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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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일기

일리

대지 1+일리.jpg

 

 

 

   00.

   조슈아 지수 홍은 우주를 좋아했다. 사실 우리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어느 거대한 생명체의 뇌일 수도 있다는 헛소리까지 흥미롭게 여길 만큼. 물론 동의하지는 않는다. 대신 지수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은 우주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행성이라고. 모든 행성이 각자의 궤도를 가지고 있듯이, 정해진 궤도 따라 도는 것이 인생이라고 여겼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기독교적 관점과 계획이 정해져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J의 습성이 반영된 가치관이었다. 그래서 홍지수는 자신의 궤도를 이탈하게 만드는 갑작스럽고도 거대한 변화들이 무서웠다. 예를 들어, 윤정한과의 연애 말이다. 정해진 공전궤도를 이탈한 행성은 어떻게 될까. 아마 다시는 자신의 궤도로 돌아오지 못한 채 우주 어딘가를 떠돌다 다른 행성과의 충돌로 파멸을 면치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01.

   한국으로의 교환학생은 홍지수의 인생 궤도 속에서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계획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영어권 나라를 희망하는 가운데, 지수는 한국 대학에 지원했다. 특별한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부모님이 한국인이셨으니까. 할머니도 미국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에 지수는 살면서 한국에 가본 적이 없었다. 얘기를 꺼내 본 적은 물론 있었지만, 부모님이 딱히 원하시지 않는 듯하여 지수는 본인의 힘으로 한국에 가고자 결심했었다. 지수가 15살 때의 일이었다.

   꽤나 오래전부터 이어온 다짐과는 다르게 한국에 대한 정보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한국어야 할머니와 어머니의 대화 덕분에 대충 알아듣는 정도까지는 되었으나 남들이 흔히 아는 K-Pop, K-Drama 등등 K-어쩌구에 대해서는 전무한 수준이었다. 오죽했으면 Korea University가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국립대인 줄 알고 고려대학교로 교환학생을 신청했었다. 고려대가 아닌 서울대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경영대의 교환학생 학교생활 지원 및 문화 교류를 돕는 봉사 동아리의 환영 술자리에서였다.

 

   “안녕하세요 Joshua예요. 한국 이름은 홍지수이고, LA에서 왔어요. Josh나 지수라고 불러줘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주 잘생긴 한국 남성의 겉모습에 한국말이 어느 정도 가능하기까지 한 미국인은 당연히 재학생들의 집중 질문 대상이었다. 지수의 버디가 경영 D반 대표 인싸댕댕이 민규로 정해지는 바람에 관심은 배가 되었다. 우와 잘생긴 애들끼리 밥조네~ 소주 마셔본 적 있어? 한 마디씩 던지며 제가 앉은 테이블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에 지수는 정신이 없었지만, 젠틀한 미소로 응수했다. 어엉 그럼ㅎㅎ

 

   지수야 웃으니까 더 잘생겼다. 아까부터 느꼈는데 완전 한국인 같아!”

   부모님이 둘 다 한국인이셔서 그런가 봐. 그래도 아직 한국말은 잘 몰라. 많이 공부해야지.”

   엥 근데 그럼 한국인 아니야?”

   “Um... 아니지 태어나기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니까.”

 

   지수는 이때부터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얼굴에서 티가 날까 봐 지수는 입꼬리를 더 끌어올렸다. 

 

   아항 그렇구나... 그러면 자취해? 아님 긱사?”

   어 후문 근처에서...”

   헐 대박 나도 그 근처인데 어디어디?”

   으응 그 역 근처 오피스텔...”

   “XX? 와 대박 나 거기 바로 옆 써니하우스인데... 그러면 우리 내일 아침에 같이 해장할래?”

 

   천하의 캘리포니아 보이도 첫 만남부터 이루어지는 한국인들의 호구조사-를 빙자한 신상털기-는 버거웠다. 슬슬 멘탈이 털려가고 있을 때쯤 구세주가 나타났다.

 

   “뭘 먹지도 않았는데 해장이야. 쟤 손에 들려있는 김치두부 깨지기 직전이다. 얼마나 잡고 물어봤으면...

 

   헐 정한이형!!! 누군가 외친 말을 시작으로 테이블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오빠 안녕하세요~ 야 빨리 윤정한 선배 왔대. 윤정한? 헐 대박, 어디? 형 진짜 오랜만이에요~ 지수에게 쏠렸던 관심은 순식간에 윤정한이라는 남자에게로 집중되었다. 지수는 그제서야 젓가락으로 5분 정도 들고 있던 안주를 입에 넣을 수 있었다. 두부김치였는데 영 제 취향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김치가 매워서 습관적으로 앞에 있던 잔을 들어서 마셨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코와 식도를 강타하는 알코올 향이 구렸다. 앞에 놓인 제 몫의 물잔은 비어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물통 따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지수는 옆 테이블에서 물통을 슬쩍 훔쳐 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텅 비어있던 앞자리가 누군가에 의해 채워져 있었다. 아까 그 남자였다. 지수는 자리에 앉아 안주를 뒤적거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진짜 예쁘다. 천사 같이 생겼어. 아까 도와줘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근데 진짜 예쁘게 생겼는데. 대화할 때 상대의 눈을 보는 버릇이 있는 지수는 제 앞에 있는 남자의 눈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테이블 위에 예의상 놓인 안주만 뒤적거릴 뿐 지수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랑은 다르게 형사처럼 꼬치꼬치 캐물어 보지 않는 남자의 태도에 조금 흥미가 생겼다. 물론 여기에는 그의 얼굴이 한몫하기도 했다. 그래서 홍지수는 다른 동아리 사람들과는 다르게 본인이 먼저 그 잘생긴 남자에게 인사하기로 했다.

 

   안녕? 오늘 날씨 춥지.”

 

 

   02.

   싸가지 없게 반말이네. 홍지수에 대한 윤정한의 첫인상이었다.

 

   윤정한은 경영대 교환학생 봉사 동아리의 얼굴마담으로 선배들과 동기들이 하도 사정사정을 해서 들어왔다. 회비도 내지 않고 일 년에 두세 번 이런 큰 자리에서 잠깐 얼굴만 비추는 역할만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정한은 오늘도 한 30분 정도만 있다가 대충 핑계를 대며 자리를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교환학생과 영어로 프리토킹하며 술 마시기? 주입식 교육의 산물 그 자체인 정한에게는 차라리 토익 공부가 더 편했다. 그리고 교환학생들이 껴있으면 술게임 진행도 어렵고, 하여튼 그냥 이런 자리가 싫었다. 대충 분위기 맞춰주다가 한창 달아올랐을 때 은근슬쩍 빠져나가는 게 이전까지의 그의 루틴이었다. 이번에는 초면에 반말을 깐 김치두부남 때문에 다 말아먹었지만 말이다.

   딱 봐도 저보다 어려 보이는 애가 반말로 인사를 해오길래 정한은 크게 당황했다. 초면에 군기를 잡기에는 아직 그렇게까지는 꼰대가 되지 못한 정한이라 그냥 본인도 말을 놓고 대답했다. 어어 안녕. 그러면서도 계속 속으로 생각했다. 개강 전 다 같이 모이는 술자리랑 종강 파티에는 꾸준히 참석하는 정한이 모르는 얼굴이라면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뉴페이스였다. 일단 동기는 아니고. 고학번은 주로 인맥으로 들어오니까 1학년이나 2학년 중 하나겠고. 근데 나한테 갑자기 말 깐다고? 초면인데? 요즘 애들 진짜 안 되겠네.

 

   이름 뭐야?”

   윤정한.”

   “oh~ 정한. 이름 멋지다. 나는 지수, 홍지수.”

