 물리 퇴마한다는 홍지수를 말리지도 못하고 구경했다. 물리 퇴마라고 해봐야 그냥 몇 대 때려주고 마는 거였지만 그 몇 대로도 혼 하나를 성불시킬 만한 주먹이었으니. 새삼 홍지수 앞에서 깝치던 지난날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

 

 

당신의 X는 당신을

 

정애와 영은은 애주가로서 와인을 즐겼지만, 그보다는 더 깊게 주종에 상관없이 마신다는 행위를 사랑했다. 때문에 안주 같은 건 사실 있으나 마나 했고, 있으면 마시다가 입맛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에 불과했다. 그러나 의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트에 들러 치즈 한 뭉텅이씩 사와 턱턱 차려주는 청년 퇴마사 덕분에 술상이 조금 풍성해진 게 마음에 영 안 드는 건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와인 한 모금, 치즈 하나, 얼굴 한번씩 구경하는 게 별미였다. 사계절 내내 이런 별미를 즐길 수 있다니? 완전 남는 장사. 정애와 영은이 깔깔 웃는 소리에 꼬박꼬박 누나 소리 붙여가며 하지 말라고 발끈하는 행동도 귀여웠으며, 살아있을 적 저런 동생 하나 있었으면 재밌었겠다 하는 감상이 통해서 맘만 먹으면 죽일 수도 있는 꼬맹이한테 함께 동거하자 먼저 제안도 했다. 낯가림도 사라지고 문득 우리 좀 가까워졌다 싶은 날이면 이미 골백번 죽고 죽어 혼이나 겨우 남은 귀신들한테 넌지시 속 아프지 않냐 물어보는 게 기특해서 장난삼아 내일의 운세 말해주던 게 이젠 습관이 됐다. 정애가 먼저 내일은 재수가 없을지도 모르니 물 조심하고, 행운의 색이 노란색이라 일러주면 기가 막히게 노란색으로만 엄선한 합장주를 끼고 출근하는 꼬라지가 골 때렸다. 너 그런 것도 믿니? 하고 물으면 누나들 얘기니까 하고 가는 거예여.”라고 말해주는 웃긴 퇴마 청년. 그런 퇴마 청년을 위해 애정운 점쳐주는 거야 누워서 숨 쉬는 행위보다 쉬운 일이었다.

 

영은이 알려준 행운의 색인 검정으로 손목을 도배한 윤정한이 집을 나섰다. 최근 홍지수는 파트너 제안을 의외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사무소로 출근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오늘 홍지수의 오오티디는 올 화이트. 윤정한은 절망하지 않았다. 사실 조금 절망해서 제가 끼고 있던 합장주 하나를 홍지수의 손목에 걸어줬지만.

 

사무소에 들어오는 업무 대부분은 운세나 궁합, 사나운 팔자를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 상담, 애인이 바람난 건 아닌지 우주의 기운으로 알아봐달라는 의뢰 따위가 대부분이었다. 첫 번째 예약 손님의 주문은 수강 신청 성공을 위한 부적을 써달라는 거였다. 윤정한이 선글라스를 옆으로 벗어둔 채 붓을 들었다. 노란 종이에 글자인지 그림인지 정체 모를 것이 쓰였다. 옆에서 보던 홍지수가 완성된 부적을 가져가 코팅한 뒤 스티커로 열심히 꾸몄다. 요즘 입소문을 타는 부꾸, 일명 부적 꾸미기였다. 얼굴 멀쩡한 미친 남자 둘이 부적 써주고 예쁘게 꾸며주기까지 한다고,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입소문 덕을 톡톡히 보는 덕에 홍지수는 주에 한번씩 다이소에 가 스티커를 한 뭉텅이 구매해왔다. 물론 비용은 전부 윤정한의 카드에서 빠져나갔다.

 

유학 가는 애인에게 주겠다며 부적과 자체 제작 합장주를 예약한 손님의 다리에 함께 매달려온 잡귀 하나를 비밀스럽게 떼어주고 나니 오후 4시였다. 명색이 퇴마사니 이런 잡일로 매출 올리지 말란 협회장의 전언이 있었으나 부쩍 오른 매출에 전언은 힘 없이 무시 당했다. 한달에 손님 10명이나 겨우 받던 사무소에 30명이 넘는 사람이 다녀갔다. 퇴마가 아닌 다른 일로 방문하는 손님 중에서도 잡귀 달고 다니는 손님이 열에 다섯은 됐기에 돈을 더 땡겨 벌 수도 있었으나 윤정한은 그냥 말없이 부적 받아가는 손님 뒤에서 빠따를 휘둘렀다.

 

왜 말 안 하고 떼어줘?”

원래 이런 건 생색내면 안 되는 거야. 넌 생색쟁이라 모르겠지만.”

이놈이 또 열 받게 하네.”

 

낄낄대던 윤정한이 소파에 드러누워 선글라스를 내린 뒤 낮잠을 청했다. “정한아, 진짜 꼴값.” 한 마디한 홍지수는 빈둥대는 사장을 멀뚱히 바라보더니 서랍에서 미완성된 팔찌 하나를 꺼내 옆에 앉았다. “자냐?” 불러도 답이 없고, 옆구리를 찔러도 반응이 없었다.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확인한 홍지수가 윤정한의 손목에 팔찌를 둘러가며 둘레를 쟀다. 큰 손으로 한참을 꼼지락거리던 홍지수가 팔찌를 엮어 테이블에 내려놨다. 이미 주렁주렁 팔찌가 매달린 손목을 조심스럽게 가져와 팔찌를 걸었다. 다른 것들에 비해 사이즈가 딱 맞아 흘러내리지도 않은 채 손목에 자리했다.

 

정신 차리라고 주는 건데. 너무 좋아하진 마.”

, 들켰어? 알겠어.”

내일 월급날이라 뇌물 주는 거고.”

 

 

영원을 맹세하지 않았으니 또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번엔 불안하지 않았다. “너 떠나기 전에 한 번만 돌아봐 줘. 그럼 내가 잡을게.” 치사한 윤정한이 낸 용기를 홍지수가 마다할 리 없었다. 검고 투명한 빛의 구슬이 어딘가의 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