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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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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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한이 이상했다. 요즘 따라 자꾸 묘하게 삐걱거렸다. 톱니가 맞지 않는 듯한 괴기함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지수는 작은 의문을 품어야 했다. 언제나 영하 4도로 유지되는 넓고 차가운 은반 위가 정한을 이상하게 만들었을까. 날카로운 스케이트 날이 얼음 위를 거칠게 쓸고 지나가는 선연한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도약. 평소답지 않게 회전축이 흔들렸다. 정한은 눈 감고도 뛰었던 토룹 점프에서 미끄러지고도 태연했다. 예상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대로 얼음 위에 몸을 누인 정한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돔 형태의 높은 천장에는 눈이 아프도록 부신 금빛이 가득 수 놓여 있었다. 환한 조명을 향해 뻗은 팔이 애처로웠다.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사월 씀

 

 

 

 화소가 다 보이는 낡은 티비 속에는 화려한 의상을 입은 피겨 선수들이 은반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다섯 살 정한의 눈에는 그들이 꼭 동화 속 왕자님 같았다. 매료당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물고 뜯어 잔뜩 해진 옷 소매를 또다시 잘근잘근 씹어대던 정한이 엄마를 졸랐다. 엄마. 나도 저거 배워보고 싶어. 유치가 다 빠진 입에서는 발음이 줄줄 샜다. 걸음마도, 말도 늦었던 정한이었다. 말을 시작하고 난 뒤에도 무엇 하나 고집부리는 일이 없어, 되려 속을 썩였던 아들. 아끼는 장난감이 동생 손에 부서져도 투정 한 번 부리지 않던 아이가 처음으로 요구한 무언가를 정한의 친모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피겨 스케이팅이 귀족 스포츠라는 것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선수 생활을 영위하기도 쉽지 않은 종목이지만, 취미로 배우는 일조차 결코 쉽지 않았다. 개인이 운영하는 피겨 교습소의 강습료는 넉넉하지만은 않은 정한의 집안이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스케이팅에 필요한 용품을 찾는 일 역시 고됐다. 발목 보호대 하나가 5만 원이 넘어갔고, 인터넷으로 주문한 부츠는 발이 맞지 않아 20만 원 가까이 되는 금액을 그대로 날렸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다. 거실에서 혼자 맨발로 뛰어보는 정한을 보고 있노라면 더더욱 그랬다. 

 운이 좋았다. 시에서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의 아이스링크에서 다음 달부터 강습을 시작한다는 공지가 있었다. 지나치게 저렴한 가격에 강사 프로필조차 올라와 있지 않아 신뢰도는 떨어졌지만, 수업의 질적인 면보다 정한에게 포기를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정빈에게는 더욱 중요했다. 체념은 습득되기 마련이었으니. 비록 느리더라도 영리한 아이였다. 떼쓰고 부탁할 줄은 몰라도, 뚜렷한 의사 표현과 논리적인 자기주장을 할 줄 알았다. 취미 이상으로 피겨를 시킬 생각은 없었으므로, 이것으로 족했다.

 

 모든 일이 뜻대로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피겨를 배운 지 고작 2년, 정한은 7살의 나이에 더블 살코를 뛰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선수조차 쉽게 정착시키지 못하는 점프였다. 겨우 공립 체육시설에서 하루 두세 시간 탄 게 전부인 아이가 낼 수 있는 기량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전문적으로 훈련 받는다면 크게 될 게 분명한 천재. 코치는 초등학교 입학을 핑계로 강습을 그만두려는 정빈을 붙잡았다. 이 아이는 선수로 키워야 한다고. 한국 피겨 스케이팅 후원사 NK 금융 그룹에서 진행하는 장학 프로그램에 지원이라도 한번 해보셨으면 좋겠다고. 정빈의 손에 들려 있는 포스터가 구겨졌다. 빙상장에 다녀오면 늘 말갛게 웃으며 자랑하던 아들. 세 살, 말을 완전히 뗀 이후 정한은 습득이 빨라 무엇이든 쉽게 질려 했다. 정한이 이토록 흥미를 붙였던 일이 있었던가. 처음으로 열의를 보이던 예쁜 얼굴이 떠올라 결국 정빈은 또다시 물러질 수밖에 없었다.

 잔뜩 풀이 죽은 아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제 피겨 말고 다른 걸 배워보자는 이야기를 꺼낸 후부터 계속 힘이 없던 정한이었다. 정빈은 운동 가방 앞에서 스케이트 부츠를 만지작거리는 정한을 보고 스스로를 단단히 다스렸다. 주어진 기회를 걷어차는 것보다 바보 같은 일이 있을까. 머리를 자르지 않아 어깨에 닿을 듯한 아들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정한아. 정한이는 계속 스케이트 타고 싶어?”

