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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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612

BERET

대지 1+BERET.jpg

 

 

 

"이 행성이 무엇을 중심으로 돌아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내 인생은 널 중심으로 돌아갔던 것 같아"

"...힘들었겠다"

"행복했어, 누구보다"

 

 

 

 

먼 미래와 더 먼 미래

 

그 미래들에서 일어난 이야기

 

 

세상은 변했다.

 

우리가 눈을 깜빡이는 작은 순간에.

 

 

 

 

B-612

w. BERET

 

 

 

 

카운트다운 시작하겠습니다

 

10

 

"예쁘겠지?"

 

9

 

"뭐가?"

 

8

 

"우주 말이야"

 

7

 

"응, 예쁘겠지"

 

6

 

"그게 다야?"

 

5

 

"...당~연히 아니지"

 

4

 

"얼른 말해봐ㅋㅋ"

 

3

 

"우주는 예쁠 거야"

2

 

"그리고?"

 

1

 

"그리고-"

 

반짝이겠지, 슈아 너처럼ㅎㅎ

 

 

 

 

근데···

"이렇게 우주의 별과 너만 반짝이는 건 내 계획에 없었어. 맹세해"

 "그래 정한아. 근데 기왕이면 저기 불타고 있는 로켓도 반짝이는 것에 포함시키는 건 어때?"

 

 

표류되었다.

우주에서.

그것도 모르는 행성에.

 

 

 

 

 

처음부터 뒤틀린 이야기였다.

사고가 났고, 죽었어야 했고, 죽지 않았다.

아 물론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우주여행, 그깟 게 뭐라고 우리의 생을 갖다 바쳤는지.

그 시간에 슈아랑 섹-

"제발 좀 닥쳐 정한아"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 그래. 맞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래.

눈 떠보니 너무 멀쩡하게 살아있었고, 본래 목적지는 아니라는 듯 푸석한 땅이 밟혔다. 일단 화성은 아니네...

 

 

-

 

 

 성공적으로 발사되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정직하게 쓰이고 발음된 기계음을 끝으로 적막이 이어졌다. 떨림과 설렘이 섞여 만들어진 짧은 적막. 그 끝에 우리는 누구보다 밝게 웃으며 포옹을 했다.

 끝의 끝에 추락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 과거였지만...

 

 "역시 사기꾼이었던 거야"

 "그래 보이진 않던걸..."

 

 어? 정한아, 이거 봐봐. 웅크리고 앉은 슈아의 뒷모습을 보고 귀엽다... 정한아? 어어 뭔데? 서둘러 달려간 곳에는 피지 못한 꽃봉오리가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장미인가? 그런 것 같은데. 이상하다. 화성 외 행성에는 생명체가 살 수 없을 텐데. 시대가 변해도 불변한 사실 중에 하나일 터였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슈지야, 만약 여기 공기가 있다면 어떡할래?"

 "뭐라고?"

 

 터무니없는 말이긴 했지만 신빙성이 없지는 않잖아. 있는 재능 다 끌어모아 했던 일 중에 하나가 플로리스트였다. 쟤도 모르진 않을 텐데, 아무래도 위험성 때문이겠구나. 눈앞에 있는 꽃봉오리는 장미가 맞았다. 피어난다면 예쁜 담홍색을 띨 붉은 장미의 꽃봉오리. 햇볕이 잘 드는 비옥한 사양토에서 잘 자라는... 일단 우리가 아는 우주에선 자라지 못했을 텐데.

 

 "우리 씨앗.. 가지고 왔었나?"

 

 답답한 우주복을 당장 벗어보고 싶었지만 바로 옆 애인의 눈이 넌 걱정되면서도 역시 또라이구나 라고 말하고 있기에 실험을 먼저 해보기로 했다. 물도 없고 햇빛도 없고, 하다못해 크지도 않은 이 행성이 어떻게 장미를 키워냈는지를.

 

 

 결과는?

 당연히 실패...일 줄 알았다.

 

 "왜 자랐지?"

