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정한은 이 근방에서 유명했다. 중학교 3학년 때 혜성처럼 등장한 수영계 아이돌이었다. 비단 수영만이 아니라 타고나길 신체 능력이 좋았다. 평형 감각과 순간적인 판단능력이 뛰어난데 운까지 따라왔다.
그렇다고 국가대표가 꿈인 패기 넘치는 청소년은 아니었다. 운동엔 진지하지 않았을 뿐더러, 체력 문제도 있었다. 오죽하면 전반전의 신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윤정한에게 스포츠란 그저 마음 맞는 애들끼리 승부욕을 불 태워 결과를 내고, 그 끝엔 함께 웃으며 밥을 먹으러 가는 취미이자 일상이었다. 선을 넘어갈 생각은 절대 없다. 운동은 즐기는 상태일 때 가장 좋으니까.
그런 정한이 수영부에 든 건 딱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째, 정해진 부활동이 없으니 툭하면 체육선생이니 코치들이 찾아왔다. 축구해볼 테냐. 베드민턴은 어떠냐. 야구도 한 번 해보자. 체력이야 근력 운동으로 기르면 되고, 너 승부욕도 쎈 놈이 후반전의 신은 욕심도 안 나냐? 윤정한 진짜 선생님이랑 세상 한 번 뒤집어보자, 짜샤.
정한을 불러대기 바쁘던 손짓들이 입부 하나에 뚝 끊긴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수영이랑 같이 배구도 함 해보자. 미련을 버리지 못하더니 정한이 점점 메달권에 가까워지자 권유가 잦아들었다.
정한을 예쁘게 여긴 수영부 코치의 견제도 한 몫 했다. 그제서야 다시 점심시간 운동장에 나가 편하게 축구를 할 수 있었다. 체육시간에는 족구를, 가끔 아이스크림 내기로 농구를 하기도 했다.
두 번째, 수영이 결코 쉬운 운동은 아니지만 단거리가 존재했다. 정한은 어차피 선수가 될 생각이 없었다. 100m 이하 그리고 단체전에만 출전했다.
코치가 조금만 꼬득여도 정한은 금방 그만둘 태세를 취해버렸다. 근력, PT 다 싫어요. 지금 단체 훈련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취미 운동만으로 만족해요.
그런데도 정한은 타고나길 능력치가 좋아서, 첫 출전부터 시연맹회장배 대회였다. 단거리의 신은 인생 첫 경기 50m에서 4위를 달성하며 주목받았다.
미국에서 온 조슈아 지수 홍마저 그 애의 소문엔 훤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 저기서 걔 얘기만 했다. 수영을 배운 지 몇 개월만에 시장배 대회에 출전했으니, 유명세 타기엔 딱이었다. 심지어 잘생겼다. 어줍잖은 훈남이 아니라, 입을 모아 미남이라 했다. 키도 178로 큰 편이었다.
슈아는 정한을 처음 본 날 깜짝 놀랐다. 머리통이 정말 코치들 주먹만 했다. 그 안에 반듯한 이목구비가 얼마나 정갈하게 주차되어 있던지. 피부도 하얗고 매끈매끈하고 눈은 별처럼 빛났다. 한국에는 이렇게 예쁜 애가 있구나. 자신과 동갑인 걸 알았을 땐 친구가 되고 싶었다.
조슈아는 수영장을 좋아했다. 또래집단이나 유행에 은근히 민감하면서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수적인 슈아에게 수영장은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장소였다. 유년시절을 보낸 집 마당엔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마침 캘리포니아 쪽은 홈파티 중에서도 수영장 파티가 유행하던 때였다. 슈아는 부모님께 이틀 넘게 부탁해 파티를 연 적이 있었다.
집안이 어질러질까 탐탁치 않았지만, 평소 워낙 착실하던 외동 아들의 부탁을 더 거절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늦은 밤도 아니고 주말 오후였다. 혹시 몰라 담배, 술 따위를 하는 것 같으면 언질을 해달라고 옆집에 몰래 부탁까지 했다. 다행히, 당연히 기우였다.
슈아는 친구들과 수영을 하다가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췄다. 피자를 시켜 먹고, 미리 사둔 아이스크림도 나눠 먹었다. 처음 민트초코맛을 먹었는데 알싸한 치약 맛이 났다. 슈아가 슬쩍 미간을 찌푸리는데 옆에서 친구들이 맛있어, 하는 바람에 그대로 어색하게 웃었다. 진짜 먹을만 하네, 괜찮다 ◠‿◠;
그리고 가끔은 수영장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이 일하러 가면 슬그머니 나와 마당으로 향했다. 물이 다 빠진 수영장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생일선물로 받았던 하얀 아이팟을 손에 쥐었다. 이어폰을 통해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가 먼저 흘러나온다.
Gabe Bondoc이 첫 마디를 부르는 순간을 좋아했다. 청량한 캘리포니아의 하늘 위로 핑크빛 석양이 물드는 걸 지켜봤다. 해가 지고 난 뒤의 어스름한 풍경을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꼭 세상에 자신 혼자 남겨진 기분이다. 슈아는 그런 감정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았다.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수영부에 든 건 어쩌보면 당연했다. (조슈아는 LA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돌아왔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같이 수영도 하고, 피자도 먹으면 낯선 땅에서 자란 애들과도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슈아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었다. 다만 수영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랐다.