 

 곧바로 끄덕여지는 고개. 꽉 다문 입술이 다부졌다. 고되고 험한 길. 수없이 이어졌던 걱정들이 무색하게, 왠지 정한이라면 잘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해보자 아들. 반짝거리는 정한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며 정빈은 웃었다. 

 

 

 

  정한은 보란 듯이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당연한 결과였다. 기뻐하는 정한을 보며 정빈도 따라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냥 행복해 할 수 없었다. 정한을 보는 일이 쉽지 않아질 거란 사실이 먼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문득 사무치게 서글퍼졌지만, 제 아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정빈의 능력으로는 결코 이뤄 줄 수 없는 꿈이었으니. 앞으로 NK 그룹 회장의 손자분과 함께 전용 링크장에서 훈련하시게 될 겁니다. 숙식 관련 부분은 크게 신경 쓰실 필요 없고, 일요일마다 댁으로 아드님 픽업 역시 저희 쪽에서 책임질 예정입니다. 유학 관련 일정은 확정 나면 따로 안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담당자는 정중하게 이야기하며 정한을 데려갔다. 지어진 지 30년이 넘은 구축 아파트와는 비교할 수 없게 크고 깔끔할 새 보금자리로. 

 커다란 저택. 엄마가 보는 드라마에서나 마주하던 건물을 앞에 둔 정한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런 곳이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화려한 석고상과 맑은 물이 흐르는 분수. 넓은 잔디밭. 처음 마주하는 세상에 넋을 잃고 있을 때 즈음, 고용인이 자신을 뒤뜰에 자리한 건물로 데려갔다. 커다란 돔 형태를 띤 건물은 빙상장이었다. 하얀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작은 아이가 은반 위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우아한 백조 같은 움직임에 정한은 넋을 잃었다. 사랑은 많은 이유를 동반하지 않는다. 꽃이 피는 계절도 아닌데, 꽃가루가 심장에 들어간 듯이 간질거렸다. 

 음악이 끊기자 정한을 발견한 아이가 빠르게 펜스로 다가왔다. 처음 보는 또래가 어색하지도 않은지 잔뜩 긴장해 하얗게 질린 정한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우와. 너 진짜 예쁘다.” 

 

 나 혼자 스케이트 타기 너무 싫었는데, 이제 매일 같이 훈련 하겠다. 그치? 곱게 휘어지는 눈꼬리가 신기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티 하나 없이 맑은 얼굴에 정한은 괜히 마음이 놓였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도, 이 아이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오했던 일임에도 훈련은 고됐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강도였다. 정한으로선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상이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웜업이 이루어졌다. 3시간의 지상 훈련 후에는 해가 질 때까지 온 아이스(On-ice) 훈련을 했다. 스케줄만 고된 것은 아니었다. 발이 자랄 때마다 부츠가 바뀌어, 값비싼 장비임에도 늘 적응하는 일 역시 고역이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깊은 한숨 한 번에 다시 밝게 웃는 지수가 정한은 늘 신기했다.

 얼음 위를 누비는 일은 여전히 행복했지만, 동시에 지치는 속도도 빨랐다. 생활 패턴이 어느 정도 몸에 익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참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눈물이 나왔다. 어린 정한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일들이었다. 그렇게 몇 년 후, 동계체전 금메달을 따내기까지 정한은 하루에도 수십 번 링크를 떠나는 생각을 했다.

 

 

 

-

 

 

 

 정한은 뛰어난 선수로 자랐다. 이미 NK가 정한에게 내걸었던 기대를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빠른 속도의 스케이트 날이 거침없이 은반을 가로지를 때마다, 지수는 지금껏 겪어온 권태가 함께 쓸려나가는 듯했다.

 

“안 힘들어?”

 

 캐비닛 앞, 가쁜 숨을 몰아쉬던 지수가 물었다. 내내 쿼드러플 점프를 연습하느라 잔뜩 지친 기색이었다. 정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훈련량이 많은 지수였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지수의 풀어진 모습에 정한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제 부모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차마 저버리지 못하는 지수라,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꺼내기조차 망설여졌다. 

 

“나는 별로. 오늘은 연습을 많이 하지는 않아서.”

“거짓말. 너 평소보다 지상 훈련 두 배로 한 거 코치님한테 들었거든.”

“코치님이 거짓말하는 거야. 나 오늘 컨디션 안 좋아서 훈련 적게 했어.”

“……어디 아파?”

 

 열은 없는 거 같은데. 커다란 손이 이마에 닿았다. 얼음과 한 몸이 되듯 해야 하는 종목이라 그런지 남보다 유독 체온이 낮은 지수였다. 차가운 손이 주는 감각이 좋았다. 지수는 숨기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새벽같이 빙상장으로 향하는 그를 정한은 알고 있었다. 발에 피가 나도록 피겨화를 신는데도 뚜렷하게 차이 나는 기량 차이. 질투도 안 날까. 순수한 걱정이 어린 얼굴을 볼 때면 정한은 간질거리는 심장을 긁고 싶어졌다. 

