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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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토끼전

디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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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귓가에 아롱거리는 노랫가락에 정한은 헉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간이침대 곁 테이블에서 라디오의 무전 신호가 지지직거리고 있었다.

 

“포인트 104, 포인트 104, 응답하라.”

 

폴리 합성 이불을 부시럭거리며 헤치고 일어난 정한은 마른세수를 하며 팔을 길게 뻗어 몇 번을 더듬고서야 마침내 간이 협탁 위의 무선기를 손안에 쥐었다.

 

“여기는 포인트 104, 여기는 포인트 104.”

“금일 달의 상황을 보고하라.”

 

정한은 전자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투박한 전자체로 나열된 숫자와 알파벳들은 시시각각 바뀌는 달의 상황을 표현하는 중요한 정보였다. 현재 시각, 날씨, 습도, 표면기온, 방사능 수치 등등이 투박하고 일목요연하게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정한은 모니터를 응시하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보고 시간이 될 때까지 잠을 자다니. 기함할만한 일이었다.

 

“현재 시각 8시 50분 69초를 지나고 있다. 현재 달 표면기온 85K … 특이사항 없음. 금일 오전동안 외부 관찰 및 내부 연구 실험, 오후에는 외부 탐사 예정이다. 이상 문포인트 104 보고 완료.”

“목소리가 좋지 않은데, 문제없나?”

“네, 괜찮습니다.”

 

막 잠에서 깨었다고 이실직고를 할 수는 없으니 기지 통신망의 상태가 별로라며 대충 둘러댔다. 통신망 상태 이상은 낙후가 원인일 텐데, 물자나 장비를 주겠다는 말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짤막한 브리핑이 끝나자 통신은 끊겼고 정한은 무전기를 쥔 채로 책상 앞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스르르 감기는 눈 위로 어린 시절의 모습이 덧그려졌다. 다시 오래된 동요가 아스라이 울리기 시작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도망치라. 무조건 달리라. 멀리, 아주 멀리. 누구도 못 찾게. 무슨 소리가 나도 절대 돌아보디 말고, 앞만 보고 가라. 알겠디? 에미가 같이 못 가도, 니 혼자서라도 가는 기라. 알았니?’

‘한아, 어서 가, 어서 가라! 정한아 달려!’

 

여인의 처절한 절규를 찢으며 울려 퍼지는 총성. 탕탕. 심장을 관통하는 듯한 날카로운 탄도 소리에 정한은 경기를 일으키듯 다시 깨었다.

 

헉! 거친 한숨과 함께 깨어났다.

손목에 착용한 스마트 워치가 정한의 이상을 감지한 듯 빨간 하트를 깜빡였다. 순간적으로 치솟은 맥박이 100회 이상을 찍었다. 발작과도 같은 현재 상태를, 시계는 자동으로 위성에 전송할 것이다. 정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 누적되면 정한은 본국 송환이 결정될지도 몰랐다.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로. 숨을 고르자 몸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동시에 엄습한 어둠에 정한은 움츠러들었다.

모두 버리고 떠나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유일한 미련과 후회의 시간은 때때로 정한을 찾아왔지만, 그것이 그를 괴롭게 하진 못했다. 변절의 길을 선택하고 타국의 비행정에 올라서면서 죄책감과 부채의식은 평생을 지고 가겠노라 약속했었으니까. 그런데 왜 이제와 그때 남겨두고 떠나야만 했던 것이 머릿속을 헤집는지 알 수 없었다. 다소 더러운 기분으로 몸을 일으킨 정한은 카페인에 기대어 잠을 깨우려 뜨거운 물에 인스턴트커피를 녹였다.

 

 

 

 

 

낭만토끼전

浪漫兎子傳

w.디어데이

 

 

 

 

 

하루의 시작은 보고서 작성과 함께였다. 간단한 아침과 커피를 들며 외부 관찰 모니터로 비추이는 관할 구역의 상세 보고를 작성하고, 오후 탐사 계획 경로를 조정하고 확정한다. 중요하지만 대단하지 않은 업무가 습관처럼 손에 익자 정한은 루틴에 몇 가지 작업을 추가했다. 무전 탐색은 그중 하나였다. 혹시라도 적진의 주파수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가능성에 시작한 일이었다. 일정 광역대의 주파수를 탐색하는 것은 그다지 많은 수고가 들지도 않았다. 스핀 버튼 위에 손가락을 얹고 미묘한 조정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달은 현재 지구 인류가 치루는 정전(靜戰; Quiet War)의 최전선이라 보아도 무방했고, 각국 콜로니(달 기지)에서는 온갖 첨단기술이 집약된 정보전이 절정이었다.

 

기원 2213년. 빠르게 망가지는 지구만큼이나 인류 간의 불상사도 심각했다. 가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로 대기근이 발생하고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민심이 어지럽고 각국의 이익이 상충하는 가운데 이념과 사상, 종교 등의 다양한 명분이 얽혀 새로운 국가와 연합이 등장했고 전쟁이 발발했다. 초고도 문명사회에서 치러지는 전쟁의 요점은 디지털 장악이었다. 숫자를 지배하는 자,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리니. 그러나 그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극명했다. 암호화 코드나 바이러스 등에 감염되면 유선 케이블과 무선 체인으로 연결된 기계들은 한꺼번에 무너졌다. 고대 시가에서나 등장하는 적벽의 화공전 마냥.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단순한 패배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자 코인 떡락으로 한순간에 국가가 부도나고, 전시 체계에 샷 다운이 걸리고, 좌표를 특정할 수 없게 된 미사일 유도 시스템 앞에서 핵무기는 돼지 목의 진주였다.

각국에서 서로를 겨냥하고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사태에 3차 세계대전은 시작과 동시에 허무하게 끝났다. 화성 개발을 위해선 고도의 문명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 발판을 무너뜨려 인류 전부가 멸망할 수는 없기에, 디지털 공격을 유보하는 협정을 맺고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이백 아니 삼백 년 전쯤의 모습으로 회귀하여. 지구와 인류는 종이와 인쇄, 총과 탱크가 주류였던 아날로그 사회로 돌아갔다.

 

신(新)국가의 투자는 달로 향했다. 화성 개발에 앞서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달 기지건설을 두고 각국의 눈치 싸움과 소리 없는 정보전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군인은 달의 영역과 자원을 두고 싸우고, 기술자들은 기지건설과 화성 기지화 개발을 착수했다.

정한은 그 군인 중 한 명이었다. 달의 영역전과 자원전은 어떠하냐고? 그것은 또 지극히 아날로그적이었다. 기술 영역에만 이중삼중의 암호 체계에 싸인 문명이 탑처럼 쌓여갔고, 정한처럼 달에 파견되는 군인들은 이곳저곳에서 실험이나 연구의뢰를 진행하고 보고하는 동시에 적진을 발견하면 죽이고 그들의 영역과 자료를 빼앗는 전천후 업무를 해야 했다. 극상의 난이도를 반영하듯, 통계상으로 달은 고급인력의 무덤이었다.

