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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천사가 되어버렸다

악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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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천사가 되어버렸다 

 

 

 

태생이 고귀했던 것은 아니다. 성인이라던 예수도 그랬듯 어머니 태 빌어 나와서 한낱 핏덩이로 세상의 첫 숨을 쉬었다. 누군가에게는 하나 새로운 세계의 탄생이었을지 모르나 대거 사람들에게는 그저 인구 한명 늘었네 정도의 감상밖에는 주지 못할 그런 날. 누군가에게는 의미없이 스쳐지나갔을 그런 평범한 날. 생일. 

 

하지만 이 생일이라는 날에는 그냥 태어났다는 감상만 건조하게 내뱉을 수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또다른 탄생 또한 그 날이어서. 정한이 자신 천사라 깨달은 것은 낭랑 십구세 세상 모든 것이 저주같아 보일 무렵 청명한 하늘의 10월 4일에서였다. 1004. 숫자로 읽어봐. 천사, 그치? 그러니까 이름 말고 날 부르고 싶다면 천사라 해줘. 1년 전 했던 말이 실현되는 날이었다. 그날의 지수는 그냥 떨떠름하게 뇨롱~ 웃고 말았는데. 오늘 내가 말한다 해도 믿지 않겠지? 정한은 지수를 알아도 너무 잘 안다. 

 

천사라는 직위 새로 깨달은 인간이라할지라도 인간은 인간이다. 짬 내서 족구한 다음에 우르르 몰려가서 마시는 물은 여전히 달다. 수업은 지루하기 그지없고 연필 끝 잘근잘근 물고 창밖 쳐다보고 있으면 집중하라며 불같은 호령이 들려온다. 야자 빼달라고 징징대봤자 엄격하신 우리의 하늘같은 선생님은 내 말 귓등으로라도 안 듣고 맛있게 씹어드시고, 어머니아버지는 학교 끝나고 야자 시작하기 전에 전화로 새 학원 등록하자며 대학걱정이나 한다.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한데. 난 천산데. 이제는 하찮은 인간세상의 법칙에 휘둘릴 내가 아닌데. 

 

그리고 홍지수. 항상 웃는 얼굴의 지수는 배고프다고 위장이 아우성칠 때에야 웬일로 무표정하게 다가와서 생일 축하한다며 말 툭 던지고 만다. 섬세한 남고딩의 마음은 아직도 여리고 여려서 하사하는 무관심한 말투에, 건네주지 않는 선물에 쉽게 상처받는다. 하다못해 초콜릿 하나라도 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 들고마는 것이다. 지수야~ 내가 신기한 거 알려줄까? 나 방금 알아차렸는데, 내가 천사래. 응? 그 하늘 높이 나는 천사 있짜나. 그래서 실없는 소리나 하면. 지수는. 

 

응. 알아. 

 

정한의 베스트프렌드 지수는 허투루 뱉는 말이 없어서 – 사실 꽤 많긴 한데 진지한 분위기에 헛소리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 정한은 지수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알고 있었다는 듯 당연하다는 표정에 어리둥절 어안이 벙벙한 건 정한뿐이다. 그제서야 이 세상의 진리를 하나 더 깨닫고야 만다. 그러니까 지수가 이걸 아는 건, 

 

내가 신이니까. 

 

 

 