 

“아냐. 그냥 오늘 좀 피곤한가 봐.”

“다행이다. 아프면 안 돼. 선수는 건강이 생명인 거 알지?”

“응. 알지.”

 

 부스스한 정한의 앞머리를 살짝 정리해 준 지수가 끙차, 소리를 내며 무거운 더플백을 들었다. 가자. 밥 먹으러. 주니어 내셔널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 식단은 여느 때와 같이 우유와 스테이크 150g 정도가 다일 게 분명했다. 아스파라거스와 구운 양파가 같이 나오면 더없이 좋고. 물릴 법한 식사인데도 지수의 얼굴이 밝았다.

 지수는 골반에 발목 부상으로 고생하는 중이었다. 성장 억제 주사를 맞아도 자꾸 크는 키 역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늘 웃는 지수가 정한은 마냥 신기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 가볍게 물으면 어김없이 너랑 같이 스케이트 타는 게 즐겁다 답할 목소리가 선했다. 저에게조차 힘든 내색 하나 내보이지 않으려는 그가 괜스레 얄미워졌다. 자신보다 살짝 작은 지수의 정수리를 가볍게 쥐어박은 정한은 식당으로 달려가는 내내 뒤에서 들려오는 지수의 비명에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종합선수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며 출전하게 된 주니어 세계선수권. 국제무대 첫 데뷔인데도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쇼트 경기에서 지수와 정한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으니, 큰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메달을 따는 데 어려움은 없을 터였다. 정한의 프리 프로그램 음악은 로미오와 줄리엣. 시작부터 4회전 점프 두 개가 예정되어 있었다. 쿼드러플 토룹, 그리고 쿼드러플 살코. 그리고 이어지는 트리플 악셀. 난도 높은 구성에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레벨 4의 레이백 스핀으로 마무리 한 무대는 흠잡을 곳 없이 깨끗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코끼리 인형이 얼음 위로 쏟아졌다. 지수의 취향인 회색 인형을 품에 가득 안았다. 전부 지수의 방으로 향할 것들이었다. 거대한 코끼리 무덤 속에 파묻혀 있을 지수를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샜다.

 

 프리 프로그램 178.62, 총점 256.33으로 윤정한 선수, 1위에 랭크 됩니다. 

 

 주니어 세계 신기록, 시즌 베스트였다. 계속해서 돌아가던 방송국 카메라조차 잊은 지수가 정한을 껴안았다. 코끼리 인형보다 저를 먼저 반기는 지수는 오랜만이었다.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지난 경기에서 크게 넘어졌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미련투성이 홍지수. 정한의 실수 덕에 1위를 따냈던 그였다. 정한은 그날, 넓은 식탁에 빈틈없이 채워지던 화려한 음식을 잊지 못한다. 그토록 환한 지수 어머니의 얼굴을 처음 본 날이기도 했다.

 사실, 지수 역시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였다. 단지 정한이 타고난 천재성이 압도적이었을 뿐. 4회전이었던 마지막 점프에서 회전축이 흔들리며 랜딩에 실패했음에도 지수의 점수는 정한의 기록에 근접해 있었다. 만약 클린에 성공했다면 세계 신기록의 주인은 지수가 됐을 터였다.

 

“넘어졌던 건 괜찮아?”

 

 불필요한 동정을 걱정으로 위장시켰다. 똑 부러진 듯한 지수는 은근히 칠칠치 못한 구석이 있어서, 아직도 검은 바지 위에는 넘어진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얀 얼음 조각을 털어 주는 정한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지수였다.

 

“응. 넘어지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다음에 잘하면 되지.”

 

 난 그냥 네가 금메달 딴 게 기쁘다니까? 지수의 눈꼬리가 물결을 만들었다. 세필 붓으로 하나하나 신경 써가며 그린 듯한 고운 얼굴. 역시 홍지수는 바보 같다고. 정한은 생각했다.

 

 

 

 

 

 

 시니어 데뷔 이후 지수의 성적이 부쩍 부진했다. 긴장을 하는지, 국제무대에만 서면 항상 아슬아슬한 성적으로 포디움에 오르지 못했다. 매번 금메달을 따내며 ‘피겨 황제’ 타이틀을 얻은 정한과는 비교되는 행보였다. 지수는 그럴수록 더 빙상장을 찾았다. 내가 부족한 탓이야. 현역 선수 중 지수보다 연습량이 많은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만 자신을 몰아세우는 지수가 정한은 안타까웠다. 

 

“힘들지 않아?”