 

우주복을 입은 정한은 문을 잠그고 기지를 나섰다. 곳곳에 야트막하고 가파른 언덕들이 줄지어 있었다. 개중에는 높은 곳도 있었고, 푹 꺼져서 밑바닥이 드러난 호수처럼 보이는 곳도 있었다. 그것은 전부 크레이터였다. 달의 후면은 크고 작은 크레이터가 가득했다. 칭동 현상으로 지구에서는 단 9퍼센트 밖에는 보이지 않는 이곳에선 영역과 자원을 두고 피 튀기는 전쟁이 한창이었고, 파견 요원들은 크레이터로 형성된 고지대와 크고 작게 쌓인 돌의 엄폐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완벽하게 숨고 먼저 발견할 것. 주요 생존 골자는 그랬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아낼 수 있는 방패의 싸움인 셈이었다.

 

헬멧 유리 너머로 보이는 달은 오늘도 대기 한 점 없는 새까만 우주 하늘과 오르락 내리락 펼쳐진 회색 대지와 뿌옇게 날리는 먼지들이 전부였다. 갑자기 발밑이 떨려옴과 동시에 탐색 경로가 설정되었다. 달의 지진은 지구와는 다르다. 지구에서 10분 남짓이라면 달은 수 시간에 달했다. 어차피 지구만큼의 위력을 갖지 않으니 탐사 계획엔 변경이 없었다. 크고 거대한 분화구를 돌아가는 루트와 그것을 관통하는 루트,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고민하던 정한은 관통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잘못됐다는 것은 크레이터 언덕의 고지대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근방까지 도달한 적이 있을거라곤 예상치 못했는데, 근처의 커다란 크레이터에 내내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속이 쓰렸다. 물론 기지는 흙과 바위를 끼고 엄폐되어 있는데다, 토질을 따라 보호색을 띠도록 만들어지지만, 근방에서 사람을 만났을 땐 얘기가 조금 달랐다. 분명 멀지 않은 곳에 기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널린 먼지 가운데서도 주의 깊게 발자국을 살피게 되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기지는 정한이 아닌 타인의 침입이나 강제적인 개폐에는 쌓여있는 모든 정보를 자동 삭제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국가의 기밀이 샐 문제는 없었다. 그보다 걱정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였다.

 

하필이면 순수인민연맹군이라니. 저쪽에 배신자로 단단히 낙인찍힌 정한은 곱게 지나가기를 포기했다. 모든 우주복에는 소속된 국가의 국기가 있었고, 위급상황 시 아군이나 동맹의 빠른 정보 파악을 위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정한의 이름은, 상당히 유명했다. 특히 적에게.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것은 이 피바람의 예고편이었을까. 서로에 대한 인식을 마치자 두 사람은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고 아찔한 경사의 크레이터 절벽에서 마주했다. 물론 정한은 자신있었다. 어릴 때부터 인민연맹군 군대에서 병기로 길러졌던 그였다. 물론 더 뛰어난 재능이 발견되어 소속이 바뀌긴 했지만, 일단 기본적인 본질은 군대의 병사였다. 그와 저쪽의 기량차가 그렇게 크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주한 인영의 뒤로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정한은 애석하게도 살아남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되새길 수 없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무기를 뽑아 들고 다가오는 두 명의 적을 보며, 애초부터 그들의 목적은 오직 저였으며 벌써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저는 그 나라에서 처단 대상이라는 것이 아주 조금 슬프고도 우스울 따름이었다.

 

일단 도망쳤다. 어차피 도망치는 데에 한계가 있음에도 그냥 잡히면 뼛조각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휘두르는 곡도와 마체테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가파른 능선을 미친 듯이 타고 올랐다. 까마득한 정상에 이르는 순간, 옆구리를 길게 베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우주복을 찢고 피를 볼 정도로. 정한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크레이터의 안쪽으로 끝없이 굴렀다.

그러던 중 튀어나온 돌에 몸이 부딪히며 멈추었다. 커헉,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억센 충격이었다. 헬멧 내부 스마트 디스플레이가 박살 났는지 온통 캄캄했다. 일반 가시모드로 전환하자 처참하게 금이 간 유리 너머로 굴러떨어지면서 자욱하게 발생한 회색빛 먼지가 가득했다. 시야 확보는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도 찢어진 우주복 사이로 산소가 질질 새는 소리는 커다랗게 들렸고, 무중력과 낮은 기압이 만들어낸 최악의 콜라보 덕분에 상처에선 방류한 댐에서 터져 나오는 물 마냥 피가 퐁퐁 방울져 쏟아지며 우주복 안쪽 이곳저곳을 적시고 있었다. 헬멧 안쪽도 피 냄새로 가득 찼다. 제 피인 걸 알면서도, 혹은 제 피이기 때문인지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의식은 몽롱해졌다. 추격자들에게서 거리를 벌릴 기회임을 알면서도, 살기 위해 발악하려는 의지보다 몸은 더 빠르게 식었다.

어린 시절의 꿈은 우주비행사였다. 수많은 굴곡을 넘으며 겨우 거머쥔 꿈의 끝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어가는 엔딩이라니.

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왜 여기까지 달려온 걸까.

사실 어느 순간 모든 목적도 의지도 잃었다. 다만 그 꿈만이 외롭게 남아, 그것을 이정표 삼아 걸은 것뿐이었다. 이 임무가 끝나면? 이후의 삶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죽음은 어쩌면 다가오는 수순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아아.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동시에 우주만큼이나 까만 어둠 속으로 정한의 의식은 고꾸라졌다.

 

 

 

세상의 모든 것은 손바닥 같았다. 제아무리 위대한 힘과 재능도 뒤집히면 악랄하게 파고드는 약점이 되곤 했다. 물리학자이자 천재 해커인 아버지를 두었다는 것은 정한이 통통한 장밋빛 뺨을 하고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해준 자산인 동시에, 그의 월경(越境) 이후 끊임없이 감시당하며 수용소를 전전하고 학대와 다르지 않은 훈련을 거치며 매일 같이 당에 충성을 맹세해야 했던 이유였다. 두 뺨의 살이 완전히 내려 삭막한 광대가 드러날 무렵, 압송된 부친은 숙청당했다. 영안실의 네모난 칸에서 나오는 그의 시신을 확인한 모자는 그날 순수인민연맹에서 탈출을 결심했다.

탈주 결행일, 정한은 그가 빼돌린 온갖 군사작전과 산업 기밀, 무기 정보를 목에 걸고 있었다. 자신과 어미의 목숨을 담보하는 한없이 가벼우면서 무거운 자산이었다. 브로커를 통해 도주로를 확보하고 국가를 완전히 따돌렸다고 생각한 순간, 총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모르겠다. 총에 맞은 그녀의 손을 뿌리친 것이 저였는지, 아니면 그녀가 제 손을 뿌리쳤는지.

 

‘도망치라. 무조건 달리라. 무슨 소리가 나도 절대 돌아보디 말고, 앞만 보고 달려.’

