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궤도
#우주SF #혁명물 #로맨스 #청게 #캠게 #BADCLUE #센티넬버스 #판타지 #네트워크수산 #새드 #HEAVEN #동화 #인외 #미확인장르 #아포칼립스 #스포츠 #운동권 #퇴마물 #리얼물 #종교 #환생 #공전궤도


여름이 온다

익명D

대지 1+여름이 온다.jpg

 

 

 

 

 

 

 

 

 

 

 

여름이 오면 그 애 생각이 난다. 그림자마저 햇살보다 따뜻한 아이였다.

 

 

 

 

 

1.

 

그 날 윤정한은 중간고사가 끝나고 일찍 귀가한 뒤 낮잠을 잤다. 피시방에 가자는 놈도 있었고 일단 한강으로 달리자며 양손에 떡볶이 전단지를 들고 달려드는 놈도 있었다. 하여간 다 귀찮았다. 와중에 멀리서 쳐다보는 홍지수의 시선은 어찌나 애잔한지. 불러주는 건 고맙지만 전날 밤을 지새운 탓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머리를 붙잡고 냅다 집으로 돌아왔다. 빠른 걸음으로 한참을 걸었더니 발목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부모님은 휴가중이다. 철없고 여린 아들을 홀로 두고 포루투갈로 떠났다. 시험따위 될대로 되라지 라고 생각하기에 윤정한은 꽤나 버젓한 청소년이었다. 공부는 했다. 잘했다고는 못하겠다. 

 

푹자고 일어난 뒤의 늘어지는 기운과 피곤이 사라진 눈가와 아무 생각 없는 뇌가 서로 다른 춤을 추고 있어 그냥 계속 누워있었다. 사실 시야 가장자리에 무언가 신경쓰이는 것이 있어 아직 꿈을 꾸고 있나 생각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집에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건 삼 년 전에 집을 나간 삼촌 뿐이다. 이십대에 탈모와 우울증까지 와서 이 집에 기생하다 갑자기 사라졌다. 가족들 중 아무도 삼촌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윤정한 역시 마찬가지다. 버려지는 것보다 잊혀지는 것이 더 외롭고 슬프다는 걸 어린 나이에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것보다 방안에 있는 저것은 무엇일까. 몸을 일으켜 마주하자 하얀 전신이 움찔거렸다. 수첩 같은 것을 뒤적이던 손이 멈추고 어쩌다 마주친 눈동자가 울렁거린다. 혹시 당신,

 

"도둑이세요?"

"아니요."

"그럼 왜 그렇게 긴장해요."

"제가 보이세요?"

"보이니까 말을 걸지."

"말이 금방 짧아지는 편이신가 봐요."

"불편해요?"

"아뇨 됐어요."

 

남자는 괜히 입맛을 한번 쩝 소리나게 다시고는 윤정한이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돌아 앉았다. 결혼식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같다. 양말까지 하얀색이다. 의복 아니고서 어디서 저런 전신 하얀 정장을 찾아낸단 말인가. 하얀 넥타이? 전혀 아니다.

 

"믿으셔도 되고 안 믿으셔도 되는데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어디서 오셨는데요."

 

검지를 들어 허공을 가리킨다. 천장에서 떨어졌어요? 그보다 높은 곳이요. 옥상? 미쳤어요? 지금 누가 미쳤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래서 어디서 나오셨는데요.

 

“일단 소개를 드리자면 저는 하늘에서 온 천사구요. 부승관이라고 합니다.”

 

거창한 인생 고백인 줄 알았다가 잠기운이 확 깼다. 이거 미친 놈 아냐. 어리버리한 채로 건네주는 명함을 받긴 했는데 슬쩍 읽어보려는 찰나 다시 빼앗겼다. 아 마지막이라서 다음에 드릴게. 좀 이따 거래처 가야해서.

 

“천사 이름이 어떻게 부승관이 돼요.”

“가브리엘 라파엘 이런 거 다 현지화 해서 인간들이 알아듣기 쉽게 만든 거에요. 저도 진짜 부승관 아닌데 그 소통의 맥락? 에서 그냥 그렇게 부르시면 돼요.”

“아 뭐라는 거야.”

“여튼 그쪽한테 할 말이 있는데.”

“네 뭔데요.”

"사실 이주전에 그쪽이 죽었어요. 근데 일이 좀 잘못 돼서 못 죽으셨어요."

"...네."

"그래서 지금이라도 죽으셔야 해서 데리러 온 거죠."