애초에 한국 중학교엔 수영부 자체가 드물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방과후 예체능 과외를 받는 게 아니라 대형 입시 학원에 간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수영을 꼭 그렇게 크고 무거운 마음으로 해야 되는 거야? 어느 날 슈아는 같은 수영부 동갑내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통 공부 대신 선택할 거면 그걸로 대학 갈 각오로 하는 거지. 미술이나 음악도 그렇고. 친구가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중학생 때, 특히 고등학교도 수영부가 있는 곳을 선택하는 데 그런 고민이 필요할 줄 몰랐다. 슈아는 이 문화 차이를 비난하기보단, 빠르게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자신의 현실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친구들의 열정은 더 존경하고, 존중하게 됐다. 왜 그렇게 대회 성적에 종종 날카로워졌는지. 가끔, 아니 자주 '나 정도면 그렇게 잘 하는 거 아냐.' 하며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던 이유도. 찬찬히 이해하게 됐다.
소문만 무성하던 윤정한을 처음 본 건 모 방송국에서 주관하는 청소년 전국대회에서였다. 조슈아 또한 시에서 수영으로 부흥 중인 중학교의 유망주 중 한 명이었다. 32강에 그쳤지만 첫 대회라는 걸 감안하면 좋은 성적이다. 무엇보다 이정도 규모는 참관만으로도 의의가 컸다.
B조의 32강이 시작됐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D조 윤정한의 경기를 보려면 지금 화장실에 가야했다. 경기장 귀퉁이, 관중석 밑으로 뚫린 통로로 갔다. 단거리 경기라 마음이 급했다. 빠르게 걷다가 코너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 가슴팍끼리 충돌해 퍽 소리가 날 정도였다. 몸이 살짝 휘청였다.
아! 상대방이 먹혀들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내지른다. 자신보다 몸이 조금 더 휘청인다. 미안해서 빠르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괜찮아? 미안, 다음 경기가 중요해서 마음이 급했나봐……."
드물게 슈아의 말이 조금 빨라진다. 다급하게 쏟아내는 동안 윤기나는 갈색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난다. 윤정한이다. 눈이 마주치자 마자 알았다. 슈아는 두 가지 면에서 당황했다.
1. 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봤었지 이렇게 가까운 건 처음이다.
2. 한국에는 이렇게 예쁜 애가 있구나. 다시 그때의 감상이 떠오른다.
동기화가 조금 느렸다. 슈아는 정신을 차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됐어, 나도 못 본 거자너. 다음 경기면 얼렁 준비운동 하러 가."
정한이 금세 침착해진 얼굴로 조금 긴 앞머리카락을 귀에 꽂으며 말했다. 슈아를 C조 출전 선수로 오해했나 보다.
"난 32강에서 끝났는데? 네 경기 보려고 그런 거야."
"나? 날 알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곤해 보이던 정한이 츄리닝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고, 스르르 웃는다. 광대와 입술이 둥글하게 솟아오른다. 우리 만난 적 있나? 정한이 혼잣말처럼 묻는다.
슈아는 뒤늦게 작은 실수를 눈치챘다. 미국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과도 스몰토크를 나누곤 했다. 그때의 버릇이 튀어나와서 친밀하게 굴었다. 한국은 조금 다른 것 같던데. 슈아가 조곤조곤 설명하려던 때였다. 통로 밖에서 출발을 알리는 기계음이 날카롭게 울려퍼진다. C조의 경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두 사람을 재촉하는 기폭제이기도 했다.
"나 다음 경기라 먼저 간다. 내 경기 볼 거면 꼭 나 응원하구."
"엉, 정아나 잘해…!"
정한이 입구를 향해 뛰어간다. 제대로 뒤돌아보지도 못한 채 길쭉한 팔을 허공에 흔든다. 슈아는 멍하니 경기장 조명이 침투해 환하게 빛내는 통로 끄트머리만 바라봤다.
방금 쪼금 실수한 것 같지. 친구들한테 하던 게 익숙해져서 나도 모르게 반말부터 해버렸네. 그래도 기분 나빠 보이진 않던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쫌 재밌어 하지 않았나. 그러면 다행인데.
조금 우두망찰한 바람에 늦게 화장실로 갔다. 결국 정한의 경기 초반을 놓쳤다. 통로에서 빠져나와 관중석 계단을 향해 뛰었다. 자리로 갈 여유까진 없었다. 난간 근처에 서서 경기장을 내려다 봤다. 정한이 아슬아슬하게 1위였다. 슈아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칠이 조금 벗겨진 쇠봉을 꾹 쥐었다.
윤정한, 더 빨리!
