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
잠에서 깨는 감각보다 빠른 건 탈 것 같은 갈증이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뱉으면서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발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멋대로 뻗은 손에 컵이 쥐여진다. 안 떨어지게 조심해. 가물거리는 목소리가 익숙해서, 정한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미간을 좁혔다. 몸을 아주 살짝 일으켜 컵을 기울였다.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일어나야 돼. 일곱 시 반이야.”
물맛이 텁텁하다. 수돗물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어제 술을 워낙 마셔서…까지 이어지던 정한의 생각이 멈췄다. 눈을 떠 바라본 천장은 익숙한 제 집과는 달랐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게 꽁꽁 커튼을 쳐둬서 살굿빛 조명이 저녁처럼 은은하게 들어오는 것도. 계절감 없이 도톰하고 푹신한 이불과 시트의 감촉도.
“출근하려면 이제 나가야 돼.”
무엇보다 윤정한은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는걸.
정한이 유령이라도 본 표정으로 컵을 내려놨다. 그간 살면서 겪어온 많은 경험들이 본능적으로 지금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스르륵 이불이 떨어지는 느낌이 생생한 건 그가 맨몸이라는 거고.
“바로 회사로 가긴 좀 그렇잖아.”
허물처럼 벗어던진 옷들이 바닥에 마구 흐트러져 있는 사이로 보이는 작은 박스와 포장지는 콘돔일 거다. 이제 정한은 등이 서늘하다 못해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독한 숙취 때문만은 아니고.
“집에 들렀다가 옷 갈아입고 다시 나와야 하니까.”
이미 옷을 갖춰 입은 상대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문제의 콘돔 포장지와 박스를 주워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깔끔한 행동에도 정한은 박수 한번 쳐주지 못했다. 꽤 판판한 등이 드러나는 셔츠와 단정한 검은 머리칼, 익숙하고 무덤덤한 목소리. 묘하게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와 목덜미에 남겨진 잇자국.
정한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움켜쥐었다. 그 소리에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얼굴을 마주치자,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한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어젯밤을 함께 보낸 상대의 이름을 멍청하게 뱉어냈다.
“…홍지수?”
그게 아니고
“홍대리님.”
파티션을 톡톡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에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집중하던 지수가 고개를 든다. 얼굴보다도 그 뒤 벽에 걸린 시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벌써 시간이… 미리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갑자기 쏟아진 업무 때문에 틀렸다. 지수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밥 먹으러 가요.”
“저는…”
“아니. 밥 먹어요.”
제안이 아니라 강요다. 단호하게 말하곤 돌아서는 정한의 등을 보던 지수가 결국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고 마이를 챙겼다. 지수의 팀은 점심을 따로 먹는 사람들이 많기도 했고, 업무 때문에 점심시간을 유동성 있게 조정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몇 번 밥을 거르자 보다 못한 정한이 일주일에 세 번은 같이 먹자고 으름장을 놨다. 회사 일 전부 네가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밥을 굶어.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정한의 다정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지만 동문에 입사 동기이기도 한 지수에게는 유별난 것도 맞았다.
같이 걸음을 옮기자 익숙한 모습인지 점심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가 들려온다. 지수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정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소매를 걷은 셔츠와 목에 건 사원증. 영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몇 번 어깨를 주무르다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놀란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일단 밥 먹으면서 얘기해.”
침착하게 말을 마친 정한이 엘리베이터 안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선다. 지수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밥 먹으면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닐 것 같긴 한데. 태연을 가장하지만 어지간히 당황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작게 담소를 나누는 정한의 귀 뒤와 목이 살짝 붉었다.
“지수야. 우리……”
“맞아. 잤어.”
풉. 막 입에 넣은 쌀국수를 그대로 뱉은 정한이 콜록거린다. 지수가 살짝 인상을 쓰며 냅킨을 정한에게 내밀었다. 밥 먹으면서 할 얘기 아니라니까. 혹시 누가 들었을까봐 주변을 슥 둘러본 정한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싹 떨어졌다. 지수는 정한을 곁눈질하곤 제 몫의 피클을 깨물었다. 느릿느릿 식사를 계속하는 동안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던 정한이 말을 뗐다.
“근데 있잖아. 사실 내가…”
“기억 안 나지? 그럴 것 같더라.”
너 어제 엄청 신나서 달렸잖아. 렸, 의 발음이 R처럼 부드럽고 동그랗다. 무덤덤한 반응에 오히려 제가 더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 어제, 어제는. 저녁에 잡힌 회사 동료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술자리가 생각보다 커진 것이다. 누가 극악무도하게 일요일 저녁에 결혼하느냐고 투덜거린 게 무색할 정도로 다를 들떴다. 정한은 최근에 일이 몰려서 스트레스가 극도로 쌓인 시점이었고, 주량이 센 편이지만 상성이 안 맞는 술을 연거푸 섞어 마시다보니 정말 드물게 정신을 놔버렸다. 그래선 안 됐는데.
“나 좀 말려주지.”
“내가 널 어떻게 말려. 그리고 너 지금 나 탓하는 거야?”
단정한 지수의 말에 다시 정한이 입을 꾹 다문다. 그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밥 먹기는 글렀고 어쨌든 수습은 해야겠다는 윤정한 특유의 성정 때문이었다. 술 먹고 필름 끊기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특대형 사고는 신입생 때에도 안 쳐봤다. 끽해야 바다가자고 친구들 졸라서 야밤에 할증택시 타고 인천까지 가거나 코노에서 스무 곡 연달아 부르다가 쫓겨나거나 그랬지. 그러니 더더욱 기가 막히지만 딱 그만큼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우리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그 말에는 지수가 여상한 표정으로 정한을 본다. 물끄러미 보는 시선에 정한이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너는 그만큼 마시지도 않았으니까 기억할 거 아냐. 나 진짜 기억이 도려내진 거 같거든. 그렇다고 해도 너랑 나랑.. 어쩌다가 갑자기 그렇, 그렇게 된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가지구. 어영부영 떠다니는 말을 듣던 지수가 컵을 내려놨다. 탁 하는 소리에 지레 쫄아버린 정한이 힐끔 지수의 눈치를 살핀다.
“그걸 설명까지 해야 되는지는 잘 모르겠네.”
“아니 그래도…”
“해주면 들을 자신은 있고? 정한아.”
그 말에는 정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수가 그것 보라는 듯 입술만 끌어올려 웃는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정한은 제 머리를 헝클었다.
지수와는 대학까지 포함해 십 년을 가까이 알았다. 같은 동아리였지만 친한 무리가 달라 인사만 하고 지냈었는데, 입사하던 날 오티에서 만나고 더 친해졌다. 그 귀하다는 입사 동기, 이런저런 이유로 다들 퇴사하고 이직하면서 해당 기수엔 지수와 정한만이 남았으니 더 애틋하기도 했고. 의외로 전부터 친해지지 않은 게 신기한 만큼 성격도 잘 맞았다. 농담이나 장난을 치면서도 지키는 선이 비슷했고, 묘하게 사람들을 바운더리 안으로 들이는 기준도 까다롭게 높았다. 무엇보다 이 회사 내부와 구성원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통했고 그러므로 이곳의 좆같음도 딱히 힘 안 들이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컸다. 동지애랄까 전우애랄까. 그렇게 매번 회사 사람들한테도 둘이 친하다고 자랑을 했는데 갑자기 술 먹고 눈떠보니 모텔에서 맨몸으로 같이 이불 덮고 눈 뜬 거잖아. 심지어 정한은 기억도 안 나는데.