정한은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 그냥 평범한 아무 가정집. 정한이 있어서 정한이 제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머니아버지는 나의 창조주이시고 나를 위해주시니 사랑할 수밖에 없고 4살 차이나는 여동생은 열넷이면서 공상 속에서 한 살 더 먹었는지 하는 꼴이 영락없는 중이병이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 애정한다. 사랑이 많은 집이었다. 물 좋다 소문 자자한 먼 사립고등학교 보낼 정도는 아니지만 넉넉해 필요하다 원한다 생각하는 것들은 대부분 손에 쥐어졌다. 부족함 없이 자라서 부족함 없는 고등학생 되어 교우관계 원활! 성적 중상! 의 인싸 윤정한이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에 지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 홍지수는 안 그런 것 같으면서 은근히 개인적인 면이 있어 남의 사생활 캐묻고 다니지도 제 사생활 털지도 않는다. 학교 밖 지수는 아무도 모른다. 점심시간에 몰래 학교 담장 넘어가 떡볶이집 간 몇 번 외에는 아무도 지수를 밖에서 만나본 적 없다 한다. 올라가있는 눈꼬리 입꼬리는 유전인가? 면전에서 무슨 말을 해도 뇨롱~ 웃어보이는 그 속없는 얼굴은?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이유는 머리가 좋아서인가 아니면 집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정한은 가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매일 그런 사소한 것들이 궁금해 미치는 줄 알았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알 것만 같아서 더 짜증났다. 언젠가 들어봤을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지수가 어느 여름날 나무 그늘 아래에서 건네준 말들은 많았던 것 같은데 정작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서. 지금껏 이야기는 알맹이 없어 텅 빈 한낱 껍데기였나? 암만 생각없이 사는 정한이라도 이건 궁금해서 머릿속에 데굴데굴 여러번도 굴려봤다. 그러니까- 지수가 신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 신이니까 우리 모두 아무것도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건 당연하지 않나? 의문은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작년의 바다는 차가웠는데. 그때의 지수도 차가웠는데. 많은 걸 알려주지 않는 친구는 그렇게 차가웠는데. 세상의 비밀에 한 발짝 다가선 지금은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일년 끝나갈 무렵의 겨울 바다는 차갑긴 했다. 바다가 별로 안 파랗네. 바다라고 꼭 다 파랗기만 하라는 법 있어? 그래도. 캘리포니아 바다는 항상 파랬거든. 한국은 안 그래, 바보야. 지수를 물 쪽으로 민 정한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그 옛말 하나도 틀린 말 없어 잔뜩 젖게 되었다. 물론 복수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쫄딱 젖은 꼴로 옷에서 물 뚝뚝 떨어트리며 추적추적 돌아가던 길에 한창 웃었다. 물은 분명 차가웠는데 살갗은 뜨거워서 춥지 않았다. 그래도 어물쩍 넘어가는 낯짝 때문에 좀 추웠다. 엄마아 내일 하루만 놀고 모레부터는 정말 열심히 할게요 아름다운 어머니 하루만.... 나 내일 지수랑 바다 보러 가기로 했단 말야. 손 싹싹 빈 전날은 쉽게 휘발되고 웃음만 남았다. 조슈지. 내가 허락 맡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나 알아? 몰라 정한아. 넌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야 돼.... 

 

 

지수야. 신이면 뭐가 좋아? 이런 걸 할 수 있지. 아야. 해 중천에 뜬 점심시간의 청명한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캐릭터 다이어리에 정한이 머리를 문지른다. 이런 것도 맞으면 아프구나... 큼직하고 둥그런 영어로 시나몬롤 써진 다이어리. 똘망똘망한 눈에 커다란 귀의 흰색... 음. 딱 지수같이 생겼네. 익숙한 글씨체가 페이지를 가득 채운다.

 

새것같은 표지만큼 그 속도 하얗다. 누런 세월의 흔적 보이지 않아 쓴지 얼마 안 됐나 보네? 음. 이런 취향도 있을 수 있지. 하고 정한은 속편하게 생각한다. 삼분의일 정도만 채워진 다이어리에는 한 페이지마다 날짜 하나씩 적혀있다. 십이월 삼십일, 힘이 있다면 선한 일에만 써야 하지 않을까? 일월 일일, 이건 아무래도... 유월 팔일, 정한이가.... 시월 사일. 뛰엄뛰엄한 숫자 적힌 종이는 손 안에서 잘도 부스럭댄다. 지수야 너가 이런 취미 있는줄 꿈에도 몰랐네에, 하고 말끝 늘인 정한은 기습한 긴 팔에 다이어리 뺏긴다. 보지는 말구.

 

뭐가? 있어 그런게. 보고 싶은데 생일선물로 보게 해주면 안돼? 준비한 것도 없짜나 지수야. 뭐가 없어. 내가 너 천사 만들어줬잖아. 뭐? 내가 신인데 당연한 거지. 

 

정한은 제 어린 신에게 경배 비슷한 것을 느낀다. 맞잡은 손이 단단하다. 신이 된 연유 물어보면 그냥, 이라는 답과 함께 어깨 으쓱이던 지수가 한 치 의심 없는 목소리로 답한다. 안 믿었어. 누가 그런 걸 바로 믿어. 그런데 작년의 십이월 삼십일은 특별해서. 일년이 끝나가는 날이라는 것 외에도 생일이라는 것 외에도 특별해서. 너가 있어서. 손 끝에 우리 함께 KTX 타고 간 부산의 더러운 물결이 갈라지고 나는 유일하고 대체불가한 무언가가 되어버려서. 그래서. 

 

그래서? 