‘어서 가!’

‘엄마아ㅡ!’

‘한아, 어서 가, 어서 가라! 정한아 달려!’

 

헉!! 마치 데자뷰처럼, 정한은 깨어났다.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상체는 맨살이 훤히 드러나 복부와 옆구리 쪽에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다. 바지는 얼룩덜룩한 카키색의 군복 그대로였다.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 마리~♫♩♪

뭉개진 발음으로 노래를 부르던 그의 시선이 정한에게 향했다.

 

“어?! 일어났어? 금방 깼구나! 안녕! 나는 …라고 해. 네 이름은 뭐야?”

 

포슬포슬한 부드러운 금발에 탈의한 상반신에 균형 잡힌 근육이 고르게 자리한 늘씬한 몸을 한 남자가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그가 앉은 자리에 걸려있는 군복은 국기도 없고, 색깔도 디자인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굉장히 프리하고 헐렁한 모양새였다. 빠르게 주변을 살폈지만, 그의 주변엔 달 기지에서 으레 정형화된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지구의 집 같은 모양새였다.

아버지의 핏줄은 이은 정한은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게 없을 정도의 천재였다. 그런 그가 알 수 없는 풍경은 도리어 공포였다. 정한은 바짝 경계를 세우고 물었다. 어디의 누굽니까? 자유연합군입니까? 신중립연대?

 

“웅. 그런건 모르겠구…….”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정한은 눈에 띈 협탁 위의 가위를 집어 들었다.

 

“으악! 난 달토끼야, 달토끼! 너 달토끼 몰라? 달에서 쿵떡쿵떡 방아 찍는 달토끼. 옥토, 몰라? 진짜 몰라? 왜, 노래도 있잖아. 푸ㅡ”

“헛소리!!”

이 다급한 순간마저 나를 놀려? 은근히 부아가 치민 정한은 이를 악물고 조금 전까지 누워있었던 병자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뾰족한 날이 제 아래 깔린 그에게 향하도록 세게 가위의 손잡이를 고쳐 쥐고 내리찍는 순간ㅡ!

 

그 순간 쇠붙이를 쥔 손아귀의 힘이 훅 빠져나갔다. 그리고 정한의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간 가위는 공중을 여유롭게 선회하고 있었다.

 

 

 

 

 

*

“어휴, 죽을 뻔했네. 나 달토끼 맞다니까.”

정한은 처음으로 살아있는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너무한다. 내가 구해줬는데.”

값을 산출할 수 없는 상황에 정한은 쓸데없는 반항을 그만두었다. 격렬한 움직임에 옆구리가 다시 아프기도 했고, 일단 그가 저를 해할 의도는 없어 보였으니까. 진정한 정한을 앞에 두고 자신을 달토끼라고 칭하는 미친놈은 태평하게 차를 내려 건넸다.

 

“뭡니까?”

“계수나무차야. 계수나무 잎을 따서 말린 거. 새순은 윗전에 상납하고 남은 거라 이건 좀 자란 잎이야. 약간 쓰지만 먹을만해!”

헤실거리는 얼굴은 세상 물정을 일도 모르는 자의 것이었다. 받기는 했지만 내키지는 않기에 찻잔을 저만치 밀어두는 정한을 보면서도 달토끼… 미친놈은 홀짝홀짝 제 몫을 마셨다. 그것이 너무 꼭 사람 같아서 마음의 소리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달토끼가 무슨 사람이랑 똑같아…….”

정한의 중얼거림을 들은 그가 그럼 뭐 이런 거여야 해? 하고 말을 마치며 변신했다. 그 모습은 머리 위에 토끼귀가 솟아나고 엉덩이에 동그란 꼬리가 쫑긋 튀어나와 포르노에서 자주 보던 바니걸, 아니 이 경우엔 바니보이나 바니맨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것과 흡사했다.

“집어쳐요!”

정한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며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집어던졌다. 으악, 우리집 물건을 다 부수네! 너, 넌 왜 이렇게 폭력적이야?! 지수가 뾰로통하게 울상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나가라든가, 정한을 제압하진 않았다. 그저 저만치에서 나뒹구는 집기들을 주우며 중얼거렸을 뿐.

 

“성질하고는. 쯧쯧.”

인간이 너무 못돼졌단다. 그럼 당신이 내 상황이 되어봐요. 성격이 좋을 수 있나. 은인에게 더 이상 못된 말을 퍼부을 순 없어 정한은 속으로 자조하듯 말했다.

정한을 제외하면 가장 마지막으로 구했던 사람은 브랜든이라는 작자란다.

 

적십자사? 라는 곳의 의사라던데. 구해줘서 감사하다며 지구에 돌아가서 더 많은 생명을 구하겠다고 해서 나 너무 뿌듯해져가지구 앞으로도 다친 사람을 발견하면 열심히 돕기로 했어. 달토끼는 몹시도 행복한 얼굴로 정한에게 말했다. 적십자라니. 대체 언제적 이야기인 거냐. 갑갑한 마음에 정한이 물었다.

 

“그게 언제쯤인데요?”

“아마 백 년 전?”

정한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얼추 지구의 역사가 흘러간 시간대와는 맞아 들었다. 그래서 일단 믿기로 했다. 아니 믿을 수밖에는 없지 않은가.

 

“적십자사는 지금 뭐 해? 혹시 브랜든 알아? 그는 유명한 사람이 됐어?”

“…몰라요.”

눈을 반짝거리며 묻는 토끼, 아니 그에게 적십자사는 국가가 분열되고 전쟁이 계속되며 폭파되고 명맥이 끊겼다, 라고 말할 순 없어 한 마디로 뭉뚱그렸다. 퉁명스러운 답변을 환자의 피로 정도로 인식했는지 토끼는 생긋 웃었다. 아니 토끼 아니고 사람이지만.

 

“아무튼 너도 잘 회복하구 편히 있다가.”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다들 멋대로 부르던데.”

“…….”

“조슈아라고도 하고, 지수라고도 하고. 보름에는 내가 눈이 빨개져서 홍이라고 부른 사람도 있어!”

“홍지수라고 할게요.”

“왜?”

멋대로 부르는 것에도 이유가 필요한가? 그러나 정한은 피곤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이유를 술술 불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윤정한이니까. 나는 그런 형태가 편해요.”

“음절이 세 개인 거?”

“네에.”

“그렇게 해. 그럼.”

쉬려고 돌아누우려는 순간, 토끼가 아니 홍지수가 다시 냉큼 물어왔다.

 

“근데 그럼 윤은 뭐야? 윤이랑 정이랑 한에 다 의미가 있는 건가? 정은 미들네임?”

“…저 좀 쉬면 안 돼요? 좀 전에도 회복하람서?”

“아… 알겠어.”

정한의 구박에 집주인은 내쫓기듯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런데ㅡ 네 옷이 완전 피범벅이 돼서 내가 빨았어. 혹시 춥진 않지? 위에 입을 거 줄까? 어쩌다 그렇게 피범벅이 된 거야? 상처 보니까 어쩌다 다친 거 같진 않던데. 무슨 일 있어? 아, 혹시 배는 안 고파?”