   응 너도 이름 이뻐ㅋㅋ

 

   그럼에도 계속 앞에 앉아서 대화를 한 이유는 첫 번째, 대체 어떤 애길래 초면에 말부터 까는지 궁금해서. 두 번째, 아까 다른 애들한테 시달릴 때 웃는 얼굴이 완전 빡쳐 보이길래 그거 한번 놀리고 싶어서. 마지막으로는, 그냥 잘생겨서.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본인 얼굴을 보고 자란 윤정한은 나름 높은 미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 앞에 앉은 저 친구는 꽤 괜찮았다. 웃을 때 사르르 접히는 눈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어차피 먹어야 하는 술이라면 잘생긴 친구 앞에서 먹는 게 좋으니까, 그래서 윤정한은 계속 그 앞에 앉아있었다. 얼굴값 하는 그 친구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둘이 앉은 테이블로 모여든 사람들 덕분에 시작한 술게임 덕분이었다.

   게임도 잘하고 술도 잘 먹는 윤정한은 보통 이런 자리에서 한 사람을 몰아가며 분위기를 형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주로 타깃은 정한과 친한 동기나 후배들이었고, 그날도 정한과 같은 테이블에는 명백한 타깃인 석민이 앉아있었다. 그러나 정한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존재했다. 바로 홍지수였다. 홍지수는 술게임을 더럽게도 못했다. 이름부터 외울 겸 가볍게 시작한 출석부 게임에서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수야~

   “네! 정한아~

 

   아니 정한아를 부르면서 나를 지목하면 어떡하니... 계속해서 정한아~를 외치며 저에게 삿대질해대는 홍지수 덕분에 윤정한은 아주 심란했다. 게임 시작 전 지수는 자신의 국적을 어필하며 지옥의 랜덤게임을 멈추어 보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마시면서 배우는 술~~임에 사뿐히 묵살당하였다. 덕분에 몸풀기로 한 출석부에서만 벌주로 소주만 5잔 정도 마셨다. 정한은 괜히 마음이 이상했다. 미국인인 줄도 모르고 싸가지 없다고 무턱대고 오해를 했던 제 모습이 꺾어 마시지 말라는 말에 원샷을 때리는 지수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미안하기도 하고 계속 신경 쓰이고. 괜히 술이 땡겼다.

 

   안 빼고 벌주를 쭉쭉 들이키는 화끈하고 잘생긴 교환학생 덕분에 분위기는 금방 달아올랐다. 자 이제 제대로 간다! 아 당연하지~~ 지금까지는 걍 몸풀기지. 오키오키 벌주부터 만든다? 테이블 가운데 놓인 맥주잔으로 맥주병과 소주병이 동시에 기울여졌다. 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아름다운 자태를 보던 정한은 제 앞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발개진 얼굴을 한 지수가 보였다. 어휴 쟤는 게임도 못 하는 게. 정한은 자기가 못 챙겨줘 미안한거면서 괜히 한번 틱틱거렸다.

 

   “아까 왜 계속 내 이름만 불렀어? 그러니까 애들이 너만 지목하잖아.

 

   그리고 이다음에는 내가 이제 술 버려주고 대충 분위기 바꿔줄 테니까 찬물 마시고 정신 차리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정한이 너 이름밖에 기억 안 나는데 어떡해.

 

   이런 대답이 날라왔다. 당황한 정한이 어버버하는 사이 벌칙용 5:5 소맥이 완성되었고 지옥의 랜덤 게임이 시작되었다. 석민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무슨~ 게임! 게임~ 스타트!

 

 

   03.

   “딸기당근수박참외메~론게임!

 

   이번에는 교환학생 찬스로 게임 설명을 듣고 연습게임까지 하고 들어갔지만, 홍지수는 그냥 술게임을 못했다. 지수는 비율개똥망 소맥잔을 들고 눈을 감았다. 하느님 아버지 제가 이걸 마시고도 안 죽게 도와주시옵고.. 온갖 벌주 브금과 함께 기도를 마친 지수는 잔에 입을 댔다. 그리고 입을 댄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한 모금 겨우 넘긴 지수는 잔을 내려놓고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Shit 이걸 마시라고? 미친 거 아니야? 초롱초롱한 눈으로 원샷을 외치는 친구들에게 도저히 안 될 거 같다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흑기사”

 

   정한의 말과 함께 테이블이 뒤집어졌다. 순식간에 지수의 손에 들려있던 잔이 정한에게 넘어갔다. 음료라고 부를 수도 없는 저 액체들을 마시느라 울렁이는 목울대를 바라보며 좀 섹시하다는 생각을 술김에 한 것도 같았다. 정한이 잔을 비우고 내려놓자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자 이제 지수가 소원 들어줘야지~ 원래 한국에서는 흑기사 해주면 소원 들어줘야 하는 거야.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싶었지만, 술에 취한 지수는 머리가 그렇게까지 논리적으로 잘 돌아가지는 않았다. ~ 그렇구나 납득을 한 지수는 정한에게 물었다. 소원이 뭐야?

 

   “나 혼자 가기 외로우니까 집까지 데려다주기.

   “엥? 오빠 벌써 가시게요?

 

   당연하지. 사실 윤정한은 아까부터 계속 집에 가고 싶었다. 마음속으로 혼자 약속한 30분은 이미 한참 지나있었는데 분위기 때문에 그리고 술 약해 보이는 홍지수 때문에 신경 쓰여서 계속 자리에 앉아있었던 거다. 좀만 더 있다는 말에 과외가 있다고 둘러댔다. 물론 개구라였다. 정한은 아쉬운 얼굴로 건네는 인사들을 받아주면서 슬쩍 지수의 가방을 챙겼다. 지수야 빨리 와야 해~ 와서 여기서도 놀자~ 벌써 얼큰하게 취한 옆 테이블 아이들이 인사를 날렸다. 오기는 개뿔. 내가 얘 가방까지 다 챙겨서 집 보낸다 이것들아. 정한은 see you soon~ 을 외치는 지수의 손목을 잡고 빠르게 술집을 빠져나왔다.

 

   졸지에 사람 하나를 떠맡게 되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술자리에서 나름 수월하게 빠져나왔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정한은 일단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먹여야지 술이 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뭐 먹을 거냐고 예의상 물어보니까 허쉬가 먹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덕분에 정한은 생전 처음으로 편의점에서 허쉬초코바를 구매했다. 정말 더럽게 비쌌다. 투쁠원이길래 먹지도 않을 걸 두 개 더 집어왔다.

   정한은 편의점 파라솔에 앉혀둔 지수의 옆으로 가서 비싼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추위에 코끝이며 볼이 빨갛게 물들었으면서도 지수는 맛있게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평소 단것을 안 먹던 정한도 하도 맛있게 먹길래 봉다리에서 하나 꺼내서 한입 베어 물 정도였다. 아이스크림을 먹은 정한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달아서 혀가 어떻게 고장이라도 나는 기분이었다. 아마 봉다리 안에 남아 있는 저 하나도 소중한 냉동실에서 썩어갈 것만 같았다. 하 돈 날렸네.

 

   근데 정한아 너 어디 가야 된다며... 늦은 거 아니야?”

   어엉 그거 구라야 신경 안 써도 되니까 빨리 술이나 좀 깨봐

 

   정한의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크림은 어느새 지수의 손에 들려있었다. 정한은 아직 겨울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름이었으면 진작에 녹고 없어질 시간이었다. 잠깐 지켜본 결과 홍지수는 엄청 천천히 먹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구라? what is 구라?”

   거짓말

   “what? 정한, 거짓말하면 안 되지.”

   ... 됐다 걍. 집이나 데려다줄게. 어딘지 기억할 수 있겠어?”