“됐어.”
“…어?”
지수가 냅킨을 들어 입가를 꾹꾹 닦는다. 사람이 하나도 없는 가게라 의심하긴 했지만 맛이 더럽게 없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얼빠진 얼굴을 하는 정한에게 다시 말해준다.
“됐다고. 그냥 넘어가.”
“뭐가 돼? 뭘 넘어가?”
지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잔 거 말이야. 직접적으로 또 들으니 얼굴이 뜨겁긴 하지만 그것보다, 홍지수 뭐라고? 정한이 인상을 썼다.
“그걸 어떻게 그냥 넘어가?”
“그럼 뭐 어떻게 할 건데?”
지수의 말투가 교묘하게 늘어진다. 그 질문엔 아직 정한도 답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잔 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진짜 잔 거 맞냐는 쓰레기 같은 질문은 안 해도 됐다. 지수가 허리를 쥐고 걷는 모양새가 은근히 불편해서. 악!-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는 생각했겠냐구. 다만 회사에서 자주 보고 오늘 점심도 같이 먹기로 했었으니까 얘기할 건 해야겠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정한이 습관처럼 튀어나오려던 한숨을 꾹 삼켰다. 슬쩍 그런 정한을 보던 지수가 눈을 깜빡였다.
“별로… 신경 쓰지 말자.”
“야 홍지수.”
“넌 기억도 안 난다며.”
그럼 너는 난다는 거야? 정한은 차마 지수에게 되묻지는 못했다.
“네가 억지로… 그런 것도 아니야. 둘 다, 실수인 거지.”
정한은 기억 한 톨이라도 떠올리기 위해 몰두하느라 그 말을 하는 지수의 얼굴을 미처 보지 못했다. 이내 목소리를 갈무리한 지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냥 넘어가. 없던 일로 해도 되고.”
“야 그게 어떻게 없던 일이 되냐.”
정한의 목소리가 조금 억울한 듯 커진다. 지수가 살짝 웃었다.
“그럼 뭐, 나랑 너 사이에 책임지니 마니 그런 얘기 해?”
누가 누구를 책임지는데? 그러면서 살풋 접히는 눈꼬리를 보던 정한이 괜히 젓가락으로 다 끊어진 면을 휘저었다. 윤정한 먹을 걸로 장난치지 마. 심경이 복잡했다. 복잡해도 너무 복잡했다….
“이러고 너 나 안 볼 거야?”
“아니.”
“그럼 둘 중에 하나가 퇴사해?”
“그것도 아니지!”
“그래, 그러니까. 정한아.”
그런데 왜 홍지수는 이렇게나 간단명료한 건지. 지수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주변의 소음을 깨운다.
“커피나 마시러 가자.”
월요일이라 나 엄청 당 필요해. 선선히 말하며 지갑을 꺼내는 지수를, 정한이 멍하니 바라보다 한 박자 늦게 허겁지겁 카운터로 쫓아갔다.
“지수야 이거.”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나갔다 돌아온 정한이 지수에게 까만 봉투를 내민다. 이게 뭔데? 하고 별 생각 없이 열어본 지수가 마시고 있던 라떼를 뿜을 뻔했다.
“너 밴드랑 진통제랑 그런 거.”
근처에 약국 있더라. 안에는 야무지게 숙취해소제와 아까 점심 많이 못 먹었다고 대신 먹을 빵도 들어 있다. 밥은 본인이 더 못 먹었으면서, 정한은 또 정작 이럴 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너 여기. 하더니 셔츠 깃 아래 어딘가를 쿡 찌른다. 따라 제 목덜미를 눌러본 지수가 아.. 하고 입술을 물었다.
“떨어질 거 같아서. 새 걸로 갈아.”
“고마워. 이따가 할게.”
손목에 봉투를 걸고 들고 있던 정한 몫의 커피를 내민다. 정한은 받아들고는 잠깐 머뭇거렸다. 너덜너덜 금방 떨어져 나갈 거 같은 밴드 아래로 아직도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프다기보단 가리는 용도로 붙인 거겠지만.
“…미안.”
지수는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길 위를 걷다가 그런 정한을 돌아보았다. 까만 머리칼 위로도 빛이 부서지듯 흔들거리다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런 말 안 해도 돼. 아니, 하지 마.”
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 * *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구.”
홍지수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지만 이건 쿨한 정도가 아니라 추운 거 아냐? 불판 열기 때문에 얼굴이 따끈하게 익은 정한이 고기를 굽다가 집게를 내려놓고 불만을 토로했다. 야근하다 말고 불려나와 밥 얻어먹는 건 좋은데, 저를 앞에 두고 뜻 모를 말만 중얼대다가 가끔 얼굴이 빨개지는 정한을 둔 지훈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쉬운데요.”
“아니 이미 생긴 일을 어떻게 없던 셈 쳐?”
“무슨 일이 생겼길래요?”
물어보면 다시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문다. 아까부터 반복되어 온 일이라 지훈은 더 캐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정한이 한숨을 폭 내쉬고는 고기나 뒤적인다. 술이나 마실래요? 기껏 선심 써서 물었더니 당분간은 입에도 안 댈 거라 선언하기에 사이다나 시켰다. 형이 웬일로 술을 마다하고. 그 말엔 고요히 어딘가 찔린 표정이었다.
“그래도 난 그렇게는 못하겠는데.”
“지수 선배랑 싸웠어요?”
면접을 잘 봤다는 이유로 성격에도 안 맞는 비서팀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하고 있는 지훈의 인내심은 상당한 편이다. 그래도 영 불러내서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면 아무래도.. 좀 짜증나겠지? 그렇다고 해서 말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정한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약간 비슷해. 지수한테는 말하지 마.”
“내가 무슨 말을 해요. 어차피 둘이 잘 풀겠지.”
회사에서 친해져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십대 초반에 만나 투닥거리는 것보단 훨씬 차분하고 배려가 있는 관계였다. 그렇다고 아예 안 싸웠냐면 또 그건 아니긴 했지. 같이 야근을 하다 저녁 메뉴로 싸운 적도 있고, 최근에 지수의 팀에 결재를 받았어야 하는 건이 누락돼서 열 받은 정한이 하소연하다가 말을 세게 하는 바람에 지수가 정색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오래 가진 않았다. 오래 담아두는 편이 아니었고,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하거나 아니면 출근길에 사온 커피를 자리에 올려두는 걸로 풀리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게 그런 종류인가? 정한은 기억을 더듬으려 애썼다. 이건 일종의, 관계가 전복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 아닌가? 영화에서도 책에서도 그랬던 것 같은데, 홍지수는 그 점심 이후론 아예 입 밖으로 그 일을 꺼내지도 않고 평소처럼 대해왔다. 생각하던 정한이 또 열이 올라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한다. 아니 어떻게 그래?
“형은 뭐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나는..”
기억도 안 나는 일로 계속 이러고 싶은 건 아닌데, 그렇다고 모른 척 입 닫기엔 내가 너무 파렴치한 아닌가? 딱히 그렇게 양심적이거나 책임감 넘치는 성격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홍지수의 무던한 얼굴을 보면 뭔가 울컥울컥 턱 밑에서 차올랐다. 차라리 제대로 설명해 주고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였으면-상대방은 기억도 못하니까 때릴 만하다고 정한은 생각했다, 실제로 반대쪽 뺨도 내줄 생각도 했고-속이 시원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고 평소처럼 다정한 얼굴로 괜찮다니까. 말하지 말라니까.