 

 바오밥나무의 씨앗을 심었다. 일부러 장미와 다른 환경에서 자라는 바오밥나무를. -사실 생고집 좀 부린 거지만- 화성에서의 여행이 좋았다면 그대로 살아갈 생각까지 해서 챙긴 씨앗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산소가 있을 확률은? 모른다 둘 다 이과가 아니라서. 하지만 상반된 두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곳이라면...

 

 "확률이 없지는 않겠네"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 내려지지 않은 심증으론 확신하지 못하는 지구인이라 며칠 더 지켜보기로 했다. 슬슬 우주복을 입고서 텐트에 사는 것도 지겨워만 졌으니까.

 

 "정말 괜찮을까?"

 

 애초에 공복이 안 느껴지는 것부터 이상하긴 했지만.

 이상한 행성. 공복도, 갈증도 느껴지지 않고, 모든 식물이 자라날 수 있고, 조금만 걸으면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그런 행성이 정말 존재하는 거였나?

 

 애당초 우주복에 남은 산소도 떨어져가긴 했지만... 정말 그런 행성이 존재하는 거였고, 그 행성을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거라면?

 

 "뭐야아... 우리 살 수 있어..?"

 

 슈아가 울 줄 알았는데 내가 울었다. 난 산소가 부족해도 울 수 있는 놈이었구나. 정한아? 왜 울어? 아 쪽팔려.. 와중에 슈아 너는 왜 같이 우는 건데..? 남들이 본다면 미친 남정네 둘이라며 혀를 차고 갈 장면이었지만 그마저도 없으니 그만 울 명분도 없었다. 그래, 시대가 변했지. 인간이 찾아내지 못한 '산소를 가지고 있는 행성'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 도박이지만 공기가 있든 없든 일단 이대로 우주복을 계속 입고 있다면 얼마 못가 죽을 것이 뻔했다. 되도 않는 희망 한번 걸어보겠다는 거다.

 

 "너 지금 뭐해 정한아?"

 

 한숨 한번 쉬고 우주복을 벗기 위해 꼼지락거리는 걸 지수가 붙들었다. 슈아야, 우리 이대로 있으면 죽어. 두려워하는 눈동자와 붉은 눈가에 초점을 두었다. 무섭구나, 와중에도 나를 걱정해 주네. 뻘생각 한번 해주고, 다음 생애도 슈아랑 같이 살게 해주세요. 소원 한번 빌고, 정한아! 숨을 쉴 수 있어! 마지막일지 모르는 슈아 목소리를... 뭐라고?

 

 "슈아야 너 지금···"

 "정한아 너도 벗어봐!"

 

 아 아니 슈아야 내가 벗을 수··· 숨이 쉬어지네..? 당황의 연속이라 넋이 나간 채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숨을 쉴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나. 나올 눈물도 없어서 서로 껴안기만 했다. 장장 일주일 동안의 심리적인 공포가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슈아와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

 

 

[ 표류 일기 ]

작성자 : 조슈아 지수 홍

표류된 행성에 대한 기록.

산소가 존재하고, 물과 먹거리는 없지만 갈증과 공복이 느껴지지 않으며, 몇 걸음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작은 행성. 석양이 지는 것을 보니 해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듯하다. 달처럼 구멍들이 있는데, 그중 유독 큰 구멍 세 개 중 하나는 따뜻한 바람이 나온다.

 

 

"왜 일기야?"

"으음 일지는 소소한 걸 적기가 좀 그래서~"

 

 

D+7

앞으로 얼마나 이 행성에 고립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재빨리 챙겨놓은 짐들을 정리했다.

아직까진 이부자리가 썩 편하지는 않지만 금방 익숙해질 듯하다.

장미는 언제쯤 필까?

 

 

D+8

심어 두었던 바오밥나무의 씨앗과 새싹들을 뽑아냈다.

이 작은 행성이 얼마나 뛰어난 생명력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두다간 금방 행성을 덮어버릴 게 뻔했으니.