 

   다행히 찬바람과 아이스크림 덕에 술이 깬 지수는 집 주소를 술술 불었다. 정한은 지수를 오피스텔 공동현관까지 데려다주고 처치 곤란이던 허쉬바까지 손에 쥐여줬다. 아이스크림을 받은 지수가 진심으로 기뻐해서 정한은 조금 민망해졌다. 여기까지 온 김에 집에서 뭐라도 마시고 가라는 말에 정한은 이럴 때 한국에서는 다음에 밥이나 한번 살게, 라고 말하는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래 정한아 그럼 내가 다음에 밥 한번 살게~ 달달한 초콜릿 향이 나는 인사치레에 정한은 웃으며 빨리 올라가서 자라고 답을 해줬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알고 있듯이 밥이나 한번 산다는 말은 한국에서 실현되는 확률이 낮은 말 중 하나였고, 그 법칙은 여기서도 통했다. 안타깝게도 윤정한과 홍지수는 번호 교환을 하지 않아서 서로 연락을 못 했다. 정한은 동아리에서 버디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단톡방에도 들어가 있지 않아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사실 하려면 어떻게든 알아내서 할 수야 있었지만, 그냥 뭐 만날 인연이면 만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이날은 미국인을 한국인으로 단정 지어 개싸가지로 오해했던 윤정한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해 반성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준 단순한 해프닝으로 남는 듯하였다.

 

 

   04.

   번호도 없는 윤정한과 홍지수가 다시 만난 건 일주일 뒤, 신입생 및 교환학생 수강 신청이 있던 날 학교 근처 골목에서였다. 늦잠 자고 빈둥거리다 편의점에 라면이나 사러 나온 정한은 구글맵을 켠 채 골목 사이를 방황하던 지수랑 딱 마주쳤다. 평소라면 대충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쳤겠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토끼 폰케이스가 끼워져 있는 지수의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폰에 찍혀있는 곳은 둘이 서있는 곳의 바로 뒷골목에 위치한 포차였다. 얘 지도를 전혀 볼 줄을 모르는구만. 혹시라도 괜찮으면 건물 앞까지만 데려다 달라는 젠틀한 부탁에 정한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슬리퍼를 직직 끌며 앞장섰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넘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정한은 지수가 혼자 학교 근처를 떠돌게 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인생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수강 신청에 참전하게 된 지수를 보고 민규는 아주 당당하게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미남답게 잠이 많은 민규는 수강신청 당일 일어나지 못했고, 지수가 어떻게 물어물어 PC방까지 가서 도전해보았지만 처참하게 말아먹었다. 뒤늦게 피방으로 뛰어온 민규와 석민의 도움을 받아 이삭줍기를 한 결과 어느정도 채워지기는 했지만, 체스판 부럽지 않은 시간표가 완성되었다. 어차피 한국에서의 학점은 미국 학교에서 인정되지 않았기에 별 상관이 없었지만, 민규가 너무 미안해하는 바람에 지수가 더 마음이 그랬다. 민규야 정 그러면 나 밥 한 번 사주라. 한국에서는 밥으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한다는 정한의 말이 딱 생각나서 뱉은 말이었다. 대충 그렇게 해서 지수는 그날 저녁에 술약을 잡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민규는 석민과 학교 일 때문에 잠깐 어디 가야 한다고 해서, 지수는 일이 다 끝난 뒤 술집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약속 장소인 xx포차는 저번에도 가봤던 곳이라 흔쾌히 혼자 가겠다고 한 거였는데, 막상 실전에 던져지니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건물 근처만 빙빙 돌던 중에 마주친 정한은 그야말로 구세주 그 자체였다.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도 그랬는데 오늘까지. 과장 조금 보태서 나만의 수호천사 뭐 이런 것 같았다. 분명 아까는 올라가는 길이 없었는데 정한과 함께 가니 건물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보였다. 술집 앞까지 지수를 데려다준 정한은 이제 다시 편의점으로 가서 라면과 도시락을 공수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어, 정한이형?

 

   지수가 하도 오지 않자 찾으러 나온 석민과 마주치기 전까지 말이다. 정한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 오늘 라면은 집에서가 아니라 여기서 안주로 먹겠구나. 저번부터 그랬지만 홍지수와 함께 있으면 제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역시나 여기까지 왔는데 술 한잔 먹고 가라는 사랑스러운 후배들의 아우성에 정한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떼거지로 모이는 자리를 싫어할 뿐이지 친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좋아하는 정한은 이런 즉석적인 모임이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기 얼큰차돌박이탕에 추가한 라면 사리가 진짜 맛있었다.

   항상 누군가와 껴서 모였지 이렇게 셋이서만 만나는 건 오랜만이라 금방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며칠 사이에 지수도 동아리 사람들과 많이 친해진 것인지 민규와 석민을 편하게 대했다. 다른 테이블에서 보면 넷이서 죽고 못 사는 사이로 보일 정도였다. 오늘따라 술도 달고 이야기도 재밌고 분위기도 적당히 즐겁고 모든 게 다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눈치 빠른 정한은 지수가 리액션을 하거나 잠깐씩 끼어들 뿐 자신의 얘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캐치했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아는 얘기만 하기는 했지. 정한은 조금 미안해져서 일부러 대화 주제를 바꾸고 계속해서 대화에 참여하는 지수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면서도 계속 내가 왜 얘를 챙겨주지 하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냥 교환학생으로 와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라고 하기에는 정한은 동아리 활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편이라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머리 아픈 게 싫어서 앞에 놓인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신나게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정한과 지수는 후문 쪽에, 민규와 석민은 정문 쪽에서 자취했기에 자연스레 둘씩 찢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막상 둘만 남으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정한은 입만 달싹거렸다. 술에 취해 왁자지껄한 거리를 정한과 지수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걷고 있었다. 어색한 웃음만이 감돌던 둘 사이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지수는 흩날리는 눈을 보고서는 신난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Oh wow! 정한, 눈이야! 대박! 뛸 때마다 생머리가 팔랑거리는 게 마치 토끼나 강아지 귀 같아 귀여웠다. 엥 아니 뭐가 귀여워. 그 짧은 순간에 지수를 귀엽다고 생각한 자신에게 놀라 정한은 또 초딩마냥 괜히 틱틱거렸다.

 

   “뭐야 홍지수 눈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ㅋㅋ”

   ...처음인데?

 

   내가 감히 내가 또 잘못을. 캘리포니아는 눈이 거의 오지 않아 눈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지수는 한국에서 눈을 보기를 기대했으나 2월에 눈이 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말에 안타까워하던 중 딱 이렇게 눈이 내린 것이었다. 그렇게 윤정한의 마음의 짐이 또 하나가 추가되었다. 눈을 보고 싶어 하던 홍지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죄. 정한아. 어엉, 나 눈 오면 해보고 싶던 게 있었는데...

 

   “뭔데?

   “눈 맞으면서 붕어빵 먹고 싶어”

 

   이상하게도 홍지수의 부탁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웃는 얼굴이라 그런가. 아니면 내가 아까 또 실수해서 미안한 마음에? 붕어빵아저씨를 찾아 학교 근처 상권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오늘따라 코빼기도 보이시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둘은 편의점에서 호빵을 구매했다. 습관처럼 맥주도 몇 개 샀다. 홍지수의 한 마디에 윤정한은 눈 내리는 날 호빵을 안주 삼아 편맥을 하는 미친 짓을 하게 되었다. 추위를 잘 타는 정한은 롱패딩을 껴입은 게 무색할 정도로 몸을 덜덜 떨었다. 목을 타고 들어오는 맥주가 너무 차가워서 차라리 뎁혀 먹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제 옆에 앉아서 눈을 쳐다보는 지수가 너무 행복해 보여서 차마 빨리 정리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안 나왔다. 한참을 고민하던 정한은 지수를 제 집으로 데려갔다.