길쭉한 팔이 반짝이는 물의 표면을 거침없이 휘젓는다. 날렵한 몸이 빠르게 물살을 가른다. 몇 초 동안 1등을 유지하더니, 그대로 정한의 손이 터치패드에 닿았다. 16강 진출이었다. 곧바로 다른 선수들이 들어왔다. 정한이 수경과 수영모를 함께 벗는다. 손에 쥔 채 인상을 약간 찡그리고, 전광판을 확인한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엉망으로 달라붙어 있는데 신경쓰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몇 명씩이나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꼭 윤정한만 잘 편집된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뒷자리에서도 탄식이 쏟아져 나온다. 쟤는 혼자 영화 찍냐? 포카리 씨에프인 줄.
슈아는 아직 물 안에서 환하게 웃는 정한을 내려다 봤다. 어느새 자신도 따라 웃고 있다. 분명 조금 전 가까이서 마주봤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은 맑게만 느껴진다. 슈아는 꼭 쥐고 있던 쇠봉을 놓았다. 손에서 비린내가 날 것 같다. 정한이 수영장을 나선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단 예감이 든다. 다음 경기도 겹칠지 모르겠지만, 짧은 우연치고는 나쁘지 않은 인연이었지. 뒤늦게 코치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자리로 돌아갔다.
천생연분
팡이
교실 안을 헤집던 애들이 자리로 돌아온다. 아직 낯선 새학기의 담임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안내사항 전달과 함께 종례가 끝이 났다. 임시 반장의 선창으로 다함께 인사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붕 떠오른다. 동시다발적으로 책걸상을 밀어댄 탓에, 마찰음이 바닥을 울린다. 다른 반에서도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애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고등학교까지 함께 온 친구 둘이 조슈아를 부른다.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먼저 가."
"엉? 왜?"
"수영장 한 번 보고 가게."
"벌써? 오늘? 동아리는 다음주부터 아냐?"
슈아는 어디서부터 설명할지 잠시 고민했다. 어렸을 적 집 마당에 수영장이 있던 시절의 추억? 착한 애들이지만 성미가 조금 급하다는 걸 알고 있다. 가방을 챙기며 짧게만 덧붙였다.
"첫 날 아니면 수영장 조용할 날이 없는 것 같아서, 거기 혼자 앉아있으면 꽤 좋아."
하긴 너 혼자있는 거 좋아하니까. 익숙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평소 슈아의 취미(비즈 공예, 접시 제작 등)가 혼자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는 친구들이다. 이해가 빠르다. 어차피 방향이 같아 1층까진 함께하기로 했다.
말로만 듣던 야자를 다 하네, 우리가. 다음 주부터 시작이라 했나? 나 약간 로망 있었는데 막상 선택하라고 하니까 왠지 안 할듯. 헐 나도.
입학식 특유의 조금 들뜬 목소리로 감상을 나누었다. 세 명이서 노을 빛으로 젖어가는 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갔다. 1층 중앙 현관 쯔음에서 친구들과 헤어졌다.
내일 봐. 슈아는 혼자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후문 쪽 건물이랬지. 실내체육관 옆으로 상대적으로 작은 건물에 수영장이 있다고 했다. 텅 빈 수영장을 상상하며 신난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 그 빛이 물결 위에서 바스라지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 아무도 없는 수영장 레일 주변을 걸으며 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 일 따위를 떠올렸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다. 솔직히 닫혀 있을 것도 염두에 두었다. 그럴 땐 교무실에 올라가서, 수영부 고문 선생님께 딱 삼십 분만요. 어색한 애교라도 떨 생각이었는데. 정문을 열자마자 물과 소독약 냄새가 풍겨왔다. 탈의실과 샤워실 입구를 지났다. 유리문 하나를 더 열었다. 수영장의 레일과…… 웬 남자 애 한 명이 맨 발로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물 위를 바라만 보는 뒷모습을 응시했다. 길쭉하고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 분명 오늘 처음 온 학교인데. 이 풍경과 인물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그럴 리 없는데 꼭 언젠가 한 번 봤던 장면 같다.
우리 반 앤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슈아가 천천히 다가는데 그새 슬리퍼가 물을 먹었는지 푸슈슉,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낸다. 잠깐 발치를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 정한과 눈이 마주친다.
어… 윤정한이다. 정한이 자신을 보며 웃는다.
구름이 움직이는지 통 유리창을 따라 그늘이 옆으로 밀려났다. 햇빛이 서서히 드러나며 유리창 위로 쏟아진다. 투과된 빛이 수영장 물 표면에 고인다. 강가의 윤슬처럼 반짝거린다. 이번에도 꼭 윤정한을 위한 연출같다. 저 얼굴을 마주한 순간, 빠르게 기억 속 페이지가 넘어간다. 조금 어둡던 통로와 멀어지던 뒷모습 그리고 왠지 간지럽던 기분까지 떠올랐다. 같은 학교일 줄이야.
자신을 기억할까. 엄청 잠깐이었으니까 당연히 잊었겠지. 그럼 연습하러 온 건가. 나가줘야 되나. 그건 싫은데…. 고민하는 동안 정한이 느릿하게 거리를 좁혀온다.
우리 또 만나네. 어쩐지 조금 즐거워 보인다.