*다 뽑아보니 원래 심어뒀던 씨앗보다 양이 많은 것 같다. 원래 이 행성에 존재했던 걸까?

 

 

D+17

서서히 이 행성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별 볼일 없는 행성 같았는데, 가끔 출출한 것 빼고는 공복도 느껴지지 않는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듯하지만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장미는 아직 잎을 피워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간단한 꽃과 농작물을 심고, 그것들이 자라나는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특이한 장미인 것 같다. 언젠간 피어나겠지?

오늘따라 노을이 예쁘게 진다. 이 행성의 장점인 것 같다.

 

 

D+18

아침 산책으로 행성 한 바퀴를 돌던 도중 정한이가 소리를 질러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알고 보니 눈을 떴는데 내가 없어져 사라진 줄 알았다고...

이젠 이 행성에 조금 익숙해져 여우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별도의 문제가 없어 자주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기로 했다.

*정한이의 고집도 있었지만

 

 

D+20

별들과 우주 쓰레기만 떠다니던 풍경에 이 행성과 비슷한 크기의 행성들이 추가되었다.

하나는 아닌데, 저 행성들에 새로운 생명체가 있을까?

조금 궁금해졌다.

오늘 준비를 하고 내일 출발하기로 했는데, 큰일이 없기를 빈다.

*별도 행성 탐색은 일기가 아닌 녹음본으로 남기기로 했다.

 

 

-

 

 

 < 첫 번째 행성 탐색 >

 D+21

 

 "뭐 있어?"

 "으응 뭐가 있긴 해"

 

 왕좌? 이런 작은 행성에 왕이 살았던 건가? Roi... 이름이 로이였나 보구나. 빛이 바랜 낡은 왕좌는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듯 까만 먼지가 쌓여있었고, 그 주변에는 일부가 삭아버린 왕관과 제 색을 잃은 망토가 널브러져 있었다. 밧줄과 못으로 돌아갈 행성을 고정해둔 정한이 뒤늦게 도착해 입을 때었다. 꽤 오래됐나 본데, 이 해골. 누가 살긴 했나 봐~

 

 "어떻게 알았어?"

 "에이 슈아야 딱 봐두 잠깐 손대면 가루 돼서 날아갈 것처럼 생겼잖아"

 

 톡- 겁도 없이 건드려서 남의 유골을 날려 보내다니, 정한아 넌 참 독특해.

 

 "이 작은 소행성에서 홀로 죽었을 텐데, 우주 구경이라도 시켜줘야지. 혹시 모르잖아? 저~ 멀리 가서 지구 구경이라도 할지"

 

 ...그렇구나. 괜히 씁쓸해져 첫 번째 행성 탐색을 마쳤다.

 여기서도 노을이 예쁘게 지는구나.

 

 마지막 인사겠네요- Salute, to King Roi

 

 

 

 < 두 번째 행성 탐색 >

 D+54

 

"주변에 소행성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 한동안 지루하진 않겠다. 그치?"

 "맞아ㅋㅋ 다 따로 살았나 봐, 여기도 한 명만 있는 거 보면"

 

 단정한 신사가 살았던 건지 고급 진 정장과 모자가 마주 흐트러져 있었다. 죽기 전에 발악...같은 걸 했나? 괜히 소름 돋네. 우리가 상상한 예의 바른 신사가 아닐 수도 있겠다. 모자 끝만 유난히 닳아있는 걸 보면 자주 벗었다가 쓴 건데, 그거 인사 아니야? 소행성 사람들끼리 친했나?

 

 "여러모로 독특한 행성이네"

 "재밌었어~"

 

 Good bye, 이름 모를 Gentleman.

 

 "젠틀맨은 우리 조슈지인데-"

 "둘이 될 수도 있지ㅎㅎ"

 

 

 

 < 세 번째 행성 탐색 >

 D+86

 

 "이거 술냄새 맞지?"

 "응, 그것도..."