   코딱지만 한 원룸에 대체 베란다는 왜 있나 싶었는데 이럴 때 쓰라고 있었나 보다. 대충 의자를 끌어와 앉은 둘은 내리는 눈을 보면서 건배를 했다. 좁은 베란다에서는 겨울 냄새가 났고, 지수가 mood를 즐기고 싶다고 틀어둔 플레이리스트에서는 팝송이 흘러나왔다. 정한은 지금 이 분위기가 되게 묘하다고 생각했다. 딱히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분위기. 난간 끝에 쌓인 눈에 하트를 그리는 지수를 바라보던 정한은 아까 사 온 식어 빠진 호빵을 건넸다. Thanks, 고마움의 윙크를 날린 지수가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나 사실 정한이 너 처음 봤을 때 천사인 줄 알았어.

 

   이건 또 뭔 소리야.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에 당황한 정한은 보이지도 않는지 지수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겪은 일부터 동아리 술자리에 나갔던 날까지 본인의 에피소드를 안주 삼아 홀짝홀짝 맥주를 들이켰다. 아침은 부산에서 돼지국밥, 점심은 전주에서 비빔밥, 저녁은 춘천에서 닭갈비, 밤에는 이태원 펍에서 한잔하는 한국 여행 로망까지 야심차게 공개했다. 정한은 갑자기 쏟아지는 홍지수 관련 정보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얘 아까까지만 해도 자기 얘기 절대 안 하고 맞장구만 열심히 쳐줘서 사람 신경 쓰이게 하던 애 맞나?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정한은 그냥 지수의 이야기를 열심히 리액션해줄 수밖에 없었다. 어엉 그랬구나, 어엉 대박이다. 그거 재밌겠다, 나중에 나랑 같이하자.

 

   문제는 윤정한은 홍지수의 주량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정한의 반응에 신이 난 지수는 계속해서 캔을 비워나갔다. 정한은 불안불안했지만 그래도 지수가 스스로 조절을 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사실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기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설마는 항상 사람을 잡고, 지수는 어느 순간 뻗어버렸다. 저번에 데려다준 전적이 있어서 집주소는 알았지만 이미 꼴아버린 애가 무사히 도어락을 치고 들어갈 확률은 0에 가까워서, 정한은 그냥 제 침대에서 재우기로 했다.

   찡찡거리는 지수를 어르고 달래서 겨우 침대까지 데려오니 진이 다 빠졌다. 옷이 불편하다길래 가장 아끼는 민트색 츄리닝 셋업을 빌려주었고, 세수까지 어찌저찌 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거의 꿈나라를 헤매는 지수를 침대에 눕힌 뒤 정한도 씻으러 들어가려는 찰나, 갑자기 멱살이 잡혔다. 술에 취한 머리는 놀란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정한은 그냥 지수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만 인지했다. 그리고서는 입술에 말캉한 게 와닿았고, 본능적으로 일단 물고 봤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려고 했다. 아까까지만해도 거의 수면 상태에 있던 지수가 정한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푼 뒤 목에 걸며 다가오는 바람에 실패했을 뿐이다. 제게 매달려오는 지수를 받아주던 정한은 지금 이 행위가 키스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미 알코올에 적셔진 뇌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따위의 사고방식으로 돌아갔다. 좁은 방안은 금세 질척한 소리로 가득 찼다.

 

 

   05.

   비록 술은 마셨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술이 센 정한은 알딸딸하기만 했지 거의 맨정신이었다. 그니까 어젯밤의 일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처음에는 당황해서 얼떨결에 받아준 거였지만 하다 보니 분위기를 타버려서 솔직히 말해 정한은 다음으로 넘어가야 되는지 고민까지 했다. 살면서 한 번도 남자랑 잔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정한이 떨리는 손을 어디부터 넣어야 하나 고민하던 사이 지수가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고민들은 모두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허탈해진 정한은 이미 잠든 지수의 옆에 벌러덩 누웠다. 그 좁은 침대에 남자 둘이 자려니까 불편하기는 했지만 취한 사람들한테는 큰 상관 없었다. 어제 일을 기억하냐고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이제 우리 무슨 사이냐고 물어봐야 하나, 혼란스러운 머리를 붙잡고 잠에 들었다.

   그러니까 일어났을 때 옆자리가 텅 비어있는 건 절대 윤정한의 예상 범위 안에 들어왔던 선택지가 아니었다. 혼자 남겨진 정한은 머리만 벅벅 긁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혹시라도 지수가 연락을 남겼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알림센터는 텅 비어있었다. 생각해보니 정한에게는 아직까지 지수의 번호가 없었다. 분명 어제 번호를 교환한 것 같았는데 연락처에 들어가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면 홍지수 폰에 번호만 찍고 걔 폰으로 전화를 안 걸었나...

 

   “아니 그러면 걔는 자기 번호도 모르는 남자 집에 와서 술 먹고 키스까지 했는데 다음 날 아침에 인사도 없이 홀라당 사라진다고?

 

   유교 문화에 절여진 한국남성 윤정한은 직접 경험하게 된 리얼 아메리칸 마인드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너무 놀라 혼잣말마저 아나운서 뺨치는 발음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한참 동안 충격에 빠져있던 정한은 그래도 해장은 하기 위해 어제 같이 술을 마신 석민을 불렀다. 선짓국에 들어 있는 선지가 탱글탱글하고 말랑말랑해 보였다. 말랑말랑? 홍지수 윗입술도 진짜 말랑말랑하고 폭신했는데... 와 시발. 아무래도 술이 덜 깬 게 분명해서 정한은 뚝배기를 들고 국물부터 들이켰다가 혀를 데었다. 아침부터 해장국집에서 부잣집 초인종 소리를 내는 정한을 석민은 조금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 형 아침부터 왜 이래 진짜...

 

   “석민아, ... 미국은 원래 친구들이랑 키스하냐?

   “형 술 덜 깼어? 대체 뭔 소리야 아침부터. , 혹시 형 미국 여자랑 키스했어?

 

   말하면서도 혹시 저와 지수가 그랬다는 걸 눈치챌까 봐 재빠르게 변명 리스트를 뽑았는데 다행히 편견이 정한의 편을 들어주었다.

 

   “아니 드라마 보니까 막 그러길래... 근데 아무리 드라마여도 그럴 수가 있냐?

   “아 미국은 뭐 그럴 수도 있지 거기는 막 쫌 오픈! 막 어? 알잖아, 아메리칸 마인드~

 

   형 근데 드라마 잘 안 보잖아 웬일이래 뭐 봤는데? 재밌어? 질문 폭탄을 던지는 석민을 앞에 두고 정한은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지수의 번호를 받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고심한 멘트에 비해 석민은 아무 의심 없이 순순히 번호를 넘겨주었고, 다시 드라마 토크를 이어갔다. 석민의 이야기는 한 귀로 흘리며 카톡 제일 상단에 새로 뜬 경영 교환 홍지수에게 언제쯤 연락해야 자연스러워 보일지나 계산하고 있었다.

 

   “그니까 막 영화나 보면 하루만 즐기고 그랬던 사람이 연락하면 집착? 그런 거로 받아들여서 막 싫증 내고 싸우고 그러잖아. 그런 게 아메리칸인 거지. 