 

적어도 이럴 때 사람 마음이 조각나지 않게 배려하는 것이 천사다움 아니었을까. 천사에 대한 관념이 와장창 무너짐과 동시에 현실과의 접점을 찾기 위해 급했던 윤정한은 아무렇게나 손을 뻗어 무언가를 쥐었다. 그게 하필이면 지난 달 홍지수에게서 받은 편지일 줄이야. 

 

“어차피 못 죽은 거 그냥 살면 안될까요. 언젠가는 뭐 최소한 늙어 죽긴 할 거 잖아요.”

“그래도 침착하시네요.”

“말그대로 언젠가는 죽잖아요.”

 

천사 부승관은 손톱을 물어 뜯기 시작했다. 한참 공들여 고친 버릇이 다시 재발한 건 이 사단을 낸 현장직 신입 최한솔 덕분이다. 우유부단한 건 묻어두더라도 지난 반세기 유입인구가 현저히 낮아 비상이 걸린 마당에 못 데려왔다고 보고는 해야 쓸 것 아닌가. 비참하지만 문제해결사 부승관이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최한솔은 다행히 파면을 면했다. 심각성도 모르고 곰젤리 주워먹고 있길래 목 메이지 말라고 우유 한 잔 부어주고 왔다.

 

“근데 저 어쩌다 죽었어요?”

 

우유에 젤리 말아먹고 있을 최한솔은 윤정한을 데려오지 않았다. 심지어 죽음의 순간에서 그를 구해냈다. 멀리서 매미가 울었다. 이렇게 일찍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여름의 짜릿한 더위도 모른 채 생을 마감하겠지. 지금 눈 앞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묻는 남자 윤정한도 여름을 요구하고 있다.

 

“알아서 뭐하게요.”

“뭐하다 죽었길래 자꾸 질질 끌어요. 막 나도 모르는 악마가 튀어나와서 은행이라도 털었어요? 천사가 온거면 착한 일 하다 죽은 거 아닌가.”

“뽀뽀하다가요.”

 

주마등처럼 누군가의 웃는 얼굴이 만화경처럼 눈 앞을 지나쳤다.

 

“당신 뽀뽀하다 죽었다구요.”

 

여름이 오기에는 아직 더딘 계절이었다.

 

 

 

 

 

2.

 

고백을 받았다. 홍지수는 비오는 날 옥상으로 사람을 불어내는 미친 짓을 일차로 성스러운 얼굴 더럽히며 눈물 콧물 질질 짜면서 좋아한다 나즉한 삼창으로 빗속에서 이차 불잔치를 벌였다. 그때 윤정한의 정신세계는 뒷산에 꽂히는 번개와 함께 아작났다.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내자식 사이에 알고 지내기로는 십 년 남짓. 어릴 적 미국에서 생활한 탓에 중학생이 되어서도 여차하면 맞춤법 틀려 놀림 받는 꼬라지까지 들킨 주제에 좋아한다고 하면 냅다 받아줄 줄 알았는지 일단 멈춤 지시를 하고 뒷걸음 치는 윤정한을 두고 홍지수의 눈물이 뚝 그쳤다. 

 

울면 먹힐 줄 알았냐.

 

와중에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길래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 따귀 맞을 뻔 했다. 조금전과는 인격이 달라진 사람처럼 정색을 하고 삐딱하게 선 홍지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넘어가 주면 안돼?

내가 왜.

 

잠시 정적이 오갔다. 누군가 먼저 털어놔야 했다.

 

너답지 않다 지수야.

알아.

 

비맞으면 눈물을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건 홍지수 답지 않았다. 벌게진 눈가가 뻔히 보이는데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슬쩍 훔친다. 윤정한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이제와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맥도날드에서 제로콜라 쪽쪽 빨며 시덥잖은 이야기로 노가리 까던 홍지수가 맞나 싶었다. 내 콜라 빠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었나. 도통 이해는 되지 않지만 울고 있는 친구를 달래줘야겠다는 생각은 앞서 들었다. 다만 지금은,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평야와 같은 일 미터가 광활하다.

 

그게 이주전의 일이다.

 

 

 

 

 

3.

 

자초지종을 묻는 윤정한에게 한 시간 가량 수다를 떨어준 부승관은 겨우 물 한 잔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단 잘못한 건 공무수행에 충실하지 못했던 천상계에 책임이 있다 할 수 있다. 는 것이 서론이었다. 여차저차해서 살아남았지만 순리대로 천국에 가셔야 하니 괜한 트집은 잡지 말아달라는 투정으로 들렸다. 