멈출 것 같지 않은 은인의 질문 보따리에 정한은 그냥 휴식을 포기하기로 했다.

 

정한은 사 개월여를 머물면서 꾸준히 그리고 안전하게 회복을 마쳤다. 사실 단순히 상처는 한 달로 아물었다. 나머지 두 달 정도는 우주복을 정비하고, 고장을 수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정비 작업도 마음만 먹었으면 일주 만에 마치고 떠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렇지만 정한이 겪은 한 달은 너무나 안온했다. 지수와 함께하는 일상은 모든 것이 평범하면서도 평화롭고 따뜻했다. 정한은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사람처럼 지수의 공간에 녹아들었고 긴장의 칼날을 세우지 않아도 하루가 잘만 굴러가는 눅진한 일상에 눌어붙은 껌딱지처럼 늘어져 아침마다 계수나무 잎차를 마시고 작은 것에도 하하호호하는 토끼를 바라보며 지냈다. 시간은 그래도 잘만 흘렀다.

 

지수는 정한에게 돌아갈 날을 묻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도. 그저 묻고 듣고 말할 뿐이었다. 대화의 주제는 우울한 과거의 일일 때도 있었고, 깊이 있는 정한의 전공에 대해서일 때도 있었다. 혹은 아주 영양가 없는 잡담일 때도 있었다. 마치 오늘처럼.

 

“네가 알고 있는 제일 어려운 단어가 뭐야?”

이제 정한은 그런 지수의 잡스런 질문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supercalifragilisticexpialidocious.”

“우와아ㅡ 대체 그게 몇 글자야.”

단어의 알파벳 개수를 헤아리는 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한이 무심코 말했다. 무엇이든 이루어질 거라는 뜻이야. 그 말에 지수가 동그란 눈을 들어 정한을 바라보다가 살포시 웃었다. 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꽃은커녕 풀 한 포기 없는 이 메마른 달에서 살아온 달토끼가.

굳이 묻지도 않은 뜻을 가르쳐준 제 속내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가 원하는 걸 이루며 살아가길 바라는 건지, 여전히 제가 이루고픈 무언가가 있는 건지.

 

문득 계수나무가 궁금했다. 노랫말이나 전설에 나오던 환상의 나무. 정한은 찻잎을 따러 간다는 지수를 졸라 따라나섰다. 우주복도 시착해볼 겸, 무장하려는 정한을 지수가 말렸다. 그런 거 필요 없다며.

 

“너 그렇게 하구 못가!”

“그럼 어떻게 가?”

“그냥 내 손만 잡으면 돼.”

처음엔 개소리인줄 알았는데.

 

“대신 절대로 놓으면 안 돼.”

라고 말해서 조금 곧이듣게 됐다.

 

우주복을 입지 않고 달을 거닐다니. 물론 옆에 달토끼 홍지수의 손을 꼭 잡고 있긴 했지만. 우주복 없이도 지구처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다. 물론 홍지수의 손을 잡아야 하지만. 우주복을 입든 입지 않았든, 달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풍화되지 않은 크레이터와 돌들이 여전히 여기저기 널려 장애물 같은 지형을 구성하고 있었고, 회색의 대지, 검은 하늘, 재 같은 먼지만 가득했다. 대체 이곳 어디에 나무가 있을까. 어떻게 생긴 나무일까. 궁금증에 휩싸이며 신경이 온통 딴 데 쏠렸던 정한은 경사로에서 돌을 잘못 밟고 말았다. 으악! 비명과 함께 정한의 몸이 기울었다.

 

사정없이 구른 온몸이 아팠다. 그 와중에도 정한은 제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운 억수로 좋네. 앞으로 넘어져도 돈 줍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나려는데, 한쪽 팔이 무거웠다. 정확하게는 손이. 여전히 정한을 손을 움켜쥐고 이어진 존재가 있었다.

이 바보가!

 

정한은 얇게 뒤덮인 회색 먼지를 걷어내고 지수를 살폈다. 밭은기침을 하며 홍지수가 깨어났다.

“미쳤냐?”

“너야말로 그렇게 넘어지면 어떡해. 막을 수도 없었잖아.”

“손을 놔야지!”

“…놓으면 안된다구 했잖아.”

“…….”

“내가 손을 놓으면 넌 죽어.”

순간 정한은 꿈에서 깨어났다. 한여름 밤의 꿈 같았던 시간의 종말. 정한과 지수는 섞일 수 없었다. 너무도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다른 생물이었다.

미련하고 착해빠진 토끼. 제가 다치면서도 쥐고 있는 손도 놓을 줄 모르는, 다정한 홍지수.

난 괜찮아, 라며 말갛게 웃는 지수의 뒤로 행복한 동화 같던 환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갑자기 떠나겠다는 정한을 지수는 말리지 않았다. 그토록 질문이 많았으면서도 이번엔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정한이 장비를 착용하는 것을 돕고, 잘 작동하는지를 함께 점검해주었다. 정한이 떠나던 날 아침, 지수는 평소와 똑같이 계수나무 잎차를 끓여 내주었다.

 

“조심해서 가.”

“그동안 고마웠어.”

정한의 감사 인사에 지수는 그저 웃었다.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어. 이 전부가. 그리울지도.”

“그럼 달을 봐. 달을 보고 간절히 빌어 봐.”

지수가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에 정한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지수는 뭐라고 더 하려다 입을 다물었고 정한은 등을 돌렸다. 얼마간 걷다 뒤를 돌아보자 지수는 아직 현관 앞에 그대로 서서 정한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정한도 손을 흔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시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설정된 좌표대로 걷던 정한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땐, 광활한 회색 대지 위로 모래 먼지만이 뒹굴고 있었다.

 

돌아온 기지에는 부재중 연락이 숱하게 쌓여있었다. 정한이 비운 4개월 동안 가동하지 않은 내부는 추웠고 딱 봐도 손을 봐야 할 모양새였다. 내려앉아 있던 먼지는 정한의 진입과 동시에 공중으로 휘날렸다. 인상을 찌푸린 정한은 통풍기를 작동시키고, 쌓여있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마지막 통신은 2개월 전의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 연맹의 수배자 명단에 있던 제가 지워졌을 것이고 연합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면, 정한이 죽었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한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구동시켰다. 파랗게 반짝이는 모니터의 조명을 받은 정한의 얼굴이 시체마냥 푸르죽죽해졌다. 떠오른 백지 위에서 타이포가 한참을 깜빡이는 동안 정한은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 써야 할 내용에 대한 구상은 끝나 있었다. 기지로 돌아오는 동안 공백기에 대한 시나리오는 이미 다 세웠으니까-옆구리의 흉터는 시나리오를 뒷받침하는 훌륭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대로 옮기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ㅡ.