"지금 연습하려고?"
정한이 슈아에게 묻는다. 그런 건 아니고. 대답하며 슈아도 정한의 쪽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슬리퍼에선 물이 빠지고, 나가는 소리가 괴상하게 흐른다.
"그런 건 아닌데, 오늘 아니면 수영장 조용할 날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놀러왔어."
슈아가 나긋하게 대답하는 동안에도 슬리퍼가 웃긴 소리를 낸다. 너 슬리퍼, 무슨 방구 소리 같다. 정한이 결국 소리내어 웃는다.
"너도 그냥 슬리퍼 벗고, 맨발로 서봐."
"그럼 다시 어떻게 신어? 나 수건도 없는데?"
"쩌기 앉아서 발 마를 때까지 흔들흔들 하고 있으면 돼. 생각보다 금방 말라."
"움……"
하얀 양말을 내려다 보며 망설였다. 슈아는 실내서도 신발을 신는 문화권에서 태어나고 자라 아직도 맨발이 익숙치 않다. 수영장에서도 준비운동을 할 때나, 오래 밖에 나와있어야 할 때면 아쿠아 슈즈를 꼭 신을 정도로.
야아 조슈아 빨리. 정한이 언제 봤다고 슈아의 팔을 잡고 재촉한다. 이거 좋다니까. 슈아는 정한을 못 이기고 결국 양말부터 주섬주섬 벗었다. 그리곤 조금 흘러넘친 물 때문에 젖어있는 바닥을 밟았다.
수영장에 맨 발로 선 게 처음이 아니다. 당연히 수영 부원이니까. 그런데 뭔가 이전과 느낌이 다르다. 슈아는 가만히 아무도 없는 수영장을 바라봤다. 파도가 모래사장으로 넘어오는 것처럼 조금씩 넘친 물이 넘실넘실 수영장을 빠져나온다. 정한과 슈아의 발등을 스치고 바로 뒤 배수구로 흘러들어간다.
거봐, 좋지. 정한이 슈아를 보며 웃는다.
너 몇 반이야? 수영부 할 거지? 조슈아 넌 나 어떻게 알았어? 지난 번에 나 응원했어? 정아니 넌 왜 여기 혼자 있었어? 수영장 레일을 따라 산책하듯 나란히 걸으며 서로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두 사람의 발가락이 살짝 쪼그라들 쯤 수영장을 뒤로 했다. 탈의실 근처에 있는 의자에 함께 앉았다. 수건을 따로 챙겨오질 않아 정한의 말대로 다리를 들었다. 허공에서 네 개의 발이 흔들거린다. 별 것도 아닌데 함께 웃다가 정한이 먼저 슈아의 발을 쳤다. 그대로 장난질을 치다가 같이 수영장을 나섰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정문을 함께 지나쳐 근처 편의점으로 갔다. 둘 다 쮸쮸바를 하나씩 입에 물고 사거리 앞에서 헤어졌다. 꼭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것 같다. 슈아는 처음 정한을 봤을 때 친구가 되고 싶었던 마음을 떠올렸다. 장난치고, 아이스크림도 같이 먹었는데 친구 맞겠지. 역시 수영장은 자신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 만남 때는 정한이 급식실을 나서는 슈아를 붙잡았다.
야, 슈아야 너도 족구 같이 하자.
친구들이 '너 윤정한이랑 친해?' 라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음. 슈아는 정한과의 사이부터 설명할까. 대답부터 할까. 족구는 뭐지. 한꺼번에 너무 여러 고민을 하다가 얼떨결에 자신의 친구들까지 데리고 정한과 운동장으로 향했다.
정한은 족구가 처음이라는 슈아한테 직접 공을 받고, 던지는 법에 대해 시범을 보였다. 정작 제일 중요한 룰은 하면서 배우면 된단다. 경기가 시작된 이후부터는.
뭐야, 조슈아 잘해. 슈아가 이상하게 잘해.
조슈아 거기 막아야지. 야, 슈아야.
죠슈야 지지 말아야지. 야야, 죠슈죠, 죠수지 슈아야!
잔뜩 뭉개지는 발음으로 같은 팀도 아닌 슈아를 한참이나 칭찬하고 불러대기 바빴다.
그 날 족구는 정한의 팀이 이겼다. 예비 종소리를 듣고 급하게 올라가려는 슈아와 친구들을 붙잡는다. 갑자기 딱밤 내기였다며, 원래 승부에는 당연히 내기가 포함되는 거라며 대뜸 정한에게 딱밤까지 맞았다.
오케이, 이런 거구나 ◠‿◠ 슈아는 정한에게 한국식 내기에 대해 제대로 배웠다.
처음 몇 번은 '왜 이렇게 친해지고 싶을까', '왜 이렇게 쟤랑 있는 게 재밌지.'였다. 점차 서로에 대한 인상이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다. 취미도, 식성도, 성격도 달랐다. 오히려 상대방에 대해 고찰하게 됐다. 쟤는 혼자 있는 시간이 소중한 애구나. 쟤는 은근히 걱정이 많고, 종종 마음이 심약하구나. 쟤는 의외로 섬세해서 조심히 다뤄야 할 때가 있구나.