 

 세계선수권 5위. 이제 막 시니어 무대에 선 선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성적이었다. 하지만 지수와 그를 둘러싼 많은 상황 때문에, 정한으로서는 걱정이 앞섰다. 지수가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을 제가 하게 될 줄은. 피겨 선수의 부상 원인은 대부분 스케이트에 있다. 장인에게 여러 번 맡겨도 발에 꼭 맞는 피겨화를 찾지 못해 지수는 무너진 부츠로 매번 훈련을 뛰었다.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발목 부상에 매번 물리치료로 고생하면서도 괜찮다며 웃는 홍지수. 넌 매번 뭐가 그렇게 괜찮아. 하나도 괜찮지 않으면서. 다 풀린 지수의 스케이트 끈을 단정히 매듭지어준 정한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꾹 눌러 삼켰다. 이미 부담도 압박도 많은 아이였다. 묵묵히 곁에 있어 주는 일이 제 역할이라는 사실을 정한은 알고 있었다.

 

“있잖아 정한아.”

 

 우리 부모님은 늘 최고가 돼야 한다고 하셨어. 금메달만이 가치 있다고. 좀처럼 속내를 잘 내비치지 않던 지수가 꺼낸 첫 불안이었다. 앞뒤로 흔들리는 다리. 지수가 불안할 때면 나오는 오랜 습관이었다.

 

“사실 나 안 괜찮아. 금메달을 딸 정도의 재능이 나한테는 없나 봐.”

“…….”

“그냥. 가끔 다 그만두고 싶어.”

 

 쓰게 웃는 얼굴이 안쓰러웠다. 무엇이 이토록 네게 염증을 일으킨 걸까. 주니어 데뷔도 전, 정한이 잠시 앓았던 권태를 지수도 느끼고 있을 줄은 몰랐다. 돌이켜보면 첫 만남 때부터 지수는 스케이트를 타기 싫다 했었다. 오랜 시간 앓아 잔뜩 곪았을지 모를 속을 생각하니 제가 다 아팠다. 좀 더 세심했어야 했을까. 쉬어도 된다는 말은 그에게 전혀 위로되지 않을 사실을 알아서, 정한은 작아진 지수의 어깨를 안았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초라했다.

 

 

 

 그랑프리 파이널 진출이 확정됐다. 한국 남자 싱글 역사상 두 번째 기록이었다. 고작 사흘 남짓한 대회 탓에 분위기가 살벌했다. 항상 웃으며 올라섰던 은반 위에 발을 내딛는 일이 두려워졌다. 연습 때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 시기였다. 지난 6개 그랑프리에서 순위와 포인트를 합산해 상위 6명만 초청받을 수 있는 그랑프리 시리즈의 꽃. 세계 최정상 선수들과 순위를 겨루는 만큼 수행 요소의 성패 여부 하나로도 메달 색이 바뀌었다. 사실 시니어 데뷔 동시에 파이널에 진출했다는 사실 자체로 기록적인 일이었으나, 정한은 조금 더 욕심이 났다. 최초를 그토록 열망하던 지수였다. 지수는 지난 4차 대회에서 미끄러지며 7위에 그쳤다. 최근 찾아온 깊은 슬럼프를 이겨내지 못한 영향이었다. 언제나 정한의 일을 제 일처럼 생각하던 지수가 떠올랐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상관없이 가장 먼저 나서 주던 아이. 내가 금메달을 따내면, 넌 또 네 일처럼 기뻐해 줄까. 그리고 다시 빙판에 서 줄까. 정한은 지수의 스케이팅을 사랑했다. 그의 손끝에서 하나하나 표현되는 악상은 정한을 계속 얼음 위로 이끌었다. 알고 있었다. 지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모든 당위는 지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정한이 헐렁해진 스케이트 나사를 다시 한번 조였다. 해내야만 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꾸준히 속을 썩이던 쿼드러플 러츠 연습 때였다. 분명 완벽한 축과 속도였다. 누구도 실패를 예상할 수 없었던 점프. 그러나 착지와 동시에, 꽉 조여놓았을 날이 부서졌다. 발목이 비틀리는 순간 정한은 직감했다. 다시는 얼음 위에 서지 못하겠구나.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제 스포츠 백 주변을 서성거리던 인영을 기억했다. NK 전속 아이스링크 안에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외부인은 없었다. 정한은 최근 차가워진 지수 부모님의 태도를 떠올렸다.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NK가 장학생을 뽑았던 이유는 명확했다. 이름 한 번 알리지 못하고 은퇴했던 지수의 부모는 제 아들에게 저들을 투영했다. 미련은 집착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이루지 못한 포디움의 꿈을 너는 이뤄내야 해. 금메달이 아니라면 소용없어. 입버릇처럼 내뱉어진 말을 정한은 똑똑히 기억했다. 지수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정한 역시 피겨에 흥미를 잃고 외로워하던 지수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지수를 은반 위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려 했던 도구 따위가 정상에 서는 모습은 그들의 시나리오에 없는 내용이었을 거다. 지수를 넘어선 순간부터 자신은 굴러 들어온 돌이라는 사실을 정한은 눈치채고 있었다. 