정한은 그 감정을 차마 명명할 수 없었다. 지수와 그의 포근한 토끼굴을 걷어차고 떠나온 건 다름 아닌 자신이니까. 고민은 무슨 고민. 정한은 상념을 치우고 자유연합국에 보낼 보고서를 빠르게 타이핑하여 전송했다. 돌아올 답을 기다리며 정한은 커피를 탔다. 뜨끈한 음료를 한 모금 넘기는 순간, 정한은 두께도 모양도 엉망이던 투박한 토기 속의 계수나무 잎차와 웃으며 그것을 건네던 사람이 그리워지고 말았다.

 

 

본국 송환이 결정되었다.

나라를 팔고 귀향한 정한은 제가 새로운 사회에도 온전히 안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한이라는 존재는 달콤한 독이었다. 조국을 배신하고 엄청난 기밀을 가지고 넘어온 이 존재는 그를 받아준 사회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아니 한 번 배신해 보았으니 또 배신할 수도 있을 거라는 불신의 싹과 함께 온 부담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타인을 뛰어넘는 성과를 가지고 도전하고 지원했던 그가 계속해서 남보다 못한 결과를 받아들면서 의심은 현실이 되었다.

직접 그의 성과와 경력을 들이밀어도 난색을 표하며 웃을 뿐이었다. 가끔 그 행정관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그의 잘못이랴. 점점 뾰족하게 되어가는 자신을 지켜보던 정한은 달에 지원하게 되었다. 달은 소리 없는 전투지였고, 그곳에 파견할 비행사는 늘 모자랐으니까. 단지 그들이 정한을 그곳에 밀어내지 못했을 뿐, 우주비행사를 원한다면, 정한이 고를 수 있는 곳은 달밖에는 없었다.

 

정한은 보고서가 도착하고 당황했을지도 모를 지구의 스탭들을 상상했다. 어쩌면 제가 달에서 죽기를 갈망했을지도 모르는데. 걱정을 덜었다고 생각한 문제아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는 느낌은 어떨까. 못된 생각을 그쯤에서 접었다. 정한의 연락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숱한 달의 전사자 중 한 명으로 내버려 둘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양심을 포기하진 않은 본국의 처사를 정한은 받아들였다. 지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지구로 돌아오는 궤도와 일자를 받아들면서, 정한은 그의 기지를 정리하고 비행선 모드로 변경했다. 달을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달의 전경을 비추는 카메라에 희뿌연 무언가가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토끼를 닮은 듯도 한 그 그림자에 정한을 실소하며 가림막을 내렸다. 이 순간까지 토끼라니. 미쳤구나.

집중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조금만 시간과 궤도를 벗어나도, 정한은 지구와 달 사이에서 미아가 될 수도 있었다. 약속된 시간에 가까워지는 원자시계를 보며 정한은 자리에 착석해 벨트를 조였다. 초읽기가 끝남과 동시에 레버를 당기자, 비행선은 완곡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여전히 개척이 미비한 후방부와 다르게 달의 전면은 곳곳에 펼쳐진 크고 작은 기지들이 촘촘하거나 성기게 얽혀 있었다. 정한은 남겨진 이방인들을 위해 기도했다. 물론 정한은 돌아가서도 여전히 이방인 신세를 면치 못하겠지만.

 

오래지 않아 지구로의 진입이 시작되었다. 대기권으로 진입하면서 엄청난 열과 소음과 압력에 휩싸였다. 내부는 붉은 경고등이 번쩍거렸다. 설상가상 지구 관제센터와도 연락이 끊어졌다. 전부 잘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오류가 난 걸까.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단 하나의 자식을 위해 마지막까지 희생밖에 몰랐던 그녀가. 자신이 여전히 한길 낭떠러지를 걷고 있는 걸 안다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리고 이어진 것은 홍지수, 그 다정하고 사랑스런 달토끼였다. 하하. ‘사랑스런’ 이러니. 낑낑깡깡 불규칙적으로 고막을 때리는 소음 속에서 정한은 허탈하게 웃었다

삶의 마지막에 지나가는 건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들이라는데, 그 마지막에서 정한은 지수의 따스하고 상냥한 미소를 보았다. 햇살 한 자락을 머금은 그를 사랑스럽다고 여기고 있었다. 자꾸 돌아보고 싶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고,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 또한 같은 이유였다.

고압과 고열 속에 의식이 녹아내렸다. 이 우주복 속에 완전히 녹아내린 자신만이 남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육체와 정신을 잇던 끈이 조금씩 해체되던 순간, 강렬하게 정한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일어나라구! 빨리 그 안전벨트 풀어! 하는 소리와 함께 위쪽의 해치가 열렸다. 열렸다기보단 날아갔다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았다. 정신이 확 들었다. 정한이 안전벨트를 풀자 뻥 뚫린 위쪽으로 휴짓조각처럼 몸이 날려 올라갔다. 순식간에 추락해 절벽에 부딪혀 흩어지는 우주선의 파편을 보다가 정한은 우주복에 끼고 있던 낙하산을 펼쳤다. 바다와 절벽을 끼고 바람의 방향이 소용돌이치면서 저항이 커져 낙하산을 제어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정한의 몸이 앞뒤로 날리며 반복되는 극적인 움직임에 맥을 못 추는 사이, 넓은 평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낙하산이 펼쳐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속도는 조금 빨랐다. 조금 전 죽는 건 면했지만, 이번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정한은 자신을 다잡으며 착륙을 준비했다.

 

콰지지직, 쿠당탕. 커다란 충격과 함께 대지에 발을 디뎠다. 우득,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정한의 몸은 낙하산을 따라 몇 미터를 더 끌려가고서야 멈췄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미친 듯이 분비되는 도파민과 엔돌핀을 잠재우자 서서히 통증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쉬어도 돼. 차분한 목소리가 거의 뜨지 못하는 정한의 눈을 감겨줬다. 누가 누구에게 건네는 위로인지도 모르면서, 정한은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왼쪽 전방 십자인대 파열, 우측 대퇴골 골절, 척추뼈 1개와 갈비뼈 3대, 쇄골뼈에 금이 갔다.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이었던 것에 비하면 위중하진 않았지만, 재활을 포함하면 전치 25주에 이르는 부상이었다. 그보다 비극적인 부분은 다른 문제였다. 완벽히 재활을 마친다고 해도, 정한은 두 번 다시 비행정이나 탐사선 따위에 오를 수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전투를 하거나 우주를 드나드는 일 따윈 엄두를 낼 수 없게 됐다. 자연스럽게 해당 직무과 직군에서 배제되었다. 새로 배속된 업무는 지구의 기술직이나 후방업무팀이었다. 이곳저곳을 전전했지만, 정한은 도저히 적응하지 못했다. 기술팀에서 로켓 제작 자문을 하거나 우주 비행정 운전 기술을 가르치다 보면 다시는 우주로 오르지 못할 저의 한계만이 들여다보일 뿐이었다. 정한이 가보지 못한, 그러나 그가 갈망했던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극렬한 질투에 시달렸고, 병신 아닌 병신이 된 제 몸을 저주하며 스스로 숨통을 조이게 됐다. 결국, 지구 복귀 후 석 달 뒤, 정한은 명예퇴직했다.