서로를 향한 선을 무수히 긋고 수정했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치대고, 장난을 거는 정한이 그랬다. 슈아야 나를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어? 여기까지? 여기까지는 나 안 싫어? 여전히 좋아? 둘 중 한 명이라도 무심했으면 툭 하고 끊어졌을 관계였다.
내가 조슈아랑 있어봤는데 윤정한이랑 똑같더라. 예상은 했는데 조슈아도 만만치 않더라. 승철의 소개로 알게 된 원우가 제일 먼저 떡잎을 알아봤다. 슈아의 전학 초기 때 했던 말이 이 안에서만 유행어처럼 사용됐었다. 그러다 몇 개월만에 꽤 멀리까지 퍼졌다.
근데 내가 정아니보다는 낫지. 지수가 트윅스를 포장지를 까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둘이 똑같다는 거, 며칠 전에 윤정한도 지나가면서 고대로 얘기하더라. 친구 한 명이 헛웃음을 지으며 대꾸한다.
"나는 그럼 무조건 정아니보다 하루 먼저 얘기할래."
"너네 진짜 천생연분이다. 아주 둘이 평~생 그래라."
유치한 대답에 옆에서 진절머리를 친다. 평생 그래라. 지수는 트윅스와 함께 그 말을 곱씹었다. 가벼운 관용적 표현이란 걸 안다.
그런데 지수는 요즘 정한과의 유통기간에 대해 생각했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만약 미국으로 돌아간다면 지수는 평생 한국과 관련된 것들을 마주칠 때마다 윤정한을 가장 크고 또렷하게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 어쩌면 물 웅덩이만 봐도 이곳의 수영장과 윤정한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지수는 자신이 정한을 좋아한다는 사실 또한 수영장에서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영장 건물 근처 공원이었지만. 여름에 매년 그렇듯 단체 합숙을 갔을 때였다.
음료 여러 개 섞어놓은 걸 가운데 두고 온갖 게임을 했다. 자연스럽게 여러 단체 게임이 오고가다 사랑해 게임까지 왔다. 룰은 쉬워. 시계 방향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사랑해' 하고 말하면 돼. 그대신 웃으면 지는 거야.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인중을 길게 늘리고,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는다. 그렇게 꽤 멀리 정한의 순번까지 왔다. 정한이 살짝 솟아오를 뻔한 광대를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 왔구나. 지수는 어쩐지 몸이 딱딱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입술도 조금 어색하게 다물었다. 그대로 정한이 자신을 바라본다. 왜인지 대회에 나갔을 때보다 긴장이 된다. 처음 한국 고등학교 교단 앞에 서서, 자기 소개를 했을 때도 이렇게 떨리지 않았는데.
긴장 탓에 오히려 정한이 조금 흐릿하게 보인다. 그래서 정한의 얼굴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슈아야, 사랑해.
정한이 답지 않게 따분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에선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평소 내기에 치열한 두 사람이었다. 조금 더 괴상한 면모로 분위기를 더 띄워줄 줄 알았는데. 앞에선 일부러 얼굴을 쓰다듬거나, 무릎을 건들이는 등 낯간지러운 행동들을 했었다.
정한도 왜인지 긴장됐다. 그야, 항상 슈아의 눈치를 살폈으니까. 사랑한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지금까지는 실험해본 적이 없다. 언젠가 한 번은 자신의 장난에 슈아가 짜증스러운 얼굴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그 날은 유난히 슈아가 피곤했던 하루였다는 걸 알아서 금방 꼬릴 내렸다.
좋아해서 그러지. 슈아야 나 안 좋아하는 사람한텐 장난도 안 치는 거 알잖아.
정한은 슈아가 더 잘 알고 있을 법한 얘기를 자신의 입으로 쏟아냈다. 오늘도, 한 번만 더 봐줘. 내가 너 좋아해서 그러는 거 너도 알잖아. 슈아의 마음 속에서 상기시키면 늘 그렇듯 알겠으니 그만하라며 웃어 넘겨주겠지. 실제로 그러했다. 저렇게 화도 못 내게 만든다니까. 어이없단 듯이 웃으면서도 한층 표정이 풀어졌었다.
왜 갑자기 엄청나게 짧은 순간 그 날이 생각났는지. 정한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슈아의 커다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슈아야, 사랑해.
슈아의 저 표정은, 모르겠다. 친해진 이후로 항상 쟤의 얼굴과 분위기를 살폈고, 이제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모르겠어서. 정한은 드물게 쑥쓰럽거나 당황할 때만 하던 행동을 했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잠깐의 정적 끝에 지수가 반대쪽을 돌아본다.
그제서야 다시 고개를 들고, 슈아의 둥근 뒷머리를 바라봤다. 최근 저 뒤통수를 바라보며 자주 웃긴 생각을 했다.
우리 나중에도 위, 아래로 살면서 맨날 장난치고 같이 밥 먹고 그러면 좋을 텐데.