 

신입 딱지 떼고도 한참동안 - 한 삼천년 정도 밖에 안 했다고 한다 - 행정업무를 보며 실내근무를 하던 천사 최한솔이 처음 맞닥뜨린 현장과제는 윤정한의 영혼을 수거하는 일이었다. 일손 부족으로 급하게 사지 멀쩡하게 체력 좋으면 다 괜찮다고 했더니 어딘지 말이 통하는 듯 안 통하는 엉뚱한 녀석이 나타났을 때 사수 부승관은 찜찜한 불안감에 휩싸였었다. 하필 자리를 비운 사이 최한솔이 출동했고 아직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에 대한 관념을 숙지하지 못한 그는 윤정한이 ‘죽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천사가 그렇게 생각하면 안 죽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저흰 말단이에요… 하여튼 들어봐요.”

 

잠시 피곤한 표정을 지은 부승관이 이야기를 이었다. 목격자 최한솔의 증언에 따르면 윤정한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비를 맞고 학교 옥상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기다렸다고 한다. 아직 날씨 추운데 비맞고 죽다니 불쌍하다. 그런 생각도 했다고 한다. 기다리기 지루해서 퍼즐게임도 조금 하고 밀린 피드도 좀 읽다가 고개를 드니 오늘의 사망자 윤정한이 뽀뽀를 하고 있더란다. 함께 서 있던 남자와.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도 참고 별별 노력을 다 하는 사이 그 순간은 왔다. 뒷걸음질 치던 윤정한이 옥상에서 추락했다. 아니, 그건 누군가의 고의였을까. 추락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최한솔은 윤정한을 구했다. 의식을 잃기 전 그를 끌어당겨 인적드문 뒷산 어딘가에 데려가 생기를 불어넣고 숨이 트이는 것을 확인한 즉시 서류를 뒤적여 그의 집, 정확히는 그의 방 침대에 올려놓고 돌아갔다고 한다.

 

“어이 없으시죠.”

“아무래도 그렇죠.”

“근데 지킬 건 지켜야 해서요.”

“제가 죽는다는 건 누가 정했어요?”

 

천사는 조용히 검지를 들어 허공 위를 가리켰다. 그래, 윗집 아저씨도 아니고 옥상 풀때기도 아닌 하염없이 높으신 분이 정했겠지. 좋은 분인 줄 알았는데. 아 순리대로 라고 했던가. 

 

이대로 순순히 따라가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꿈을 꾸는 기분이지만 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걸어볼 만 했다.

 

“일주일만 시간 주세요.”

“다들 그렇게 말씀하세요.”

“그럼 한 달 줘요.”

 

거 되게 뻔뻔하시네요. 부승관은 열었던 입을 다시 닫았다. 이번에는 어떻게 끌고가야하나 골치가 아프려는 차에 전화가 울렸다. 최한솔이었다. 업무통화 외에는 내선 쓰지 말라고 잔소리 하려는데 일 얘기란다. 인사팀에서 연락이 어쩌고 전출이 어쩌고 하는 횡설수설을 한참 듣다가 알았어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인간들은 될 놈은 된다고 한다더라. 부승관은 윤정한에게 시간을 허락했다.

 

 

 

 

 

4.

 

생일을 이유로 윤정한은 어렸을 적부터 자신이 천사라고 뻥을 치고 다녔었다. 놀랍게도 그게 먹힌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는데 홍지수는 남달랐다. 첫만남에 천사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펄쩍 뛰며 달려들었다. 단지 천사를 만나서 반갑다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하나님 만나봤냐는 질문만 빼고 천국과 천사에 관한 상식을 끊임없이 질문해왔다. 아직 하늘나라와는 거리가 먼 초등학생이었다. 몸이 멀고 마음이 멀었다. 천사란 건 예쁜 무언가라는 인식 뿐이었다. 그런데 홍지수는 윤정한을 특별하게 생각했다. 천사니까.

 

홍지수는 간혹 예상치 못한 순간에 윤정한의 등을 쓸곤 했다. 왜 날개라도 있을 까봐? 툭 던진 말에 스매쉬가 날아온다. 아니, 없을 까봐. 또 뜻 모를 소리한다 라며 무시했다. 똑똑하고 재주 잘 부리는 윤정한은 괴짜 소리를 듣곤 했지만 홍지수는 못 이겼다. 남의 도시락 반찬을 빼앗아 먹는 게 윤정한이라면 그 뺏어온 반찬을 가로채 먹은 뒤 반찬 주인 찾아가서 뻔뻔하게 맛을 평하는 게 홍지수였다. 영문을 모르는 반친구를 두고 윤정힌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저거 완전 또라이 아냐. 서로 만만치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미움 받지 않는 것 또한 서로 비슷했다.