죄책감과 함께 피어오르는 건 기묘하게도 오기, 혹은 승부욕 같은 거였다. 이상한 데서 발동하는 윤정한의 집요한 특기. 홍지수는 가끔 혀를 내두르며 너 그거 문제야, 하고 면박을 줬지만 대체로 져주던 거.
“그렇게까지 하는 거 보면 좋은 일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런가? 나랑 잔 게 그렇게 별로였나? 그랬을 수도. (왠지 모르게) 자존심은 엄청 상하지만 그랬을 수도!
“형도 잘 모르겠으면 그냥 넘어가는 게 좋지 않아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지수 선배가 쓸데없는 얘기 하는 사람도 아니고.”
회사원치고는 가끔 무모한 면이 있는 윤정한과 달리 홍지수는 대체로 현명하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자주 내려서 정한도 친구인 것과 별개로 지수의 조언을 자주 구했다. 지훈도 초반에 회사 생활이 힘들 때-너 왜 나한텐 그런 말 안 했어, 지훈아. 저도 말할 사람 가려서 해요. 와 얘 말하는 것 좀 봐 너무하네!-지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니까 모두의 신뢰를 받는 홍지수가 제시한 방향이 틀린 건 아닐 거다. 정한도 어느 정도 속으로는 동의하고 있는 바이지만.
“몰라.”
그런데 자꾸 속에서 뭔가 긁힌 것처럼 답답하고 뾰족하단 말이지. 정한이 앞에 놓인 사이다를 소주처럼 원샷하고는 내려놓았다. 그날 커피 사서 돌아가던 길, 햇빛을 받으며 서 있던 얼굴이 자꾸 생각이 났다.
“너 회사로 돌아갈 거야?”
“그냥 집 가서 하려고요.”
계산서와 함께 받은 사탕을 입에 넣어 굴리던 정한이 잠깐 몸을 틀어줬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습관처럼 정리한 지훈이 좀 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애매해 사람도 별로 없는 흡연구역.
“형 피울래요?”
“아아니 나 끊은 지 좀 됐잖아.”
더 물어보지 않은 지훈이 양해를 구하고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폰이나 보던 정한이 까맣게 물든 어둠 속에서 몇 번 탁탁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점멸하는 담뱃불을 봤다. …어?
“형도 이제 완전 바쁠 때 아니에요? 체육대회 곧 하지 않나.”
“…어어. 돌아가는 거 보니까 또 내가 독박 쓸 거 같은데.”
“엄청 대기업도 아니면서 사내 체육대회 이런 거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여간 구색 맞추는 건 엄청 좋아들 하셔서.”
불이 화악 담배 끝에 붙자 지훈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가 다시 저문다. 정한이 사탕을 입에 넣은 채 멍하니 그걸 쳐다봤다. 이거 왜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지. 뭐지. 담배 끝을 살짝 깨문 지훈이 길게 빨아들였다가 뱉는다. 입술 새로 흩어지는 연기.
“TF팀 만든다면서요.”
“우리 본부에서… 꾸릴 거 같던데.”
“지수 선배도 오겠네. 그 팀도 맨날 궂은 일 선배한테 다 시키니까.”
작년에도 같이 했잖아요, 이번에 그 핑계로 화해하던가요. 지훈의 충고 아닌 충고에도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청하게 서있기만 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 생각한 지훈이 형, 하고 정한을 부르자 정한이 갑자기 고개를 팍 든다.
‘나 잠깐만… 담배 좀.’
‘뭐야아 나 추워어. 빨리 들어가자. 응?’
‘별로 안 춥잖아. 조금만 기다려 정한아.’
평소보다 조금 희게 질린 채 담배를 꺼내 무는 길쭉한 손가락. 약간 뻣뻣한 목소리와 몇 번의 시도에도 라이터가 안 켜지니까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내쉬던 얼굴. 초조할 만큼 벌벌 떨고 있던 홍지수.
‘빨리 가자아. 나 졸려.’
담배를 빼앗아서 내던진 다음엔 어쨌더라. 손목 안쪽의 얇은 살을 깨물면서 키스했던 것 같다. 어쩔 줄 몰라 갈피를 못 잡고 공중에서 나부끼던 손바닥. 그때 몸을 숙인 채 가만히 올려보자 결국 손목을 내준 채 담배는 포기했다. 손을 잡고 위로 올라갔었다. 싸구려 네온사인이 빛나는 모텔 4층. 호수는 기억 안 나고.
“아 개미친 윤정한.”
“네?”
“지훈아 나 먼저 가볼게.”
당황해하는 지훈을 두고 정한은 회사 쪽으로 향했다. 아직 월말. 지수가 있는 경영전략팀이 제일 바쁠 시기니까 아마 사무실에 있을 거다.
“윤대리님!”
“야식 배달 왔습니다~.”
편의점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들고 사무실로 갔더니 다들 놀란 얼굴을 한다. 힘드시죠? 저녁은 드신 거 같아서. 정한이 팀 뒤쪽에 있는 공용 테이블에 과자와 음료를 올려두고, 특별히 사온 트윅스 몇 개를 집어서 지수의 자리로 갔다. 누가 왔는지도 모르고 이어폰을 끼고 집중하고 있는 얼굴. 모니터 위로 불쑥 손등을 내밀자 놀라서 동그래진 시선이 올라온다. 정한은 애써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바빠? 그제야 이어폰을 주섬주섬 빼낸 지수가 상황을 파악했다.
“무슨 일 있어?”
“그냥, 근처에서 지훈이랑 밥 먹었는데 생각나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생각보단 유난스러운 행동이라 여겼는지 지수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둘이 친한 건 회사에서 다들 알지만 대놓고 홍대리님 잘 먹겠다고 인사를 하자 지수가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한은 살짝 상처 받았다. 그리고… 트윅스를 받아서 포장을 까는 지수의 손을 보던 정한이 헛기침을 했다.
“잠깐 얘기 할래?”
“너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니야.”
아마도. 아니 근데 우리가 겪은 것도 ‘무슨 일’ 아니야? 걱정스러운 지수의 표정이 뒤통수로도 따라 붙었다.
책상을 차지한 서류 더미를 보다가 함께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방음이 잘 되는 걸 알았지만 문까지 꼭꼭 닫은 정한이 몸을 돌려 자리에 앉아 지수를 바라봤다. 무엇 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홍지수는 간식을 먹을 때도 최선을 다해 씹는다. 이제 얘기하라는 듯 눈썹을 들어올리는 지수를 가만히 보다가, 정한은 말을 툭 던졌다.
“안 될 거 같아.”
“응?”
“없던 일로 하는 거.”
“뭘…”
되물으려던 지수의 입술이 일자로 꾹 다물린다. 며칠 얌전히 지내는가 싶더니 또 이 얘기냐는 표정에 정한은 일단 숨과 함께 말을 삼켰다. 그런 거 잘 못하는 거 알잖아. 대충 넘어가는 거. 정한은 살짝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비볐다. 이상하게 눈을 들어서 지수를 볼 수가 없다.
“나 신경 쓰여. 네가.”