 

   시발 진짜 어떡하지. 고민 끝에 구질구질하게 구는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정한은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그쪽은 번호를 가지고 있으니까 먼저 연락을 하겠지, 이런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정한은 돈만 내고 보지 않던 넷플릭스에서 미국 하이틴 로맨스 영화를 시청했다. 석민의 말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나름 속이 넓다고 자부하던 정한에게도 아메리카 대륙은 감당하기 힘든 스케일이었다. 일단 영화 제목부터 키싱부스였다. 키싱부스? 미쳤나? 아니 하이틴이라면서 왜 청불인데?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누른 정한은 석민에게 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미국에서 키스 정도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뺨을 때린 게 더 이슈가 될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석민이 말리지 않았다면 윤정한은 아마 홍지수 인생에서 가장 구질구질한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를 했는데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자기가 먼저 키스하고, 자기가 먼저 천사인 줄 알았다 그러고, 자기가 먼저 여행 얘기 꺼냈는데 이렇게 연락 하나 없고 나 혼자서 머리만 쥐어뜯는다고? 나중에 가서는 조금 억울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교남의 관점에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기는 한국인데 그러면 한국의 정서를 따라야 하는 거 아닌가? 타문화 존중의 자세라고는 개나 줘버린 태도로 정한은 침대에 누워 이불이나 뻥뻥 차댔다. 침대 한쪽에서 지수의 향수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06.

   그 시각 홍지수는 눈을 감은 채 3분에 한 번씩 회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드라마나 소설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필름 끊길 때까지 마시고 하룻밤 사고 치기를 볼 때마다 지수는 정말이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문학적 허용 및 과장이라고 생각했지 실제로 자신에게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조차 안 해봤다. BUT. However. 오늘 아침 홍지수의 세상이 뒤집혔다.

   눈을 뜨기 전부터 몸통 이곳저곳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제 옆에 누군가가 저를 끌어안고 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온갖 시나리오가 써지는 바람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지수는 천천히 심호흡을 세 번 하고 눈을 떴다. 불행하게도 모르는 천장이었다. 혹시라도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잠에서 깰까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더니 다행히 아는 얼굴이었다. 윤정한. 물론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일단 아는 사람이니 범죄에 연루된 것 같지는 않았다.

   자고 있는 정한이 깨지 않게 그러나 누구보다 빠르게 침대에서 벗어나 일어서니 엉덩이부터 허리까지 찌르르 통증이 올라왔다. ... 거기가 아프지? 지수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다. 방바닥에는 어제 지수가 입고 왔던 니트나 슬랙스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급하게 몸을 더듬어보니 정한의 옷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설마 속옷까지...? Shit. 머릿속에는 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충격받은 나머지 지수는 방 한가운데에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러던 중 지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30분 뒤 면접인데 오고 계신가요^^? 카페 사장님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와씨 좆됐다. 이번에는 한국어로 욕이 나왔다. 지수는 한국까지 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자 한 과거의 자신을 존나 패고 싶었다. 미국에서 부모님의 반대로 못 했던 아르바이트를 여기서 해보자는 큰 꿈은 좋은데 왜 하필 면접이 오늘 지금 이 시간이냐고. 과거의 저를 원망해봤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지수는 재빨리 어제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바지를 주워 입는데 그 순간순간에 엉덩이와 허리께가 아파서 울고만 싶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곤히 자고 있는 정한을 깨우기는 뭐해서 곱게 개어 놓은 추리닝 위에 포스트잇을 하나 남기고 왔다. 01019951230 이거보자마자전화해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 당장은 얼굴 보고 얘기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도망치는 것도 있었다.

 

   면접을 무슨 정신으로 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학교 근처에 카공 명소로 은은하게 입소문 난 개인 카페였는데 사장님은 지수의 얼굴을 보자마자 합격을 외쳤다. 당장 내일부터 나와서 일을 배우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온 신경은 핸드폰으로 가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원나잇이라니. 절제가 미덕인 보수의 끝판왕 한인교회에서 절대 용납되지 않는 행위였다. 홍지수 인생 최고 일탈이자 궤도 이탈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3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리고 정한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직 자고 있을 수 있으니까, 자기합리화하며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배달어플로 해장용 피자를 시켰다. 최대한 느끼한 거로. 그러나 피자를 다 먹고 난 뒤에도 연락은 없었다. 아직 자고 있을... 수가 있나 싶었지만 뭐 바쁜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면서 또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니 다음날 해가 떴다. 하룻밤을 꼴딱 샜는데도 윤정한에게서는 연락이 1도 없었다. 이게 말이 되나. 우리 아마 잔...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다고? 하다못해 ‘뭐해’나 ‘자니’라도?

   먼저 연락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수에게는 정한의 번호가 없었다. 분명 어제 번호 교환을 한 것 같았는데 눈 씻고 봐도 연락처에는 윤정한 이름 석 자가 없었다. 잠을 한숨도 못 잔 지수의 머리는 이성적으로 굴러가기에는 무리인 상태였다. 한참동안 핸드폰을 쳐다보던 지수는 그냥 무작정 정한의 집으로 찾아갔다. 현관문 앞에 서고 나서야 집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와버렸으니 뭐 밑져야 본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벨을 누르니 다행히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는 그 짧은 시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삐리릭- 소리와 함께 홍지수가 하루종일 생각한 그 잘생긴 얼굴이 등장했다. 하룻밤 사이에 진짜 급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상상 속에서보다 더 잘생겨서 놀란 나머지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갔다. 

 

   너 나 먹버하니?”

   ...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아니 지금 먹버하는거냐고

 

 

   07.

   윤정한은 울고 싶었다. 아니 먹은 적이 없는데 뭘 버려요... 일단 정한은 지수에게 먹버의 뜻부터 설명해주었다. 얘가 어디서 잘못 들어온 거일 수도 있으니까. 충격받지 않게 최대한 마일드한 단어로 설명해주었지만, 지수의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전화는 왜 안 하는데? 번호가 없는데 어떻게 해요. 정한은 정말이지 울고 싶어졌다.

 

   “아니 나는 너 번호도 없어. 그리고 애초에 안 잤는데 왜 먹버야...?

 

   너야말로 먼저 키스해놓고 입 싹 닫고. 아무리 너가 아메리칸 마인드라고 해도 여기는 한국이거든. 미국에서 키스 정도는 친구나 모르는 사이에도 가볍게 할 수 있는 거일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큰일난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있는데 진짜... 너랑 나랑 이런 거 파평윤씨 조상님들이 아시면 무덤에서 깜짝 놀라서 나오셔.

 

   정한의 말을 듣던 지수는 처음에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나중에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한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쟤는 지금 저 말이 웃긴가? 나는 지금 완전 진지한데... 전까지는 웃는 얼굴이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지수는 생글생글 웃으며 정한에게 물어왔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잔 게 아니라는 거지?

   “안 잤다고. 너가 키스하자마자 바로 뻗었잖아.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데”

 

   하시발 다행이다... 지수는 낮게 중얼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한은 방금 지수의 입에서 나온 게 욕설이 맞는지 제 귀를 의심이나 하고 있었다. 바닥에 앉은 지수가 금방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나서 정한은 잠깐 쫄았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계속해서 홍지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왜 또 뭐가 문제인데,

 

   “그러면 대체 엉덩이는 왜 아프지? 거의 멍든 거 같아”

   “너가 술 취해서 옷 갈아입다가 넘어졌어. 내가 도와준다는데도 싫다고 싫다고 해서 진짜...

   “빡쳤었구나”

   “엉ㅎㅎ”

 

   그렇게 아주 다행스럽게도 둘은 오해 아닌 오해를 풀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쪽만이었다. 원나잇의 악몽이 현실이 아닌 꿈이었다는 사실에 홀가분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홍지수를 보는 윤정한은 아직까지도 조금 혼란스러웠다. 아니 원나잇은 안되고 키스는 되고...? 여전히 유교남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행위였다. 그래서 정한은 한번 슬쩍 떠봤다.