 

어쩌다 천국에서 내려왔어?

 

지난 여름 홍지수가 물었다. 그때 무어라 대답했던가.

 

일을 많이 시켜서.

 

홍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가 공부를 게을리 하는 구나. 윤정한은 꽤 성실한 학생이었다. 딱 우등생이 되기 직전까지만 노력하는 편일 뿐이었다. 그러한 윤정한에게 홍지수가 끌렸다고 한다면, 이제와서? 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연애를 하는 꼴을 본 적도 없고 말그대로 성자와 같은 포지션을 획득한 홍지수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다정했다. 윤정한에게도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끌림이 없었냐고 한다면 또 묘한 거짓말이 된다.

 

그날과 같은 옥상이다. 홍지수는 교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아직 봄이건만 셔츠가 더워보였다. 허리춤 만할 때부터 본 사이인데 홍지수는 하나도 안 변했다. 늘 윤정한의 곁에 있어주는 사람, 그대로였다. 그런 그에게서 고백을 받은 날, 그리고 편지를 받았던 날. 편지에는 무엇이라 적혀있었던가. 알 수 없는 영어로 가득한 글귀에 읽을 염두도 내지 못했다. 홍지수만의 숨김이다. 숨기고 싶은 이야기는 영어로 한다. 그걸 두고 윤정한이 늘 무시라는 배려로 응대한다는 걸 그도 알기에 또 어리광을 부린 것일 터였다.

 

꼬깃꼬깃 접힌 편지는 아직 윤정한의 바짓주머니에 들어있다. 다시 빛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빨리 왔네."

"네가 부르는데 얼른 와야지."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 홍지수의 손이 윤정한을 향하다 멈췄다.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쫓지 않기로 했다. 그 날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윤정한은 나름 노력했다. 하지만 도저히 홍지수와 뽀뽀했다는 과거의 날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죽음을 맞을 뻔 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동화로만 느껴진다. 수면부족으로 도둑을 천사로 착각했거나 본명이 부승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침입자에게 그냥 이래저래 당했다거나. 어찌되었던 간에 확실한 건 홍지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이주만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아해. 가지 마.

 

불안이었다. 윤정한은 그렇게 믿었다. 사랑같은 걸 하는 게 아니다. 어릴적부터 이어진 인연이 어른이 되어 깨어질까봐, 저 홍지수가 불안한 거다. 그것만은 채워줄 자신이 있었다. 이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까지 챙겨줄 자신은 없지만 그를 떠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나 아무데도 안 가. 아니 갈 수도 있는데 꼭 다시 만날 수 있어."

"그게 무슨 위로야."

"위로 아냐.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

 

울적한 눈망울. 저런 거 보자고 부른 거 아니었다. 어쩌다 홍지수가 저렇게 되었단 말인가. 내탓이다.

 

"그냥 네가 불안한 거 같아서, 아니면 미안해."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너무도 작았던 품이 이제는 한가득 들어찬다. 지수야, 너도 어른이 되나보다. 나는 네가 어른이 되어도 곁에 있을 수 없겠네. 할아버지 되어서 만나도 난 아직 어리니까 그 땐 맘껏 어리광부릴게. 

 

"아무데도 가지 마."

"안 가."

"거짓말."

"너랑 뽀뽀는 해도 도망은 안 가."

 

키득거리는 걸 보니 기분은 나쁘지 않은 가 보다. 

 

"기억하고 있었어?"

 

아니, 기억 안나.

 

"너 내가 다가가니까 계속 뒷걸음질 쳐서 내가 잡아먹는 건 줄 알았어."

"그거 기정사실 아니냐. 지수야 말은 똑바로."

"아냐, 결국엔 네가 먼저 했잖아."

 

그래, 그랬었지.

 

홍지수가 날 좋아할 리는 없지만, 난 말이야 지수야. 네가 너무 좋거든. 미치도록 좋아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줄도 몰랐어. 근데 죽었대. 그래도 너랑 뽀뽀라도 했다니 다행이다. 넌 혹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느 날 사라져버릴 걸. 그래서 날 위해 말하고 다가와 준거니. 정말 홍지수 답다. 그래서 네가 좋아 지수야.

 

"응."

"뭐가 응이야."

"좋아서."

 

네 냄새. 오늘이 마지막일런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내일 만나면 한 번 더 네 향을 맡게 해줘. 날개는 돋지 않을 테지만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 날이 기다리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최대한 많이 너를 내게 남겨두고 떠나고 싶어.

 

 

 

 

 

5.

 

홍지수는 다음 날 인사도 없이 전학을 갔다.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없는 번호였다.