 안전요원까지 자리를 비운 빙상장 안, 돌아간 발목을 쥐고 조용히 울었다. 아직 피겨화를 벗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수와 함께 갈라쇼에 서고 싶다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을까. 

 

 

 “계속 선수 생활 이어 하시기에는 무리가 있겠는데요.”

 

 사형과도 같은 선고. 직접 의사의 판정을 듣는 일은 단순히 예상하는 것과 분명히 달랐다. 각오가 무색하게 눈물이 났다. 정한에게 비단 이번 대회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위협당하는 자신의 평범보다 걱정되는 단 한 가지가 있었다. 너와 함께 빙판 위에 서는 일이 즐겁다 이야기하던 지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제가 쓰러진다면, 지수가 홀로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당분간 절대 안정에 취하라는 의사의 언질에도 정한은 훈련에 나섰다. 은퇴 발표는 파이널 직후에 해도 되지 않을까. 다시는 발목을 쓰지 못한다 해도 이번 그랑프리 금메달을 지수의 목에 걸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정한을 미련하게 만들었다.

 지수가 무언가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정한도 느끼고 있었다. 날카로운 스케이트 날이 얼음 위를 거칠게 쓸고 지나가는 선연한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도약. 눈 감고도 뛰던 쿼드러플 토룹에서 평소답지 않게 회전축이 흔들렸다. 예상했던 바였다. 애초에 은반 위에 서는 자체가 무리인 상태였다. 덕분에 넘어지고도 태연한 얼굴을 할 수 있었다. 저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는 게 좋아서, 훈련하는 일이 즐겁다고 말하던 지수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대로 얼음 위에 몸을 누인 정한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돔 형태의 높은 천장에는 눈이 아프도록 부신 금빛이 가득 수 놓여 있었다. 네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고 싶었는데. 환한 조명을 향해 뻗은 팔이 애처로웠다. 

 

 

 

 코치의 만류에도 정한은 고집스레 그랑프리 파이널 무대에 섰다. 무모한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 그 미련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얼핏 보기에도 퉁퉁 부어오른 발목에 잔뜩 테이핑 한 상태로 수행하게 된 쇼트 프로그램. 정한은 주니어 시절에도 받아본 적 없는 점수를 받았다. 프리는 기권이었다. 똑바로 걷는 일조차 불가능했다. 선수대기실까지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웠다. 결국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주저앉았다. 발목에서부터 통증이 타고 올라왔다.

 

“윤정한!!”

 

 뒤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가장 피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지수의 무너진 얼굴은 상상만으로도 정한을 아프게 했다.

 

“미쳤어? 발목 다쳤다며. 근데 출전을 해?”

“…….”

“다시 네 발로 걷기 싫은 거였으면 말을 하지. 내가…….”

 

 지수가 울었다. 반평생이 넘도록 함께 하면서 처음 본 눈물이었다. 만 번을 넘어져도 울지 않던 홍지수가 울었다. 정한은 그제야 제 고집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정이었는지 깨달았다. 단 한 번도 꺼내 본 적 없지만, 지수도 함께 바라왔을 일. 은반 위에서 함께 연기하자는 무언의 약속을 제 손으로 산산조각 내버렸으니까.

 

 

 

 내쫓길 각오는 되어있었다. 애초에 NK와의 계약은 정한이 피겨 선수로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는 조건 하에 이루어졌으므로. 쓸모를 다한 정한이 서 있을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선택지가 정한에게 주어진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양심은 있었던 걸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비수처럼 쏟아지는 말이 정한을 날카롭게 찔렀다. 마치 정한이 모든 불행을 자초했다는 듯한 태도였다. 벼락처럼 도착했던 정빈의 연락이 떠올랐다. 다정과 걱정으로 점칠 되어있던 목소리. 집에 가고 싶었다. 화려하고 깨끗한 저택이 아닌, 크레파스 자국이 잔뜩 남아있는 촌스러운 벽지와 이가 깨진 그릇이 즐비한 자신의 좁고 아늑한 집에.

 방 한켠에 짐을 가득 쌓아두고도 선뜻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던 것은 순전히 지수 때문이었다. 정한이 다친 후, 지수는 눈에 띄게 불안정해진 모습을 보이곤 했다. 단정하던 손은 뜯긴 손톱과 거스러미로 지저분해졌고, 입술 역시 각질을 물어뜯는 바람에 피가 나기 일쑤였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정한의 방에서 함께 잠을 청하던 지수를 기억한다. 제 상처를 숨기고 싶어 하는 지수의 유일한 표현 방식이었다. 정한은 제가 곁에 없는 지수를 상상했다. 단단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한없이 여린 아이. 정한은 지수를 잘 알았다. 그의 부모님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붙어있던 두 사람이었으니, 사실 모르는 게 이상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을 잃은 채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무너지게 될 지수를. 어쩌면 모든 안정을 제게서 찾았을 그를 두고 떠날 순 없었다, 정한이 지수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의 크기가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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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겨 황제 타이틀은 지수의 것이 됐다. 얼음 위에서 죽을 사람처럼 스케이트를 타는 그를 감히 누가 이길 수 있을까. 그랑프리 파이널 이후 이어진 4대륙 선수권과 세계선수권에서 지수는 최고의 기량을 자랑했다. 금메달 두 개가 새롭게 방에 걸렸다.