그를 살아오게 해준 유일한 꿈을 접는 대가로 찍힌 0의 개수도, 퇴직 이후 이어진 수많은 기업의 러브콜도, 그 어느 무엇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우주비행사가 꿈이라고? 그것밖에 없나? 자네는 그럼 그걸 다 이루고 나면 뭐 할 건가?’

첫 지도교수 면담에서 그가 정한에게 한 질문이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우주는 끝이 없는데, 우주비행사에게 다 이룬다는 것은 뭘까. 정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먼 미래의 일이 될 것이라고.

세상에 나고 자라 꿈꿔온 것은 우주비행사 하나였다. 벅차다면 벅차고, 소박하다면 소박할. 오직 그 하나였다. 그를 위해 어머니를 버렸고, 조국을 버렸다. 목표만 보고 달려왔던 삶이 목표가 없어지는 순간 이렇게나 부유하게 될 줄 몰랐다.

 

국적과 이념을 떠나 순수하게 재능으로 정한을 아꼈던 지도교수는 애재자의 안타까운 소식에 강사를 겸한 조교직을 제안했다. 교단의 일을 배우는 것부터 차근차근 익혀보라는 의도였다.

지식과 재능, 실력을 겸한 정한이기에 후학을 양성한다면 누구보다 든든한 이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한은 제법 비틀려 있었다. 저보다 적은 한계와 더 많은 가능성과 발전의 기회를 가진 파릇파릇한 이들을 지켜보는 것도, 새싹들의 무지함을 견뎌내는 것도 지금의 정한에겐 너무 힘든 일이었다.

정한의 인내는 쉽게 바스러졌고, 강의안이나 내용만 봤을 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수업은 정한의 냉랭하고 자비 없는 강의 태도와 맞물려 학생들의 반감이 맞물려 냉정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

삐ㅡ

올 사람이 없는 시간이었다. 아침부터 줄창 담배만 피웠던 집 안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어쩌면 교수일지도 몰랐다. 최근 정한은 술 냄새를 풍기며 강의실에 들어가거나, 지각이나 무단 휴강이 잦았다. 어쩌랴.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을. 유일한 은사와 말다툼을 벌여 반항하는 아이처럼 비치고 싶진 않았다. 근무 태만이라면 교수도 학교로부터 더 이상 저를 감싸진 못할 터였다.

 

삐삐, 삐ㅡ

버저를 누르는 손길에 참을성이 없었다. 간다고, 가. 정한은 언더락 잔에 남은 골드럼을 마저 삼키고, 테이블 위에 내려둔 후 현관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누군데 아침부터ㅡ

화를 내려던 말은 그 얼굴을 본 순간 뚝 멎어버렸다. 마치 오디오를 잘라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밥 먹자.”

“…….”

“와 아침부터 술? 빈속에 술? 담배? 위에 아직 구멍 안 났어?”

“…달토끼?”

“응. 그새 까먹었어?”

“홍지수라고? 진짜?”

“못 믿겠으면 만져볼래?”

지수는 활짝 웃는 얼굴로 정한의 손을 쥐어 뺨에 댔다. 불에 덴 듯한 감각에 정한은 기겁하면서 손을 뺐다.

 

“이리와. 먹자. 냄새가 맛있어 보여서 샀는데, 무슨 맛일지 너무 궁금해♥”

“됐거든. 그보다ㅡ”

“먹어. 배고프면 더 우울해진대. 배를 채워야 힘이 생겨서 뭐라도 하지.”

“됐다고! 대체 네가 여긴 왜ㅡ”

지수는 묵살하듯 크림스튜를 뜬 숟가락을 정한의 입에 처넣었다.

 

정작 내가 네 로켓 타고 쫓아올 때는 알지도 못했으면서 여기에 왜 왔든 뭔 상관이야. 알아서 뭐할 건데? 내쫓으려고? 네가 그럴 수나 있을 거 같아? 이놈이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시간을 안 줬어, 돈을 안 줬어. 두손 두발 머리통 멀쩡해서 혼자 밥도 안 차려 먹고 어디서 배고파서 성질을 내? 닥치고 저녁 감사합니다, 하구 처먹어.

해사하게 웃는 지수의 얼굴은 찬연했지만, 속사포로 내뱉는 말은 그렇지 못했다. 달토끼 주제에. 어디서 저렇게 찰진 험한 말을 배웠을까. 그것도 웃으면서 욕하는 고급 스킬을.

결국, 정한은 입안에 담긴 걸쭉한 스튜를 삼켰다. 묵직하면서도 고소하고 단짠단짠한 맛이 감도는 몽글몽글한 스튜. 그릇에 담긴 스튜는 지구로 돌아온 이래 내내 정한이 앓았던 우울에 대한 위로이자 어르고 달래고 설득하고 조건을 다는 것이 아닌 투박하고 정직한 온기였다. 순간 감정이 벅차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비록 지수가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뜨거운 스튜에 입천장이 데었다고 해도.

 

정한이 퇴근하고 돌아오자 지수는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곁에는 책을 엉망으로 늘어둔 채였다.

“왔어?”

정한의 일상에 지수가 녹아들고 있었다. 돌아왔을 때 공백이 가득한 집보다는 사람ㅡ 아니, 토끼 냄새가 나는 일상이 정한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도통 적응이 안 되는 부분은 저것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아버지를 맞던 것 마냥 저를 맞는 홍지수가. 적응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싱숭생숭했다. 저를 맞아주는 지수를 볼 때마다 심박수가 올라가며 기뻐지는 것이었다. 그 마음을 들킬까 봐 정한은 괜히 더 퉁명스러워졌다.

 

“그럼 오지, 안 오냐. 내 집이 여긴데.”

“뭐래.”

“너야말로 뭘 하는데 그렇게 어질러 놨어?”

저에게 향하는 지수의 관심이 쑥스러웠던 정한이 주제를 돌렸다.

 

“달토끼는 어떻게 생겼어?”

“뭐?”

“달토끼. 달토끼 얘기는 있는데, 그림은 없어서.”

“하.”

정한은 코웃음을 내뱉으며 사 온 치킨을 테이블에 내려두고 메모장을 끌어와 대충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 그게 뭐야?”

로스트 치킨의 담백하고 기름진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며 행복해하던 지수가 정한이 끄적거린 모양새를 보고 물었다.

 

“달토끼.”

“미쳤냐? 존나 못생겼어. 어떻게 이게 나야?”

“…달토끼는 어차피 환상의 동물인데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야 그래도 내 와꾸가 있는데! 너한테 내가 이런 이미지야?”

“뭐?”

“이게 어떻게 나야. 무슨 멍게 같은 걸 나라고…. 티비랑 동화에 나오는 토끼들은 얼마나 귀여웠는데! 이건 모독이야!”