 

 

 

 

 

6. 

 

"월급 많이 나와요?"

"나오긴 합니다. 네. 나와요."

"많이 힘드신가 보네."

 

네. 대답할 여력이 남지 않아 대충 대꾸를 던졌다.

 

묵묵히 죽음을 맞이하기로 결심을 마친 윤정한은 포지션 제안을 받았다. 파트타임 천사직이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지려다 그럼 안 죽어요? 한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고장한 인형처럼 아래위로 흔드는 부승관을 보고 허탈감에 주저 앉았다. 윤정한을 처음 찾아왔던 날 최한솔의 전화는 의외의 내용이었다. 인사팀에서 윤정한을 원한다는 것이다. 안그래도 천국 인구 감소율이 치명적인 탓에 공무를 위해 채용할 사람도 부족한 마당에 차라리 괜찮은 인재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연장시켜주는 조건으로 임시직을 제안하는 대안을 실험해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간택된 운 좋은 인간 중 하나가 윤정한이었다. 

 

"그럼 저 뭐 게약서 써요?"

"이미 받았다는데.”

“아닌데.”

"주머니에 뭐 있잖아요. 꺼내봐요."

 

볼펜으로 허공을 콕콕 찌르는 방향을 따라가보니 자신의 바짓주머니를 가리키고 있다. 손을 넣어 꺼낸 것은 홍지수에게서 받았던 편지였다. 영어로 그득한 그 징그런 종잇조각을 꺼내들자 획 채간다.

 

"아니 무슨 공문서를 이렇게 꼬깃꼬깃 접고 다녀요."

 

사인 하세요. 아니면 죽든가. 천사의 말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여기 도장 찍고 나면 윤정한도 절반은 천사인 셈이었다. 천사가 학교 지각하고 그러면 안되겠지. 갑작스런 사명감과 부담을 느끼면서 건네받은 볼펜으로 자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적어냈다. 

 

"그거 막 마법이에요?"

"뭐가요."

"왜 갑자기 그냥 종이가 막 그런 천사 언어가 돼요?"

"대체 당신 뭐라는 거죠."

"아, 아니에요."

 

일이 진짜 많은가 보네. 부승관은 만날 때마다 예민하고 피곤해보였다. 한 예민 피곤 소리를 듣는 윤정한도 이제는 귀찮아서 말을 아낄 때가 되었는데 자꾸만 입단속이 안 됐다. 나도 저렇게 고단하게 살게 되려나. 그래서 월급 얼마 주는거야.

 

"이거 나중에 시간될 때 읽어보세요. 뭐 날개가 생기는지 하늘 날 수 있는지, 사람 마음 읽히는지 뭐 그런 '자주 묻는 질문' 모아 놓은 매뉴얼 안에 들어있어요. 당장 뭘 해야하는 건 아니니까 준비되면 연수 받으러 오시면 되고 우리 쪽에서 사람, 그러니까 사수가 나갈 거에요.”

“그 분도 이름이 한국형이에요?”

"... 그냥 조슈아라고 부르면 될 거에요. 한국 이름 알려드려요?"

"아 조슈아 선밴님."

"부장님이에요."

"부장님이 사수를 해요?"

"그냥 마실 나오는 거 좋아하시거든요."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아메리카노를 쭈욱 들이킨 부승관이 영차 하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꽤나 돌아다닌 모양이다. 새하얀 양말이었을 것이 오늘은 바닥에 조금 때가 묻어있다. 그렇게 많이 죽나. 근데 인구부족이라니, 저쪽도 일 장난 아니게 꼬였나 보다.

 

"언제쯤 만날 수 있나요."

 

조슈아 선밴님 제가 진짜 잘 할 게요. 윤정한은 속으로 다짐했다. 전신 화이트로 꾸미고 다니든 천사가 되면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린 봄날 소년 나의 홍지수를. 초능력 달고 널 찾아가면 나의 동화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될 수 있을까. 왜 먼저 떠났는지는 묻지 않을 생각이다. 그저 그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저가 이렇게 순애보였다니 놀랍기 그지 없다. 그날 먼저 입을 맞춘 것이 자신이라는 말을 의심하지 않은 건, 그만큼 아직도 너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정한은 기다렸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7.

 

최한솔은 홍지수에게 물었다. 그 사람 사랑해요? 홍지수는 대답했다. 글쎄.

 

구름점이 흘러갔다. 최한솔은 숨을 들이쉬고 물었다. 

 

왜 그 사람을 살려줬어요? 

 

홍지수는 대답했다. 난 천사니까. 착한일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