 

   “홍지수 이제야 얼굴 좀 폈네 아까는 완전 죽상이었는데ㅋㅋ 키스는 괜찮나 봐?

 

   쟤 뭐냐는 듯 쳐다보는 지수의 얼굴이 완전 괜찮다는 얼굴이라 정한은 그냥 입을 닫았다. 이 이상 구질구질한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둘은 그 자리에서 깔끔하게 번호교환을 하고 정식으로 친구를 먹었다. 그 와중에 정한이 점심으로 먹으려고 시킨 돈가스가 도착해서 둘이 사이좋게 나눠 먹기까지 했다. 뒷정리까지 도와준 지수는 홀가분한 얼굴로 인사와 함께 윙크를 날리고는 떠났다. 평소에는 혼자 잘만 있었던 원룸이 사람 하나 떠났다고 괜히 휑해 보였다. 아 아무것도 하기 싫다, 중얼거리며 바닥에 드러누우니 저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종이 쪼가리가 보였다. 지수가 쓴 포스트잇이었다. 이건 또 언제 썼대. 정한은 그걸 주워서 예쁘게 편 다음 지갑 속 학생증 끼고 다니는 자리에 넣어놨다. 다음 주면 벌써 개강이었다.

 

 

   08.

   경영대 수업의 특징이라 함은 첫 번째, 영어강의가 많고 두 번째, 타과생 및 외국인이 많으며 세 번째, 수업 내용에 알맹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윤정한은 영강으로 열린 전선 과목을 홍지수와 함께 듣고 있지만, 교수님의 설명에 전혀 집중하지 않고 딴짓이나 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한은 남들은 필기하느라 바쁜 오른손을 책상 아래로 내려 지수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디까지나 장난이었는데 제 손을 단호하게 쳐내는 손이 미워서 일부러 집요하게 더 만졌다.

   만지고 쳐내고 만지고 쳐내고. 소리 없는 파닥거림이 계속되자 주변 사람들이 큼큼거리며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지수는 잔뜩 커진 눈으로 정한을 쳐다봤다. 정한은 이 순간이 좋았다. 홍지수가 자기 때문에 빡쳐서 두 눈 크게 쳐다보고 눈으로 욕하는 순간. 처음에는 마조인가 싶었지만, 그냥 지수가 자기를 온전히 쳐다봐주고 관심 가져주는 게 좋은 거라고 결론 내렸다. 지수는 한숨을 한번 크게 쉬더니 그 큰 손으로 엉덩이를 주물거리는 정한의 손을 콱 잡았다. 그러고서는 발음이 구려서 1도 알아듣지 못하겠는 교수님의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윤정한은 오른손이 잡혀서 아무것도 못 하는데 영어로 필기까지 하고 계셨다. 어차피 강의를 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정한은 얌전히 잡혀있었다. 가끔 엄지로 손등을 쓸어보기도 하고 깍지도 껴봤는데 지수는 꿈쩍도 않고 손에 힘만 더 줄 뿐이었다. 그렇게 둘은 강의가 끝날 때까지 내내 손을 잡고 있었다.

 

   놀라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정한과 홍지수는 그 이후로도 계속 키스했다. 술이 약한 홍지수는 사람들이랑 만나는 건 또 좋아해서 술자리에 자주 나갔다. 교환학생으로 온 거니까 즐기고 싶다는 말에 뭐라고 토를 달 수는 없었다. 술에 취한 지수는 계속 옆 사람에게 기대고 치대서 어쩔 수 없이 정한이 옆자리를 사수해 케어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어진 알 수 없는 책임감의 연장선으로, 정한은 자기가 아니면 얘를 집까지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전필을 몰아 듣느라 이번 학기에 팀플만 4개를 하게 된 민규에게 제가 대신 지수를 챙기겠다고 말까지 해둔 상태였다. 민규는 굉장히 어리둥절해 했지만 일단 알겠다고 했다. 실제로 죽을 거 같았기 때문에 민규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그렇게 공식적으로 홍지수 보호자가 된 정한은 술에 취한 지수를 오피스텔까지 데려다주었다. 공동현관 앞에서 돌아가려고 하면 꼭 지수가 옷자락을 잡아 왔다. 정신 차리고 보면 현관문 앞이었고, 불 꺼진 센서등 아래에서 입술을 부딪쳐오는 지수의 등을 쓸어주며 달래주고 있었다. 혹시라도 같은 층에 사는 사람이 나오기라도 할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집중하라는 듯이 혀를 얽어와서 정신줄 잡기에 조금 버거웠다. 숨이 다 해 벅차 오를 쯤이 되면 지수는 먼저 입술을 떼고 도어락 비번을 친 다음에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집 안으로 사라졌다. 정한은 비틀거리며 신발을 벗는 지수의 소리를 현관문 너머로 엿듣다가 넘어지지 않고 잘 들어간 것 같다고 확신이 들면 번들거리는 입술을 닦고 걸어서 5분 거리인 자기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다음 날 점심쯤에 둘이 같이 해장을 하러 가는 게 둘 사이의 암묵적인 루틴이었다.

   그날도 어느 술자리에 나가 있던 지수를 중간에 빼돌려 나와 집까지 데려다준 뒤, 다음날 아점으로 처음 지수와 키스한 다음 날 석민과 해장했던 집에서 국밥을 말아먹던 중이었다.   

 

   너 어디 가서 술 많이 마시지 말아라. 키스하는 게 술버릇인 애가 어딨어. 진짜 큰일 나.”

   그럼 너가 옆에서 계속 막아주던가 정한아ㅎㅎ

 

   쟤 또 사람 꼬시네. 사실 윤정한은 요즘 홍지수 때문에 굉장히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다른 애들한테 지수의 술버릇에 대해 물어보니 기분이 많이 업되는 거 뿐이지 딱히 다른 주사가 없다고 했다. 아닌데 걔 스킨쉽 진짜 많아지고 눈 풀리고 막 장난 아닌데. 정말 아무것도 없냐고 물으니 왜 그러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왜 지수형 막 울고 그래? 절대 안 그럴 거 같은데... 이런저런 정황들로 미루어보아 홍지수는 윤정한한테만 술 먹고 이런 짓을 한다는 뜻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이거 완전 대놓고 꼬시는 거 아니야? 방금 전의 멘트도 그랬다. 옆에서 막아주라니. 내가 요즘 그 짓 하느라 학교 주변 술집이란 술집은 다 발도장 찍고 다니는 거 너도 알잖아. 정말이지 홍지수가 저럴 때마다 고백이 목끝까지 차올라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09.

   윤정한은 본래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정한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안정감에서 행복을 느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기가 윤정한 인생의 최대 목표였다. 장난을 하도 쳐대는 바람에 정반대의 성향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적어도 인간관계에서만은 안정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편이었다. 장난을 쳐도 그 관계가 유지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그렇게 온갖 장난과 내기를 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정한은 절대로 정해진 선을 넘지 않았다. 그래야만 오래오래 볼 수 있으니까. 정한은 사랑하는 사람과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하기를 바랐다.