 정한의 부츠 위에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 이후, 지수는 연습에 더 목을 맸다. 매일 넘어지는 바람에 파스를 달고 사는 그였다. 근처에만 가도 진동하는 알싸한 냄새가 진동했다. 바보 같은 지수는 미련하게 정한의 몫까지 제가 떠안으려 하는 게 분명했다. 한없이 착한 그 애는 정한의 부상을 모두 제 잘못으로 돌리고 있을 터였다. 내가 못나서. 내가 욕심을 부려서. 누구도 지수의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을 일임에도, 모든 화살을 제게로 돌리며 끊임없이 자신을 할퀴고 있을 속이 훤했다. 네 탓이 아니야. 아무리 말해도 지수가 들을 리 없는 이야기였다. 늘어난 멍 자국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자잘한 부상은 끊이지 않았지만, 다행히 지수의 새 시즌 준비는 순조로웠다. 완성도 높은 프리 프로그램 안무는 구성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가져올 수 있을 정도였다. 의상으로 최종 컨펌 된 연한 하늘색 상의와 새하얀 바지를 입은 지수는 눈이 부셨다. 예쁘다. 잘 어울려. 정한이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지수가 선수를 쳤다.

 

“정한아. 이제 나 훈련하는 거 봐주러 안 와도 돼.”

“뭐?”

“아니, 그냥 안 왔으면 좋겠어.”

 

 아직 발목도 다 안 나았으면서 뭐하러 무리해서 와. 그리고 내가 너 혼자 벤치에 앉아있는 거 보기 힘들어. 늘 상대와 눈을 맞추며 말하는 지수였다. 그런 그의 시선이 땅을 향해 있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할 때면 나오는 지수의 버릇 같은 것. 차갑게 뱉은 말에 저 혼자 상처받았을 지수가 눈에 보였다. 난 언제나 괜찮은데. 은반을 떠난 이후 정한은 새삼스레 지금껏 제가 피겨를 사랑했던 이유를 상기했다. 지수가 얼음 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애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던 거였다. 어떻게든 또 하나의 유대가 만들어졌다는 작은 사실 하나가. 그래서 정한은 괜찮았다. 피겨를 아꼈던 이유가 온전히 지수라, 지수가 괜찮다면 정한은 아무래도 좋았다.

 

“……알았어.”

 

 그러나 정한은 지수의 말에 순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고집을 피우길 바랐을까. 하지만 지수와 필요 없는 논쟁은 피하고 싶었다. 어릴 적 밥 먹듯 투닥거리던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의 지수는 잔뜩 금이 간 유리 같았다.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산산이 조각 나버릴 것만 같은.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를 더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선수 생활을 그만둔 정한은 곧바로 입시를 시작했다. 통념 속 평범 안에 갇히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지만,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뒤에서 은밀하게 돌고 있는 말이 있었다. 정한의 부상이 우연이 아니라는 소문. 소문이 빠른 바닥이었다. 영원한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충분히 힘든 지수였다. 끝없이 바닥으로 파고들 그의 죄책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지수는 종종 악몽을 꿨다. 제 그림자에게 잡아먹히는 꿈을 꾼다 했다. 갉아 먹히는 것 같아 무섭다고. 새벽 세 시가 넘어서 정한의 방문을 두드리곤 하던 지수였다. 최근 지수의 불면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정한은 지수가 불안했다. 얼마 전 손을 만지작거리던 지수가 떠올랐다. 정한이 깨어있는 줄도 모른 채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쏟아내던 언어들을 정한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네 자리를 뺏은 것 같다고. 계속 운동하는 게 무섭다고. 다음 날 치러진 경기에서 지수는 포디움에 서지 못했다. 문득, 계속 표현하고 있던 지수를 자신이 몰라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정한과 달리, 지수는 항상 정한과 함께 훈련하는 게 즐겁다 했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온몸으로 티를 내던 너를 나는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너도 모든 이유가 나였겠구나.

 

 정한은 사랑에 있어 대단한 드라마를 꿈꾸는 편은 아니었다. 일찍 시작한 선수 생활로 인해 철이 일찍 든 탓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낭만은 품고 살아서, 지수에게 애정을 쏟는 일에는 늘 부지런했다. 어느 때보다 금메달이 간절한 시기였다.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피겨 팬들의 관심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다. 지난 경기에서 부진한 경기를 보인 지수를 비난하는 이 또한 적지 않았다. 정한은 지수 앞에 나서지도 못할 주제에 훈련장으로 향했다. 홀로 아파할 홍지수를 두고 볼 수 없어서. 네가 행복할 수 없다면 너와 함께 아프고 싶어. 정한의 사랑이었고, 정한의 낭만이었다.