이게 무슨 십대 고백도 아니고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귀 끝에 열이 올라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지수는 대답이 없었다. 정한은 겨우 지수의 손끝만 봤다. 작은 포장지를 쪽지 모양으로 가지런히 접고 꾹꾹 누르는 단정한 손톱. 답지 않게 자주 손을 잡고 장난을 쳤었다. 그런 거 어떻게 했었지? 정한은 그날 이후로 지수를 중심으로 제 세계가 조금씩 이상하게 틀어져 돌아간다는 걸 느꼈다.
“너 웃기다.”
침묵을 가르고 날아든 지수의 말이 서늘하다. 놀란 정한이 고개를 들어 지수를 보면, 지수는 여전히 차분한 낯이다. 마치 오랫동안 이 말을 준비라도 한 것처럼. 정한은 또 조금 억울했다. 너는 왜 이게 다 당연한 것처럼 굴어?
“기억도 안 나는 일 때문에 왜 이렇게까지 해?”
기억 조금 돌아왔는데, 여기서 말하면 얼굴이 터질 것 같아서 정한은 참았다. 지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꼿꼿하게 바른 자세. 길고 가느다란 목과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는 얼굴이 슬로우 모션처럼 들어왔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지수는 잔뜩 긴장해서 울 것 같았는데 그런 건 정말 꿈이었던 것처럼.
“말했잖아. 책임 같은 거 안 져도 된다고.”
“그런 거 아니야.”
“정한아. 내가 널 모르니.”
네가 착해서… 거기까지 말하고 지수는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쓸었다. 살짝 감기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정한은 어쩐지 속이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나한테까지 안 그래도 돼. 다 큰 성인 둘이서 그러는 게 엄청 큰일도 아니고. 나 이제 괜찮아.”
“괜찮다는 말 하지 마.”
그리고 너랑 내가 그냥 사이도 아닌데, 그게 왜 큰일이 아니야. 고집스럽게 대꾸해오는 정한을 보던 지수가 미간을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기억 못하는 거 미안해.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거 싫어.”
“그럼 뭐 어떻게 할 건데?”
또 똑같은 말 반복하잖아 우리. 이제 와서, 갑자기 사귀기라도 해? 지수의 말에 정한이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부터 해야 하면 하고.”
지수가 헛웃음을 쳤다. 어이가 없어 보이기도 했는데, 좀… 빡쳐 보였다. 정한이 눈을 굴리는데 지수의 말보다 행동이 빨랐다. 덥썩 정한의 손을 쥐더니 꼼꼼하게 깍지를 낀다. 정한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떴다.
“이런 거 할 수 있어?”
고집스럽게 단정한 셔츠 소매의 커프스. 지수의 엄지가 느릿느릿 정한의 손등을 쓸었다. 명백하게 의도를 가진 손길이 진득하다. 낯선 감각에 정한이 파드득 놀라자 지수가 입술을 끌어올렸다. 정한아. 넌 함부로… 아무 말이나 좀 하지 마. 속삭이는 듯한 말에 아까부터 계속 삐죽삐죽 울리던 경보가 울리는 기분이다. 자꾸만 냉소적으로 구는 지수에 대한 심술 같은 거. 무슨 말을 해도 벽처럼 다 튕겨내는, 영 그답지 못한 홍지수에 대한 반발심리.
정한은 막 빠져나가려는 지수의 손을 힘주어 꽉 쥐고 제쪽으로 끌어당겼다.
“……!”
코끝이 닿는다. 입술이 겹쳐질 만큼 가까워졌다. 놀라서 커진 지수의 까만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치는 게 보였다. 덜컥 저지른 일치고 막상 가까워지니 오히려 차분해진다. 시선에 온도가 있다면 온몸이 바싹 타버릴 것 같다. 나 아무 말 한 거 아닌데. 정한은 또 어떤 순간을 상기했다. 겨우 정한을 침대 위로 엎어놓고 숨을 몰아쉬던 지수의 허리를 끌어당기던 손. 놀라서 벌어지는 입술과 가까워서 흐릿해지던 얼굴 같은 거.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밖에서 똑똑 문을 두드렸다.
“대리님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팀장님이 사오셨어요.”
“악!”
정한이 세게 걷어차인 정강이를 쥐며 스르륵 무너지는 사이, 지수가 표정을 갈무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너무 아파서 볼썽사납게 콩콩거리는 정한을 살짝 노려본 지수가 갈게요 대답하더니 문고리를 쥔다. 너 진짜 너무 세게 찬 거 아냐?! 눈물까지 매단 정한에게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정한아 너는 진짜…”
나 좀 그만 상처 줘. 한숨처럼 흘러나오는 말에 정한이 의미를 읽기도 전에, 지수가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 * *
매년 대표가 염원하고 바라마지않기 때문에 꽤 중요한 행사로 취급받는 사내 채육대회 TF팀 발령이 났다. 작년이랑 구조 자체는 안 바뀌겠지만 장소 섭외와 소품, 식순 등 자잘하게 조율해야 할 사항이 많아서 꽤 여러 팀이 엮였다. 왜 우리 회사 체육대회에 거래처 대표가 보내는 응원 메시지 영상 같은 게 필요해? 마케팅팀 최승철 대리가 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합류했다.
총무팀이자 작년에 체육대회를 치렀던 유일한 담당자인 정한 역시 당연하게 TF팀으로 불려갔다. 어차피 사전에 필요한 인력을 꾸리는 데 정한의 입김도 발휘했다. 빡세게 구를 건데 일 잘하는 실무자들로 다 추렸고 거기엔 당연히 홍지수 대리도 포함이다. 지수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닌지 제일 큰 회의실을 개조해 만든 임시 TF팀 사무실에 간단히 짐을 챙겨 들어왔다. 첫 회의를 앞두고 자료를 돌리는 데 손이 스쳤다. 눈이 마주쳤는데 지수는 아는 척도 않았다. 파삭. 얇은 파일이 정한의 손 안에서 구겨졌다. 막내 찬이 대리님 그거.. 하고 얼버무리자 쌩하니 지수가 먼저 돌아섰다.
그렇게 회의실에서 입 맞출 뻔한 날 이후로 지수는 철저하게 정한을 피했다. 밥 먹으러 가자고 사무실 갈 때마다 다른 팀원이랑 약속이 있다거나 아예 외근으로 빠졌다. 퇴근할 때 얘기라도 좀 할라치면 야근을 한다던가 미팅을 잡아서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았다. 회사에서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라, 입술 깨물고 고민하던 윤정한이 TF팀 핑계로 홍지수를 데려온 것도 반쯤은 맞았다. 같이 일하면서도 얼마나 피할 수 있는지 보자.
“윤정한 대리님.”
탕비실에서 마주친 지수가 눈을 세모나게 떴다. 종이컵에 커피 스틱 두 봉이나 때려붓고 휘휘 젓던 정한이 시치미를 뗀다. 팔짱을 낀 지수가 입을 뗀다.
“제가 왜 대리님이랑 장소 답사를 가요. 저 담당도 아닌데.”
“왜요. 불만 있으시면 아까 회의 때 말씀하시지.”
“저 필요 없잖아요.”
“필요한데요? 운전 말동무도 해주셔야 되고.”
“너 장난해?”