   그런 윤정한에게 홍지수는 말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일단 지수는 교환학생이었다. 떠나야 하는 사람이었고, 당장 몇 개월 뒤면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불안정의 끝판왕이었다. 거기에다가 선은 진작에 넘었다. 친구랑 술 마시고 키스하는 사람이 어딨어. 한평생 안정적인 관계를 추구해온 정한은 그래서 조금 무서웠다. 좋아하는 거랑은 별개로 자신이 저 사람과 함께할 미래를 견뎌낼 수 있을지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은 윤정한은 사귀기도 전부터 장거리 연애의 장단점에 대해 알아보는 중이었다. 물론 단점이 더 강력해서 끙끙 앓았다. 좋아는 하는데 무턱대고 지르기에 정한은 걱정이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고백도 못 하고 홍지수 손에서 신나게 놀아났다. 가끔은 그냥 이렇게 썸만 디질나게 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수도 이러는 편이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왕 하는 거 열심히 장단을 맞춰줬다. 온갖 남친짓은 하면서 남친은 아닌 말도 안 되는 장단 말이다. 그래도 가끔가다 넘치는 사랑을 참기 정말 어려울 때는 조금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지수의 말을 떠올렸다. 한국에서 정한이 너 같은 친구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 그놈의 친구. 요즘에는 남자친구도 친구니까 그냥 친구도 결국에는 남자친구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는 기적의 논리까지 시전하며 꾹꾹 참아내고 있었다. 친구라고 선 긋는 홍지수와 섣부른 고백으로 멀어지기는 싫었으니까. 한국에 있는 시간만이라도 지수의 옆에서 함께 하고 싶었다. 

 

 

   10.

   1학기 내내 붙어 다니던 윤정한과 홍지수는 종강 기념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가기로 했다. 지수가 옛날에 세웠던 그 말도 안 되는 계획대로 말이다. 4개월 동안 나름 한국 생활을 한 지수는 그게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수는 여수 쪽에 있는 풀빌라에 가서 느긋하게 놀다 오고 싶었다. 요즘 인싸들은 다 그렇게 놀던데. 무엇보다 한국 면허가 없는 지수를 대신해 모든 운전은 정한이 도맡아 해야 했기에 꺼려졌다. 미안하니까. 그런데도 정한이 나중에 보면 추억인데 한번 해보자고 부추기는 바람에 그 정신 나간 여행을 하게 되었다. 먹방여 행하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에서는 이런 코스로 다니는 게 아예 없는 일이 아니라는 설득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꿈꾸던 일이 실현되는 건 아무래도 즐거운 일이라 지수도 좋긴 좋았다.

   둘은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서 돼지국밥을 먹기 위해 부산을 향했다. 아메리카노 하나씩 빨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일출을 봤다. 피곤해 죽겠어서 그런 건지 몰라도 일출의 낭만 따위는 없었다. 부산에 도착해서는 아저씨들이 득실득실한 국밥집에서 국밥을 먹었다. 뜨끈하고 든든한 게 왜 국밥충이 되는지 알 것만도 같았다. 박하사탕까지 야무지게 챙겨 나온 뒤 잠깐 바다를 보러 갔다. 신발을 벗은 채 해변을 걷다가 정한과 눈이 딱 마주쳤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서로를 바다 쪽으로 밀쳤다. 다행히 정한은 타고난 운동 신경으로, 지수는 코어 힘으로 버텨냈다. 서로 요놈 봐라,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다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다음 코스는 전주에서의 점심이었다. 둘은 예약까지 해둔 유명 한식집에 가서 비빔밥을 비롯한 여러 한식을 먹었다. 지수의 입맛에는 그닥이었는데 정한이 진심으로 맛있어했다. 잠깐 시간이 남아서 카페를 갈까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한복이라도 한번 입는 게 어떠냐는 정한의 말에 대여점으로 향했다. 지수는 이렇게나 많은 한복들을 보는 게 처음이라 굉장히 신기해했다. 미국에는 딱히 전통의상이라고 할만한 게 없으니까 더 흥미로웠다.

   그 옆에서 감흥 없는 눈으로 형형색색의 한복들을 살펴보던 정한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 빛났다. 지수야 우리 가위바위보 진 사람이 여자 한복 입자. 이런 거에 절대 안 빼는 지수는 당연히 오케이 했다. 그리고 가위바위보는 당연히 묵돌이 홍지수가 졌다. 내기는 내기니까. 말은 했지만, 이모님의 도움을 받아 한복을 고르는 지수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르게 입만 웃고 있었다.

   지수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사이 정한은 제 몫의 치마와 저고리를 골랐다. 우리 찡찡이 또 삐지면 안 되니까. 제일 큰 사이즈를 골라서 들어왔음에도 어깨 부분이 터질 거 같고 치마가 허리께가 쪼여왔다. 세상에서 답답한 거를 제일 싫어하는 정한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뼈가 굵은 거 어떡해, 살도 아니니까 뭐 줄일 수도 없고. 타고난 몸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장신구를 고르는 지수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웃기려고 치마 입자고 한 건데, 여성용 대여 한복 특유의 화려함이 지수와 잘 어울려서 놀랐다. 아니 쟤는 뭐 이런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려. 지수는 쭝얼거리며 세상 불편한 걸음걸이로 나오는 정한을 보고 빵 터졌다.

 

   “와 정한아 너 지금 진짜 웃기다. 쫌 웃어봐 이쁜데 왜 그래.

 

   아 당연하지, 윤정한인데. 칭찬에 머쓱해진 정한은 괜히 지수의 옆에 가서 제일 화려한 장신구를 골라줬다. 꽃이랑 싸구려쥬얼이 잔뜩 박혀있는 거였는데 머리 위에 올리니까 전혀 죽지 않고 오히려 얼굴이 더 돋보이는 느낌이었다. 드럽게 이쁘네 진짜. 정한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삼키며 제 몫의 장신구를 골랐다.

   잘생긴 남자 둘이 여자 한복을 입고 길거리를 다니니 당연히 온 동네 시선을 끌어모았다. 처음에는 쪽팔려서 죽고 싶었는데 대여 시간이 끝나갈 때쯤 되니 즐길 만큼 익숙해졌다. 담벼락에서 포즈를 취하며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남들 줄 서서 기다리는 곳에서도 하나 찍었다.

 

   “둘이 잘 어울려요!!

 

   정한과 지수의 사진을 찍어준 여고생들이 핸드폰을 건네주며 외치고 와다닥 뛰어갔다. 어이가 없었지만 잘 어울린다는 말에 또 기분이 좋아져서 정한은 그냥 웃고 말았다. 한복을 반납하고서는 춘천으로 닭갈비를 먹으러 갔다. 둘 다 여기나 서울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제 이태원에 간 뒤 니글니글거리는 안주를 파는 펍에서 맥주를 한잔하는 거였다. 하지만 장거리 운전으로 지친 정한이 차마 거기까지는 못 갈 거 같다고 말하는 바람에 간단하게 정한의 베란다에서 노상을 까기로 했다. 여기가 루프탑이지 뭐 루프탑이 별거야.

 

   하필이면 그날따라 달이 완전 슈퍼문처럼 떠 있었다. 동그랗고 큰 보름달이었다. 정한은 술을 들이키는 지수 얼굴을 보다가 달을 한번 보고 또 지수 얼굴을 한번 봤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느라 피곤에 절여져 때꼰해진 얼굴이 역시나 예뻤다.

 

   “오늘 달이 참 이쁘네”

 

   당신을 좋아한다는 뜻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뱉은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달이 예쁜 것도 그리고 윤정한이 홍지수가 좋아한다는 속뜻도. 물론 라면 먹고 갈래의 의미를 저번 주에서야 안 지수가 이 말의 뜻을 알 리가 없었다. 1도 못 알아들은 지수는 정한의 말에 그렇다며 맞장구를 쳐주더니 이내 자신이 사랑하는 달과 우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달은 사실 지구 둘레를 도는 게 아니래, 달의 공전 궤도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변하다가 거의 9년 주기로 제자리로 돌아온대 등등 유튜브에서 썸네일로 온갖 어그로를 끄는 영상에 나올법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실 정한은 지수가 하는 얘기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신나서 쫑알쫑알거리는 홍지수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리액션을 더 해줬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술이 귀여웠다. 오물오물거리는 게 꼭 다람쥐 같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편의점에서 사 온 술이 다 동났다. 술 약한 홍지수는 벌써 취했다는 뜻이었다. 정한은 별 볼 일 없는 대학가 근처 야경에 취해있는 지수를 어르고 달래 안으로 들어왔다. 낑낑거리며 침대에 눕히고 보니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다 싶었다. 둘이 처음 키스했던 바로 그 날. 괜히 그날이 생각나서 정한은 빨리 침대 곁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정한을 잡아 오는 손이 있었다. 마치 그날처럼.