조슈아가 언제 미국으로 돌아갈 줄 알고. 게다가 쟤 엘에이서 살 땐 교회 엄청 열심히 다닌다고 했었지. 나 고백했다가 조슈지 막 경멸하는 표정 짓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런 표정을 보면, 아무리 장난으로 치고박고까지 이어진 적 있는 정한이어도 상처 받을 것 같았다. 게다가 상대가 조슈아라면 더욱 더.
정한은 슈아를 만나기 직전, 그러니까 작년 잠깐 사겼던 애한테 차이며 그런 악담을 들었었다. 너는 꼭 너보다 더 예쁜 사람 만나서, 아니다. 딱 너랑 비슷하게 눈치 빠른 애 만나서 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애태우고, 고생 한 번 해봐.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 돌이켜보니 서운하네. 헤어지자마자 슈아가 전학을 왔으니, 그런 상대를 너무 일찍 만난 것 같다.
둘 다 벌칙 음료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속에 켜켜이 쌓인 감정들 때문에 몸까지 무겁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왔다. 둘만 갑자기 구석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저러다 갑자기 나타나길 반복하는 걸 다 알만한 얘들이다. 오늘은 서로가 가슴께를 무겁게 만든 원인인데도 함께했다. 어쩔 수 없다. 슈아가 혼자 있고 싶어하는 시간 빼곤 거의 대부분 같이 있으니까.
좀 걸을까. 그래.
둘 다 슬리퍼를 끌고 리조트를 나왔다. 아주 큰 공원이 수영장과 몇 개의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전부 돌진 못 하고, 수영장 건물을 축으로 공전궤도를 그리듯 느리게 걸었다. 우리의 중심이 수영장이 맞긴 하지. 첫 만남부터, 벌써 두 번의 방학을 함께하며 갔던 합숙 그리고 종종 수영장에 둘만 남아 발을 담그고 놀던 날들까지.
실 없는 수다를 떨다가 불쑥 대학 같은 진지한 주제가 튀어나왔다가, 다시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수련원은 낮은 산 초입에 위치했다. 덕분에 열대야인데도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낯설고, 정체 모를 풀벌레들이 울어댄다.
가만히 있으면 더 모기 물려. 정한이 먼저 허공에 팔을 휘젓는다. 그러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슈아의 팔둑을 툭 하고 친다.
아, 실슈야. 실쑤.
정한이 웃느라 뭉개진 발음으로 말한다. 정한에게 혹독하게 배운 슈아는 그닥 참는 타입이 아니었다. 똑같이 얇은 긴팔로 감싸진 팔을 휘젓지도 않고, 대놓고 정한의 어깨를 툭 건들였다. 어차피 정한은 슈아가 똑같이 반응하는 걸 더 좋아하기도 하니까.
어~? 아~ 조슈지 딘땨 왜 그래~♡
찰싹.
아 정아나~ 진짜 왜 그래~♡
찰싹. 찰싹.
서로를 치다가 팔둑이 얼얼해진다. 상체를 비틀어 피하는 모양새가 우습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이 거의 끌어안듯이 몸을 겹치며 웃었다. 그러다 지수는 갑자기 내가 정한이를 좋아하나 생각했다.
이런 순간들이 너무 즐겁고,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그동안 의문을 가지거나, 고민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게임도 다 장난이지. 아까의 그 사랑한단 말도 당연히 장난이고. 정한의 장난이라면 익숙해진 줄 알았다. 그렇게까지 긴장했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의외로 깊지 않았다. 지수 스스로도 조금 놀랄 정도였다. 그러다 그마저도 수긍했다.
왜냐면 정한이잖아.
한국에 와서 잘 지내고 있다가도 종종 자신이 정처없이 떠다니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이 곳에 장기 여행을 왔고, 언젠간 떠날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부모님이 몇 년 안에 미국으로 돌아가자던가 그런 얘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지수를 이 땅에 두 발 찰싹 붙이고 있게 한 건 정한이었다. 정한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다시 허공으로 떠오를 것 같을 때. 발목을 콱 붙잡아 줄 것 같다. 예의 그 눈동자를 환하게 빛내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야아 조슈지 혼자 어디가냐.
두 사람 다 서로에게 고백하지 않은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사랑해 그 한 마디를 며칠간 곱씹은 건 나 혼자 뿐일 거다. 나란히 걸으며 웃고 장난치다 서로를 껴안았을 때의 설렘. 어차피 평소에도 자주 느끼던 감정이었으니까. 가슴께부터 입까지 전부 간지러워서 몇 번이나 발설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지금 말고, 나중에 더, 조금만 더 확실해질 때 그때 하자. 그렇게 억누르고 나면 자기 전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역시 말하질 않길 잘했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지내면 되지 않을까.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이란 게 있다면, 그 시간을 꽉 채우도록 함께이길 바라니까.
토요일의 학교가 조용하다. 수영장에 가기 전 정한은 잠시 교실에 들렸다. 빨아두고 사물함에 넣어둔 얇은 긴팔 티를 챙겼다. 뒷문을 닫고 나와 복도에 섰다. 가을의 따듯한 볕이 복도 끝까지 골고루 쏟아진다. 느릿느릿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환기를 위해 작게 열어둔 창문 틈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이 맞구나. 곧 정한과 지수가 3학년이 된다.