 

믿음이 있으니 신이 된 거지. 다른 게 있겠니 정한아.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와 청년의 경계에 걸친 정한의 신은 눈 깜짝 않고 대답한다. 너가 날 믿어주어서, 그 뒤따른 암시는 너무나 투명하고 당연한 사실이라서 정한은 그저 으응 그러게 하고 웃고만 만다. 아직 솜털도 젖살도 채 사라지지 않은 볼에 제 볼을 기댄다. 점심시간의 햇살은 따가운데 그늘로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맞고만 있다. 하지만 괜찮다. 신과 천사가 어디 쉬운 일에 아파하는 존재겠어. 

 

그래서 왜 지금 알려준 건데. 서프라이즈지~ 정한이 너는 항상 천사 되고 싶어했잖아. 1004. 생일선물로 만들어주고 알려주고 싶었어. 고작 그런 이유로? 뭐래, 고작이 아닌데. 마음에 안 들어? 도로 가져가버릴까? 아니? 엄청 마음에 드는데? 너야말로 뭐래. 

 

 

저무는 해가 걸친 나뭇가지는 검정이고 하늘은 온통 붉고 파랗다. 다행히 집 가는 방향은 같아서 나란히 걸을 수 있다. 저벅. 저벅저벅. 우리 발걸음 딱 맞는다. 몇 년을 같이 걸었는데. 그러고서야 문득 시험해보고 싶은 거다, 태양 아래 날개 펼쳐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새들처럼, 오늘만큼은 높이높이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디로든 가 손을 지금처럼만 꼭 잡고선 그냥 이렇게만 어디여도 상관없으니 정말 어떻게라도. 

 

지수야 조슈지. 내가 오늘 두 가지를 깨달았어. 하나는 내가 천사라는 거고 하나는 너가 신이라는 거야. 응. 그럼 세 번째는 뭐야? 세 번째가 있을 것 같아? 법칙 같은 건 꼭 세 개던데.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그래? 그럼 세 번째는 뭐라고 생각해 너는. 

 

말없이 손잡고 뛴다. 차가운 가을 저녁의 공기가 얼굴 때리는데 춥지가 않고 더위에 귀만 빨개진다. 다 무너져가는 건물 앞에 우뚝 선다. 세 번째. 

 

문에 걸린 자물쇠를 지수가 죽죽 편 클립으로 재빠르게 풀어버린다. 왜, 신이 이런 것도 못할까봐? 아니 너가 이런 것도 한다는 게 놀라워서.... 담력테스트 자주 하던데, 여기. 그래서 끼이익 소리내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썩은 목조계단 하나하나 올라가면, 마침내 지붕 위에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면, 

 

먼 하늘은 파랑에 주황에 검정으로 가득차있고

 

그 속에는 십이월 삼십일의 어두운 바다가 있고 

 

저 위에 비행기가 남긴 자국은 하늘을 반으로 가르고

 

철새들은 저들만 아는 고향으로 떠나 날아올라서. 

 

일말의 의심조차 가질 수 없다. 

 

어깨부근이 간지럽다. 예전의 커다란 티라노사우르스가 지금 와서는 조류가 된 거야, 참새같은. 어릴적 들었던 얘기 떠올린 정한은 문득 인간의 조상 또한 그런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궁금해진다. 유인원이라 불리는 우리에게 사실 천사의 피가 대대로 내려오는 건 아닌지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 날개죽지가 가렵다. 흰색 나래 펼친 성스러운 존재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아니면 피 잔뜩 묻힌 성스러운 처벌의 화신인가? 어쨌거나 성스러운 건 마찬가지인데. 뚫고 나오는 고통에 맞잡은 손 쥐어짠다. 그리하여 천사는 우는 아이에게도 선물을 주었답니다. 아, 이건 천사가 아니었나? 아득한 감각에 몸부림친다. 부드러운 것들이 더 엷은 피부에 상처내며 모습 드러내는 게 느껴진다. 이카로스는 너무 많은 걸 탐해서 고꾸라졌다고 해. 태양에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려다가 모든 걸 잃었어. 바다로 떨어졌어. 폐부에 숨이 들이찬다. 그런데도 이카로스 이름은 하늘의 정복하는 자라고 해. 그렇구나. 한 발 앞으로 내딛는다. 갇혀 있었는데 나가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비행했어. 그랬구나. 추락하지 않을 수 있는데. 지수는. 나는. 그러니까 지수야. 슈지야. 홍지수. 

 

응. 

 

세 번째. 우리는 날 수 있다. 어때?

 

 

 

손 틈새로 바람이 스친다. 비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