   정한은 이번에도 먼저 다가오는 지수를 밀어내지는 못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키스를 마치고 곧바로 기절잠에 들었던 지수가 정한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등허리며 배를 느릿하게 문질러댔다는 점이었다. 지금 이게 대체 뭐 하자는 거지. 쉴 새 없이 쪽쪽거리면서도 뭉근하게 비벼오는 하체에 정한은 힘을 주어 제게 매달린 얼굴을 떼냈다.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와중에도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잠깐, 잠깐만. 나 너 좋아해 지수야.

 

   ? 나도 우리 정한이 좋아하지.”

   친구로서 이런 거 말고.”

   ...

   “그니까 나 지금 진지하니까 지금 이러는 거 장난이나 술 때문..

 

   지수는 정한의 말을 다 듣지 않은 채 입술부터 부딪혀왔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입으로 막는 바람에 정한은 결국 말을 완성 짓지 못했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방 분위기와는 다르게 끝까지 가지는 못했다. 먼저 달려든 지수가 뒤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무섭다고 빼는 바람에 결국에는 패팅으로 끝냈다. 윽윽거리며 신음을 참아내는 지수의 입에 계속해서 입 맞추며 좋아한다고 속삭였다. 분명 지수도 나도, 라고 했었던 거 같은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또 옆자리가 휑하니 비어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멍하니 기다리지 않았다. 일어나면 연락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이번에는 윤정한이 홍지수를 찾아갔다.

 

 

   11.

   사실 홍지수도 알았다. 윤정한이 자기를 좋아하는 거. 그리고 조금 늦게 제 감정을 깨닫기는 했지만, 홍지수도 윤정한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얼빠기질이 발동된 건 줄 알았는데 사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엥? 그럼 됐네 둘이 사귀면 되는 거 아니야? 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홍지수에게는 아니었다. 그거랑 그거랑 말이 다르지 임마!!

   지수가 생각하는 조슈아 지수 홍의 인생 궤도는 대학을 졸업해서 회계법인에 들어가고 같은 기독교 신자인 에밀리나 뭐 에이미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랑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그런 거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들어온 이야기라서 지수 본인도 이게 맞는 길이라고 생각해왔고, 이렇게 살아가야만 한다고 믿어왔다. 그니까 홍지수 인생에서 염주 팔찌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외국인과의 동성연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윤정한은 홍지수 인생에서 단순 변수 수준이 아니라 궤도를 박살 내는 소행성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무서웠다.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까 봐.

   무엇보다 자신이 그냥 윤정한의 인생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가 될까 봐 무서웠다. 한국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었고, 지수는 떠나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없는 한국에서도 윤정한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잘만 살 것이다. 얘기 들어보니까 정한은 취미생활도 1년 이상 간 적이 없댄다. 뭐 했다가 뭐 했다가 깔짝깔짝. 타올랐다가 금방 또 새로운 재미를 찾아 떠난다. 사랑도 뭐 그러겠지. 지금은 죽고 못 살 거 같은 눈빛을 보내긴 하는데 언젠가는 저 눈빛도 식을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홍지수는 무서워서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달빛 아래에서 제 몸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는 정한의 눈빛이 생각보다 더 뜨거워서, 영원할 것만 같아서 계속 마음이 동했다. 마지막에 가서는 저도 모르게 나도 좋아한다고 속삭였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너도 나도 정해진 길이 있는데, 우리는 서로의 궤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변수인데.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그래서 튀었다. 아침에 혼자 일어난 윤정한이 상처 받을거 뻔히 알면서. 오히려 상처받고 자신을 찾지 않기를 바랐다. 시작하지도 않았으니까 그 상처도 빨리 아물 것이다. 홍지수 혼자 LA에서 한국을 그리워하며, 파탄 난 자신의 궤도를 이어붙이려고 노력하면서 살기만 하면 되었다. 아예 연락조차 못 하게 카톡이며 다 차단했다. 어차피 2학기는 학교에 안 다니고 놀려고 했으니까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제주도에 내려가서 한달살이나 한번 해볼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던 찰나 정한에게서 연락이 왔다. 차단당한걸 아는 것인지 학교 메일로 메일을 보내왔다.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이건 예상에 전혀 없던 일이었다.

 

 

   12.

   홍지수는 분명히 안 나가려고 했다. 진짜 안 나가려고 했는데 밖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지수네 오피스텔의 공동현관은 카드키가 있어야지만 들어올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드라마 속 미련한 주인공처럼 비에 쫄딱 맞은 채 벌벌 떨며 기다리는 정한의 모습을 생각하자 초조해졌다. 혹시라도 윤정한이 비 맞고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걱정되어서 잠깐 확인만 하고 오리라 고민 끝에 큰 결심을 했다.

   급히 우산이랑 수건을 챙겨서 내려가니까, 정한은 공동현관에 작게 마련된 로비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몇십분을 걱정한 제 모습이 굉장히 웃겨지는 상황이라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덕분에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정한과 딱 눈이 마주쳤다. 지수는 급하게 뒤돌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타했다. 야 홍지수!! 정한의 부름도 씹은 채 급하게 닫힘 버튼을 눌렀지만, 정한이 더 빨랐다. 닫히는 문 사이로 발을 끼워 넣었다. 하여튼 운동신경은 더럽게 좋아요. 물론 지수는 그런 모습을 사랑해 마지않았다.

 

   “지수야 얘기 좀 하자고.

   ...너랑 할 얘기 없는데”

   “나는 있으니까 그럼 듣기만 해.

 

   집까지 올라가는 동안 아무 말도 없어서 지수는 이러다 엘리베이터가 터지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까지 했다. 도어락 비번을 치는 손이 계속 떨려가지고 두 번이나 틀려먹었다. 센서등이 꺼진 현관 앞에 둘이 서 있으려니까 술 먹고 주사 핑계 대며 했던 키스들이 떠올랐다. 한번만 더 틀리면 기사님 불러야된다, 침착하자 홍지수. 심호흡을 하고 하나하나 차분히 비밀번호를 눌렀다. 정한이 지수의 집 안으로 들어온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막상 이런 상황에 던져지니 지금까지 했던 고민들은 떠오르지 않고 이럴 줄 알았으면 집 정리 좀 해놓을 걸 따위의 영양가 없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정한은 멍하니 서 있는 지수를 소파에 앉히고 저는 그 앞에 주저 앉은채 말을 꺼냈다.

 

   뭐가 문제인데. 사실 나도 조금 무섭기는 해. 너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 사귈 수 있을지 잘 모르겠고. 그런데 이런 생각 하느라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서 도망치느라 지금 너 안 보는 게 더 바보 같은 짓 같아서 그래. 어차피 반년 뒤에 떠날 거라면 그냥 그동안 미쳤다 생각하고 한 번만 만나주면 안 될까. 우리 둘이 같이 있으면 그게 행복이잖아, 우리 조금이라도 행복하면 안 될까 지수야.

 

   그 말을 하는 윤정한의 눈가가 그렁그렁해서, 지수의 무릎에 올려진 손이 덜덜 떨려서, 홍지수는 저도 모르게 팔을 벌려 정한을 안았다. 더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인생이고 나발이고 알아서 될 대로 되라지. 홍지수의 공전궤도가 전면 수정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