슈아는 수영을 그만하겠단다. 정한은 그 말을 듣고, 당황하고 서운해 했다. 대한민국 고등학생 중 우리 둘만 수영부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을까. 수영으로 대학에 갈 것도 아닌데도 매일 수영을 2시간씩 하는 애들이 어디있담. 그런 농담을 자주 했다.
처음에는 그래서 수영을 했는데, 이제는 그래서 그만두려고.
합숙 이후 슈아가 입을 열었다.
다른 애들이 너무 간절하더라. 나는 굳이 수영부가 아니어도 주말 아침에 조깅을 하거나, 승관이랑 배드민턴을 치거나 너랑 승철이랑 풋살을 하면 되잖아. 민규나 다른 애들이랑 족구를 해도 되는 거고. 나한테는 방법이 너무 많은데 우리 부 애들은 수영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 말에 코치는 물론 다른 애들 전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입시할 때가 됐지. 지수는 그래도 공부 쫌 하니까. 슈아의 수영부 탈퇴는 정한에게만 갑작스러웠다.
슈아가 정한에게 너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정한은 '나는, 나는…' 고민했다.
나는 왜 수영을 그만두기 싫을까. 수영으로 대학? 아직도 모르겠다. 이유는 단순했다. 수영이 아직은 더 하고 싶으니까. 그 옆에 당연히 슈아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한의 머릿속에 근심, 걱정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수영장 근처였다.
정한이가 말은 안 해도 요즘 걱정이 많을 때라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우리 다 이제 고3이니까, 그렇겠지? 고백이야 네 마음이니까 결국 네가 결정할 일이지만 나는 글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슈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퍼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슈아와 함께 서 있는 애는 아는 얼굴이다. 옆에 태권도 부였다. 이런 식으로 주말에 학교를 나오는 운동부 애들끼리 가끔 축구를 하거나, 밥을 나눠 먹을 때가 있었다. 그때 친해진 애다.
들으면 들을수록 윤정한에게 고백하지 말라는 게 주된 내용이다. 듣기 좋고, 그럴 듯한 말로 도움을 거절한다. 정한의 입장에선 그 이유가 터무니없다. 입시 때문에 내가 요즘 은근 예민하다니. 안 그렇다는 걸 조슈아 네가 제일 잘 알 면서. 벽에 등을 붙이고 선 정한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근데 슈아는 정말 나랑 똑같다. 저 멘트 거의 고대로 정한도 누군가에게 했던 적이 있다.
그게 불과 한 달 전이다. 합숙이 끝나자마자 후배 한 명이 정한을 찾아왔다. 검은색 생머리가 반짝거렸다. 조슈아의 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비슷하게 보드랍고 참하게 생겼다. 특히 눈이 반짝인다. 정한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초면에 맹랑하고 깜찍한 질문을 던진다.
지수 선배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가능성 없는 게임은 하고 싶지 않아서요. 지수 선배가, 선배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정한은 후배가 정말로 귀여워서 잠깐 웃다가 일부러 듣기 좋은 거절을 했다.
글쎄에~ 슈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내가 쩨일 궁금한데. 우리가 아무리 친해도 그런 건 모르지. 네 마음이니까 고백하고 싶으면 해. 결국 네가 결정할 일이잖어. 근데 나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어. 슈아가 안 그래 보여도 되게 섬세하고 예민하거든. 낯선 사람이 한 번에 다가오면 놀랄 수도 있어서 조심히 다뤄야 해.
그런 정한은 통성명을 했던 거의 바로 다음 날 대뜸 족구를 하자고 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만에 슈아에게 꿀밤도 먹였다.
아무리 자신이 고백을 안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선수치려는 걸 뻔히 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내 눈에 안 보이면… 그건 어쩔 수 없는데 이건 경우가 다르지.
그 날의 자신을 생각하면 지금 슈아가 왜 평소보다 말이 조금 빠른지, 표정도 살짝 굳어있는지 알 것 같다. 이럴 때 우리는 꼭 닮았으니까. 슈아의 마음을 알 것 같은데도 정한에게는 조금 더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벽 뒤에서 나와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야 조슈지,
둘이 모해?
두 사람 모두에게 손을 흔들었다. 잠시 정한에게 시선이 꽂혔다가 다시 서로를 바라본다. 상대의 난감한 표정을 읽은 슈아가 슬쩍 도와주듯 가란 손짓을 한다. 마음을 알고나서야 저 행동들이 읽히는 것 같다.
"어? 내가 오니까 가네?"
"아, 곧 훈련 시작한대."
들고왔던 음료를 손에 고대로 쥔 채 파란 태권도 도복이 멀어진다. 정한이 그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지수가 대답한다. 손목시계를 살폈다. 수영부는 아직 집합 시간이 조금 남아있다. 둘 다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알았다. 자연스럽게 화단 근처 벤치로 향하며 정한이 입을 열었다.
