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에 희망이 없다.
졸업 논문이 통과된 4학년이란 대개 그렇다. 보통은 재미까지 없는 편이다.
1년 동안 연구실에서 열심히 갈려가며 완성한 졸업 논문은 손을 떠났고, 이제 제 관심 밖이다.
학부생 연구실에 뒀던 짐을 빼야 한다길래 혼자 남아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교수님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그를 찾고 있었다는 듯이 안색을 밝히며 연구실로 불렀다. 면담의 요지는 당장 취업할 생각이 없다면 석사라도 따보는 게 어떻냐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기미가 보인다면 자신의 랩에 꽂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교수님…. 저희 석사 티오가 학사 티오보다 적은 건 알고 계시죠….’
아직 그렇게 말할 정도로 겁을 상실하지 못한 윤정한은 그냥 빙긋 웃고 말았다. 전공을 제대로 써먹을 생각이 있다면 대학원을 가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속이 여간 쓰린 일이 아니었다.
가족과도 이야기해보고 결정해야 할 문제인 것 같다는 말로 면담을 끝내고 자연대 3호관을 나오니 늦여름 햇살이 눈을 따갑게 찔러왔다.
짐을 차에 싣고 라운지로 커피를 사러 가며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쯤 울렸다.
통화의 주인은 면접 스터디에 갈 시간이 다 됐다며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올해로 2년이 조금 넘은 애인 홍지수였다.
둘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하는 착각처럼 홍지수와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던 건 아니다.
윤정한에게는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걔가 동아리를 하나 같이 하자며 자신을 설득한 게 먼저였다. 친구 따라 강남은 안 가도 연남까지는 가주는 윤정한은 그 동아리 진짜 재밌다더라. 너도 같이하자 소리를 듣자마자 신청서를 넣었다. 놀라운 실행력이었다. 홍지수는 그 동아리에서 만든 인연이었다. 교양 하나가 겹쳤다는 이유로 말을 트기 시작했고, 아직 고등학교 티가 덜 빠진 홍지수는 조금… 귀여웠으니까. 아무튼, 놀려먹을 사람이 하나 더 생기는 건 좋았다. 윤정한은 홍지수와 금방 친해졌다. 윤정한의 고등학교 동창이 자기 빼고 둘이 더 친한 거 같다며 빈말로 툭툭거릴 정도였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홍지수를 끼고 다니던 윤정한이 제 감정을 자각한 건 순식간이었다. 어째서 그 감정을 모르고 있었는지 이해조차 가지 않았다. 무거운 감정에 순식간에 휩쓸린 윤정한은 허우적거리기 바빴다. 약간의 술, 약간의 수면 부족, 그리고 시간. 윤정한이 제 감정을 정의하기에 충분했다.
원래 사랑은 강렬한 감정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적어도 윤정한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 감정에 휩쓸려 보기로 했다. 그 애라면, 아마 평생을 휘말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음을 정한 다음이 문제였다. 그 애를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다. 내 마음과 그 애의 마음이 같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홍지수에게 자신의 감정을 밀어붙이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던 윤정한은 머리를 싸맸다. 어떡하지? 차이면 진짜 접싯물에 코 박고 죽고 싶을 거야. 근데 고백 안 하자니 죽겠다…. 일단, 그 애가 나를 그런 쪽으로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지만 확인하자. 아니면…. 그럴 마음이 생기게 해야지.
윤정한이 그렇게 다짐하고 있을 당시, 홍지수는 이미 윤정한을 좋아하고 있었다.
감정을 자각하기 전의 윤정한이 매일 옆에 붙어 다니며 앙냥냥 거리는 걸 넘어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홍지수는 윤정한을 좀 특별하게 대했다. 둘 모두와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인정한 사실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든 다정하게 굴고 진짜로 다정한 홍지수가 더 다정하게 마음을 쏟는 대상, 홍지수가 윤정한을 어떻게 대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그 애의 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윤정한이 홍지수를 대하는 것도 그랬다. 그건 숨겨지지도 않았고,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윤정한이 어떡하지, 나 홍지수 좋아하나 봐. 했을 때 놀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쟤가 자각했구나, 지수는 안대 모른대? 정도의 감상만 존재했다.
홍지수를 살짝 떠봐야겠다고 다짐한 윤정한은 홍지수를 세심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홍지수는 얘가 갑자기 왜 그러지? 정도의 생각은 했지만, 윤정한이 또 이상한 장난을 고민하고 있겠거니 넘겼다. 홍지수를 관찰하던 윤정한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친 장난에 똑같이 유치하게도 굴고 짜증도 좀 냈지만, 드문드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보듯이 부드러이 휘는 눈매, 섬세하게 건네는 손길, 나직하게 깔리는 목소리. 이건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였고, 윤정한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멍청이였다. 열람실 책상에 달아오른 볼을 식힌 윤정한은 이제 더 고민할 필요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차츰 선선해지는 가을,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 윤정한은 홍지수에게 제 마음을 고백했다.
그렇게 윤정한이 마음을 고백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난 뒤 모든 게 바로 잘 풀리지는 않았다. 그즈음, 홍지수가 신청한 교환학생이 승인됐다. 미국에 다녀온다고 했다. 사실, 그 애의 고향은 미국이니까 돌아간다고 말하는 게 맞았다.
홍지수의 고향은 미국이다, 그 애가 한국에서 계속 살지만은 않을 것이다. 걔도 태어난 곳에서 사는 게 편할 테니까. 문득 깨달은 헤어짐은 가슴 한구석에 아릿함을 남겼다.
그 애는 괜찮다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걱정이 가득 담겨 내려간 축 내려간 눈꼬리를 지긋이 바라보다 고개를 홍지수의 어깨에 파묻었다. 은은하게 나는 향수의 향에 울적한 기분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지수야, 나랑 헤어질 거야?”
“정한아…. 헛소리 좀 하지 마….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아니…. 너 졸업하면 미국 갈 거잖아. 그럼 나도 너 따라서 미국 갈까 고민하고 있었고….”
“내가? 미국으로?”
“안 가?”
“아니….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한국에서 계속 지내려면 못 지낼 것도 없으니까?”
삽질을 제대로 했다는 걸 알게 된 윤정한은 말을 한다고 들었던 고개를 다시 어깨에 묻었다. 쪽팔려…. 나 왜 또 사서 걱정했지….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평소라면 조금 안겨있다가 갑갑하다며 손을 풀었을 홍지수도 그날만은 한동안 안겨있었다.
그랬던 적도 있었지…. 홍지수는 딱 한 학기만 미국에 있다 돌아왔었다.
짧은 과거 회상을 뒤로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오늘은 짐도 다 정리한 홀가분한 날이니까, 저녁에 분위기 괜찮은 와인바나 가자고 할까?
앞으로의 미래를 위하여, 건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