나 바쁘다고. 지수가 버럭 짜증을 내자 그제야 정한이 몸을 돌려 제대로 지수를 돌아본다. 오랜만에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니 그제야 지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시선이 길어지자 지수가 눈을 돌렸다. 사붓하게 눈을 내리깔자 길게 빠진 눈매에서 우아한 소리가 날 것 같다. 정한은 스틱을 빼서 쓰레기통에 던졌다. 꿈에 몇 번 요요히 시선을 낮춘 지수가 나왔다. 별 것 하지 않았는데 윤정한은 새벽에 깨어나면 다시 잠을 못 잤다. 벌게진 눈가와 물기 어린 목소리나 피부의 기억이 불현듯 찾아올 때가 있었다. 근데 회사에 가면 냉랭한 얼굴조차 몇 번 보여주지 않으니 속이 바짝 탔다.
뭐든 해보고 싶었다.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고 장난치는 거 말고. 그게 아닌 범주의 어떤 관계들을 시작해보고 싶다고. 기억이 안 나는 하룻밤의 일로 이런 마음이 들 수도 있는 건가? 그 부분에서 윤정한 또한 매일 밤마다 삽질을 해가며 자괴감이 들었지만 의외로 술 먹다가 계시처럼 한 마디 들은 게 확 가슴에 박혔다. 사람 마음 어떻게 다 칼로 재듯이 나눠? 하다보면 하게 돼요. 연애에 관해 나온 말은 아니었지만 대충 적용이 가능했다. 정한은 애초부터 지수에 대해서는 유독 물렀고 경계가 낮아 대부분을 허용해왔다. 그것도 얼마 전에야 인지했다.
그런데 도대체 홍지수는… 무슨 생각인지. 차라리 멀쩡한 얼굴로 없는 셈 치자고 말이라도 할 때가 나았다. 정한을 보면 아닌 척 도망치기 바빠서 제대로 된 말도 몇 주 만에 처음이다.
“요즘 왜 자꾸 나 피해?”
“내가 언제…”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 너무 대놓고 피하지 않았어?”
저도 찔린 게 있어 아니라는 말은 못한다. 드물게 당황해하는 지수를 보면 또 한 발짝 물러나게 된다. 정한이 장난스럽게 몸을 기웃거렸다. 나 싫어? 지수가 한심한 표정을 짓는다. 너는 진짜, 또 말을 하다가 마는 지수를 보다 정한이 얼른 낚아챈다.
“피하지 마.”
“…….”
“나 싫어하지도 말고.”
물끄러미 저를 보는 지수의 눈빛은 읽을 수가 없다. 복잡한 얼굴. 몇 번 입을 뗐다 닫으며 결국 아무 말 없이 마른세수만 한다.
“같이 답사 가. 응?”
답사 장소는 멀지 않은데, 계약 얘기를 해야 할 부지 주인이 서울 외곽에 살고 있어 아쉬운 쪽인 여기서 직접 찾아가야 했다. 외근이 아니라 거의 출장 개념인 거다. 얼굴을 덮은 길쭉한 손가락 사이로 지수의 눈이 비스듬하게 보였다. 정한아.
“…너 진짜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그건 나돈데. 어쨌든 어렵게 떨어진 승낙에 정한은 종이컵을 입에 문 채 싱긋 웃었다. 그에 비해 지수는 조금 침울해 보였다.
“저녁 안 먹어도 괜찮아?”
“괜찮아. 너는?”
나도. 지수가 정한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다. 그럼 그냥 빨리 가자. 아침 일찍부터 움직인 탓에 둘 다 잔뜩 지쳤다. 미팅은 나쁘지 않았고 체육대회를 진행할 만한 공터를 빌리는 것도 구두로는 계약이 됐다. 워낙 말이 많고 잰체하길 좋아하는 땅주인이라 비위를 맞추는 게 좀 힘들어서 그렇지만 온갖 사회생활로 갈고닦은 윤정한의 애티튜드가 빛을 발했다.
그 다음엔 갑자기 섭외가수 관련 미팅이 잡히는 바람에 급히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까다로운 조건을 살살 조율하는 건 정한이, 계약금 관련한 네고는 지수가 맡았다. 도대체 무슨 사내 체육대회에 가수까지 섭외를 해? 대학교 축제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진작 다 마셔서 얼음만 남은 컵을 구기며 정한이 하소연하면 지수가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그럼 슬슬 가보겠습니다, 미팅을 정리하려는데 벌써 가시냐며 넉살 좋은 매니지먼트 직원들이 둘을 붙잡았다. 저희 지금 저녁 먹을 건데 같이 드시고 가세요. 거절하려는 지수를 정한이 살살 달랬다. 우리 아직 계약서 안 썼어. 지수가 눈만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정한도 정한 나름대로 짜증이 좀 났다. 빨리 마치고 지수를 바래다주면서 진지하게 얘기 좀 해보려고 했는데, 얼굴 마주하고 제대로 얘기조차 못했다. 아 진짜 돈 벌어먹기 쉽지가 않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 잔 받으세요.”
“아….”
내밀어진 잔을 보던 정한이 눈물과 함께 술을 삼켰다. 옆에 앉은 지수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조심하라는 협박성 경고가 확실히 붙어 있었는데 당연히 홍지수한테도 잔이 건네졌다. 예의상 한번 건배를 한 지수가 피곤한 낯으로 잔을 입에 댔다.
“그거 줘.”
“괜찮아.”
술이 조금 들어가면 금방 얼굴이 붉어지는 지수는 사람들의 타깃이 되곤 했다. 정한이 말없이 지수의 잔을 슥 빼가서 제 물컵에 털어놓곤 물을 따라준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지수가 중얼거리는 말에 정한도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이거 좀, 오버 같나? 정작 술 조심해야 하는 건 본인이긴 한데도. 아니나 다를까 지수가 속삭였다.
“너 술 조심히 마셔.”
“아 당연하지.”
좁은 자리에 누가 더 들어오면서 지수가 정한의 곁으로 더 붙었다. 손등과 허벅지가 살짝 닿으며 스쳤다. 정한이 잔을 들이켰다. 벌써부터 지수의 뒷목에 붉은 물이 들었다.
매니지먼트사가 술 잘 먹는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진짜 장난이 아니었다. 2차, 3차까지 내리 이어지는 술자리-도대체 내부 회식에 왜 자꾸 외부인인 저희를 데려가시려고 하는 건지-를 겨우 꾸벅꾸벅 인사하며 빠져나온 정한과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편의점?”
“어어.”
숙취해소제는 나눠 마셨다. 어쨌든 둘 다 조절하며 마신 탓에 인사불성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대리 부르면 되긴 하는데… 회사에 차 반납하고 갈 생각을 하니까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카운터에 서있던 정한이 슥 내밀어지는 아이스크림 두 개를 보고 지수를 올려본다. 이것도 계산해 주세요. 그리고 담배까지.
“제대로 밥도 못 먹고 술만 먹었네.”
“내일 위에 구멍 뚫릴 거 같은데.”
이러다 죽지. 앓는 소리를 내는 정한에 지수가 가볍게 웃는다. 편의점 앞에 펴둔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금세 사위가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술집을 드나드는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다. 정한은 금세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손에 쥔 채 테이블에 엎드려 지수를 바라봤다. 슬쩍 저를 훔쳐봤다가, 느릿느릿 눈을 피하는 홍지수의 눈.
“부담스러워?”
“아니야 그런 거.”
“이러고 있으니까 술 깬다.”