 

 엄청 오래된 술... 후각이 예민한 여우에게는 최악이네. 거대한 술통과 수많은 빈 술잔들로 가득 찬 행성. honteux Buveur... 창피하다고?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웠나? 엄청난 술꾼이었던 것 같은데. 유언을 술통에 남긴 것도 꽤 특이하네. 기계로 찍힌 듯 가지런히 박혀있는 'Buveur' 앞에는 'honteux'가 투박하게 쓰여있었다. 무슨 언어야? 프랑스어. 부끄러운 술꾼이라고 적혀있어.

 

 "마시면 큰일 나려나?"

 "혹시 모르니까"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인 정한이 돌멩이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부끄럽지 않은 술꾼으로 해주자, 이젠 술 안 마시고 있을 테니까"

 

 말 한 번 돌려본 거구나ㅎ 잠깐의 끄적이는 소음을 끝으로 행성을 떠났다.

 

 sans honte honteux Buveur

 

 

 

 < 네 번째 행성 탐색 >

 D+107

 

 "우와, 처음으로 쓸만한 물건들이야"

 "책상, 잉크, 종이..."

 

 꽤 열심히 살았나 본데? 만년필이 유독 많이 닳아있는 걸 보면. 낡고 삭아버린 책상의 서랍을 열어보니 수없이 많은 종이들이 쏟아졌다. 이게 무슨... 숫자가 있어, 별을 세는 사람이었나 봐. 은행이랑 예금이란 단어는 왜 나오는 거지?

 

 "별을 본인 소유로 써놓은 것 같은데?"

 "혼자 사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담"

 

 욕심이 많았던 건가. 주변 별들도 적혀있는 거 보면 서로 친하진 않았나 봐. 지인의 별을 소유하진 않으니까··· 책상과 의자, 그 주변에 있는 인골들과 미처 마무리되지 않은 종이를 보아 죽기 직전까지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였다. 과로사였나? 알기가 어렵네. 문서들을 보면 게으르진 않았던 것 같고.

 

 "종이만 조금 챙겨서 가자"

 

 나머진 이 사람의 작업물이니까, 손 대지 말아야지.

 

 

 

 < 다섯 번째 행성 탐색 >

 D+134

 

 "여긴 좀 작은 행성이네"

 

 오기 전부터 그래 보였지만. 여우의 열 걸음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 작은 행성에는 똑같이 작은 인골이 가로등에 기대져 있었다. 이런 작은 행성에 가로등이라니. 오, 켜지네? 내가 행성을 둘러보는 사이에 가로등을 이리저리 살피던 정한이 몸을 들어 올렸다. 이거 봐봐.

 

 "Roi? 저번에 그 왕 이름 아니야? 어쩐지 익숙한 냄새가 나더라"

 "그놈 신하였나 봐. 고생 좀 했겠다"

 

 왜? 여기... 밤에만 불을 켜야 한다고 쓰여는 있는데. 이 행성, 밤낮이 1분 단위로 바뀌길래. 아, 작은 행성은 그렇겠구나. 그래서 이렇게 작은 건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생기는 동정은 답도 없는데, 빨리 뜨자. 지금이라도 쉬게 해드려야지.

 

 가로등의 불빛을 끄고서 작게 읊었다.

 

 Dors bien.

 

 

 

 < 여섯 번째 행성 탐색 >

 D+360~?

 

 "이젠 날짜도 못 세겠다"

 

 하긴, 이전 행성 때문에 다 까먹었어. 여긴 또 더럽게 크네... 밤낮 구별은 쉬울 것 같다. 행성에 비례하는 큰 책상과 그 위에 쌓인 종이들의 모습이 꼭 네 번째 행성과 비슷해 보였다. 내용은 많이 다르지만.

 

 "주변 행성들에 대한 내용이야. 여기 지구도 있어"

 "우리가 다녀간 행성들도 있네, 왜 우리 행성은 없는 거지?"