"으음~ 근데 쟤 나한테 고백하려던 거 아니었나?"
"다 들었네?"
"웅, 걸어오는데 내 이름이 들리더라고."
우리 슈지가 내 걱정해주는 것도 들었구. 슈아가 멈칫한다. 괴롭히거나 놀리려는 건 절대 아니고 슈아의 마음이 더 알고 싶을 뿐이었다. 정한도 당연히 간절하고, 소중한 만큼 조심스러워지는 사람이니까.
"당연하지, 정아나. 난 항상 너 생각하잖아."
정확히 두 사람이 벤치에 엉덩이를 붙일 때 슈아가 말했다. 이 말까지 듣고도 정한은 아리송하다. 왜냐면 슈아는 운동부 단체 X맨 게임을 할 때도 정한에게 저런 식으로 말했으니까.
'아 정아나 나는 당연히 너한테 붙지. 난 너 좋아하니까 항상 믿지.'
갑자기 슈아야 너 좋아하는 애들, 나 포함, 정말 힘들겠다. 그런 생각까지 든다. 오늘 겨우 덜미를 잡은 것 같은데 이대로는 또 속절없이 놓쳐버릴 것 같다. 정한은 정말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서 여러 생각이 든다. 오늘도 아닌 건가. 딱 한 발자국인데 그게 늘 어렵다.
"근데 슈지야 너는 연애 안 해? 나도 너한테 고백하고 싶다는 후배가 찾아왔을 때 막 거절한 적이 있거든. "
그래서 또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자신마저 아리송한 질문을 던졌다. 서로를 끝없이 떠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걸 알면서도. 너가 먼저 올래, 내가 먼저 갈까. 이마저도 둘이 작은 내기를 하는 것 같다. 슈아는 이번에도 순순히 밀리지 않는다.
"그러게, 너랑 있는 게 좋아서 별로 생각도 안 해봤네."
"하긴 나도 너랑 자주 있어서 딱히. 근데 말하다 보니까 너한테 고백하려는데 왜 나한테 먼저 찾아왔는지 알 것 같다."
"나도. 우리가 금방이라도 사귈 건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나봐."
정한이 갑자기 눈을 땡그랗게 뜨고 고개를 홱 돌렸다. 슈아가 아주 잘 아는 표정이 된다. 좋아하는 장난이 막 떠올랐을 때 생기가 도는 윤정한.
"슈아야 근데 걔네가 우리한테 도움만 받고 싶었던 건 아니겠지? 우리 사이가 정확히 뭔지 떠보고 싶은 것도 있었겠지?"
"그렇겠지."
"근데 우리가 맨날 그런 식으로 얘기하니까 애들이 완전 오해하겠다."
슈아는 정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도 정말 나지만, 너도 정말 길다 정한아 ◠‿◠;
"슈지야 우리 그런 오해 받는 것도 좀 지겨운 김에……."
"야, 윤정한. 그건 아니다."
"응……?"
"이왕 고백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정아나. 너가 못하면 내가 할게. 애들이 오해할까봐 말고 우리 서로 좋아하니까 사귀자고."
헉 조슈지. 정한의 표정 변화가 극명했다. 슈아가 말을 잘랐을 땐 레일을 3시간 뺑뺑이 친 것처럼 생기가 없어졌다. 고백을 뺏어간 순간부터 다시 반짝인다.
승철의 말을 빌려, 슈아는 은근 화끈했다. 다정하다가도 단호할 때가 많다는 건 정한이 더 잘 알았다. 그러니까 둘 다 뺑뺑 돌아 여기까지 왔는데 마지막을 어영부영 끝맺음 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모야 조슈지 ㅎㅎ 왜 치사하게 혼자 멋있어.
슈아의 고백을 한 번 곱씹던 정한이 웃는다. 자연스럽게 몸을 기울여 온다. 서로의 몸에 의지한 채 바짝 붙어 앉았다. 잠시 말 없이 화단을 바라봤다. 조금 전을 각자 돌이켰다. 우리 너무 바보같았다. 슈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원우가 맨날 우리 둘이 똑같다고 했잖아. 정한이 벌써 작년이 되어버린 유행어를 꺼내온다.
"우리 반 애들도 너랑 내가 전생? 전생연분? 이래."
"전생연분 아니고, 천생연분. 슈지야 너 이럴 때 이제 귀엽다는 말 해도 되겠다."
"너 원래도 했었어."
그랬나. 하긴 내가 우리 슈아 예뻐하니까. 정한이 특유의 웅얼거리는 말투로 대꾸하며 손을 잡아온다. 슈아도 같이 깍지를 꼈다.
어쩌면 우리 둘은 평생 거의 지구 반대편에서 살았을 텐데. 정한을 알게 된 지 벌써 1년이 넘었는데 새삼 다시 신기해 했다. 그러다 곧 앞으로 더 많은 걸 함께할 수 있단 기대감으로 설레인다. 정한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대뜸 슈지야 좋다. 덧붙인다. 그러게 정아나. 슈아가 나긋한 목소리에 애정을 꾹 눌러담아 대답했다.