별로 취하지도 않았지만. 잘 넘긴 머리칼이 하루가 꼬박 지나자 살짝 흐트러졌다. 매끈한 이마와 콧대로 떨어지는 옆얼굴을 빤히 보고 있으면 지수가 괜히 고개를 돌렸다. 이런 간지러운 시간을 도무지 못 견디겠다는 듯이. 우리 예전엔 어떻게 이런 시간들을 보냈었지? 정한은 과거를 천천히 돌이켜 보았다.
바짝 군기가 들어서 칼같이 다린 정장을 입고 출근하던 시절. 길이 들지 않은 구두 때문에 뒤꿈치가 다 까지니까 지수는 몰래 갖고 있던 슬리퍼를 줬다. 사무실에선 이거 신고 다녀. 팀장한테 엄청 깨진 날 드물게 눈물콧물 삼키면서 쭈그려 앉아있던 정한을 찾아와 말없이 옆에서 앉아주던 지수. 중요한 발표나 계약이 있는 날에는 꼭 신경성 위염이 도지는 걸 알아서 물과 약을 챙겨주던 친절. 연말 행사의 MC를 울며 겨자 먹기로 맡은 정한의 리허설을 도와줬었다. 헤어와 의상도 체크해줬고, 잘 끝낸 후 긴장이 풀린 정한의 머리를 안아줬고.
반대의 경우도 있었겠지만, 정한은 지수가 해준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곁에 와서 서 있던 시간들을 헤아리면 그냥 정한의 일상 대부분이다. 새삼스럽게. 정말 새삼스럽게도.
“지수야.”
이제야 알아차린 것처럼.
부드럽게 풀어진 분위기는 어떤 전초전 같다. 지수가 눈을 깜빡였다. 정한은 쏟아지는 머리칼을 넘기며 지수와 눈을 마주쳤다. 잘 차려입은 직장인 둘이서 마주보고 앉아 이런 분위기를 내는 게 웃겼지만 진지했다. 정한이 가만히 테이블 위로 뻗은 손을 움직여 지수의 손을 잡았다. 조금 떨던 지수가 그대로 잡히게 두자, 용기가 생긴 정한이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둘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여기 밖이야.”
“알아. 근데 아무도 없잖아.”
너머의 편의점 알바생은 다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지수는 조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여전히 믿지 못하는 것처럼. 정한은 최대한 시선을 부드럽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미 좀 녹아있는 것 같은데, 면역이 없는 사람처럼 지수가 좀 쑥스러워했다. 나 진짜 너를 모르겠어. 손 크기에 비해 얇은 손목이 단숨에 잡혔다. 이전과는 또 분위기가 달랐다.
“정한아 우리 가야 돼. 더 늦으면…”
“지수야.”
다시 코끝이 닿는다. 정한은 바로 근처에서 파스스 떨리는 속눈썹을 내려봤다. 그리 길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나비 같다. 정한은 가슴이 빨리 뛰는 걸 느꼈다. 손목을 잡은 손바닥에서도 맥박이 느껴지는 것 같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정도로. 지수가 겨우 중얼거렸다. 이거 이상해. 갑자기 너가 나한테 왜…. 계속해서 말했지만 정한도 자기 속을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심히 물을 건네주던 아침의 지수를 떠올리면 어금니가 간지럽고 배 안 어딘가가 나비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정한은 기꺼이 전환점으로 삼기로 했다. 윤정한은 이런 기회를 잡는 데에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지수의 입장이 궁금했다. 얼굴을 붉히며 기를 쓰고 고개를 안 들려는 걸 보면 감이 잡히는데 도통 얘기를 안 하려고 들어서. 정한은 지수의 턱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놀라서 위로 치켜들자 그제야 시선이 마주친다. 놀라서 순하게 살짝 벌어진 입술 끝 잘 빠진 꼬리에도 가볍게 입술을 누른다.
“야 너 진짜…”
손목을 쥔 손을 가볍게 틀어 깍지를 끼고 끌어당기자 어깨와 가슴이 붙었다. 입술이 닿는다.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지수의 핸드폰이 커다랗게 울렸다.
“악!”
“미안. 여보세요?”
다시 한 번 홍지수의 발길질에 뒤로 나동그라진 정한이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구세주처럼 폰을 양손으로 꼭 쥔 지수가 네, 팀장님 하며 빠른 걸음걸이로 테이블을 벗어난다. 플라스틱 의자에서 볼품없이 떨어진 정한이 옷을 탁탁 털었다. 간만에 담배 말리네. 테이블 위에 엉망으로 흐트러진 지수의 가방과 담배를 챙겨주려고 몸을 일으켰을 때, 정한의 시선에 삐죽이 튀어나온 서류 하나가 걸렸다.
간단히 보고 겸 통화를 마친 지수가 다시 자리에 돌아왔을 때, 정한은 팔짱을 낀 채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가방 위에 놓인 서류를 보고 지수는 상황을 단박에 이해했다.
“너 이직해?”
뽑아둔 서류들은 대부분 비슷한 조건이 나열된 회사들의 자료들이다.
“쓴 것도 없어.”
“쓸 생각은 있었다는 거네?”
“너도 할 수 있으면 이직하고 싶다며.”
“야, 그건 일이 힘들 때 하는 소리지. 그리고 진짜 생각 있었으면 난 너한테 제일 먼저 얘기했어.”
“나도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는데.”
“그러니까 왜 나한텐 말을 안 하는데?”
대답하기도 전에 정한이 답을 덜컥 알아차린다. 지수가 낭패라는 표정을 지어서 확실해졌다.
“너 나 때문에 그러는 거구나.”
“정한아.”
스스로 말을 꺼내면서 상처를 받은 정한의 표정에 지수가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정적이 가로질렀다.
“아직 쓴 것도 없고, 진지하게 생각한 거 아니야.”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
정한이 뭔가를 울컥 참는 표정으로 말을 짓씹었다. 불편하다고 말했으면 안 했을 거잖아. 다른 데로 가고 싶을 만큼 싫었다고 나한테 말이라도 했으면, 내가 얼마나, 너한테 바보같이. 말이 드문드문 시꺼먼 바닥 뒤로 내던져진다.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니야.”
그리고는 뭔가 고민하더니 최악이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지수는 더 이상 정한의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정한이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그 말 하지 말라고 했지.”
“내가 어떻게 안 해. 네가 나 때문에 이직하려고-”
“너 때문 아니야.”
말을 끊어낸 지수가 숨을 골랐다. 아까의 분위기는 오간 데 없이 싸늘해진 공기 속에서 말을 꺼내는 게 비참했다.
“나 때문이야.”
“홍지수 그걸 믿으라고…”
“나 너 좋아해.”
그리곤 고개를 마구 젓더니 말을 고쳤다.
“예전부터 좋아했었어.”
처음부터 친구인 적 없었어. 그 말에 정한이 멍하니 지수를 바라봤다. 엉망으로 구겨진 종이 위로 툭툭 눈물이 번졌다. 홍지수의 시간은 더 예전으로 돌아간다. 한참, 아주 한참 전으로.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작위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예전부터 좀 애늙은이 같은 부분이 있었던 지수는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사랑에 빠지는 건 아주 얕고 표면적인 거라고 여겼다. 그럴 수 있겠지만 난 아니야. 사실 그럴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우연히 공강에 친구를 따라간 동아리실에서 그 말이 산산조각 나는 경험을 했다. 불편한 자세로 소파에 누워 쪽잠을 자고 있는 윤정한의 얼굴을 보고. 세상의 구심점이 그 애를 향해 빨려들어 가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잠든 얼굴이 하얗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 길로 관심도 없었던 영화비평 동아리에 가입을 했다. 좀처럼 친해지기는 어려웠다. 생각보다 과 생활도 동아리 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는 정한 때문에 속이 탔다. 맘만 먹으면 편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캘리포니아 선샤인 출신도 사랑에 빠지면 이렇게 되는구나. 지수의 속앓이를 아는 유일한 친구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졸업할 때쯤에 느지막이 힌트 하나를 줬다. 정한이 준비하고 있다는 회사는 다행히 지수가 지원할 수 있는 부서의 공채도 열려 있었다. 좀 더 높은 스펙도 되지 않나 의아해하던 친구들의 말에도 웃기만 했다. 입사 동기가 되어서 놀란 얼굴로 먼저 인사해오는 정한을 만난 날에는 집에서 혼자 조금 울었다.