 음악에 맞춰 연기하는 지수는 아름다웠다. 전보다 자주 넘어지고, 엣지 컨트롤 역시 불안정했지만, 마치 한 마리 백조 같은 모습은 여전했다. 우아하고 고상한 지수 특유의 스케이팅이 돋보이는 안무는 가히 역작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깨끗하던 얼음 위로 지수가 그리는 궤적이 선명히 보였다. 길고, 동그랗고, 가느다란 선들. 지수를 닮은 모양이었다.

 지수는 수십 번을 연습한 뒤에야 링크를 떠났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은반 위 새겨진 선이 가지런했다. 스케이트 날이 같은 자리를 수도 없이 지나간 탓에 홈이 깊었다. 정한은 펜스를 넘었다. 오랜만에 내딛는 은반이었다. 지수가 남겨 둔 선을 따라 걸었다. 오롯한 지수의 자취가 사랑스러웠다. 발이 얼어가는 감각도 모른 채, 정한은 그렇게 한참을 얼음 위에 서 있었다.

 

 

 

 밀라노 올림픽 출전권이 달린 세계선수권. 지수는 3장의 티켓을 따냈다. 한국 남자 싱글 최초 기록이었다.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올림픽이니만큼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각종 스포츠채널에서 인터뷰가 쇄도했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지수를 섭외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세계 탑 피겨 선수. 베일에 싸인 집안. 그리고 곱상한 외모까지. 전부 이해가 가는 컨택이었다. 올림픽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며 지수는 출연을 거절했지만.

 밉보인 건 그래서였을까. 전부터 돌고 돌던 소문이 터졌다. 정한의 부상이 사실은 지수의 소행일 수도 있다는 음모론이었다. NK가 곧바로 입막음을 시도했지만, 이미 퍼질 대로 퍼진 뒤였다. 언론은 하루종일 정한과 지수에 대해 떠들어댔다. 좋은 먹잇감인 셈이었다. 정한은 잔뜩 상처받고 있을 지수가 걱정됐다. 운동에 집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게 보이는 깊은 구멍들. 텅 빈 아이스링크 위에서 쭈그려 앉은 정한은 지수의 흔적을 손으로 쓸었다. 은반이 지수마저 내치지 않기를 바랐다.

 

 

 

 기사가 퍼진 후, 저택의 분위기가 제법 살벌했다. 기사가 보도됐다는 것은 어찌 되었든 NK의 보안이 뚫렸다는 뜻이었으므로. 지수는 집안 어른들 심기를 거스를까 무서워했다. 조금만 수틀려도 화를 내던 할아버지와 금메달만을 강요하던 부모님 사이에서 자라 늘 눈치를 봐야 했던 과거가 체화된 탓이었다.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정한을 제외한 누구도 지수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지수는 언제나 발소리를 줄였다. 훈련에서 돌아오면서까지.

 차라리 티를 냈어야 했다고 정한은 생각했다. 지수는 기사가 거짓이라 여겼다. 제 부모가 정한을 일부러 다치게 하지는 않았을 거라 믿고 싶었을 지수를 정한은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 그래서, 그 기자 누군지 알아냈어?”

 

 대체 어떤 기자가 NK를 상대로 허위기사를 썼을지, 정한도 호기심이 동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랬으면 안 됐는데. 대화 주제를 듣자마자 지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어야 했다. 지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말들은 지수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못 됐다.

 

“그러게 차라리 교통사고 내자고 했잖아. 걔가 기자한테 꼰질렀을 지 어떻게 알아? 어린 것이 영악해서는 눈치는 더럽게 빠르던데!”

“회장님께서 그랬다가 애 죽으면 일 커진다고 막으셨던 건 기억 안 나? 조립 풀어두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어.”

“……기자한테 돈 제대로 먹였지? 해명문은 준비됐대?”

“어. 세팅 완벽해. 기자한테 돈 좀 먹였으니 일단 더 날뛰지는 못할 거야.”

“그럼 됐어. 우리 지수 올림픽 때까지는 처신 잘해야 하는 거 알지? 난 지수가 금메달 못 따면 죽어버릴 거야.”

 

 설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거짓말이야. 지수의 얼굴에 순간 스치는 절망을 읽은 정한은 문득 두려워졌다. 지수의 팔목을 잡은 채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대리석과 슬리퍼 밑창이 맞닿는 소리가 났다. 

 

 

“윤정한.”