모독 같은 소리 하네. 정한은 그렇게 속으로 궁시렁거렸지만 티비에 나오는 토끼와 홍지수를 번갈아 보고 나니 제 그림이 조금 하찮게 여겨지긴 했다. 실망한 지수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야, 치킨을 먹는 토끼가 어딨냐?”

“뭐 어때. 나는 달토낀데. 눈도 삐고 손가락도 삔 너는 말할 자격 없어.”

“…허.”

정한은 황당해하면서 반대쪽 닭다리를 집어 들었다. 지수는 치킨을 먹는 내내 항아궁에 갈 토끼 후보 중에 내가 제일 예쁘고 잘생기고 힘도 셌는데, 하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지수가 이렇게 슬퍼할 거라고 예상치 못했던 정한은 못생긴 토끼 그림을 곁눈질하다가 결국 손가락을 쪽쪽 빨고는 냉장고 문을 열어 사과를 하나 꺼내 깎기 시작했다.

 

“밥 먹다 말구 뭐해? 나머지 내가 다 먹어도 돼?”

“내가, 손이 삔 건 아니고 좀 미숙해. 특정 분야에.”

“어쩌라고.”

“자 토끼.”

정한은 토끼 모양으로 깎은 사과를 지수에게 내밀었다. 노란 속살에 빨간 귀를 가진 앙증맞은 사과 토끼에 지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밥 먹고 후식으로 먹자. 됐지?”

“어떻게 이 귀여운 걸 먹을 생각을 해?!”

“애냐?”

“아니거든! 너 말야, 내가 몇 살인지 알아? 나 999살이거든 너보다 내가 나이 훨씬 많거든!”

“예예 어르신. 니가 999살이면 나는 천 살이거든.”

“너 닭다리로 먼지 나게 맞아 볼래?”

과장되게 타박하는 지수에 그럼 먹지 말든가, 하고 정한이 응수했다. 싫어. 내가 다 먹을 거니까 너는 손대지 마. 지수의 귀여운 욕심에 정한은 대답 없이 큼직하게 뜯은 날개를 입에 넣었다. 별게 다 귀여워 보이고 웃음이 나는 걸 보면 배가 부르기는 한가 보다 하는 생각과 함께.

 

 

“강사님, 그거 아세요? 요즘 표정이 엄청 좋아지셨다는 거.”

풀이를 적어주며 설명을 마친 정한에게 한 학생이 건넨 말이었다. 예전에는 왜 그렇게 날이 서 있으셨어요. 다들 그래서 강사님 안 좋아하고 오해했어요. 더 늦기 전에 괜찮은 사람이란 거 알게 됐으니까 다행이지만.

변한 건 없었다. 정한은 여전히 학생들의 젊음을 질투했고, 그런 한편 그들의 멍청함에 진절머리가 났다. 다만 달에 가지 않아도 이제 크게 상관없어졌다. 그러니 질투로 날카로워질 필요가 없었고, 그들의 무지에도 조금 참을성 있게 응대해줄 맘이 든 것뿐이었다. 홍지수가 있어서였다. 홍지수가 있어서 배도 고프지 않았고, 외롭지 않았다. 쓸데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혼자 우울해할 필요가 없었다. 집에 돌아가면 맞아주는 누군가가 있고, 같이 밥을 먹고 잠들고 일상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 덕분에 지구의 삶이 나쁘지 않아졌다. 더는 달을 바라보며 목멜 필요도, 우주에 나가지 않아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사님 수업 정말 좋아요. 저희에게 새로운 미래와 가능성을 보게 해주니까요. 학생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가 웃으며 칭찬을 건넸다. 정한은 조금 멋쩍어졌다. 위대한 업적을 가진 교수들이 쌔고 쌨는데, 제가 뭐 이렇게 대단한 칭찬을 받을 주제가 되는 건가 싶어서. 그런 겸손한 한편으로는 행복했다. 이전에는 받고 싶어도 받지 못했던 인정에 목말라 있었으니까. 체념한 이후에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한 가치였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기쁘고 즐거웠다.

 

“또 화재네요. 기근도 심각한데. 지구에선 이제 얼마 못 살 거라고 다들 그러더군요. 뉴스에서도, 학계에서도. 그래도 이주 계획이 단계별로 성공하고 있으니 다행이에요.”

모니터 위로 뜨는 속보 영상을 보며 학생이 중얼거리는 말에 정한은 문득 지수의 말이 떠올랐다.

 

‘지구는 머잖아 수명이 다하겠구나. 인간들은 달과 화성으로 갈 준비를 하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처음엔 대수롭지 않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무슨 시답잖은 걱정을 하느냐고. 너는 달토끼인데. 멸망하는 지구에서의 생존도 끄떡없을 거 아니냐는 그런 생각을. 그건 정한의 오산이었을까? 갑자기 지수가 읊조린 혼잣말의 답이 궁금해졌다. 인류가 모두 이주를 하게 되면, 지수 또한 정한을 통해 그가 갈 수 있는 우주선의 자리 하나쯤은 충분히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홍지수가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이게 다 교수님들과 강사님 같은 분들 덕분에ㅡ”

“저기 미안한데, 나 좀 가볼게. 급한 일이 생겨서. 다음 수업 때 보자.”

정한은 학생의 말을 끊고 급하게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섰다.

 

 

 

 

 

*

바깥은 먹구름이 낀 양 컴컴했다. 지수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지구에 온 이래, 내내 이런 모양이었으니까. 달이 물 한 방울 없는 메마른 대기 때문에 살 수 없다면, 지구는 심각한 오염으로 얼음이 녹아내리고, 땅이 묻히고, 바다는 적색이 되고 푸른 평원은 황무지가 되어 점점 죽어가는 별이 되어가고 있었다. 외부의 먼지를 감당할 수 없어, 창문을 꽁꽁 내려두고 지낸 지는 오래였다. 그 사이로 산들거리는 바람이 불었다. 코끝으로 밀려드는 달의 바다 향에 지수는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왔어?”

“넵. 무정한 형님, 어째 떠나고 소식 한번 없어서 저를 이 먼 곳까지 오게 하세요?”

한솔이었다.

 

“형, 올해로 천년이에요. 구백구십구 년 열심히 해왔잖아요. 그놈의 승천식 때문에.”

앉아라, 먹어라, 권하지 않아도 냉장고에서 야무지게 온갖 과일을 꺼내놓고 테이블 앞에 앉아 제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먹는 한솔의 넉살을 지수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형이 방아 찧다 말고 사라져서 떡이 다 굳었어요. 그것 때문에 항아님이 화가 잔뜩 났지만,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용서해주시겠대요.”

선심 쓰듯 말하는 한솔에 지수가 잘라 말했다.

 

“안 간다고 전해드려.”

“미쳤어? 999년의 수련은 어쩌고? 항아궁에 가려고 구백구십구 년 동안 떡을 찧어왔잖아! 아깝지도 않아?”

놀란 한솔의 말이 대번에 짧아졌다. 약간 거슬렸지만, 지수는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그럼 네가 마저 찧어서 가져가든지.”