마음은 들불 같아서 번지는 건 쉽고 꺼지는 건 너무 어렵다. 지수는 최대한 조심하려고 했다. 좋은 친구인 만큼 포기하기 쉽지 않았다. 정한이 너무 좋은 사람이어서 더 그랬다. 욕심이 자꾸 나서 힘들었다. 도저히 못 견딜 거 같은 날에는 연차를 내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잘 쉬고 왔어? 다정하게 물어오는 얼굴엔 차마 쉬는 게 고작 회사와 너를 피하는 거란 말을 하지 못했다.
“네가 기억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입맞춰오는 정한을 마주봤을 땐 저열하리만치 기뻤다. 입술과 손길이 닿은 곳곳이 뜨거워서 온몸이 묶인 것 같았다. 모든 말은 핑계지만 오랜 짝사랑의 보답 같아서 눈을 감고 외면했다. 우는 지수의 뺨을 연신 닦아주고 입술을 맞춰주는 정한은 눈물 나게 다정해서 죽을 때까지 이 비밀을 갖고 가고 싶었다.
“네가 다 기억했으면 내가 싫었을걸.”
좋아한다고 몇 번을 말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종내엔 사랑한다고도 말했던 것 같다. 정한은 웃으며 뺨에 입술을 맞춰줬다. 이걸 기억하지 못할 거라니 속이 끊어지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못할 거라서 이런 말을 대담하게 뱉었으니까.
다음날 아연실색한 얼굴을 보기 싫어서 도망가려고 했는데, 잠에 절어 뒤척이는 얼굴을 보다가 시간이 흘렀다. 조심스럽게 이마와 뺨과 입술을 만지면서. 미안하다고도 했던 것 같다. 눈을 떠서 예상한 대로 당황하는 걸 뒤돌아 외면하면서 눈물을 겨우 참았다.
“그냥 없던 일로 하고 싶었어. 네가 신경 쓰는 것도 싫고, 괜히 죄책감이나 책임감 때문에 잘해주는 것도 싫어서.”
그럼 내가 너무 비참하니까. 머뭇거리며 그날을 얘기하려는 정한이 미웠다. 그냥 아무 일 없이 예전처럼 돌아가자는 말에 자꾸만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게 저만이 아닌 것 같아서 괜히 기대하게 됐다. 그러면서도 다정한 성정에 기대어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매일매일 정신이 갉아 먹혔다.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제게 잘해주는 정한을 볼 때마다 근원을 의심하다보니 마음이 힘들었다.
“그냥… 그때 그러지 말 걸.”
욕심이 나서 그랬어. 어쩌면 너도 나랑 비슷해서, 그래서 나한테 입맞춘 게 아닐까? 그 기대를 없앨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잖아. 좋아하니까. 너무 좋아하니까. 울음처럼 쏟아지는 지수의 고백 가운데에서 정한이 서 있었다. 무서워서 정한을 볼 수도 없었다. 받을 사람이 없는 애정은 돌아올 땐 기괴한 모양을 했다. 네가 잘해줘도,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굴 때에도 불안해서. 늘 평온하고 상냥했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온몸을 떨며 고백해오는 홍지수만 서 있었다. 어떤 땐 네가 그날의 날 기억하면서 날 원하길 바라면서도 절대로 기억하길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 그런 거야. 못 견디겠어서.”
네가 아니라 나를, 내 애정을 못 견디겠어서.
지수가 엉망으로 젖은 얼굴을 양손으로 덮었다. 진짜 말없이 가려고 한 건 아니야. 뭔가 정해지면 그래도 말하려고 했어. 그래도 난 네 친구니까. 그것만큼은, 그거라도.
여전히 정한은 답이 없었다. 지수는 이제 조금 억울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정한아. 그래도 얼굴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술이 너무 단번에 깨서 어질어질했다.
“좋아해.”
함께한 날들이 천천히 머릿속에서 필름처럼 차르륵 돌아갔다. 어쩌면 다시 안 올 지도 모르는 날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속은 후련했다. 진짜 미련 없이… 아무것도 안 바라고.
털썩.
그때 들리는 소리에 지수가 시선을 들었다가 깜짝 놀란다.
“정한아.”
정한이 무릎을 꿇은 채 지수를 올려보고 있었다. 너 뭐하는 거야, 바닥 더러워. 얼른 다가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정한이 몸에 힘을 꾹 줬다. 얘 왜 이래.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리는 윤정한. 옷이 다 더러워지는데 그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웃고 있었다.
“너… 미쳤어?”
정한이 고개를 가볍게 갸웃거렸다. 지수가 오래 사랑한 예쁘고 반짝이는 눈이 화사하게 접혔다. 가로등 빛이 나른하게 두 사람의 기묘한 대치를 감쌌다. 어쩔 줄 몰라서 정한의 어깨를 만졌다가, 얼굴과 목을 만지는 지수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낸다. 커다란 손에 뺨을 한 번 부빈 정한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수야.”
미안해.
“네 고백은 못 받아줄 거 같아.”
그 순간,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음에도, 홍지수는 그대로 윤정한의 뺨을 좀.. 올려붙이고 싶었다.
* * *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어… 꼬시는 거지?”
아침 일찍부터 차를 끌고 지수의 집 앞까지 데리러 온 정한이 가볍게 윙크한다. 너 선보러 가? 지수의 물음에 정한이 세상 상처 받은 시늉을 했다. 어딜 가길래 그렇게 멋을 부렸어?
“아 뭐래 홍지수. 너한테 잘보이려고 그런 거지!”
“아니 그러니까 왜…”
일단 타긴 탔다. 익숙하게 벨트를 채워주려는 걸 마다하고 직접 찼더니 뺨을 부풀린다. 귀엽긴 한데 갑자기 왜 이래.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대, 정한아.”
“너 진짜 너무한다.”
“나 좀 무서워.”
“너는 내가 뭐만 하면 무섭대.”
라디오를 틀던 지수가 가볍게 눈썹을 찡그렸다. 너 향수도 뿌렸어? 어엉 근데 이거 향 좋아하는 거 맞아? 좋아하긴 하는데.. 그럼 됐어. 유난히 얼굴이 편 윤정한.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지수가 버벅였다.
“나 어제 차인 거 아니었어?”
“으음, 뭐.”
대답하는 정한의 얼굴과 목소리가 평온했다. 어제 그러고 쪽팔려서 죽고 싶은 지수를 기어이 택시에 태워 보내기까지 했던 정한이었다. 그냥 무단결근하고 퇴사할까 생각했지만 먹고사는 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미루고 미루다 터덜터덜 퀭한 얼굴로 나왔는데 일찍부터 정한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들어보니까 아직 아닌 거 같아.”