 

방문이 닫히자마자 지수는 정한의 손을 뿌리쳤다. 빨갛게 부어있는 손목이 안쓰러워 다가섰을 때, 지수는 뒷걸음질 쳤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함께 했음에도 처음 보는 지수의 모습이었다. 분하고, 억울하고, 서러운. 어떤 비참한 감정의 응집체. 지수가 느끼고 있을 참담한 기분이 정한에게까지 닿았다.

 

“…….”

“…….”

 

 긴 침묵이 이어졌다. 다듬어지지 못한 모난 말이 너를 향할까, 누구도 먼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왜 말 안 했어?”

“지수야.”

“진짜 우리 부모님이 그랬어?”

“…….”

“말해봐. 진짜 우리 부모님이 그랬냐고.”

 

 이미 모든 사실을 눈치챈 그의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정한은 차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나 올림픽 안 나갈 거야.”

“뭐?”

“이게 다 무슨 소용인데? 다 네가 받아야 할 메달이었어. 나 피겨 안 해.”

“야, 홍지수.”

“올림픽 나가서 메달 따면? 그게 의미가 있어?”

“그래도 나가. 난 네가 올림픽 나가는 거 보고 싶어. 가. 가서 금메달 따 와.”

“……넌 속도 없지.”

 

 지수가 정한을 째렸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알았니. 지수의 뒷모습을 정한이 처음 본 날이었다.

 

 

 

 지수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사흘이었다. 지수의 잦은 악몽 이후 함께 방을 쓴 뒤로, 이렇게 홀로 남겨진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사실 지수는 그럼에도 연습을 게을리하지는 못해서, 훈련장 의자에서 쪽잠이나 자고 있을 터였다. 지수의 방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 온 지수가 그 풍파를 잘 견뎌낼 수 있을까. 끓어오르는 감정과는 별개로 지수가 보고 싶었다. 밥은 잘 먹고 있을지. 연습하다 어딘가를 다치지는 않았을지. 지수는 피겨 선수로서 최고의 조건을 타고난 몸이었지만, 그래서 더 불안했다. 얇은 뼈대. 그리고 그만큼 얇은 발목은 쉽게 망가지곤 했다.

 

 

 

 지수는 얼음 위에 죽은 듯 누워있었다. 넓은 은반 위에 누운 지수는 마치 얇은 선처럼 보였다. 정한은 습관처럼 지수가 잔뜩 그려놓은 곡선을 따라 걸었다. 지수에게 도착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감겨있던 눈꺼풀이 떠지는 순간이 슬로우 모션 처럼 지나갔다. 고작 며칠 보지 못했다고 이 고운 얼굴이 그토록 보고 싶었는지. 절망에 지쳐있던 지수를 보며 문득 차올랐던 실망이 씻긴 듯 내려갔다. 역시, 정한은 지수라면 전부 괜찮았다. 날이 그려놓은 궤적 위를 따라 걷는 일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라 해도, 제 앞에 있는 이가 지수라면 정말 다. 지수는 그렇지 않아 보였지만.

 

“……울어?”

 

 정한과 지수는 달랐다. 정한이 괜찮다고 해서 지수도 괜찮은 게 아니라는 걸 바보같이 잊고 살았다. 착해빠진 너는 또 내 날개를 네가 꺾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죄스러움이 휘몰아쳤다. 난 늘 널 자신해놓고, 매번 가장 중요한 걸 놓치는 것 같아.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지수에 정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수는 누구에게든 우는 모습을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애였다. 내 은퇴 경기 때 보인 눈물이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결국 언제나 널 울리는 건 나구나. 내가 미안해. 울지마 지수야. 두서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이제는 말해야 할 때였다.

 

“네 잘못 아니야. 왜 네가 하지도 않은 잘못으로 혼자 그렇게 앓아.”

“야.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 아니……!”

“애초에 난 피겨 같은 거 안 해도 됐었어. 너희 기업 아니었으면 시작도 못 했을 거고. 오히려 빛을 보게 해 준 건 너잖아. 그리고,”

 

 내가 얼음 위에서 계속 버텼던 이유는 처음부터 너였어. 하얀 옷을 입고 빙판 위를 누비는 지수를 처음 본 날을 정한은 잊지 못했다. 천사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싶었던 순간을.

 

“그래서 난 네가 올림픽에 갔으면 좋겠어.”

 

 메달 색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모두가 지켜보는 그 무대 위에서 네가 보란 듯이 해냈으면 좋겠어,

 이토록 깊은 애정이 또 있을까. 흘러넘치는 마음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문득 참을 수 없어졌다. 어떻게든 사랑을 꺼내고 싶은 기분. 입술이 맞닿는 것은 순간이었다. 차가운 지수의 체온과 달리 입술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모두 다 괜찮다 여겨질 만큼.

 

 

 

우리 겨울에 가자.

그곳에서 같이 살자.

우리가 사랑하는 얼음 위에 가만히 누워 하늘의 별을 세자.

그렇게 살자.

 

밀라노에 다녀와서 그렇게 살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