“나는 이미 항아궁 발탁됐거든.”

“그럼 걍 버려.”

“헐. 형 잘 생각해. 이번에 돌아오지 않으면 영구추방이래.”

“알았어. 그렇게 알고 있을게.”

위기감을 상실한 얼굴로 지수는 손안에 무언가를 쪼물딱거리며 잔뜩 집중해 있었다. 덤덤한 지수에 한솔은 먹던 과일을 제쳐놓고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대체 뭘 하는 거예요? 좀 진지해지라고요.”

“나 지금 매우 진지해. 하도 오래 떡메만 쳤더니 질렸어. 안 갈 거야.”

“지금도 손으로 뭐 만들고 있기는 똑같잖아?!”

“이건 도자기라는 거야. 이렇게 만들어서 구우면 딱딱하게 된다고.”

“먹는 거야? 만들면 내공이 올라가?”

“뭐래니.”

“그럼 아무짝에도 쓸모없잖아.”

“하지만 재밌어.”

지수의 말에 한솔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천년에서 딱 일 년 뺀 시간 동안 성실하기 그지없이 살아온 이 형한테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것인가.

 

한솔아 지구에 뭐가 있는지 알아? 닌자거북이. 네 사촌뻘 될 텐데 닌자라니까. 그리고 또 뭐가 있냐면 토끼와 거북이. 내가 늦잠 자느라 너와의 경주에서 졌대. 큭큭큭. 네가 내 간 빼내려고 바다에 데려가는 이야기도 있어. 몰랐는데, 너 정말 너무하더라? 지수는 조악한 솜씨로 점토를 만지며 떠들었다.

 

이 형이 미쳤나.

한솔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지수가 고개를 들고 한솔을 똑바로 바라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지구엔 재밌는 게 많아.

 

그래 지구는 흥미로운 게 많다. 달과는 다른 소리, 다른 색채(다소 회색톤이긴 하지만), 다른 냄새(약간 고약해도), 다른 촉감, 다른 이야기, 다른 풍경과 다른 생명이 있다. 달과 다른 그 다양함이 퍽이나 재밌어서 아주 오랫동안 질리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윤정한. 지구에는 윤정한이 있다. 앞으로 그와 만들어갈 형태가 기대되고 궁금해졌다. 정한은 언젠간 쇠할 존재이지만, 그가 살아온 세계, 그가 보아온 풍경을 바라보고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수의 시간은 바쁘게 돌아갈 터였다. 그것만으로도 지수가 지구에 남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지구만 오래 남아준다면.

지구로 떨어진 달토끼가 과연 어떻게 될지는 어디에도 전례가 없어 모르겠지만 최초가 된다는 것 또한 아주 색다르고 짜릿할 거다.

 

“지구엔 재밌는 게 많아, 한솔아.”

지수의 얼굴 가득이 미소가 차올랐다. 지수의 함축적인 말 안에 든 것을 더 물을 필요는 없었다. 한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작별이지. 잘 있어. 건강하게 지내고. 안녕.”

“안녕.”

담백한 인사를 끝으로 한솔은 사라졌다.

 

 

 

정한은 다급하게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집안은 텅 비어있었고, 인기척도 없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동안 홍지수가 걷어주었던 분노가 거센 조류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망연하게 분노를 삭이던 정한의 뒤로 철컥 소리가 들리더니 지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너!”

“왜?”

“…달에 안 갔어?”

“뭔 소리야. 갑자기 웬 달 타령?”

“지구가 망하면 넌 어디로 가?”

“몰라 그건 그때 가봐야지 뭐.”

“달로 안 돌아갈 거야?”

“나? 좀 전에 추방당했는데”

마치 오늘 점심엔 스파게티를 먹었어, 같은 어조였다.

 

“추방?”

“응 나 이제 영영 달에 못가 괘씸죄로 영구추방이거든.”

“지구 곧 망할 텐데?”

“별수 없지. 괜찮아, 네가 있잖아.”

“…….”

“지구가 망해도 넌 내 곁에 있을 거잖아. 그치? 설마 나 버리고 혼자 도망갈 거야? 아니지? 십 리도 못가서 발병 날 거다.”

진지한 척하면서도 정한을 믿어 의심치 않는 지수에 심각했던 정한의 얼굴엔 비로소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무구한 달토끼가 걱정도 됐다. 장난은 칠지언정, 흰소리는 하지 않았으니까.

 

“지수야, 그치만ㅡ”

“Supercalifragilisticexpialidocious.”

지수는 그 한마디로 정한의 입을 막았다.

 

네가 알려줬잖아. 걱정하지 마, 정한아. 잘 될 거야. 앞으로 너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거고, 나도 괜찮을 거야. 지수가 정한을 살며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지구에서, 일억 만 리의 타향보다도 먼 곳의 고향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은 외계인이, 언젠가 제가 아무 생각 없이 건넸던 말로 저를 위로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했지만, 정한은 지금 이 순간이 아프도록 행복했다. 그래서 정한은 지수를 꽉 안았다.

 

 

드물게 구름 사이로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정한은 제 곁에 누워 두 눈을 감고 있는 지수에게 물었다.

 

“지수야, 집이 그리워지면 어떡해?”

“어떡하겠어. 네가 달래줘야지.”

“그래도 보고 싶으면? 지구가 완전히 살 수 없게 변해버리면? 그래서 떠나고 싶어지면?”

가끔 떠올릴 때가 있다. 저버린 조국을, 저버린 조국의 차가운 땅속에 누워있을 부모님을. 전향하여 새로운 국적을 얻고도 서러웠던 날들을. 지수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때 가서 우는 지수를, 정한은 어떻게 달래야 할까.

 

“정한아. 하늘 봐봐.”

물끄러미 올려다본 하늘에 빛나는 달이 있었다.

 

“그리우면 보면 돼. 달은 늘 지구의 주변을 돌고 있어. 난 언제든 그곳을 볼 수 있고.”

“…….”

“달은 늘 지구의 곁에 있었어. 항상 지구의 주변을 돌고 있었고. 지구가 어떻게 변하든, 달은 지구의 곁에 있을 거야.”

잔잔한 지수의 답이 끝나자 정한은 그의 이마에 조용히 입맞춤했다. 토끼털 같은 머리칼을 부비자 지수가 정한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

남아줘서 고마워. 녹슬어 가는 세계만을 눈앞에 둔 이에겐 그런 건 감사 인사도 되지 못할 것이다.

 

“자네 요새 새로운 연구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며?”

“네.”

“갑자기 뭔 바람인가?”

“지구에서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거든요.”

“지구에서?”

“네, 그래서 현재의 기술을 활용해 지구 환경 개선과 지속 가능한 개발에 적용해 보려고요.”

“가능하겠나, 그거.”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좋은 도전이야. 힘내보게.”

“감사합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정한의 뒤로 모니터에는 토끼 같은 앞니를 드러내며 반짝반짝 웃는 이의 미소가 보였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