장난스럽던 목소리가 느릿하게 진지해졌다. 지수는 무릎 위에 손을 올려두고 눈을 굴렸다. 살짝 지수를 바라보며 웃는 눈길이 너무 다정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대충 분위기가 뭔진 알겠는데… 윤정한이 이런 근사한 얼굴을 했었던가?
“내가 좀 더 너 쫓아다닐게.”
“무슨…”
“좀 더 너한테 매달리고 막 보챌게.”
내가 지금 너 좋다고 해도 너 못 믿을 거잖아. 지수가 눈을 깜빡였다. 정한이 멍한 지수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 지금 얼굴 볼만하다. 그제야 뒤늦게 뺨을 감싸며 표정 관리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좀 어리둥절했다. 정한이 햇살에 눈이 부신 사람처럼 웃는다.
“나 좋아해달라고 만나달라고 그럴 거야.”
네 시간을 내가 상쇄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노력할게 내가. 천천히 지수에게 떨어지는 말을 곱씹던 지수가, 너무 놀라서 정한을 돌아보았다. 약간 민망한 듯 웃으면서도 지수와 눈을 꼭 맞춘다.
“그러니까 맘껏 누려 지수야.”
“무슨…”
어이가 없어 말을 못 하는데도 정한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네가 좀 덜 억울해질 때까지. 내가 너 좋아한다고 하는 거 믿을 수 있을 때까지. 기억 못하는 나 용서해줄 수 있을 때까지.
“내가 기다리고 좋아하고 있을게.”
그러다 좀 괜찮을 거 같다 싶을 때 있잖아. 정한이 살짝 애교를 부리듯 덧붙였다. 아 얘 괜찮은데? 나쁘지 않은데? 그럴 때가 되면은. 응?
“그때 내가 고백하면 받아주라.”
그래도 너무 오래 안 걸리면 좋겠는데, 일단 그건 내가 잘 기다려 볼게. 그러더니 민망하긴 한 모양인지 라디오 볼륨을 확 키운다. 말없이 정한을 물끄러미 보다가 새빨개진 귀와 뺨을 발견한 지수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 웃지 마. 나 지금 약간 좀 죽고 싶어. 웅얼대던 정한이 못 참고 창문을 열고 아악 소리를 지른다. 큰 소리도 잘 못 내면서. 신호가 멈출 때마다 핸들에 이마를 꽝 박으면서도 고백을 물리진 않는다.
지수는 끝내 대답하는 대신 웃기만 했다. 그게 맞긴 한데도 약간 야속하단 맘이 들어서 정한은… 이게 업보인가 했다. 지수는 그제야 맘이 놓여서, 조금씩 막히는 출근길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어제 잠을 설친 탓에 곤히 잠든 지수의 새근거리는 뺨.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고인 그 얼굴을, 정한은 아주 오랫동안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 *
기어이 역전골이 터지자 드물게 엄청난 함성소리가 쏟아진다. 그대로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불고, 같은 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저마다 경기장으로 뛰어나왔다. 커피를 물고 있던 지훈이 감탄했다.
“정한이 형 날아다니는데요?”
“예전부터 축구는 잘했으니까.”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는 경기였다. 이게 회사 체육대회 축구 경기인가? 돈 주고 봐야할 것 같은데. 지훈의 말마따나 임원들도 아주 흡족한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고 TF팀으로서 이 체육대회에 지난한 시간과 체력을 바친 지수로서도 만족스러웠다. 상대팀 에이스였던 승철이 아쉬워서 바닥을 굴렀다. 그 사이에 승리의 주역인 윤정한-2:1에서 3:2로 만든 연속 두 골의 주인공-이 헹가래를 받으며 웃고 있었다.
그다음 순서는 다들 관심 밖이었다. 어차피 임원들끼리 짜고 치는 경품 뽑기 순서와 시상, 그리고 초대가수의 공연이 끝났을 때는 이미 해까지 져 있었다. 회식할 사람은 따로 이동하면 된답니다. 차마 거기까진 못 따라가겠어서 고개를 저은 지수가 기지개를 켜며 핸드폰을 봤다.
“홍지수!”
아직도 뺨이 붉은 정한이 지수에게로 달려왔다. MVP까지 받은 정한은 지수와 팀이 갈렸다.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지수와 달리 정한은 꽤 아쉬워했다. 기왕 같은 팀이면 좋잖아. 제비뽑기를 한 지수의 팀장님을 한동안 원망하면서도 둘은 착실히 체육대회 준비를 함께 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가자.”
차는 두고 와서 간만에 근처에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새 씻고 왔는지 정한에게서 깨끗한 비누 냄새가 났다. 젖은 머리가 흐트러진 부분을 살짝 고쳐주자 정한이 걷다 말고 우뚝 멈췄다. 지수가 어이 없이 웃었다. 얘 또 왜이래.
“나 기대해?”
“아 진짜 미쳤나봐.”
장난스럽게 눈썹을 휘면서 가슴 위에 손을 올려 심쿵한 포즈를 취하는 윤정한. 이제 좀 익숙해질 것 같기도 한데, 불이 꺼져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지는 아래에선 마치 프러포즈라도 앞둔 영화배우처럼 느껴졌다. 장난 그만하고 빨리 오란 말에 정한이 털레털레 나란히 걸어왔다.
“머리 많이 길었다.”
“그치. 나 탈색할까봐. 오늘 골 넣었더니 해도 된대 울 팀장님이.”
“무슨 색?”
“무슨 색 할까? 뭐 원하는 색 있어?”
그 말에 잠깐 고민하던 지수가 웃었다. 왜애. 고개를 살짝 저으며 한다는 말이,
“너 대학생 때 자주 염색했었잖아. 노란색에 빨간색에, 분홍색도 했었던 거 같은데.”
나 그래서 처음에 너 무슨 아이돌 하려는 줄 알았어. 웃음 섞인 말을 뱉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어, 지수가 정한을 돌아봤다. 안 와? 그렇게 말하려는데 정한의 눈빛이 너무 달았다. 저는 기억도 안 나는 시간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간직하는 지수의 애정을 확인할 때마다, 정한은 이런 표정을 지었다. 나한텐 이게 일상이야. 지수가 당황해서 그런 말을 하니까 금방이라도 키스하고 싶다는 얼굴을 했고.
그리고는 한숨을 쉬면서 지수를 꼭 끌어안는다. 나 언제 너 따라잡아. 그 말에 지수가 정한의 팔 안에서 웃음을 삼켰다.
“주말에 뭐할 거야?”
“아직은 별 생각 없어.”
“영화 보러 갈래?”
“너 안 피곤하겠어?”
괜찮다는 듯이 웃는 정한의 얼굴이 아직도 붉었다. 나 오늘 잘했으니까 하고 싶은 거 같이 해줘. 아이처럼 떼쓰듯 말하면서도 살짝 깃든 긴장을 지수는 금방 읽었다. 그건 익숙하게 겪어온 지수의 사랑이어서. 그걸 확인하는 게 신기했고, 또…
“좋아.”
그 말 한 마디에 정한의 얼굴이 밝아진다. 지수는 말없이 손을 내밀어 정한의 손을 잡았다. 금세 어깨에 얼굴을 기대오며 뭐 볼까? 하고 애교를 부리는 정한을 보면서. 정한이 기다리고, 또 지수가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날이 멀지 않았음을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