 

 가치가 없는 행성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어. 내용들이 하나같이 짧고 이유만 거창하게 붙은 걸 보면... 우리 장미가 특별하지 않은 거였나? 에이 슈아야 그렇진 않을 거야, 여기 기록된 것들 전부 영원한 것들만 기록되어 있잖아. 장미가 영원할 거라고 판단하지 않았던 거지. 탁한 유리관 속에서 살아있던 장미는 꽃봉오리 하나를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피어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은?

 

 "돌아가자"

 

 우리 행성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종이를 봤어. 한 페이지 조차 채우지 못한 별 볼일 없는 행성에 대해 말이야. 증거조차 없어서 믿을만한 자료는 되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 장미가 영원했다는 건 알 것 같아"

 

 

-

 

 

 "이 장미 말이야, 가시가 있는데도 뭉툭한 걸 보면 썩 위협적이진 않은 것 같아"

 

 슈아가 이상해졌다. 플로리스트 때도 식물에 애착을 갖기는 했지만... 여우인 상태로 이렇게 애지중지해가면서 기르진 않았는데···

 

 "언제쯤 필 것 같은데?"

 "음... 지금?"

 

 말도 안 된다. 표류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간절한 슈아 눈빛 받아놓고 아무 반응 없던 장미가 지금 피는 건 말도 안 되는 거다. 근데 생각해 보니 슈지는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일 몰고 다녔으니까···

 

 "예쁘지!"

 

 어... 예쁘다 슈아야. 난 가끔 네가 마법을 부리나 싶어. 예쁜 빨간 장미 옆에 하얀 북극여우가 뛰는 모습은 절경이었지만. 저게 뭔데 저렇게 기뻐하는 걸까? 아무리 예쁜 장미여도 자세히 보니 썩 생기 있는 장미는 아닌데. 뭐, 슈지가 좋다는데.

 

 

 

 열심히 꾸민 우리의 행성은 장미가 피어난 이후 더욱 보기 좋아지기는 했다. 갈수록 생기가 넘쳤고, 가끔 지구에서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며 노을을 즐기기도 했다. 이 정도면, 후회 없는 삶이긴 한 것 같다고. 그다지 좋은 기억이 많지는 않다. 오히려 좋은 기억이 많은 곳은 지금 우리의 행성이니까. 우리가 꾸미고, 가꾼 우리의 행성.

 

 

 

 우리의 행성은, 우리의 행복이 과거를 전부 덮었을 때 모든 것을 놓아주었다.

 아니. 우리는, 우리의 행복이 과거를 전부 덮었을 때 모든 것을 놓아주었다.

 

 

 

-

 

 

 

 긴급 소식입니다. 현재 시각 2121년 6월 12일 오후 10시 34분

 정체 모를 혜성들이 지구로 충돌하고 있으니 다음 지역의 주민분들께서는 신속히 대피하시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 서울, 일본 나고야, 미국 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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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시각 2122년 3월 4일 오후 10시 34분

 작년 21년 6월 경에 벌어진 혜성 충돌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현재까지도 충돌의 원인을 밝히고 있으며 대한민국 서울에 추락한 혜성에서 두 시신을 발견, 훼손 상태가 심각··· 신원 확인 결과 100년 전 우주여행으로 인해 실종된···

 

 

 

/Bump±612

 

 

 

 순식간에 발전한 세상은 뒤떨어진 인류를 짓밟으며 끝없이 성장했다. 성공과 나락 사이에서 꿈틀대던 일부는 비참하게 떨어져 나갔고, 나머지 일부는 살아남음에 의의를 가졌다. 세계인권선언은 굳건했으므로 타인의 인권을 짓밟는 행위는 여전히 범법이었으나, 제제하는 이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은밀히 자리 잡은 계급이 판을 치는 이 세계엔-

 

 "우주여행이 왜 가고 싶은데?"

 

윤정한과

 

"응? 거긴 예쁘고... 넓잖아"

 

홍지수가

 

"...그렇네. 우리 꼭 가자, 우주"

 

지구 탈주를 꿈꾸며 살아남고 있었다.

 

 

그게 혹여, 환상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